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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14.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꼴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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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너는 불륜을 저질렀다.>(에제16,1-15.60.63)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사람의 아들아, 예루살렘에게 자기가 저지른 역겨운 짓들을 알려 주어라. 3 너는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예루살렘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의 혈통과 태생으로 말하자면, 너는 가나안 땅 출신이다. 너의 아버지는 아모리 남자고 너의 어머니는 히타이트 여자다. 4 네가 태어난 일을 말하자면, 네가 나던 날, 아무도 네 탯줄을 잘라 주지 않고, 물로 네 몸을 깨끗이 씻어 주지 않았으며, 아무도 네 몸을 소금으로 문질러 주지 않고 포대기로 싸 주지 않았다. 5 너를 애처롭게 보아서, 동정심으로 이런 일을 하나라도 해 주는 이가 없었다. 오히려 네가 나던 날, 너를 싫어하여 들판에 던져 버렸다. 6 그때에 내가 네 곁을 지나가다가, 피투성이로 버둥거리는 너를 보았다. 그래서 내가 피투성이로 누워 있는 너에게 ′살아남아라!′ 하고 말하였다. 7 그러고 나서 너를 들의 풀처럼 자라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서 꽃다운 나이에 이르렀다. 젖가슴은 또렷이 드러나고 털도 다 자랐다. 그러나 너는 아직도 벌거벗은 알몸뚱이였다. 8 그때에 내가 다시 네 곁을 지나가다가 보니, 너는 사랑의 때에 이르러 있었다. 그래서 내가 옷자락을 펼쳐 네 알몸을 덮어 주었다. 나는 너에게 맹세하고 너와 계약을 맺었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리하여 너는 나의 사람이 되었다. 9 나는 너를 물로 씻어 주고 네 몸에 묻은 피를 닦고 기름을 발라 주었다. 10 수놓은 옷을 입히고 돌고래 가죽신을 신겨 주었고, 아마포 띠를 매어 주고 비단으로 너를 덮어 주었으며, 11 장신구로 치장해 주었다. 두 팔에는 팔찌를, 목에는 목걸이를 걸어 주고, 12 코에는 코걸이를, 두 귀에는 귀걸이를 달아 주었으며, 머리에는 화려한 면류관을 씌워 주었다. 13 이렇게 너는 금과 은으로 치장하고, 아마포 옷과 비단옷과 수놓은 옷을 입고서, 고운 곡식 가루 음식과 꿀과 기름을 먹었다. 너는 더욱더 아름다워져 왕비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14 네 아름다움 때문에 너의 명성이 민족들에게 퍼져 나갔다. 내가 너에게 베푼 영화로 네 아름다움이 완전하였던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15 그런데 너는 네 아름다움을 믿고, 네 명성에 힘입어 불륜을 저질렀다. 지나가는 아무하고나 마구 불륜을 저질렀다. 60 그러나 나는 네가 어린 시절에 너와 맺은 내 계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계약을 세우겠다. 63 이는 네가 저지른 모든 일을 내가 용서할 때, 네가 지난 일을 기억하고 부끄러워하며, 수치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복음<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19,3-12)
3 바리사이들이 다가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읽어 보지 않았느냐?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나서, 5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 6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7 그들이 다시 예수님께,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 하자, 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 10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 12 사실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사람들 손에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또는, 콜베사제기념일 독서(지혜 3,1-9 또는 1요한 3,13-18)와 복음(요한 15,9-17)을 봉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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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14.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꼴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8.14 02:30
- 관계적 무신론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오늘 저는 말을 하나 만들어 냈는데 그것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이름하여 관계적 무신론입니다.
무신론은 하나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무신론이 있는가 하면 존재를 부정하지 않지만 하느님이 계시건 계시지 않건 하느님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실천적 무신론도 있고, 오늘 제가 주님의 가르침과 관련하여 만들어 낸 관계적 무신론도 있습니다.
관계적 무신론은 낯선 말이지만 그리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는 관계적 무신론은 두 가지 뜻이 있겠습니다.
하나는 복음의 더러운 영들이 흔히 그러하듯 나와 하느님의 관계를 부정하여, 나와 하느님의 관계가 없는 것이고 자연히 내 안에 하느님이 안 계신 겁니다.
