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메섹의 아나니아
사도행전 9:10-20 2022/12/18 구주강림절 제4주
9: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9: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9:12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9: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9: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9: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9: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9: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9: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9: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우리 자녀와 이웃들에게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누군가에게 길이 되고 안내자가 되는 것만큼 복되고 귀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가 이끌어 주는 분들을 향해서 우리가 선생님이라고 높여 부르면서 깍듯이 살피고 모십니다.
저에게는 세 분의 선생님들이 계십니다.
윤동주, 문익환, 장준하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서 살았던 이 세 분의 친구들이
저의 오래된 선생님들입니다.
윤동주
죄의 부끄러움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 문학의 선생님이지요.
문익환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 성경의 선생님입니다.
장준하
행동하는 신앙(양심)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 신앙의 선생님이지요.
이 세 분이 저에게 주신 가르침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결코 이길 수 없는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를 감싸고 있다.
둘째 결코 물러설 수 없는 그리스도의 진리가 우리 안에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
그렇게 말뿐만 아니라 몸으로 보여주신 저의 선생님들이지요.
오늘본문 사도행전 9장을 보면
초대교회를 이끌었던 아주 중요한 인물 두 분이 등장합니다.
훗날 이방인의 사도(전도자)가 될 사울(바울)과
훼방 하는 자 사울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품었던 스승 아나니아입니다.
먼저 아나니아의 제자 사울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배냐민 지파 출신의 바리사이 전통 유대인입니다.
그가 유대교 신앙에 열심을 넘어 진심이었다는 것은
예루살렘 출신이 아닌 사울이
예루살렘에 있는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 들고
다메섹(다마스쿠스: 피난살이 그리스도인의 집성촌)으로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행9: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9: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이미 나무에 달랴 죽은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저주와 심판 받은
‘예수가 부활 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가 하나님이 약속한 그리스도다.’
이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신성모독이자 이단 사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손에 쥐어진 대제사장의 공문을 들고 불경한 이단의 무리들이 숨어 산다고 하는 다메섹으로 살기등등하게 나아간 것입니다.
그런데요.
바로 그때, 사울이 핍박하는 주님이 개입하게 됩니다.
다메섹(다마스쿠스)의 외곽인 다라야(Darayya) 마을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하늘로부터 오는 빛과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행9: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더 놀랍고 신비스러운 것은
땅에 고꾸라진 사울에게 들려진 소리였습니다.
행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그러자 엉겁결에 사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9: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당신은 누구십니까, 주님?)
여기서 사울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는 아주 중요한 호칭 하나가 등장합니다. 바로 주님이었습니다.
하나님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호칭 ‘주님’을
신비한 빛과 신비한 소리 앞에서 사울 자신도 모르게 나오게 된 것입니다. 찰나, 정말 한 순간에 일어난 신비체험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신비스러운 만남(체험)을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사도행전 9, 22, 26장에 걸쳐
무려 세 번이나 반복해서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 율법에 따라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이방인 누가가 자신의 책에서 증거 한 이유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
사울의 회심이 진짜였다는 것을
모든 교회에 알리고자 함이었습니다.
의도적인 편집이었지요.
하지만 이것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특히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 인해 흩어져서 생긴 다메섹 교회는
사울의 회심을 더욱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신앙의 동지였던 스데반 집사의 순교
그 아픔이 아직도 생생한데(트라우마)
어느 누가 사울을 그리스도의 형제로 받아들이겠습니까?
어림없는 소리였지요.
그 때 사울을 교회로 받아들인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아나니아였습니다.
아나니아(야)
‘여호와(주님)은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름의 뜻이 참 좋지요.
이름의 뜻이 좋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사도행전에서만
세 명의 아나니아가 등장합니다.
사도행전 5장: 아나니아(삽비라)
사도행전 9장(오늘 본문): 아나니아
사도행전 27-28장: 아나니아
이렇게 세분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출신 지역과 함께 이름을 부르는 교회의 전통에 따라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를 예루살렘의 아나니아
오늘본문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아니니아를 다메섹의 아나니아
그리고 사도행전 27-28장에 나오는 아나니아를 대제사장 아나니아라고
각각 구별해서 부르지요.
이 세분 중에서 다메섹의 아나니아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훼방꾼 사울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도를 차근차근 가르쳐주는 사울의 선생님이었다는 것입니다.
행9: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9: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유쎄이아)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타르수스)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하나님을 찾는) 중이니라
아무리 기도중이라 하지만 다소 사람 사울을 찾아간다.
사실 어림없는 소리였습니다.
스데반 집사 순교에 다소 사람 사울이 개입되어 있었다는 것과
그 핍박의 칼날이 이제는 다마스쿠스를 향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사울을 찾아 간다.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메섹의 아나니아가 주님의 명령을 거절하지요.
행9: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9: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그러자 주님이 다시 명령합니다.
행9: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렇게 해서 다메섹 아나니아가 기도중인 사울을 찾아갑니다.
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여기에 보면 다메섹 아나니아가
안수하는 선생이 되어서 사울에게 두 가지를 행합니다.
첫째 사울의 눈을 뜨게 합니다.
육체의 눈뿐만 아니라
율법과 자기 의에 눈이 멀었던 사울의 눈을 뜨게 하지요.
그렇게 해서 자신이 핍박했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고 그리스도로 다시 보게 합니다.
행9: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9: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9: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여기서 사용된 ‘다시 보게 된지라’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나블레포입니다.
‘우러러 본다’는 뜻입니다.
낮잡아 보았던 나사렛 사람 예수를
아나블레포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우러러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나니아가 제대로 된 스승의 역할을 해낸 것이지요.
또 하나 다메섹 아나니아가 안수하는 선생으로 사울에게 행한 것이 있습니다. 율법에 갇힌 사울을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서 선포자로 사도로 교사로(딤후1:11) 쓰임 받는 하나님의 그릇이 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시)9: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그렇게 해서 교회사에 등장하는 인물 사도 바울이 된 것입니다.
다메섹 아나니아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메섹 아나니아를 기억해야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의 아름다운 순종이
그의 아름다운 헌신이
그의 아름다운 돌봄과 희생과 기다림이
위대한 선포자이자 사도이자 교사이자 하나님의 그릇인 바울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교회가 막 시작 될 무렵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가리켜서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행9: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그러다가 사도행전 11장에 가서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이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하나 더 붙여지게 됩니다.
행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
그리스도인
다른 이름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의 길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예수님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따르는 사람들이겠지요.
따라서 그분의 제자인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날마다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가장 연약한 육체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겠지요?
찬송가 453장입니다.
찬송의 시인은 자신의 간절한 소원을 이렇게 밝힙니다.
내 평생의 소원 내 평생의 소원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어떻게 해야 대속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을까요?
첫째 성령을 보혜사 곧 참된 스승으로 삼으십시오.
2. 성령이 스승 되셔서 진리를 가르치시고 거룩한 뜻을 깨달아 예수를 알게 하소서
둘째 성령의 감화를 받으십시오.
3. 성령의 감화 받아서 하나님 말씀 배우니 그 말씀 한 절 한 절이 내 맘에 교훈 되도다
셋째 오늘이 구주 강림절 마지막 주인데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십시오.
4. 예수가 계시는 보좌는 영광에 둘려 있도다
평화의 왕이 오시니 그 나라 왕성 하도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