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에게 아닥사스다 왕이 내린 조서
(에스라 7장 9-20절)
9-10.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에스라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찬양할 목적으로 또다시 여행에 소요됐던 시간을 언급한다. 그런데 에스라가 이 시기를 택해서 여행을 한 까닭은, 팔레스타인 땅으로 오는 도중 반드시 거쳐야만 했을 사막 지대의 폭염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에스라는 니산월(태양력으로 3, 4월), 즉 봄에 바벨론을 출발하여 압월(태양력으로 7~8월), 즉 여름에 도착함으로써 사막에서의 고생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율례(호크)와 규례(미쉬파트)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라마드)로 결심하였었더라”
초두에, 개역 개정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은 키(~때문에)라는 접속사가 있다. 맨 끝부분의 결심하였더라는 결심하였기 때문이다로 번역함이 보다 적절하다. 그래서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례를 가르치기 위해 바벨론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은 것이다.
미쉬파트는 재판하다, 공의를 실행하다의 뜻이 있는 동사 쉬파트의 파생형이다. 이것은 마땅히 따라야 할 행동의 규범 혹은 선악의 분별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준 등을 가리킨다.
호크는 새기다, 초상화를 그리다 등의 의미를 갖는 동사 하카크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번복될 수 없을 만큼 단단히 규정된 것 혹은 명령된 것을 뜻한다.
미쉬파트와 호크는 외형상으로는 차이가 있는 듯하지만, 두 단어가 동시에 혹은 교대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볼 때, 거의 같은 의미로 봐야할 것이다.
라마드는 습관들이다, 효율적으로 가르치다는 의미이다. 에스라가 실행하기를 결심한 여러 일 중 가장 중요시되던 것은 바로 이 가르침이었다.
11-13.여호와의 계명의 말씀과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례 학자요 학자 겸 제사장인 에스라에게 아닥사스다 왕이 내린 조서의 초본은 아래와 같으니라 모든 왕의 왕 아닥사스다는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학자 겸 제사장 에스라에게 조서를 내리노니 우리 나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중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뜻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너와 함께 갈지어다
조서의 수취인이 누구인가를 밝히는 구절이다. 이 조서에는 에스라가 수행해야 할 사명 내지는 그의 공적 역할이 명시되어 있다.
“모든 왕의 왕 아닥사스다”
이 같은 자기 소개는 자신이 내리는 조서의 권위를 증대시키기 위한 의도를 보여준다. 모든 왕의 왕이라는 칭호는 앗수르나 바벨론 왕들에 의해서도 사용되었는데 이런 호칭은 원래 왕들에 의해 다스려졌던 기존의 나라들을 정복한 정복국의 왕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하였을 것이다.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학자 겸 제사장 에스라에게 조서를 내리노니”
율법은 어떤 판단 기준으로서의 규례를 의미한다.
제사장이라는 직함은 1-5절의 계보를 통해 간접적으로 설명되었다. 에스라는 페르시아의 공무를 담당하는 관리로서, 또 하나님의 율법을 맡은 유대인의 지도자로서 소개되고 있다.
조서를 내리는 것은 문자적으로는 명령을 반포하다를 의미한다.
“우리 나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중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뜻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너와 함께 갈지어다”
아닥사스다가 통치하던 전 지역을 가리킨다. 아닥사스다 당시에는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페르시아 전역에 흩어져서 살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페르시아의 식민지는 아니었지만 애굽의 남부에서도 상당수 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라와 함께 귀환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부분 바벨론에서 살던 자들이었다.
14-20.너는 네 손에 있는 네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기 위하여 왕과 일곱 자문관의 보냄을 받았으니 왕과 자문관들이 예루살렘에 거하시는 이스라엘 하나님께 성심으로 드리는 은금을 가져가고 또 네가 바벨론 온 도에서 얻을 모든 은금과 및 백성과 제사장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그들의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기쁘게 드릴 예물을 가져다가 그들의 돈으로 수송아지와 숫양과 어린 양과 그 소제와 그 전제의 물품을 신속히 사서 예루살렘 네 하나님의 성전 제단 위에 드리고 그 나머지 은금은 너와 너의 형제가 좋게 여기는 일에 너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쓸지며 네 하나님의 성전에서 섬기는 일을 위하여 네게 준 그릇은 예루살렘 하나님 앞에 드리고 그 외에도 네 하나님의 성전에 쓰일 것이 있어서 네가 드리고자 하거든 무엇이든지 궁중창고에서 내다가 드릴지니라
“너는 네 손에 있는 네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기 위하여 왕과 일곱 자문관의 보냄을 받았으니”
율법은 에스라가 항상 가까이하고 있는 양피지 두루마리에 기록되었을 모세 오경이다.