다음으로 오늘 복음의 가르침과 관련하여 얘기하려는 것은 우리의 인간관계가 하느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며, 우리의 인간관계 안에 하느님께서 아니 계신 것입니다.
우선 우리의 만남이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연히 만났거나 서로 좋아서 만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만났다고 생각하니 헤어지는 것도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들이 좋을 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헤어지는 결정에 하느님의 뜻은 전혀 고려 사항이 아닙니다.
그런데 관계적 무신론의 문제는 만남과 헤어짐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처음 만나서 헤어지기까지 삶과 관계에서도 마찬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서로 나누는 관계가 아닐 것이고, 하느님께로 같이 가는 동반자 관계도 아닐 것이며, 서로가 서로에게 하느님의 예언자이지 않을 것입니다.
풀어 얘기하면 이들은 서로 사랑할지라도 서로 바라보며 사랑하지 하느님을 같이 사랑하지도 않고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가는 길이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 아니기에 한 생을 서로 의지하다가 사별하게 되면 그것으로 끝장나고 그들의 동반은 하느님께로 가는 동반이 아니라 죽음으로 끝나는 동반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서로에게 하느님의 예언자가 아닙니다. 당연합니다.
예언자란 하느님께서 당신 말씀을 전하라고 보내는 존재인데 하느님과의 관계를 부정하니 서로 잔소리는 무한히 쏟아내도 그 말이 서로에게 하는 예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혼배 성사를 받은 우리 신앙인들은 시작은 서로 좋아서 배우자로 선택했고 결혼했을지라도 실은 인간의 호감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짝지어주신 거라고 믿어야 할 것이고, 한 생을 서로가 서로에게 예언자가 되어 살며 당신께 같이 오라고 하느님께서 짝지어주셨음을 이제부터라도 믿으며 살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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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14.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꼴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15,9-17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기념일 고유 복음)
오늘 복음은 사랑의 ‘근원’과 ‘절정’을 함께 보여 줍니다. 근원은 이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우리의 사랑은 ‘스스로 짜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아드님께로, 다시 우리에게로 ‘흘러내려 온 사랑’입니다. 그 사랑 ‘안에 머무를 때’ 비로소 우리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절정은 이것입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사랑(카리타스)을 그리스도인 삶의 심장이라 했습니다. 그는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것을 하라’ 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바르게 ‘사랑’에서 흘러나올 때, 그 삶은 길을 잃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끝내 ‘자기를 내어 주는’ 데까지 자랍니다.
오늘 기리는 콜베 성인이 이 말씀을 글자 그대로 살아 냈습니다. 그가 목숨을 대신 내어 준 사람은 오랜 친구도, 가족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함께 갇힌 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종이 아니라 친구’라 부르셨듯, 콜베는 낯선 그 사람을 ‘친구’로 끌어안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사랑은 더욱 ‘큰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남아 있는 열매’가 되어, 그가 살린 사람과 온 교회 안에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콜베의 그 결단이 ‘한순간의 충동’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평생 ‘성모님께 봉헌된 사랑’ 안에 머문 삶이 맺은 ‘마지막 열매’였습니다. 사랑 안에 ‘머무른’ 사람만이, 결정적 순간에 사랑을 ‘내어 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흘러내려 온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가? 나의 사랑은 ‘서로 사랑하라’는 행동으로 이어지는가? 나는 낯선 한 사람도 ‘친구’로 끌어안을 수 있는가? 나의 작은 선행들은 ‘더 큰 사랑’을 향해 자라고 있는가?
