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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 사전전고(祀典典故) / 서원(書院)
함양(咸陽) 남계서원(灆溪書院) 가정 임자년에 세웠으며 만력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정여창(鄭汝昌)ㆍ정온(鄭薀)ㆍ강익(姜翼) 호는 개암(介庵), 참봉을 지냈고, 추향되었다.
별사(別祠) 숭정 갑술년에 세웠다. : 유호인(兪好仁) 성종조의 명신
장수(長水) 창계서원(滄溪書院) 기축년에 세웠다. : 황희(黃喜)ㆍ황수신(黃守身) 세조 때의 정승 ㆍ유호인(兪好仁)ㆍ장응두(張應斗) 호는 송탄(松灘), 생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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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계서원(滄溪書院)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면에 있는 조선후기 황희 등 4인의 선현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문화재자료.
건립시기1695년(숙종 21)
소재지전라북도 장수군 장수면 선창리
정의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면에 있는 조선후기 황희 등 4인의 선현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문화재자료.내용1695년(숙종 21)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황희(黃喜)·
황수신(黃守身)·
유호인(兪好仁)·
장응두(張應斗)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유림과 후손에 의하여 제단(祭壇)을 마련하고 춘추로 향사를 지내왔다.그 뒤 1955년에 복원하였으며, 1968년에
강백진(康伯珍)을 추가 배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상현재(尙賢齋) 등이 있다.이 서원은 1984년 전라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매년 7월 10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4변(籩) 4두(豆)이다. 유물로는 황희의 영정 등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전고대방(典故大方)『문화재대관』(전라북도,1979)『장수군지』(오일승,1928)
집필자집필 (1995년)박완식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창계서원(滄溪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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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肅宗) / 숙종(肅宗) 26년(1700) / 12월 초6일
황희(黃喜)ㆍ황수신(黃守身)ㆍ유호인(俞好仁)ㆍ장응두(張應斗)의 서원에 사액하지 않는 건
1. 예조(禮曹)에서 올린 계목(啓目)에, “계하(啓下) 문건은 점련(粘連)하였습니다. 전라도(全羅道) 장수(長水)의 유학(幼學) 김석보(金碩輔) 등의 상소를 보니, ‘고(故)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는 도량은 넓고 식견이 심원(深遠)하여, 오늘날까지도 국조(國朝)의 어진 재상(宰相)을 거론할 때는 반드시 그를 가장 으뜸으로 여깁니다. 또한 효성스럽고 우애로우며 충성스럽고 검박했던 행실과 정론(正論)을 부식(扶植)하고 사론(邪論)을 억눌렀던 공적은 진실로 후세에 모범이 됩니다. 그의 아들인 열성공(烈成公) 황수신(黃守身)은 상소하여 요사스런 무당을 배척한 한 시대의 훌륭한 신하였습니다. 교리(校理) 유호인(俞好仁)은 충효(忠孝)와 청검(淸儉)한 행의(行誼)가 훤히 드러났고, 경연(經筵)에 출입하여 임금을 인도한 공이 매우 컸습니다. 생원(生員) 장응두(張應斗)는 고요한 산속에서 독서를 하며 뜻을 구하고, 효제(孝悌)ㆍ충신(忠信)이 남달리 뛰어났으며, 재학(才學)을 겸비하여 기묘년(己卯年)에 천거되었습니다. 이 네 사람의 유풍(遺風)과 여운(餘韻)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발하기에 충분합니다. 이에 한 고을의 많은 선비들이 한 목소리로 힘을 합쳐 혼령을 편안히 모시는 사우(祠宇)를 건립하여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삼았으니, 특별히 유사(攸司)에게 명하여 은액(恩額)을 시행하여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황희가 재상이었을 때의 업적과 황수신이 선대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잘 이어받았으니, 모두 한 시대의 훌륭한 신하였습니다. 유호인의 문장과 지행(志行), 사우(師友)의 연원(淵源)은 선배들의 글에 모두 기록되어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의 귀와 눈에 남아 있습니다. 장응두의 경우에는 상소에서 비록 ‘고요한 산속에서 독서를 하며 뜻을 구하였으며, 기묘년에 천거되었습니다.’고 하지만, 그의 행적과 사실은 결코 적게 개견(槪見 대강 추려서 살펴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릇 서원은 본래 사문(斯文)에 공이 있어 후세에 모범이 되는 자들을 위하여 설립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서원을 건립하기 시작할 때의 뜻은 우연한 것이 아닌데, 황희가 재상이었을 때의 업적과 황수신이 선대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잘 이어받은 사실과 유호인의 문장과 행적은 고(故) 상신(相臣) 김육(金堉)이 저술한 《국조명신록(國朝名臣錄)》에 모두 수록되어 있으니, 선비들이 존경하고 흠모하는 정성으로 사우를 건립하여 숭봉(崇奉)하는 것도 불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조정에서 사액을 하는 것은 사체(事體)가 매우 중대할 뿐만 아니라 장응두를 병향(並享)하는 것은 더욱이 가볍게 논의하기 어려우니, 상소의 사연을 지금은 우선 그대로 두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니, 그대로 윤허한다고 계하(啓下)하였다.
