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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키마운틴의 노을빛』
소설
이남
1
현관에 놓인 신발들을 내려다보았다. 남편 민호의 낡은 작업화와 그녀의 편안한 베이지색 운동화만이 남아 있었다. 40년 전, 일리노이주 시카고에 도착했을 때 가졌던 설렘과 긴장감은 사라지고, 이민자로서의 삶이 만들어낸 고단함만이 집안에 스며 있었다. 며칠 전 막내딸이 동부로 직장을 옮기며 집을 나간 후, 집은 고요했다. 호수 도시 시카고의 차가운 겨울 공기처럼, 그녀의 마음도 텅 비어 있었다.
1985년 1월, 오헤어 국제공항에 발을 디뎠을 때, 가장 먼저 지수를 때린 것은 시카고 특유의 매서운 칼바람이었다. 짐가방에는 얇은 트렌치코트와 막 결혼한 남편 민호의 낡은 양복 한 벌이 전부였다. 낯선 영어 간판, 거칠게 질주하는 노란 택시들, 그리고 구름을 뚫고 솟아오른 듯한 마천루의 웅장함 앞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민호는 떨리는 목소리로 "여보, 이제부터는 고생 끝이야. 당신을 꽃 피우게 할게."라고 속삭였다. 그때의 '아메리칸 드림'은 그들의 유일한 연료였다. 그 꿈은 빌딩 숲에서 빛나는 황금빛처럼 찬란했고, 그들은 서로에게 5년 안에 작은 베이커리를 열어, 맘 편히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을 당신에게 선물하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들의 5년은 40년이 되었고, 베이커리 대신 민호의 작업화와 지수의 운동화만이 이 집의 역사를 대변했다. 그들이 이주 초기 코리안 타운 외곽에 얻었던 낡은 아파트는 이제 삼십 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안고 있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시카고의 스카이라인은 여전히 희미하고 멀었다. 창문 틈새로 스며드는 찬 공기는 아무리 난방을 해도 사라지지 않는 습기와 섞여 있었다. 벽장 깊은 곳에는 아이들의 키를 잰 흔적, 이민 온 첫해에 샀던 영한사전, 그리고 수많은 김장독에서 나온 짙은 김치 냄새가 세월의 냄새와 뒤섞여 있었다. 그 냄새 자체가 지수가 30년간 억척스럽게 살아온 '고단함'의 증거였다.
김지수(62세)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지난 30년 동안 그녀의 시간은 코리안 타운에서의 억척스러운 생계와 세 아이의 교육에 맞춰 돌아갔다. 남편은 작은 마트에서 일했고, 그녀는 틈틈이 케이터링 일을 했다.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라는 수식어 뒤에는 항상 이민 1.5세대라는 무거운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이제 그 모든 역할이 끝난 자리, 집은 너무나 고요했다. 그 고요함은 처음에는 해방감이었으나, 이내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바뀌었다.
새벽 4시 30분이면 지수는 자동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코리안 타운에서 주문받은 케이터링 일을 소화하기 위해서였다. 매번 수백 개의 만두를 빚고, 잔치에 올릴 갈비를 재웠다. 그녀의 손톱은 늘 고춧가루 물이 들어있었고, 몸에서는 아무리 씻어내도 마늘과 기름 냄새가 희미하게 배어 있었다. 그녀는 대학 시절 문예창작과를 꿈꾸며 노트를 놓지 않았던 재능 있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이곳 시카고에서 그녀가 쓸 수 있는 글은 식자재 주문 목록과 아이들의 숙제 검토 메모뿐이었다. 아이들의 학비와 생계비를 벌기 위해 **가장 먼저 포기해야 했던 것은 '나의 목소리‘였다.
막내딸의 방은 이제 완벽하게 비워져 있었다. 침대에는 얇은 매트리스 커버만 덮여 있었고, 벽에는 마지막으로 붙여 놓았던 동부 대학원의 합격 축하 포스터가 찢긴 채 남아 있었다. 지수는 그 빈 공간을 서성였다. 코리안 타운의 빡빡한 인간관계, 시카고 교외로의 고된 통근, 아이들을 향한 끝없는 염려가 사라지자, 처음에는 가벼운 깃털처럼 날아오를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 해방감은 며칠 만에 차가운 메아리로 되돌아왔다. '내 삶은 이제 누구에게 필요한가?' 그녀의 질문은 대답 없이, 텅 빈 방 안에서 맴돌았다. 이 불안감은 더 이상 '엄마'나 '아내'가 아닌, '김지수'라는 존재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근원적인 공포였다.
그녀는 거울을 보며 생각했다. '나의 삶은 과연 한국에 두고 온 꿈을 대신하고 있는가.' 그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웅크리고 있던 무언가가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짓눌려 있던 **‘나’**라는 존재였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곧바로 인근 대학의 영문학 강좌에 등록하고, 한국인 친구들과 북클럽을 만들었다.