주님, 아버지에게서 흘러온 당신 사랑 안에 머물게 하소서. 그 사랑을 ‘서로 사랑하라’는 행동으로 살게 하시고, 콜베처럼 낯선 이도 친구로 끌어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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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14.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꼴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육화: 하느님의 겸손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겸손하신 하느님을 믿는다면 어떠할까요?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의 신비주의 육화: 하느님의 겸손 2026년 8월 13일 목요일 프란치스칸 신비주의는 본질적으로 육화의 신비에 뿌리를 둔 신비주의입니다. 신학자 일리아 델리오(Iilia Delio)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육화의 급진적인 의미에 의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강조하며, 특히 나병환자와의 만남이라는 강렬한 체험을 통해 그가 깊이 변모하였음을 보여줍니다: 프란치스코는 가난하고 겸손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며 겸손과 가난의 영 안에서 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십자가의 자비로운 사랑으로 프란치스코를 품어 주셨듯이, 그 동일한 하느님께서는 이제 나병환자의 일그러진 모습 안에 현존하고 계셨습니다. 나병환자는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포옹의 원천이 되었고, 그리하여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그와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병환자와의 체험은 프란치스코의 삶에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의 삶이 하느님 안에서 더욱 깊어지면서, 그는 자신을 타인에게 내어주며 사랑 안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바치려 애썼습니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며, 프란치스코는 겸허한 사랑의 하느님을 사회에서 두드러지고 자만하며 부유한 이들 가운데서가 아니라, 평범하고 잊혀진 이들, 가난하고 병든 이들, 그리고 주변부에 있는 이들 가운데서 발견하였습니다…. 하느님의 가난과 겸손의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는 길은 사랑의 언어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내어줍니다—이것이 하느님의 가난입니다. 사랑은 타인을 향하여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 나아갑니다—이것이 하느님의 겸손입니다. 육화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성자, 곧 말씀을 통해 우리를 향해 오시어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사랑의 선물, 곧 완전한 자기 비움의 사랑을 "케노시스(kenosis)"라 부릅니다. 하느님의 가난은 말씀의 케노시스, 곧 자기 비움이며, 말씀께서 신적 영광의 풍요로움에서 내려오시어 우리의 연약한 인간 본성 안으로 들어오신 사건입니다. [1] 델리오는 우리에게, 프란치스코처럼 하느님의 가난과 겸허를 체험하도록 초대합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겸손하신 하느님을 믿는다면 세상은 어떠할까요? 가난과 겸손의 하느님을 따르는 것이 그들을 자기 의견과 편견, 판단을 내려놓게 하여, 하느님처럼 있는 그대로의 이웃을 더 열려 사랑하게 만든다면 말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세상을 걸었는데, 이는 단지 그리스도처럼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그 발자취가 곧 신적 겸허의 발자취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사랑 안에서 내려오시어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만나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고, 가장 예상치 못한 모습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했습니다. 하느님의 겸손은 곧 받아들임을 뜻합니다—하느님께서는 평범하고 연약한 인간의 육신을 받아들이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며, 우리 또한 타인을 하느님의 계시로 받아들이도록 이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하느님의 광채로 드러내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과 모든 피조물은 그 안에 하느님께서 거하시기에 지극한 존중과 주의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겸손의 신비를 단지 이성으로만 이해하려 한다면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겸손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구체적 현실 안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방식입니다. [2] 우리 공동체 이야기 1980년대 후반, 저는 오하이오 주 월시 대학교에서 프란치스칸 수녀 테아 보우먼을 뵙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녀의 육신은 연약했지만, 목소리는 노래하듯 울려 퍼졌습니다. 그녀는 우리와 함께 춤추시며, 노래하고 눈물 흘리시며, 기쁨으로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향한 확신을 심어 주셨습니다. 저는 그날 대학을 떠나며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면서도 더욱 충만해졌습니다. 그날 테아 보우먼 수녀와 하느님의 현존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 Janet S. References [1] Ilia Delio, The Humility of God: A Franciscan Perspective (St. Anthony Messenger Press, 2005), 19–20, 25. [2] Delio, The Humility of God, 31–32.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Pouya Hajiebrahimi, untitled, 2025,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안개 속에 홀로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은 변모를 기다리며 성녀 클라라가 말한 거울 앞에 고요히 서 있는 모습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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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14.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꼴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3595 2026.08.13 08:10
용서하는 자비는 흘러가는 사랑입니다 1