[주-D002] 국조명신록(國朝名臣錄) :
조선 후기 실학자 김육(金堉)이 편찬한 조선 시대 명신의 언행과 행적에 관한 책이다. 모두 17책으로 되어 있으며, 367명이 수록되어 있다. 도학ㆍ사업(事業)ㆍ충절로 분류되며 각 개인의 가계와 벼슬 경력ㆍ언행ㆍ행적을 기록하였음.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박선이 송수경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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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肅宗) / 숙종(肅宗) 32년(1706) / 정월 29일
송준길(宋浚吉)의 서원에 사액을 청하는 것에 대하여 등대(登對)할 때에 품처(稟處)할 것을 계하(啓下)하는 건 *
*星川書院성천서원
1. 예조(禮曹)에서 올린 계목(啓目)에, “계하(啓下) 문건은 점련(粘連)하였습니다. 함양(咸陽)의 유학(幼學) 박중규(朴重圭) 등의 상소를 보니, ‘선정신(先正臣)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은 일찍이 안음현(安陰縣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월성산(月星山) 아래에 살며 고을의 수재들과 더불어 도학(道學)을 드러내어 밝혔기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후생(後生)들이 나아갈 바를 대강이나마 알게 된 것은 그의 은덕이 아님이 없습니다. 그곳에 서원을 건립한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는데도, 사액의 은전이 거행되지 않아 많은 선비들이 답답해하며 탄식하고 있어 이렇게 상소하여 호소합니다.’고 하였습니다. 근래 서원에 사액을 청하는 것으로 시끄러울 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 서원을 중첩해서 설립하는 것에 대해서도 금령(禁令)이 있었습니다. 송준길의 경우에는 오로지 송준길만을 배향하는 서원과 병향하는 서원이 이미 4곳이나 되니, 지금 허락하여 시행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살았던 곳과 한때 지나쳤던 곳은 차이가 있으며, 영남이 평소 문헌(文獻)의 고을이라 칭해지는데 근래 사풍(士風)이 오래도록 흥기하지 않았으니, 전현(前賢)을 존경하고 숭상하여 보고 느끼는 바탕으로 삼도록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 박중규 등이 상소하여 청하는 것은 방색(防塞)하기가 불가하다고 생각되나, 은전에 관련되기에 신(臣)의 조(曹)에서 감히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으니, 임금께서 재결(裁決)하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강희(康熙) 45년 정월 30일에 동부승지(同副承旨) 신(臣) 심극(沈極)이 담당하였는데, 임금이 등대(登對)할 때 품처(稟處)하라고 계하(啓下)하였다.
