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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祖實錄선조실록〉 宣祖선조 34年 3月 25日자인데요. 임금(宣祖선조)이 便殿편전에서 皇世子황세자(光海君광해군)가 入侍입시한 가운데 鍼침을 맞았다는 內容내용이 들어있습니다. 그 자리에는 藥房提調약방제조 金命元김명원(1534~1602)·柳根유근(1549~1627)·尹暾윤돈(1551~1612) 등이 있었구요.
우리가 잘 아는 許浚허준(1539~1615)·李公沂이공기·金命國김명국(生沒年생몰년 未詳미상), 許任허임(1570~1647) 등 御醫어의와 鍼醫침의들도 총출동했죠. 아무래도 임금을 治療치료하는 자리이니만큼 무겁고도 深刻심각한 雰圍氣분위기였겠죠.
御前어전에서, 敢감히 방귀를?
그런데 實錄記事실록기사 中에 ‘柳根유근’이라는 분의 이름 뒤에 작은 글씨로 쓰여진 記事기사가 눈에 띄었습니다.
“柳根유근(임금의 咫尺지척에서 敢감히 방귀를 뀌었으니 이는 爲人위인이 輕率경솔한 所致소치이다.(咫尺天威지척천위 敢發穢聲감발예성 蓋無人輕率之致也개무인경솔지치야)”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柳根유근이 敢감히 임금이, 그것도 몸이 아파서 鍼침을 맞고 계신 그 嚴重엄중한 자리에서 방귀를 뀌었다(穢聲예성)는 것입니다.
想像상상해 보면 그 雰圍氣분위기가 얼마나 ‘갑뿐사’였겠으며, 방귀를 뀐 柳根유근 本人본인은 또 얼마나 唐慌당황했겠습니까.
모두들 망극해서 어쩔 줄 몰라하면서 짐짓 모른체 하느라 애를 썼겠죠. 몇몇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그런 일은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 자리에 入侍입시했던 史官사관의 붓이 그걸 그냥 넘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敢감히 임금이 鍼침을 맞고 있는데 방귀를 뀐 柳根유근의 사람됨이 輕率경솔하다.”고 ‘디스’를 한거죠.
그 때문에 禮曹判書예조판서와 左贊成좌찬성 等을 지낸 柳根유근은 “임금 앞에서 敢감히 방귀를 뀐 人物인물”로 歷史書역사서에 記錄기록되고 말았습니다.
平素평소 柳根유근이라는 분하고 어떤 抑何心情억하심정이 있어서 그런 건지 잘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別별것까지 다 評價평가한 史官사관도 그렇고, 그것을 걸러내지 않고 그대로 實錄실록에 실은 編修官편수관들도 참 至毒지독한 분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그 德分덕분에 우리는 421年 前전 御前어전에서 벌어진 일을, 마치 드라마의 한 場面장면처럼 生生생생하게 想像상상할 수 있게 됐습니다.
■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과 〈承政院日記승정원일기〉의 差異차이
저는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이 얼마나 대단한 記錄物기록물인지를 紹介소개하기 위해 ‘柳根유근의 방귀’를 例예로 들었습니다.
그러나 ‘柳根유근의 방귀’ 이야기는 實錄실록의 觀點관점에서 보면 多少다소 ‘TMI’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柳根유근의 방귀를 批判비판하는’ 史官사관의 評價평가를 넣었어야 할 어떤 理由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實錄실록은 어디까지나 編集本편집본이기 때문입니다. ‘史草사초’가 있죠. 史官사관이 朝廷조정의 모든 行事행사 및 會議회의에 參席참석하여 임금과 臣下신하들의 言動언동과 政事정사의 內容내용을 紹介소개하고, 그 잘잘못 等을 記錄기록한 것을 史草사초라 하죠. 여기에 官廳관청의 公式文書공식문서 等을 모아 後代후대(朝鮮조선의 境遇경우 次期차기 國王代국왕대)에 編集편집 整理정리해서 編纂편찬하는 것이 바로 實錄실록입니다.
只今지금 言論언론으로 치면 記者기자가 取材취재한 內容내용을 데스킹해서 報道보도하는 스트레이트, 解說해설, 論評논평, 社說사설 等이라 볼 수 있습니다. 放送방송으로 치면 뉴스 및 다큐멘터리 編集本편집본이겠죠.
‘柳根유근의 방귀’와 같은 例外예외도 있지만, 後代후대에 實錄실록의 編集편집 過程과정에서 相當部分상당부분 걸러내기 때문에 ‘팩트’에 充實충실한, 多少다소 無味乾燥무미건조한 內容내용을 傳전하기 마련이죠. 다만 ‘史官사관의 寸鐵殺人촌철살인 評價평가’가 實錄실록의 價値가치를 한껏 높이는 要素요소가 됩니다.
그런 實錄실록과 달리 承政院승정원(大統領대통령 秘書室비서실) 所屬소속 注書주서(7級급) 2名이 임금의 一擧手一投足일거수일투족과 臣下신하들의 報告보고 等을 빠짐없이 記錄기록한 《承政院日記승정원일기》는 어떨까요.