용서받는 자비에서 용서하는 자비로 자비라는 말을 오래 마음에 품고 있으면 그 안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자비는 어느 한 사람의 마음속에 고여 있는 아름다운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에서 시작하여 나에게로 흘러오고, 나를 적시고 살린 뒤 다시 나를 지나 형제에게로 흘러가기를 원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비는 내가 소유할 수 있는 덕이 아니라 흘러가도록 나에게 맡겨진 선물이며, 내가 다른 사람보다 너그러워서 베푸는 무엇이 아니라 이미 헤아릴 수 없이 받은 것을 다시 흘려보내는 은총입니다. 내가 자비로운 사람이 되기 전에 하느님께서 먼저 나에게 자비로우셨고,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기 전에 이미 나는 수없이 용서받았으며, 내가 누군가를 기다려 주기 전에 하느님께서는 내가 돌아오기를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래서 자비의 시작은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있지 않고, 내가 이미 무엇을 받았는지를 깨닫는 데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형제가 자신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일곱 번이면 충분하지 않겠느냐는 그의 질문에는 어쩌면 우리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에도 한계를 정하고 싶어 하고, 기다림에도 끝을 정하고 싶어 하며, 용서에도 횟수를 정해 두고 싶어 합니다. 한 번은 참을 수 있고 두 번은 이해할 수 있으며 몇 번쯤은 용서할 수 있지만, 어느 순간에는 이제 충분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용서의 횟수를 더 많이 늘리라는 뜻이라기보다 자비를 계산의 세계에서 해방시키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사랑을 세지 말고, 용서를 기록하지 말며, 내가 얼마나 참았는지를 장부에 적어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용서하실 때마다 횟수를 세셨다면 나는 이미 오래전에 그분의 자비 밖으로 밀려났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흔일곱 번의 용서는 결코 쉽고 가벼운 말이 아닙니다. 어떤 상처는 한 번 용서한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늘 기도하며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내일 그 사람의 얼굴을 보는 순간 다시 마음이 아플 수 있고, 오래전 들었던 한마디가 어느 날 갑자기 기억 속에서 살아나 가슴을 찌를 수도 있으며,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했던 상처가 뜻밖의 순간 다시 눈물이 되어 흐를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내가 아직 용서하지 못했다고 자책하기 쉽지만, 어쩌면 일흔일곱 번의 용서란 바로 그런 우리의 마음을 알고 계시는 주님의 말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 번의 용서로 끝내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에게, 상처가 다시 살아날 때마다 다시 용서의 길을 걸어도 된다고, 오늘 다시 시작하고 내일 또다시 시작해도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흔일곱 번의 용서는 같은 사람을 계속 용서하라는 말씀이면서 동시에 내 안에서 일흔일곱 번 되살아나는 상처를 일흔일곱 번 하느님의 자비 앞으로 데려가라는 초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여라.”라는 말씀은 더욱 깊고 무겁게 다가옵니다. 마음으로부터 용서한다는 것은 상처받지 않은 척하는 것이 아니며, 잘못된 일을 잘못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나를 해친 사람에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용서는 진실을 지우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용서는 진실을 정직하게 바라보면서도 그 상처와 악이 내 삶의 마지막 말을 하도록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에게 한 일은 분명 잘못이었습니다. 나는 그것 때문에 아팠고 어쩌면 아직도 아픕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잘못을 붙들고 남은 삶을 살아가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저지른 잘못이 당신이라는 사람의 전부라고 말하지도 않겠습니다.”라고 마음 깊은 곳에서 조금씩 고백해 가는 것이 용서입니다.
그러므로 용서와 화해는 같지 않습니다. 용서는 내 마음에서 시작될 수 있지만 화해는 서로의 진실과 책임과 변화가 필요합니다. 때로 자비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거리를 두는 것이며, 모든 것을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분명히 말하는 것이고, 상대방이 책임져야 할 것을 대신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책임을 감당하도록 기다려 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비는 악을 허용하는 나약함이 아니라 악에게 인간 존재의 마지막 말을 넘겨주지 않는 사랑의 힘입니다. 그래서 참된 용서는 기억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기억의 의미를 바꾸고, 상처를 지워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상처가 더 이상 미움의 샘이 되지 않도록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기 어려운 가장 깊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어쩌면 자신이 얼마나 많이 용서받았는지를 잊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복음에서 자비의 순서는 언제나 내가 용서하는 데서 시작하지 않고 내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기 전에 나는 자비를 받아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고, 내가 누군가를 품어 주는 사람이기 전에 이미 수없이 품어짐을 받은 사람이며, 내가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견디는 사람이기 전에 누군가가 나의 부족함을 오래 견디어 주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완전해서 나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부족하고 넘어지고 다시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당신 자비 안에 품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용서받는 자비’는 인간을 낮은 자리로 데려갑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고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나 역시 자비가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받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고, 누군가의 말 때문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던 사람이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말 한마디로 누군가의 가슴에 오래 남는 상처를 남긴 사람일 수 있습니다. 오늘은 내가 용서하는 사람이지만 내일은 내가 용서를 청해야 할 사람이 될 수 있으며, 오늘 내가 누군가를 품어 주지만 내일은 내가 누군가의 품 안에서 다시 일어서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자비는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서로 가난한 사람들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만나게 되는 형제성의 사건이 됩니다.