장응두(張應斗)의 서원에 사액하지 않는 건
1. 예조(禮曹)에서 올린 계목(啓目)에, “계하(啓下) 문건은 점련(粘連)하였습니다. 장수(長水)의 유학(幼學) 손봉조(孫奉祖) 등의 상소를 보니, ‘본 고을은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와 열성공(烈成公) 황수신(黃守身)의 관향(貫鄕)이자, 교리(校理) 유호인(俞好仁)이 태어나고 자란 곳입니다. 아울러 고(故) 장응두(張應斗)를 함께 제사 지내고는 몇 해 전에 궐문에 사액을 청하였는데, 해조(該曹)에서 장응두의 사적(事蹟)이 분명하지 않다는 이유로 사액의 청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감히 논의하여 장응두를 <제사하는> 향사당에 옮기고 세 신하를 병향하는 사당에 사액의 은전(恩典)을 입고자 이렇게 상소하여 호소합니다.’고 하였습니다. 장응두의 사적이 분명하지 않아 본조(本曹)에서 일찍이 이전에 방색(防塞)하였던 것은 참으로 마땅한 일이었고, 도학(道學)과 절의(節義)가 후세에 드러나지 않은 경우에는 낭묘(廊廟)의 인재와 유악(帷幄)의 선비라 하더라도 모두 제향 하여 제사 지내는 예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관향은 태어나 자란 곳과는 다르고 또 먼 지방의 궁벽한 고을에서 보고 느끼는 바가 없어 사사로이 스스로 시축(尸祝)하는 것은 비록 금할 수 없겠으나 사액의 은전(恩典)은 아마도 허락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으므로 상소의 사연을 그대로 두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니, 그대로 윤허한다고 계하(啓下)하였다.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박선이 송수경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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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 정조 13년 기유(1789) 1월 22일(기묘)
13-01-22[02] 문임(文任)은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의 원우(院宇) 액호(額號)를 지어 올리라고 명하였다.
○ 예조가 아뢰기를,
“상주(尙州) 유생의 상소에 대한 비답으로 인하여 《등록(謄錄)》을 가져다 살펴보니, 익성공 황희의 서원은 상주 백옥동(白玉洞)에 있는 것과 장수(長水) 창계사(滄溪祠)에 있을 뿐인데 모두 사액(賜額)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번에 유생이 상소하여 청한 것은 중첩하여 설치하는 것에 대한 조정의 금령(禁令)에 저촉되지 않습니다만, 은전(恩典)을 청하는 데 관계되는 일이니 상께서 재결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하교하기를,
“익성공의 원우에 아직까지 편액(扁額)을 내리지 않았으니, 어찌 흠전(欠典) 중에 흠전이 아니겠는가. 특별히 문임으로 하여금 액호를 지어 올리게 하고, 사액하는 날에 근시(近侍)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라. 제문은 내가 친히 짓겠다. 일찍이 들으니, 파주(坡州)와 고양(高陽) 사이에 익성공의 자손이 살고 있다고 하는데, 제사를 받들어 모시는 자가 그 지역에 살고 있는가? 기백(畿伯)에게 분부하여 찾아서 장문(狀聞)하게 하라.”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광태 (역) | 2003
강 :
命文任撰進翼成公黃喜院額
목
禮曹啓言因尙州儒生疏批取考謄錄則翼成公黃喜書院只有尙州白玉洞 長水滄溪祠而俱未賜額今此儒疏之請不在疊設之禁而係干恩典請上裁敎以翼成院宇尙闕扁額豈非欠典之欠典乎特令文任撰進額號宣額日遣近侍致祭祭文當親撰曾聞坡高之間有翼成子孫云主祀者在其地乎分付畿伯搜訪狀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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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암집(立巖集) 민제인(閔齊仁)생년1493년(성종 24)몰년1549년(명종 4)자희중(希中)호입암(立巖)본관여흥(驪興)
立巖集卷之三 / 七言四韻 / 次同年生員張應斗詠歸堂詩軸韻
蓮榜參名卅載餘。老來多病類相如。關河謾作三年客。雲樹難通一札書。
尙友平生唯與點。求詩此日遠尋予。細論卜詠空遙想。安得親過子所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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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집(西浦集) 곽열(郭說)생년1548년(명종 3)몰년1630년(인조 8)자몽득(夢得)호서포(西浦), 포옹(浦翁)본관청주(淸州)특기사항민순(閔純)의 문인.