記者기자의 取材日誌취재일지 或혹은 映像영상 撮影本촬영본을 日記形式일기형식으로 整理정리한 것으로 보면 됩니다. 日記일기이니만큼 每日每日매일매일의 날씨까지 記錄기록해 놓았죠. 그러니 그 生生생생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朝鮮時代조선시대 御前어전의 모습을 生中繼생중계한 動映像동영상 같은 느낌을 줍니다.
《實錄실록》과 《承政院日記승정원일기》를 한-番번 比較비교해 볼까요.
■ 英祖영조의 變德변덕 氣質기질을 指摘지적한 臣下신하
〈英祖實錄영조실록〉 1738年 1月 21日字를 보겠습니다.
“임금이 昌德宮창덕궁 養正閤양정합에 나아가 領議政영의정 李光佐이광좌 等을 만났는데, 東宮동궁(思悼世子사도세자)도 있었다. 임금이 東宮동궁에게 글-字자를 써서 스승들(李光佐이광좌 等)에게 주라고 하자 東宮동궁은 곧 글씨를 써서 주었다.”
어떻습니까. 無味乾燥무미건조하게 ‘팩트’만 傳達전달한 新聞신문의 스트레이트 記事기사 같죠. 같은 날짜(1月 21日)의 〈承政院日記승정원일기〉는 어떻게 다를까요. 1738年이면 思悼世子사도세자의 나이는 겨우 4歲였는데요.
英祖영조는 “오늘 東宮동궁이 冊책을 읽고 싶어한다.”고 韻운을 떼면서, “네가 읽겠느냐.”고 思悼世子사도세자에게 물었는데요. 思悼世子사도세자가 수줍은 듯 對答대답을 하지 못하자, 英祖영조는 慈愛자애로운 웃음을 지었답니다.
“그럼 글씨를 쓰겠느냐.”
內侍내시가 종이 2장과 함께 붓과 벼루를 가져왔고, 思悼世子사도세자가 붓을 잡고 글씨를 썼습니다.
“(웃음을 지으며) 글-字자 쓰는 것은 어려워하지 않는데 글 읽는 것은 몹시 싫증을 낸단 말이야. 글씨 쓴 종이를 네 스승(李光佐이광좌)에게 갖다주어라.”(英祖영조)
臣下신하들의 德談덕담이 이어졌는데요. 領議政영의정 李光佐이광좌(1674~1740) 等은 “東宮동궁이 穩和온화한 모습과 슬기로운 智慧지혜를 갖췄다.”고 極讚극찬했습니다. 런데 이 자리에서 判中樞府事판중추부사 徐命均서명균(1680~1745)이 意味深長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집니다.
“殿下전하(英祖영조)의 率先垂範솔선수범만이 東宮동궁을 引導인도하는 最上최상의 方法방법입니다. 한데 殿下전하께서는 平素평소 感情調節감정조절을 잘 못하시는 点점이 많으니…. 于先우선 聖上성상께서 더욱 힘써 돌이켜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徐命均서명균은 겉으로는 慈愛자애롭기 그지없는 아버지(英祖영조)의 變德변덕스러운 性格성격을 指摘지적하고 있습니다. 徐命均서명균은 或혹 24年 뒤인 1762年에 일어난 悲劇비극(壬午禍變임오화변·思悼世子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事件사건)을 豫告예고한 것일까요.
■ “殿下전하 폭삭 늙으셨습니다”
<英祖實錄영조실록>과 <承政院日記승정원일기>의 比較事例비교사례를 더 들어볼까요. <英祖實錄영조실록> 1744年(英祖영조 20) 8月 20日字를 보죠.
“英祖영조가 右議政우의정 趙顯命조현명(1690~1752)과 禮曹判書예조판서 李宗城이종성(1692~1759)을 接見접견하고 御眞어진(임금 肖像畫초상화) 2幅폭을 보여주며 ‘이것이 나의 40歲세 때를 模寫모사한 것인데, 이 御眞어진의 奉安處봉안처를 찾아야겠다’고 말씀하셨다...” 팩트만 傳達전달한 記事기사죠. 그런데 같은 날짜 <承政院日記승정원일기>는 어떨까요. 51살이 된 英祖영조가 41살 때 그린 當身당신의 肖像畫초상화를 가져와 臣下신하들과 品評會품평회를 열었다는 內容내용을 아주 詳細상세하게 描寫묘사합니다.
“<白居易백거이>(白樂天백낙천, 772~846)의 詩시에 ‘나이 많은 兄형이 어린 아우를 마주 對대하듯 한다’고 했는데 그 表現표현이 맞습니다.”(趙顯命조현명)
“10년 사이에 이렇게 달라졌으니.... 그 表現표현이 참으로 絶妙절묘하구나. 只今지금 보니 이 때만 해도 젊었구나!”(英祖영조)
英祖영조는 大臣대신들에게 “가까이 와서 寡人과인의 御眞어진을 詳細상세히 보라”고 했습니다. 英祖영조는 特특히 視力시력이 좋지 않은 畫家화가 <張得萬장득만>(1684~1764)에게 “眼鏡안경을 쓰고 보라”고 勸권했습니다.
*****(2026.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