지수가 등록한 강좌는 시카고 대학 인근의 평생교육원에서 개설된 ‘20세기 미국 소설 읽기'였다. 낡은 SUV를 몰고 낯선 캠퍼스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젊은 학생들의 활기찬 웃음소리가 그녀의 귀에 이질적으로 들렸다. 강의실 안은 대부분 지수보다 30살 이상 어린 학생들로 채워져 있었다. 첫 수업, 교수님이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며, 왜 이 수업에 왔나요?"라고 물었을 때, 지수는 떨리는 목소리로"지수 킴입니다. 40년 전에 잃어버린, 저의 목소리를 찾으러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그 시선은 지수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대학 강좌 등록과 동시에 그녀는 평소 코리안 타운에서 친하게 지내던 혜진, 미경과 함께 '심야 북클럽'을 결성했다. 모두 갱년기의 공허함과 이민자로서의 정체성 혼란을 겪는 동지들이었다. 그녀들이 처음 고른 책은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였다. 책을 읽으며 나눈 대화는 단순한 문학 비평이 아니었다. 혜진은 "우리가 꿈꾸던 아메리칸 드림도 결국 이 화려한 소설처럼 신기루 같았던 건 아닐까?"라고 물었고, 미경은 "주인공이 원하는 것은 결국 과거로 돌아가는 것, 우리도 늘 한국으로 돌아갈 날을 꿈꿨잖아"라고 답했다. 그들의 공통된 고민 속에서 지수는 자신이 비로소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을 발견했음을 깨달았다.
늦게 찾아온 자유는 달콤했다. 친구들과의 파안대소, 낯선 미국 작가의 문장 속에서 그녀는 삶의 새로운 빛깔을 발견했다. 특히 북클럽 멤버인 혜진이 던진 말이 그녀의 심장을 뛰게 했다.
혜진은 지수보다 네 살 어렸지만, 그 누구보다 자유분방하고 도전적이었다. 혜진 역시 젊은 시절, 이민 와서 겪었던 사업 실패와 남편과의 불화 등 많은 좌절을 겪었지만, 항상 툴툴 털고 일어났다. 그녀는 지수에게 "이민자로 산다는 건, 평생 불안정한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아. 하지만 이제 애들도 다 컸으니, 우리 자신을 위해 모래 위에 꽃밭을 만들 때가 왔지."라고 말했다. 혜진의 그 솔직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는 지수의 억눌렸던 감정들을 해방시켜 주었다.
어느 날, 북클럽 모임을 마치고 혜진은 커피잔을 들고 창밖의 회색빛 시카고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시카고가 있는 일리노이주는 미국 중서부의 대표적인 평원 지대였다. 수십 년간 바라본 이 끝없는 평원의 단조로움은 지수와 혜진의 고단하고 변화 없는 이민자 일상을 상징하고 있었다. 혜진은 그 평원에 대한 피로감을 폭발시키듯 말했다.
2
지수에게 요즘 가장 평화로운 시간은 새벽이었다. 시카고의 겨울빛이 창문을 넘어오는 자리에 앉아, 두툼한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마시는 시간. 그녀는 테이블에 로드 트립 지도를 펼쳐놓았다. I-80 웨스트를 따라 아이오와와 네브래스카의 지루한 평원을 가로질러 콜로라도로 가는 지도였다. “젊을 땐 이민자로 살기 바빠서 이 광활한 미국 땅을 제대로 볼 엄두도 못 냈지. 이제야 자유가 찾아왔네.”
새벽 5시 30분. 민호는 이미 출근하고 없는, 집이 완전히 그녀의 공간이 되는 시간이었다. 지수는 커피를 내리는 단순한 행위에서조차 해방감을 느꼈다. 핸드드립 커피의 증기가 코끝을 간질였고, 그녀는 시카고의 겨울빛이 창문을 넘어 테이블 위 지도에 희미하게 드리우는 순간을 응시했다. 창밖으로는 코리안 타운 외곽을 향해 굉음을 내며 달려가는 새벽 버스의 소리, 그리고 마트에 납품할 식자재를 실은 트럭의 낡은 엔진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그 소음은 그녀의 30년 이민 생활을 상징하는 것 같았지만, 이제 그녀는 그 소음을 뒤로하고 새로운 경로를 긋고 있었다.
그녀의 검지 손가락은 지도 위를 느릿하게 움직였다. 아이오와, 네브래스카...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밭과, 어디를 보아도 똑같이 반복되는 직선 도로. 지수는 젊은 시절 이민자로 살았던 나날이 바로 이 I-80 웨스트의 단조로운 횡단과 같았다고 생각했다. 생계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좌우를 돌아볼 새 없이 전진하기만 했던 시간. "이 지루한 길을 빨리 지나야 록키 마운틴이라는 거대한 '변화'가 나타나겠지." 그녀는 지도 위의 평원 구간을 하나의 통과의례처럼 느껴야만 했다.
지수는 친구 혜진과 통화하며 여행 계획을 다듬었다.