西浦先生集卷之六 / [西浦日錄] / [詩話]
安亭辛公永僖。字德優。其文章節行。與南秋江孝溫齊名。廢朝時。隱㞐稷山。自號安亭。
寄張斗之 應斗
空齋飛雪灑寒窓。咽咽幽泉亂石矼。更有少年淸似玉。手携山谷口飜江。
祭安亭先生文 安亭門人張應斗。官翰林。
李太白騎鯨後。風月閒多年。天送先生以續此風月。陶淵明千載後。江山無處士。天送先生以主此江山。玉樓重修。天亦無人。還招公也。嗚呼。天送之天招之云何。吁矣尙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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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응두(張應斗)
[생원] 중종(中宗) 8년(1513)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58위(88/100)
자(字) 두지(斗之)
본인본관 지례(知禮)
거주지 장수(長水)
선발인원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전력 유학(幼學)
[부(父)]
성명 : 장지효(張至孝)
품계 : 통훈대부(通訓大夫)
관직 : 행울진현령(行蔚珍縣令)
[출전]
『정덕8년계유8월20일생원진사방(正德八年癸酉八月二十日生員進士榜)』(여주이씨 옥산문중 전적(驪州李氏玉山門中典籍)-사마방목(司馬榜目)[보물 제524호])
기묘록 속집(己卯錄續集) / 별과시 천거인
별과시(別科時)에 천거한 사람들로 서울 밖에서 천거된 사람은 모두 1백 20명인데 천과(薦科)에 오른 사람은 28명이며 따로 14명이 전하는데, 나머지 78명은 아마도 그 착한 행실이 아주 없어질까 두려워 똑같이 기록한 듯함.
경외관동천인
68생원 장응두(張應斗)는 장수(長水) 출신으로 효제(孝悌)ㆍ충신(忠信)이 남달리 뛰어났으며 재학(才學)을 겸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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佔畢齋集門人錄 / 門人錄
○康伯珍字子鞰。信川人。先生外甥也。自少。受業於先生。成廟朝壬辰仲春。中生員。丁酉春。登a012_503b甲科第三人。官至舍人,司諫。出宰興海時。刻行彝尊錄。戊午。杖流。
○康仲珍字子韜。庚子春。中生員,進士。登第。官至弘文館修撰。伯珍之弟也。受業於先生。戊午後二十二年。仲珍刻行先生文集七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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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백진(康伯珍)
조선전기 함안군수, 사헌부장령, 사간원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자온(子韞), 무명재(無名齋), 효량(孝良)
출생일미상사망일1504년(연산군 10)본관신천(信川)
관련사건 무오사화
개설
본관은 신천(信川). 자는 자온(子韞), 호는 무명재(無名齋). 강윤리(康允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거례(康居禮)이고, 아버지는 강척(康惕)이며, 어머니는 김숙자(金淑滋)의 딸이다. 강중진(康仲珍)의 형이다. 김종직(金宗直)의 생질이자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72년(성종 3) 생원시에 합격하고, 1477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489년 사헌부지평이 되었다가 같은 해 10월에 함안군수가 되었으며, 재직기간 선정을 베풀어 1493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으로부터 선정사실에 대한 장계(狀啓)로 가자(加資)되기도 하였다.이듬해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사헌부장령·사간원사간을 지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일손(金馹孫)·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 등이 대역죄로 능지처사를 당할 때 장(杖) 80에 정주로 귀양가서 봉수(烽燧)의 야역(夜役)주 01)을 하였다.1504년에 무오수죄(戊午受罪)주 02)로 외방부처된 사람들의 처리안이 나와 결국 능지처참되고, 아들과 형제들도 결장(決杖)주 03)에다 외방으로 축출당하였다. 1506년(중종 1)에 대사간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효량(孝良)이다.