그래서 용서받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깊은 가난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때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보다 자신이 용서받는 것을 더 어려워합니다. 용서받으려면 내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내가 옳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며, 나 역시 다른 사람의 자비와 기다림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는 자비가 필요한 사람입니다.”라는 고백은 인간의 자존심에게는 어려운 말이지만 영혼에게는 자유의 문을 열어 주는 말입니다. 내가 자비를 필요로 하는 가난한 사람임을 받아들이는 순간 다른 사람의 가난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용서받는 자비는 받아들이는 가난이 되고, 용서하는 자비는 내어주는 가난이 됩니다.’ 한쪽 손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받아들이고 다른 손으로 그것을 형제에게 건네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두 손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받은 바로 그 자비가 나를 지나 흘러가는 것입니다. 내가 만들어 내는 사랑이 아니라 받은 사랑이 흘러가고, 내가 만들어 낸 인내가 아니라 나를 기다려 주신 하느님의 기다림이 흘러가며, 내가 만들어 낸 용서가 아니라 내가 이미 받은 용서가 형제에게로 흘러갑니다.
어쩌면 자비의 반대는 미움만이 아니라 ‘붙잡음’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상대방이 내게 한 잘못을 붙잡고, 그날 들었던 말을 붙잡고, 내가 얼마나 억울했는지를 붙잡고, 내가 옳았다는 사실을 붙잡으며, 때로는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해 주었다는 사실마저 붙잡습니다. 그렇게 하나씩 붙잡다 보면 어느 순간 두 손이 가득 차서 더 이상 하느님의 자비를 받을 수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건네줄 수도 없게 됩니다. 그래서 용서는 놓아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잘했다고 말하며 놓아주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을 심판하고 응징하고 기억하는 일의 최종 권한을 내가 움켜쥐지 않고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때 나는 조금씩 자유로워집니다. 용서는 상대방을 풀어주는 일이면서 동시에 그 사람에게 묶여 있던 나를 풀어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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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14.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꼴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우리 인간 존재성 안에는 사랑하고 신뢰할 힘이 더 강하게 부여되어 있습니다! 2026.08.14. 05:03
성경의 첫 장, 창세기 1장 27절에는 남자와 여자의 창조에 대한 아름답고 서정적인 묘사가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던 날, 하느님과 비슷하게 그를 만드셨다. 그분께서는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 5:2 참조). "아담"은 야고보나 요한과 같은 이름이 아니라, "흙으로 빚어진 피조물"을 뜻하는 말로, 히브리어로는 "아다마"라 합니다. 창세기 첫 세 장에서 "아담"은 남자와 여자를 함께 가리킵니다. 따라서 남자와 여자는 동등한 위치에 있으며, 둘 다 똑같이 하느님의 모습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남자와 여자가 함께할 때 진정한 하느님 모상으로서의 우리 존재성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타락 이전의 이야기입니다! 타락 이후에는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인간은 저주 아래 있는 존재로 묘사되며, 그 저주의 결과를 남자와 여자가 각기 다르게 겪는다고 성서는 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남자에게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창세 3:19)라고 말씀하시고, 여자에게는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창세 3:16)라고 말씀하십니다. 학자들은 이것을 창세기가 기록되던 당시 근동 지역의 실제 사회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봅니다. 특히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대목입니다. 여자는 먼저 아버지의 권위 아래에, 그 다음에는 남편의 권위 아래에 있었으며, 그 이유는 여자가 그들의 "소유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홉 번째 계명인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는 계명은 정결에 관한 것이 아니라 재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여자는 아버지나 남편의 소유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탈출기에 나오는 다음 내용을 보면 당시의 그러한 사회적 통념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네 이웃에게 속한 어떤 것이든 탐내지 말라."(탈출 20:17). 게다가 예수님 시대에는 이혼이 매우 쉽게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어떤 랍비들은 아내가 음식을 망치거나 시댁에 대해 나쁘게 말하면 남편이 이혼할 수 있다고 가르쳤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남편이 자기 아내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를 발견하면 아내를 버릴 수 있다고까지 말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요즘의 상식으로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던 것이지요. 