"지수야, 우리 록키 마운틴 국립공원 예약은 해뒀지? 거기 웅장한 산맥 앞에서 우리가 살아온 이 고단한 세월이 얼마나 작아 보일까?" 혜진이 설레는 목소리로 물었다. 혜진은 신이 나서 콜로라도의 여행 계획을 구체화했다. "우리가 묵을 숙소는 에스테스 파크 쪽이야. 거기서 트레일 리지 로드를 따라 하이킹을 할 거야. 길이 엄청 험하진 않대. 그리고 자동차 정비도 끝냈어. 네브래스카 휴게소에 들러서 꼭 옥수수도 사 먹자!"
"물론이지. 그런데 혜진아, 나는 콜로라도의 이민자 사회가 궁금해. 시카고처럼 코리안 타운이 견고하게 있을까? 아니면 젊은 이민자들이 많을까?" 지수는 단순한 관광이 아닌, 자신의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싶었다. 지수는 혜진에게 솔직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시카고의 코리안 타운은 참 안전했어. 우리가 말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똘똘 뭉쳐서 서로를 지켰으니까. 하지만 때로는 그 견고함이 답답한 감옥 같았지. 젊은 이민자들은 우리처럼 '생계'가 전부가 아니라, '삶의 질'을 논한다고 하더라고. 콜로라도에 가면, 우리처럼 생계를 위해 영혼을 팔지 않은 젊은이들의 활기를 보고 싶어." 지수는 그들 안에서 자신의 '두 번째 청춘'의 가능성을 찾고 싶었다.
삶의 열정을 되찾은 듯 그녀의 눈빛은 빛났다. 그때, 활기차게 떠들던 그녀의 곁으로 민호가 다가왔다. 그는 낡은 작업 점퍼를 입고 있었다. "여보, 여행 재밌게 다녀와요. 대신 너무 무리하지 말고. 네브래스카 구간이 운전이 꽤 지루할 거래." 민호가 무심한 듯 걱정을 내비쳤다.
민호는 거실 구석에서 낡은 작업 점퍼의 지퍼를 잠그고 있었다. 그는 로드 트립 지도를 보더니, 운전이 '지루할 것'이라는 말 대신 '위험할 것'이라는 경고를 덧붙였다. "아이오와부터 네브래스카 구간은 지금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질 때야. 특히 밤에는 블랙 아이스 때문에 아주 위험해. 운전 조심하고, 밤에 절대 달리지 마." 민호의 목소리에는 권유가 아닌, 명령에 가까운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지수는 민호의 이 과도한 걱정이 자신을 묶어두려는 심리적 족쇄 같다고 느껴 짜증이 났다.
"괜찮아요. 걱정 마. 내 인생의 두 번째 청춘을 찾으러 가는 걸." 지수는 웃었지만, 민호의 얼굴에서는 여전히 옅은 그림자가 느껴졌다. 지수는 억지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민호의 걱정을 잘라냈다. 그녀는 '두 번째 청춘'이라는 화려한 구호 뒤로 민호의 옅은 그림자를 외면했다. 그 그림자는 40년 동안 이민자 가장으로서 겪었을 무거운 책임감과, 아내와의 새로운 거리에 대한 씁쓸함이었다. 하지만 지수는 그 그림자를 마주할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그저 자유와 도전을 향한 충동만이 필요했고, 민호의 묵묵한 뒷모습은 그녀의 새로운 삶에 방해되는 풍경처럼 느껴졌다.
바로 그날 오후, 지수는 북클럽 멤버들에게 여행 계획을 자랑하던 중, 친구 미경의 전화를 받았다. 미경은 평소 웃음 많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낮게 떨리는 목소리가 불안하게 지수의 귓가에 박혔다.
미경의 전화가 걸려왔을 때, 지수는 혜진, 그리고 또 다른 북클럽 멤버인 윤희와 카페에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지수는 록키 마운틴으로 가는 로드 트립의 경비 예산까지 자랑하며 한껏 들떠 있었다. “우리 신랑(민호)이 걱정은 많이 했지만, 결국 허락했어! 나이 들어도 이렇게 도전하는 거, 너무 짜릿하지 않아?” 그녀의 목소리에는 행복과 우월감이 뒤섞여 있었다. 그 순간, 진동과 함께 걸려온 미경의 전화는 그녀의 달콤했던 자유의 정점을 산산조각 내는 굉음과 같았다.
“지수야, 우리 신랑, 갑자기 쓰러졌어. 중환자실이래. 병원에서 오래 못 버틸 거래.”
지수는 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을 놓칠 뻔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불과 며칠 전, 미경의 남편은 혜진의 남편과 함께 바비큐 파티를 하자며 호탕하게 웃었었다. 활기찬 이민자의 나날도 언제까지나 지속되지는 않는다. 달콤했던 자유의 끝에, 그녀는 문득 서늘한 바람을 맞은 기분이 들었다.