참고문헌
성종실록(成宗實錄)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중종실록(中宗實錄)국조방목(國朝榜目)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점필재집(佔畢齋集)허암유집(虛庵遺集)
주01야간에 불을 피우는 봉수군의 역주02무오사화로 죄를 받음주03장형을 받음
집필자집필 (1996년)유영박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강백진(康伯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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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강중진(康仲珍)조선시대사인물
조선전기 성균관전적, 형조좌랑, 승문원판교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자도(子鞱), 자일(子逸), 죽은(竹隱)
출생일1459년(세조 5)사망일1520년(중종 15)본관신천(信川)
관련사건 기묘사화
정의
조선전기 성균관전적, 형조좌랑, 승문원판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신천(信川). 자는 자도(子鞱)·자일(子逸), 호는 죽은(竹隱). 강윤리(康允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거례(康居禮)이고, 아버지는 교위(校尉) 강상(康愓)이며, 어머니는 성균관사예 김숙자(金淑滋)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생질이자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80년에 진사가 되고, 1495년(연산군 1)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풍저창직장(豐儲倉直長)이 되었다. 이어 홍문관저작·성균관전적·형조좌랑을 거쳐 외직인 의흥(義興)·영동(永同)의 현령을 역임하다가,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시강원문학이 되었다.1506년 사간원헌납에 올라 언론활동을 전개하다가, 곧 예빈시첨정으로 전직되었다. 사헌부장령·군기시·내자시·봉상시부정을 역임하였고, 밀양부사와 성주목사를 지냈다. 1510년 제포(薺浦)에서 왜인의 변란이 일어나자, 제용감정(濟用監正)으로 대마도경차관을 겸직하여 왜구를 토벌하였다.특히 안골포(安骨浦)에서 왜란 진압에 공을 세워 군공일등(軍功一等)으로 보고되었으나, 대간에서 무예를 모르는 자가 군공일등이 될 수 없다고 상계하여 많은 논란이 일어났다. 그뒤 군기감·선공감정을 거쳐 승문원판교가 되었다가 기묘사화로 장류(杖流)되었다.
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국조방목(國朝榜目)『허암유집(虛庵遺集)』(정희량(鄭希良))
집필자집필 (1996년)이병휴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강중진(康仲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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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록 속집(己卯錄續集) / 별과시 천거인
별과시(別科時)에 천거한 사람들로 서울 밖에서 천거된 사람은 모두 1백 20명인데 천과(薦科)에 오른 사람은 28명이며 따로 14명이 전하는데, 나머지 78명은 아마도 그 착한 행실이 아주 없어질까 두려워 똑같이 기록한 듯함.
경외관동천인
1참봉 노우명(盧友明)은 함양(咸陽) 출신으로 조행(操行)과 명망이 있었으며 학술이 있고 단정하였으며 성품이 깨끗하고 담박 고요하였다.
2참봉 유맹달(柳孟達)은 임천(林川) 출신으로 천성이 순정(淳正)하였으며 성질이 활달하고 효행이 두드러졌으며 재능이 있었다.
이상 두 참봉은 유일(遺逸)로서 벼슬을 받았다가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3유학 박계효(朴繼孝)는 삼가(三嘉) 출신으로 학행과 재질이 있었고 기개와 도량이 강정했다. 예의를 다하여 상례를 모셨다.
4생원 송석현(宋錫賢)은 영광(靈光) 출신으로 마음이 투철하고 효우가 돈독하였으며 재행(才行)이 뛰어났고 재능이 있었다.
5생원 임말손(林末孫)은 수원(水原) 출신으로 조행이 있고 언행이 청렴하였으며 남을 가르치기에 부지런하였다.
6생원 변벽(卞璧)은 거창(居昌) 출신으로 학행과 기식(器識)이 있어 어버이를 섬김에 거스름이 없었다.
7생원 형사보(邢士保)는 거창 출신으로 효행과 학문이 있었다. 임오과(壬午科)에 올라 벼슬이 전적(典籍)에 이르렀다.
8유학 유자방(柳子房)은 거창 출신으로 조행과 기식이 있었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친우에게 믿음이 있으며 경사(經史)에 두루 통하였다.
9좌랑 정경(鄭瓊)은 효행이 드러났으며 학문이 두루 통하였다. 이하는 모두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다.
10판관 박찬(朴璨)은 재행과 효렴이 있었다. 이상 두 사람은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다.