이런 배경 속에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에 대한 법적 논쟁으로 들어가지 않으시고, 창세기의 타락과 에덴 동산에서의 추방 이전, 즉 우리 존재의 원초적 순수 상태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타락한 상태보다 원래의 상태를 확증하시며, 하느님께서 의도하신 남자와 여자, 그리고 혼인의 본래 뜻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 원래의 상태는 남자가 여자를 소유하는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벗의 관계였습니다. 그것은 지배와 종속이 아니라 사랑이었습니다. 오늘날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상대를 소유물로 여기지 않을 때, 그리스도의 마음이 드러나고, 인간은 원죄의 상태가 아니라 원초적 순수의 상태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은 아우슈비츠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낯선 이를 대신해 죽음을 자원한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 성인을 "이 어려운 시대의 주보 성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어려운 시대'란 우리의 관계성 안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중심 자리를 차지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의 관계성에서마저 세상적 이득과 손해의 논리를 앞세우는 시대를 의미합니다. 사실 물질주의와 개인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요즘의 세상에서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것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서로에 대한 신뢰심이 아닐까 합니다. 아마도 이런 현상(?)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우리 정신 안에 우리 인간에 대한 부정적인 개념을 더 많이 주입시키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등을 통해 우리가 듣고 보는 것들이 대개는 우리 인간의 어둡고 암울하고 잔혹한 모습들이다 보니 우리는 우리 서로에 대한 신뢰심을 더 키워가기보다는 별 의식 없이 그 반대쪽으로 가려는 정신의 경향을 갖게 되는가 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성인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치명적인 독은 무관심입니다.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통해) 하느님께 찬미 드리는 일에는 결코 한계가 없어야 하는데도 이런 무관심이 우리 세상에 팽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온 힘을 다해 (우리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통해)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합시다!" 괄호 안에 넣은 말들은 제가 콜베 성인이 한 말의 의미를 제 나름대로 해석하여 덧붙인 것입니다. 이것이 아마도 콜베 성인이 이야기하고자 했던 본래의 의도가 아닐까 하는 마음에서요.... 사실 우리 인간 존재성 안에는 사랑하고 신뢰할 힘이 더 강하게 부여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며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 가장 큰 축복일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축복을 더 큰 축복으로 만들어가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해 주시며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 묵상을 마치면서 예전에 한두 번 나누어 드렸던 글 앞 부분을 다시 한번 나누어 드리고 싶습니다. 이 글은 1998년 성탄을 앞두고 저의 고백 사제이셨던 저베이스 화이트 신부님(Fr. Gervase White, OFM)이 저에게 보내 주셨던 성탄 메시지입니다. "한 해가 어디로 갔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성취해 냈습니까? 나는 이 기다림의 시간이 나로 하여금 뒤로 물러나 내게 주어진 것들이 무엇인지를 숙고할 기회를 주기에 언제나 이 시간에 감사드립니다. 우리 주변의 세상을 바라보게 될 때, 나는 우리가 대단히 유복한 시기에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단 몇 사람만이 참으로 행복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팩스와 휴대폰에 의해 연결되어 있고, 전자 메일로 접속되어 있어 잠겨 있는 문 뒤의 도시들에서는 안전이 보장되어 있는 듯하지만,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이 이상은 없다 싶을 정도의 공포와 외로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증오와 공포가 텔레비전 쇼와 영화, 뉴스,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 계속해서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토록 나쁜 것들로 인해 우리의 감각이 마비되어 버린다면, 우리는 우리 삶 속에 있는 좋은 것들을 보는 데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기술이 더 빠르고 더 먼 곳에까지 다다를 수 있게 해줄수록, 느긋해져야 할 우리의 필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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