에스라는 본토로부터 어떤 심상치 않은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그는 아닥사스다에게 귀환을 허락해주기를 요청했던 것이다. 에스라는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율법이 여전히 지켜지고 있는 지를 살필 필요성을 느꼈다. 페르시아 정부의 입장에서도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켜서 안정된 삶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바람직하였을 것이다. 그 당시 페르시아는 피정복민들의 반란이 잦았기 때문이다.
보냄을 받았다는 것은 에스라의 팔레스타인으로 귀환이 표면적으로는 페르시아 정부의 이익을 위하여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을 말해준다.
“왕과 자문관들이 예루살렘에 거하시는 이스라엘 하나님께 성심으로 드리는 은금을 가져가고”
왕과 자문관들이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심을 쓰는 것은 피정복민들의 정치적 소요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며, 피정복민의 신으로부터의 진노를 피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
“또 네가 바벨론 온 도에서 얻을 모든 은금과 및 백성과 제사장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그들의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기쁘게 드릴 예물을 가져다가”
모든 은금은 에스라가 바벨론 백성들로부터 얻을 변상 예물을 가리킨다. 백성과 제사장들은 에스라와 함께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하려고 했던 무리들을 가리킨다. 제1차 귀환 때에도 바벨론 땅에서 귀환한 모든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위하여 많은 현물들을 하나님께 바쳤었다.
“그들의 돈으로 수송아지와 숫양과 어린 양과 그 소제와 그 전제의 물품을 신속히 사서 예루살렘 네 하나님의 성전 제단 위에 드리고”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가져간 재물의 제1차적 용도가 하나님께 대한 제사와 관련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 나머지 은금은 너와 너의 형제가 좋게 여기는 일에 너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쓸지며”
나머지 은금은 성전의 보수 및 장식을 위해 예비비로 남겨진 돈을 말한다. 나머지 은금을 오직 제의용으로만 사용하도록 제한하는 명령이다.
너의 형제는 에스라와 같은 제사장들을 가리킨다.
“네 하나님의 성전에서 섬기는(폴한) 일을 위하여 네게 준(예하브) 그릇은 예루살렘 하나님 앞에 드리고”
폴한은 예배하다의 의미를 갖는 동사 펠라흐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예하브는 짐지우다, 맡기다 등의 의미를 갖는다. 아닥사스다의 에스라에 대한 신임을 엿보게 해준다.
“그 외에도 네 하나님의 성전에 쓰일 것이 있어서 네가 드리고자 하거든 무엇이든지 궁중창고에서 내다가 드릴지니라”
페르시아 정부와 바벨론에 잔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련해서 준 것들이다. 아닥사스다는 오직 제의용으로만 돈을 지원하겠음을 말하고
있다.
궁중창고는 강의 서편
에서 징수되는 세금을 보관하는 금고 및 그 관리 기관을 가리킨다. 이 같은 명령은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공공 사업비용은 그 지역에서 충당되어야 한다는 제정 원칙과 완전히 부합된다.
(요약 정리)
에스라는 하나님의 율법을 깊이 연구하고, 삶에서 철저히 준행하며, 백성들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했다. 에스라는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 먼 길을 떠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었다"고 고백한다. 영적인 목표를 이루는 것은 인간의 힘이나 계획만으로는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권세자들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환경을 열어주실 때 비로소 거룩한 사역이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방 왕인 아닥사스다는 에스라에게 막대한 은금과 성전에 필요한 기물들을 내어주며 아낌없는 지원을 약속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통치자나 이방 세력의 마음까지도 감동시키셔서 성전을 세우는 도구로 사용하신다.
에스라에게는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칠 권한뿐만 아니라, 율법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가르치고 다스릴 사법적 권한도 함께 주어졌다.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고, 영적인 질서가 바로 세워질 때 온전한 예배 공동체가 회복됨을 말해준다.
오늘날 신도들에게서도, 영적인 질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정체성의 회복이다. 세상에 살고 있지만, 물들지 않고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것이야 말로 온전한 예배 공동체가 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한 자임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죄로부터 자유함을 입고, 하늘의 생명을 받아 하늘에 앉히심을 얻는다. 비록 육체는 죽을 때까지 세상에 살지만, 영적인 몸은 하늘에 이미 있다는 것이다.(에베소서 2장 5-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