미경의 남편은 한인 마트에서 고기를 손질하는 정육점 사장이었다. 며칠 전 바비큐 파티에서 그는 큰 손으로 고기를 썰어주며,
“우리 이민자들이 이렇게 웃고 사는 게 진짜 아메리칸 드림 아니겠어?”라며 호탕하게 웃었었다. 그 활기찬 웃음소리가 지수의 귓가에 남아있는 듯했다. 지수는 자신의 손에 들린 커피잔이 미경 남편의 유한한 생명처럼 느껴졌다. 잔을 놓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붙잡았지만, 그녀의 내면은 이미 죽음이라는 현실의 서늘한 바람에 직면해 있었다. 그녀가 추구하던 '새로운 삶'은 언제든 '상실'로 대체될 수 있다는 섬뜩한 경고였다.
지수는 미경과 함께 병실 앞 간이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시간을 보냈다. 유리창 너머로 미경의 남편이 산소 호흡기에 의지한 채 고요하게 누워 있었다. 그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그 고요함이 죽음의 현실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중환자실 앞 복도는 특유의 소독약 냄새와 함께 단조로운 기계음으로 가득했다. 산소 호흡기와 심장 박동 측정기에서 울리는 삐- 삐- 하는 소리는 생명이 아직 꺼지지 않았음을 알리는 불안한 노래였다. 유리창 너머 미경의 남편은 마치 밀랍 인형처럼 평온하게 누워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잔주름 하나, 근심 하나 없었다. 그 완벽한 고요함은 바로 죽음이 생명을 완전히 삼킨 후의 평화처럼 느껴져 더욱 끔찍했다. 지수는 숨쉬는 것조차 버거운 듯 가슴이 답답해졌다.
미경은 흐느끼듯 말했다.
"지수야, 나는 이제 어떡하지? 우리 신랑이랑 함께할 시간이 이렇게 갑자기 사라질 줄은 정말 몰랐어. 어제 사소한 걸로 다퉜는데, 그게 마지막 말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 미경은 목이 멘 채, 전날 밤 남편과 다툰 사소한 이유를 고백했다. "밤에 남편이 리모컨을 독차지하고 스포츠 채널만 본다고 내가 소리를 질렀어.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겠다고. '나이 들어서까지 리모컨 가지고 싸우냐'고 버럭 화를 냈는데... 지수야, 그게 마지막 말이 될 줄은 정말 몰랐어. 나는 이제 그 리모컨 싸움이 너무 간절해." 미경의 후회는 지수의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다. 그때, 지수는 남편 민호의 얼굴을 떠올렸다. 마트에서 힘겹게 일하고 돌아와 묵묵히 밥을 먹던 그의 뒷모습.
함께하던 일상의 그림자가 사라진 듯, 미경의 마음 한쪽이 텅 비었을 모습이 지수에게 깊은 충격과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그녀는 그제야 늦게 찾은 자유의 달콤함에 취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소중한 것을 잊고 지냈음을 깨달았다. 지수는 민호에게 건넨 자신의 마지막 말이 '나 로키 마운틴 가요'라는 이기적인 통보였음을 깨닫고 자책했다.
지수는 간이의자에 앉은 채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마트에서 막 퇴근해 낡은 작업 점퍼를 벗고 소파에 지쳐 쓰러지듯 앉아 뉴스를 보던 민호의 뒷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어깨는 무거워 보였지만, 늘 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미경의 남편처럼, 그 뒷모습도 어느 날 갑자기 영원히 사라질 수 있었다. 지수는 민호의 뒷모습이 투명해지듯 사라지는 환각을 보았고, 극도의 공포에 질려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자유'는 사실 이기심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녀는 민호에게 충분히 대화하고 이해를 구하는 대신, '나 로키 마운틴 가요'라고 통보했다. 심지어 민호가 걱정을 표할 때도, 그녀는 그것을 '방해'로 여겼다. 지수는 가방에 챙겨둔 로드 트립 지도를 떠올렸다. 그 지도는 이제 자유를 향한 흥분이 아닌, 이기심을 상징하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조용히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3.
며칠 후, 미경의 남편은 결국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장의 흰 국화 향기는 시카고 한인 사회의 깊은 슬픔을 대변하는 듯했다.장례식장은 코리안 타운 외곽의 한 교회당이었다. 흰 국화 향기는 강한 소독약 냄새와 섞여 시카고 겨울 공기처럼 싸늘하게 공간을 채웠다. 조문객들은 대부분 50대 후반에서 60대의 이민 1세대와 1.5세대들이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단순히 미경의 남편을 잃은 슬픔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유한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깃들어 있었다. 낯선 땅에서 생계를 위해 고군분투하며 서로에게 의지했던 동지들. 그들의 슬픔은 마치 이민자 공동체 전체의 집단적인 상실감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어깨 위에는 고국이 아닌, 이곳 미국 땅에서 홀로 남겨질지도 모른다는 고독이 내려앉아 있었다.