11생원 이종경(李宗慶)은 학행과 기식이 있었는데, 연경(延慶)의 아우이다.
12생원 신겸(愼謙)은 조행이 있었고, 여유가 있었다.
13진사 정세경(鄭世卿)은 재행과 효행이 있었다. 추천으로 벼슬에 올랐다가 파직되었다.
14참봉 김석홍(金錫弘)은 학행과 조행이 있었다.
15진사 홍등(洪縢)은 선을 좋아하고 잘못을 반성하여 잘 고쳤으며,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일찍이 유일(遺逸)로 벼슬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생원 신광록(申匡祿)은 학행이 있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벗을 지성으로 사귀어 자상하게 인정을 다하였다.
17유학 이후(李煦)는 재식이 있어 집에 있으면서 고요히 심성을 길러 옛사람의 학풍이 있었다.
18진사 여희단(呂希端)은 학행과 재행이 있었다.
19사부(師傅) 목희증(睦希曾)은 조행이 있었으며 성질이 질박하고 유순하였다.
20진사 이문건(李文楗)은 침중(沈重) 숙성(夙成)하였으며 효우(孝友)에 돈독하였다. 충건의 아우로 급제하여 벼슬이 승지(承旨)에 이르렀는데, 을사년에 집안에 화를 당하여 귀양갔다가 죽었다.
21사부 여희림(呂希臨)은 효심이 많았다.
22진사 김안도(金安道)는 배우기를 좋아하고 검행(檢行)하였다. 영상 김령(金鈴)의 아들로 음직을 받아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다.
23진사 이백록(李百祿)은 배우기를 좋아하고 검행하였다.
24진사 신명화(申命和)는 순후하고 삼가며 효행이 있었다.
25생원 김인손(金麟孫)은 경학에 밝고 지조가 있었다. 후에 이름을 단(亶)이라 고치고 임오과에 올라 벼슬이 참의에 이르렀다.
26생원 허금(許䃢)은 결백하고 조심스러웠는데 벼슬이 부사에 이르렀다.
27참봉 김만억(金萬億)은 언행을 삼가고 학문을 좋아했다.
28도사(都事) 홍사부(洪士俯)는 결백하고 언행을 조심하여 벼슬이 부사에 이르렀다.
29참봉 김창(金琩)은 언행을 아주 조심했다.
30유학 김진종(金振宗)은 향하는 바가 견실하고 확고하였다. 무자년에 급제하여 을사년에 벼슬이 전적에 이르렀다가 귀양가 죽었다.
31진사 원계채(元繼蔡)는 지조가 있는데 을묘년 식년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다.
32생원 박세훈(朴世勳)은 재주와 식견이 있는데 세희(世熹)의 형이다.
33군수 이은(李誾)은 지조가 있고 결백하였으며 학식이 있었다.
34전 도사 이세번(李世蕃)은 학식과 지조가 있었다.
35생원 이선장(李善長)은 학식과 지조가 있었다.
36생원 우순필(禹舜弼)은 학행이 있었다.
37전 현감 최상(崔祥)은 조행이 있었다.
38진사 이세웅(李世雄)은 뜻이 돈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치부를 하지 않았다.
39유학 박두남(朴斗南)은 몸가짐을 잘하여 조행이 특이하였다.
40생원 송미창(宋彌昌)은 재행이 있었다.
41유학 윤거신(尹居莘)은 학행이 있었다.
42참봉 이광식(李光植)은 효행과 일을 잘 처리하는 국량이 있었다.
43생원 박번(朴蕃)은 효행과 학술이 있었다.
44유학 문준(文濬)은 뜻이 돈독하여 옛것을 좋아하였다.
45유학 문회지(文繪地)는 뜻을 돈독하게 행하였다.
46유학 한계유(韓繼愈)는 뜻이 돈독 견실하였으며 학문에 재능이 있었다.
47유학 김인범(金仁範)은 기절(氣節)과 재능이 있었다.
48유학 진건(陳騫)은 뜻이 돈독하여 옛것을 좋아하였으며 재주와 문식이 있었다.
49유학 허초(許礎)는 지조가 떳떳하였으며 재기(才氣)가 있었다.
