비비정의 정취
임두환
만경강은 철새들의 낙원이자 온갖 생명체의 보금자리이다. 오늘도 만경강 지킴이로 강변을 걷노라니, 늦가을 아침 햇살에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만경강은 완주군 동상면 사봉리 밤샘에서 발원하여 동상저수지, 대아저수지를 거쳐 작은 하천을 이룬다. 호기심에 발원지를 찾아 나섰다. 밤샘은 작은 약수터와 같은 옹달샘으로 깊은 산골짜기였다. 이곳에서 흐르는 물줄기는 고산천과 소양천이 합류하고, 좀 내려가면 전주천과 삼천 천이 삼례에서 합류하여 강을 이룬다. 호남평야의 젖줄이라 할 수 있는 만경강은 완주, 익산, 김제, 군산의 들판을 적이고는 김제 망해사 앞을 지나 새만금 방조제에 다다른다.
만경강의 백미는 비비정飛飛停에 있다. 세속을 벗어난 비비정 주변의 풍경은 황금빛 들녘에 푸른 물길이 만나는 풍요로운 곳으로, 철새들의 도래지이자 갈대밭의 조화로움에 있다.
예전부터 비비정은 비비낙안飛飛落雁이라고 불리어, 완주군 8경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꿈 싫은 한내천 백사장에 사뿐히 내려앉은 기러기 떼가 한 폭의 수묵화 같다고 하여 불린 이름이다. 한내천 위에 소금 배와〮〮 돛단배가 오르내렸으며, 교통의 요충지여서 서울과 지방을 오르내리는 나그네들의 소통중심지였다.
요즘에는 국가 보호 종인 흑두루미, 저어새, 황새는 보이지 않지만, 겨울 철새인 기러기와 백로, 물오리 떼가 한가로이 노닐며 먹잇감을 찾고 있다. 그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망중한이 따로 없다.
비비정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만경강 예술 열차가 나온다. 삼례 폐철교는 일제강점기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을 반출하기 위해 개설된 것으로, 눈물겨운 수탈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그 당시, 악랄했던 일본 놈들의 만행을 생각하니 울화통이 터진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폐철교에 새마을호를 리모델링하여, 예술 열차로 변신시켜 놓았다. 이곳 레스토랑, 카페, 특산물판매장은 젊은이들의 쉼터이자 데이트 장소로 인기 만점이다. 누구의 발상인지, 기발한 아이디어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뿐 아니다. 예술 열차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 낙조의 풍경은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황홀경이다.
시골 농촌에서 자랐던 나로서는 기러기, 까마귀 떼에 놀랐다.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접어드니, 어느 곳에서 찾아드는지 기러기 6, 10편대(200여 마리)가 V자를 그리며 장관을 이룬다. 하늘을 날다가도, 앞서가던 리더가 강과 논바닥으로 내려앉으면 일사불란하게 행동을 같이한다. 까마귀 역시, 많을 때는 400여 마리가 떼를 지어 하늘을 수놓는다. 배가 고플 때면 전깃줄에 줄지어 앉아, 주변 들녘의 먹잇감을 찾고 있다. 이들은 벼 이삭, 보리, 잡풀, 해초, 벌레 등을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는 잡식성 대식가이다.
만경강변에는 억새와 갈대가 자리다툼 하며 숲을 이루고 있다. 자랄 때는 억새와 갈대를 가름하기 어렵지만 꽃대에서 엇갈린다. 억새는 꽃가지가 은백색으로 날렵하지만, 갈대는 흑갈색 꽃에 양털 같은 몽실함이 있다. 가을철, 소슬바람에 한들거리는 억새꽃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은백색 꽃 결이 외할머니 머릿결과 흡사하여 눈길이 더욱 쏠린다. 이들은 겨울철, 칼바람에도 흔들거릴 뿐, 쓰러지지 않는 지혜를 갖고 있다.
철학자이자 사상가였던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다.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가냘픈 한 줄기 갈대에 지나지 않지만, 생각하는 힘이 있어 우주를 지배한다고 설파했다. 늦가을, 오색 빛으로 치장하던 나뭇잎들이 찬바람에 힘없이 떨어진다. 봄, 여름, 가을 동안 애써왔던 이파리를 미련 없이 버리고 있는 게다. 그 이유는 무슨 까닭일까? 매서운 겨울철,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자구책이라 하지만 좀 잔인하다는 생각이다. 어떻든, 삼라만상 자연의 섭리에 오묘함을 느낀다.
만경강의 사계는 변화무쌍하다. 호남평야의 젖줄이자 철새들의 낙원이면서도 어우러진 갈대숲에 생동감이 넘쳐흐른다. 만경강 지킴이로 일과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다.
앞으로는 세상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에 순응하며 살고 싶은 마음이다. 앞만 보고 달려왔던 내 인생! 이제라도 마음을 비우고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숙연함이 느껴진다.
2024, 11,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