미경의 상실은 단순히 배우자를 잃은 슬픔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랜 이민 생활 동안 함께 지탱해 온 삶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힌 공포였다. 미경의 남편은 30년간 시카고에서 작은 식료품 도매상을 운영하며 미경의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었다. 이제 그 배경이 사라지자, 미경은 단순히 슬픔을 넘어 심리적, 경제적 뿌리 뽑힘의 공포를 경험하고 있었다. 미경이 텅 빈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모습에서 지수는 그 공포를 직감했다. '이민자의 삶은 언제나 위태로운 모래 위에 지어진 성과 같다. 서로의 존재만이 그 모래를 단단하게 묶어주는 유일한 접착제였다.' 지수는 민호 없이 혼자 남겨진다면, 자신 역시 이 낯선 시카고 땅에서 모든 정체성이 흔들릴 것 같았다.
미경은 흐느낌 대신, 텅 빈 눈빛으로 허공만 응시했다.
“지수야, 우리 신랑이 그랬어. 한국 떠나온 건 후회 안 하지만, 이 넓은 땅에서 우리가 서로의 전부라고. 근데 이제 내 전부가 사라졌어.” 미경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서로의 전부'. 그것은 단순히 사랑하는 배우자 이상의 의미였다. 언어 장벽, 인종차별, 끝없는 생계의 압박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유일한 '통역사'이자 '방패'였다. 미경 부부가 이민 초기에 겪었던 사업 실패와, 아이가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했을 때 함께 밤새 울었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 증인이 사라진다는 것은, 미경의 40년 삶의 증거가 함께 사라진다는 의미였다.
지수는 생각했다. 살아 있을 때 서로의 온기를 충분히 나누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이 깨달음은 단순한 위로가 아닌, 자신에게 닥칠 미래에 대한 섬뜩한 경고였다. 지수는 자신이 그동안 열정적으로 추구했던 '개인의 자유'가 얼마나 허망할 수 있는지 깨달았다. 그녀의 '자유'는 민호라는 안전한 기둥이 뒤에 서 있을 때만 가능했다. 기둥이 사라진다면, 자유는 곧 '홀로 남겨진 고독'이 될 뿐이었다. 지수는 미경의 차가운 손을 꽉 잡았다. 이민 생활에서 가장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 바로 살아 있는 사람의 따뜻한 온기였음을.
장례식장을 나오자, 시카고의 매서운 바람이 그녀를 때렸다. 지수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민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지수는 자신의 차에 앉아 히터를 최대로 틀었지만, 온몸이 떨려왔다. 그녀가 민호에게 '데리러 와 달라'고 요청한 것은 단순히 운전이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상실의 공포 앞에서 민호의 변치 않는 존재감에 기대고 싶은 절박한 심리적 구원 요청이었다. 그녀는 민호에게서 자신의 삶이 아직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다는 확인을 받고 싶었다. 민호가 "응, 금방 갈게"라고 짧게 대답했을 때, 그 단 세 마디는 세상의 어떤 위로보다 단단하고 믿음직스러웠다.
“여보, 나 데리러 와 줄 수 있어요?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요. 지금 바로 와주면 안 될까요.” 민호는 "응, 금방 갈게. 운전하지 말고 따뜻하게 기다려."라고 짧게 대답했다.
민호가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앉아 지수는 그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민호가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앉은 지수는 창가에 기댔다. 민호의 거칠고 두꺼운 손이 핸들을 잡고 있는 모습,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비치는 그의 깊은 잔주름. 마트 일로 인해 손등에는 깊은 상처와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그 거친 손이 자신의 가정을 40년간 지탱해 온 무게를 말해주고 있었다. 민호는 운전에 집중하며 말이 없었지만, 지수는 그의 곁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존재감과 따뜻한 체온에 깊은 안도감을 느끼며 눈물을 참았다.
"우리가 서로의 전부라는 것을,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그날 밤, 민호가 깊이 잠든 후 지수는 거실 스탠드 불빛 아래 홀로 앉아 오래된 한국 가족 앨범을 펼쳤다. 사진 속에는 흑백의 부모님이 계셨다. 한국 시골 마을, 평상 위에 앉아 낡은 놋그릇에 담긴 밥을 드시던 모습.앨범 속 부모님의 사진은 빛바랜 흑백이었다. 낡은 놋그릇에는 보리밥이 담겨 있었고, 평상 위에는 다듬다 만 나물들이 놓여 있었다. 부모님은 화려한 옷 대신, 닳고 닳은 한복 차림이었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묘한 평온함과 굳건한 신뢰가 있었다. 지수는 부모님에게서 '아메리칸 드림'이나 '성공' 같은 거창한 구호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서로의 존재 자체를 중심으로 흔들림 없이 사는 삶의 단단함을 보았다.
3.6. “아버님은 여든여섯에 세상을 떠나셨지. 이민 오기 전에, 그때 결혼 생활이 예순네 해였다고 하셨어.” 부모님은 화려하게 살지는 못했지만, 서로에게 기대어 이 험난한 세상의 풍파를 견디셨다.
지수는 부모님의 '예순네 해' 결혼 생활이라는 숫자를 되뇌었다. 그 긴 세월 동안 부모님은 서로의 전부가 되어 주었을 것이다. 한국 전쟁, 가난, 그리고 시골 마을의 험난한 삶을 통과하면서도, 그들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끈기와 인내를 보여주었다. 그들의 삶은 미국에서처럼 외부 환경(돈, 성공, 사회적 지위)에 의해 결정되는 불안정함이 없었다. 그들의 삶은 서로의 사랑을 중심으로 견고하게 짜여 있었다.