50진사 허자(許磁)는 재행이 있어 계미년 알성별시(謁聖別試)에 올라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으며 을사년 위공원훈(僞功元勳)으로 삭탈되었다.
51유학 김시창(金始昌)은 학행이 있었다.
52생원 박훈(朴薰)은 근실하여 실행력이 있었다.
53생원 이영우(李永祐)는 마음씀이 거침없었으며 뜻을 세우는 데 지조가 있었다.
54유학 유여주(兪如舟)
55생원 신세경(申世卿)
56유학 김윤종(金尹宗)은 김식(金湜)의 문인으로 명천(明川)에 귀양갔다가 풀려 상주(尙州)의 집에서 죽었다.
57유생(儒生) 서경덕(徐敬德)은 개성(開城) 출신으로 스스로 고향으로 내려가 거처하니, 남들이 향거(鄕擧 향리에서 위로 인재를 천거함)하였다.
58유학 윤환(尹瓛)은 여주(驪州) 출신으로 지절(志節)이 방정하고 효행과 학술이 있었다.
59유학 정소(鄭韶)는 남양(南陽) 출신으로 문학을 좋아하였으며 어머니가 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잘랐다.
60유학 이윤문(李允文)은 충주(忠州) 출신이다.
61유학 김증(金增)은 청주(淸州) 출신이다.
62생원 상진(尙震)은 임천(林川) 출신으로 기묘년 동별시(冬別試)에 올라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를 성안군(成安君)이라 추증하였다.
63유학 김극양(金克讓)은 보령(保寧) 출신으로 문음으로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는데, 좌의정 극성(克成)의 아우다.
64생원 김숭종(金嵩宗)은 음성(陰城) 출신이다.
65진사 이난손(李蘭孫)은 온양(溫陽) 출신으로 갑신년 별시에 올라 벼슬이 정랑에 이르렀다.
이상 일곱 사람은 모두 학식이 있었다.
66생원 이해(李蟹)는 나주(羅州) 출신으로 재주와 덕행을 겸비하여 실천력이 독실하였으며, 경(經)에 밝고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과거공부를 일삼지 않았다.
67생원 박이홍(朴以洪)은 창평(昌平) 출신으로 마음씀이 순박하고 독실하였으며, 효도와 우애가 돈독하였다.
68생원 장응두(張應斗)는 장수(長水) 출신으로 효제(孝悌)ㆍ충신(忠信)이 남달리 뛰어났으며 재학(才學)을 겸비하였다.
69진사 최필성(崔弼成)은 부안(扶安) 출신으로 지극한 효도로 부모를 섬기고 문ㆍ무의 재주를 겸비하였으며 빈한하면서도 구차하게 취함이 없었다.
70유학 어득한(魚得漢)은 고성(固城) 출신으로 학식이 있었다.
71진사 김응청(金應淸)은 영덕(盈德) 출신으로 학식이 있었고 몸가짐이 성실했으며, 착한 것으로 사람들을 인도하고 빈곤하면서도 잘 사는 것을 도모치 않았다.
72생원 김세보(金世寶)는 청도(淸道) 출신으로 거상(居喪)에는 죽을 마시었으며 또한 재예(才藝)가 있었다.
73진사 김상(金湘)은 문경(聞慶) 출신이며 말이 적었고 벼슬에 나아가 군수에 이르렀다.
74진사 손계돈(孫季暾)은 경주(慶州) 출신으로 청렴하고 강직하며 학식이 있다.
75진사 이인견(李仁堅)은 영천(榮川) 출신으로 마음 가짐이 청렴하고 뜻을 이루기 위해 나아감에 구애됨이 없었으며 학식이 있었다.
76생원 이정(李涏)은 인동(仁同) 출신으로 재주와 학식이 뛰어났다.
77생원 박덕손(朴德孫)은 함안(咸安) 출신으로 문학을 좋아하고 웃어른을 공경했으며 고향에서 공순하였다.
78진사 금원정(琴元貞)은 봉화(奉化) 출신이며, 수차에 걸쳐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고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