사진 속 부모님의 모습은 소꿉놀이 같았다. 사소한 일로 다투어도 금세 웃음으로 풀고 마주 앉아 밥을 나누던 모습.
부모님의 '소꿉놀이 같은 사랑'은 이민자들의 피 튀기는 생존 전쟁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지수와 민호는 이민 와서 늘 '성공'과 '아이들의 미래'만을 바라보며 살았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함께하는 기쁨'이 아닌 ‘함께 짊어져야 할 짐'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지수는 깨달았다. 이민이라는 낯선 땅에서도 평생의 동반자라는 굳건한 믿음이 그들의 삶을 채우고 있었다는 것을. 그녀가 한국에 두고 온 '뿌리'는 바로 그 함께하는 단순한 일상 속의 사랑이었다. 지수는 거창한 '자유'나 '꿈'이 아닌, 밥 한 끼를 마주 앉아 다정하게 먹는 가장 작고 단순한 행복을 되찾아야 했다.
지수는 사진첩을 닫고, 결심을 굳힌 채 조용히 민호가 잠든 안방으로 향했다.지수는 민호가 잠든 곁에 섰다. 민호는 곤하게 잠들어 있었고, 그의 깊은 숨소리는 평화로웠다. 지수는 그가 유한한 존재임을 다시 한번 깨달으며, 눈물을 흘릴 뻔했지만 참았다. "사람은 언제나 곁에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녀는 로키 마운틴으로의 여행을 '나를 찾는' 개인적인 여정이 아닌, '우리의 남은 삶을 함께 채우는' 약속의 여정으로 바꿔야 함을 알았다. 그들의 새로운 여정은 남은 삶을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세상의 웅장함 앞에서 다짐하는, '우리'의 새로운 의식이어야 했다.
4
다음 날 아침, 민호는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 준비를 했다. 작업복을 챙기고,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그의 모습은 40년 동안 이어져 온 일상의 그림자처럼 묵묵했다. 지수는 그가 앉은 식탁 맞은편에 조용히 앉았다.
아침 식탁에는 옅은 김이 오르는 국과 밥이 놓여 있었다. 민호는 습관처럼 뉴스를 틀어놓은 채 묵묵히 식사를 했다. 그들의 식탁에는 수십 년간 굳어진 침묵의 규칙이 있었다. 지수는 이 침묵이 그들의 관계에 미세한 균열을 만들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녀는 그 균열을 메우기 위해 먼저 용기를 내야 했다.
"여보." 지수가 나지막이 불렀다. 민호는 고개를 들어 지수를 바라보았다. "나… 미경이 보고 많이 무서웠어요. 당신 없이 혼자 남겨진다는 게, 얼마나 텅 빌지 이제야 상상이 가서." 지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목이 메었다. "나이 들어서 내 자유만 찾았지, 정작 당신과의 시간을 소홀히 했어요. 이민 와서 우리가 서로에게 유일한 뿌리였는데, 그걸 잊고 살았어. 미안해요."
지수는 여행을 포기하려는 진짜 이유를 숨기지 않았다. "나는 그동안 내 삶의 억압에서 벗어나 '나만의 자유'를 찾으려고 애썼어요. 그런데 미경 씨 일을 보면서 깨달았지. 내 자유보다 더 중요한 건, 우리 둘이 함께하는 남은 시간이라는 걸."
민호는 그녀의 말을 듣더니, 40년 만에 처음으로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당신이 요즘 활발해 보여서 좋았는데, 사실 조금 낯설고 서운했지." 민호가 조용히 대답했다.
민호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하지만 당신 마음 이해해. 당신도 나도, 이 낯선 땅에서 각자의 자리를 지키느라 바빴으니까. 이제부터는 우리도 당신 부모님처럼, 소꿉놀이 하듯 살면 되지 않을까." 민호는 지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당신이 이민 와서 글쓰기를 포기하고, 그저 내 아내, 아이들의 엄마로만 살았던 게 늘 마음의 짐이었어. 당신이 지금이라도 당신의 목소리를 찾는 건, 우리가 시카고에 왔을 때 했던 첫 약속을 지키는 일이야."
지수는 그의 품에서 눈물을 훔치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민호의 손을 잡았다. “여보. 우리, 로드 트립 다시 계획해요. 로키 마운틴으로 가는 거, 나 혼자 가는 여행이 아니라, 당신과 내가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여행이었으면 좋겠어.”
민호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말했다. "지수야, 당신이 자유롭지 않으면 나도 행복할 수 없어. 대신, 그 여행을 '우리'의 여행으로 만들자." 민호는 자신이 며칠간 휴가를 내고 지수와 함께 가겠다고 말했다. 민호가 마트에서 4일간 휴가를 낸다는 것은, 사실상 자신의 일상과 생계를 건 큰 결심이었다.
“앞으로 남은 10년, 15년 동안 서로 헤어질 때까지 즐겁게, 다정하게 살아요. 언제까지 함께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시간만큼은 행복하게, 아름답게 채우고 싶어요.” 지수가 간절하게 말했다.
지수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의 이기적인 충동이 민호의 깊은 사랑으로 치유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이 여행이 자신의 개인적인 '탈출'이 아닌, 40년간 묵묵히 서로를 지켜 온 그들의 삶을 재조명하는 새로운 서막임을 깨달았다. 로드 트립의 의미는 완전히 바뀌었다. 콜로라도는 더 이상 개인의 해방을 위한 미지의 목적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40년 동안 함께 살아온 이민자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서로의 존재를 새롭게 확인하는 성지(聖地)가 되었다.
민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수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래, 당신이 하자는 대로 할게. 로키 마운틴이든, 어디든 좋아. 우리, 함께 더 많이 웃고, 함께 더 많이 봐요. 내가 당신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줄게." 이제 두 사람의 사랑은 잔잔하고 따뜻한 등불처럼 모양을 바꿔 빛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사랑은 격렬했던 젊은 날의 사랑이 아닌, 폭풍우를 견디고 살아남은 촛불처럼, 험난한 이민 생활을 통해 더욱 단단해진 '잔잔하고 따뜻한 빛'이었다. 민호는 배우자로서의 역할 외에, 남은 삶을 함께 취미와 관심사를 공유하는 '친구'가 되겠다는 구체적인 약속을 했다.
두 사람은 곧바로 여행 계획을 수정했다. 혜진에게는 미안하지만, 부부만의 여행이 필요했다. 혜진은 지수의 급작스러운 일정 변경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민호의 동행 소식에 축복을 건넸다. "지수야, 잘했어. 너희 두 분, 콜로라도에서 인생의 황금빛 노을을 만나고 와!"
그들은 지도 위에 콜로라도를 향하는 새로운 경로를 펜으로 그었다. 지도는 이제 그녀 혼자만이 아닌, 민호의 돋보기 아래 펼쳐졌다. 민호는 지도를 보며 숙소 예약과 자동차 정비 목록을 꼼꼼하게 점검했다. 여행 준비는 더 이상 지수의 개인적인 열정이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 짊어진 공동의 책임감이 되었다.
지수는 여행 가방에 자신의 옷과 민호의 옷을 나란히 개어 넣으며 오랜만에 진정한 '동행'의 기쁨을 느꼈다. 지수의 베이지색 운동화와 민호의 낡은 작업화가 나란히 개어져 있는 모습은, 이민자 부부의 새로운 출발을 상징했다.
지수는 이 다짐이 아이들에게 **'삶으로 보여주는 것'**을 실천하는 것임을 알았다. 아이들이 이민 2세대로서 겪는 정체성 혼란에 대해, 부모가 '함께하는 삶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 가장 큰 유산임을 깨닫는 지수의 독백이 이어졌다.
며칠 후, 낡은 SUV가 웅장한 I-80 웨스트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민호가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앉은 지수는 창밖으로 빠르게 사라지는 시카고의 스카이라인을 바라보았다.
시카고의 마천루가 점점 멀어지더니, 끝내 희미한 점으로 사라졌다. 그 마천루는 한때 그들이 꿈꾸었던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었고, 40년간 그들의 삶을 지배했던 경쟁과 성공의 압박을 상징했다. 지수는 그 풍경에 대한 미련 없이 손을 흔들었다.
그들의 새로운 여행은 시카고를 떠나 콜로라도의 웅장한 자연 앞에서 새로운 삶의 약속을 다지는 의식과 같았다. 조수석에 앉은 지수는 민호의 어깨에 기대었다. 그녀의 '자유'를 향한 개인적인 여정은 미경의 남편이 남긴 상실의 그림자 앞에서 끝이 났다. 이제 남은 것은, 민호와 함께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이 광활한 미국 대륙을 횡단하는 '우리'의 여정이었다. 그녀의 마음속 등불은 잔잔하지만 꺼지지 않는 빛을 내고 있었다.
5
시카고를 떠난 지 이틀째, 그들은 네브래스카를 지나 콜로라도 경계에 접어들었다. 며칠간 끝없이 이어지던 옥수수밭과 지루한 평원 대신, 저 멀리 거대한 산맥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낡은 SUV는 이틀 내내 I-80 웨스트를 따라 쉼 없이 달려왔다. 네브래스카의 광활한 평원은 아무리 달려도 변함없는 풍경이었다. 지수는 잠시 민호의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었고, 눈을 떴을 때, 저 멀리 수평선을 찢고 솟아오른 듯한 거대한 산맥의 검은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그 웅장한 모습은 평생을 평지에서 살아온 그들에게 ‘삶의 새로운 '차원'을 보여주는 듯했다.
"여보, 저것 좀 봐. 저게 록키 마운틴이구나." 지수가 창밖을 가리켰다. 민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수의 손을 살짝 잡았다. "그래. 우리가 이 넓은 미국 땅 끝까지 왔네."
콜로라도에 진입하자 풍경은 급변했다. 평온하던 도로는 급격한 경사를 이루기 시작했고, SUV는 숨을 헐떡이며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지수는 창문을 내리고 차가운 산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해발 고도가 높아지면서 낡은 SUV의 엔진은 낯선 경사에 힘겨워하는 듯했다. 하지만 지수는 그 불안함 대신, 산맥의 압도적인 위엄에 전율했다. 그녀는 폐부 깊숙이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 공기에는 시카고 코리안 타운의 고단한 냄새가 단 하나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녀는 이 공기야말로 자신이 40년간 찾아 헤맸던 '자유'의 실체임을 깨달았다.
마침내 그들은 록키 마운틴 국립공원 입구에 도착했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하늘은 수많은 색깔로 타오르고 있었다. 오렌지, 자주색, 그리고 깊은 보랏빛이 거대한 산맥의 봉우리를 물들였다. 지수는 차에서 내려, 눈 앞에 펼쳐진 장엄한 광경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록키 마운틴의 봉우리들은 이미 만년설로 덮여 있었다. 해가 지평선 아래로 빠르게 기울자, 봉우리들 위로 황금빛과 오렌지색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지수는 그 압도적인 장엄함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깨달았다. 시카고에서 그녀가 느꼈던 '개인의 고독'이나 '억눌린 자아' 같은 고민은 이 자연의 웅장함 앞에서는 한낱 먼지처럼 느껴졌다.
민호는 지수의 어깨에 자신의 두꺼운 점퍼를 걸쳐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채 함께 노을을 바라보았다.
민호가 걸쳐준 두꺼운 점퍼의 온기는 지수가 40년간 민호에게서 받고 싶었던 묵묵하고 변치 않는 사랑의 온기였다. 민호는 운전대를 잡은 채 지수를 바라보았다. "40년 동안 이 풍경을 보려고 여기까지 왔나 보오." 민호의 목소리에는 묵묵한 감동이 서려 있었다.
. "인생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지수가 민호에게 기대어 속삭였다. 그녀는 깨달았다. 노년의 삶은 고요하지만, 결코 공허하지 않다. 이 넓은 땅에서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이와 하루를 함께 채워가는 것으로 충분했다. 지수는 민호의 손에 기대며 답했다. "맞아요. 우리가 함께 이 노을을 봐야 했으니까."
록키 마운틴의 노을빛 속에서, 지수는 깨달았다. '나'를 찾아 떠난 여정은 결국 '우리'라는 더 깊은 정체성을 확인하는 여정이었음을. 그녀가 한국에 두고 왔다고 생각했던 '뿌리'는, 민호와 함께 40년을 견뎌낸 단순한 일상 속의 사랑, 그리고 서로에게 헌신하는 잔잔한 등불 같은 믿음이었다.
지수는 이민자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재정의했다. 한국은 태어난 곳이지만, 그녀의 ‘진정한 '뿌리'는 민호와 함께 40년간 시카고의 낯선 땅에 심어온 서로를 향한 신뢰와 희생이었다. 그들의 삶은 화려한 횃불은 아니었지만, 이민의 어둠 속에서 서로의 길을 비춰준 잔잔하지만 꺼지지 않는 '등불'이었다. 이 등불은 그들의 아이들에게도 이어져, 아이들은 이민자 가정의 고난 속에서도 굳건하게 주류 사회에 정착할 수 있었다.
지수는 그 노을을 배경으로 민호와 함께 찍은 사진을 자신의 새로운 북클럽 모임에 보낼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이제부터 써 내려갈 글의 주제는, '자유를 찾아 떠나는 개인이 아닌, 함께 늙어가며 삶의 노을을 공유하는 두 이민자의 이야기'가 될 것임을 조용히 다짐했다.
지수는 민호에게 카메라를 건네 노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녀가 새로 쓸 소설의 주제는 '록키마운틴의 노을빛'이 될 것이다.
어둠이 내린 후, 그들은 근처 작은 모텔에서 늦은 저녁 식사를 했다. 민호는 지수에게 뜨거운 국물을 떠주었고, 지수는 말없이 국물을 받아 마셨다. 늦은 깨달음이었지만, 이제부터라도 그들은 서로를 가장 소중한 동반자로 여기며, 함께 남은 삶의 페이지를 채워나갈 것이다.
록키 마운틴 아래 작은 모텔 방, 창밖은 어둡고 조용했다. 민호는 지수를 위해 근처 식당에서 사 온 뜨거운 국물을 그릇에 담아주었다. 지수는 그 뜨거운 국물 한 모금이 40년 동안 이민 생활의 찬 바람 속에서 얼어붙었던 자신의 마음을 녹이는 듯했다. 그녀는 민호에게 기대어 말했다. "여보, 우리 다시 시작해요. 남은 삶은 서로에게 더 집중해요." 민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두 번째 청춘은, 웅장한 산 아래, 뜨거운 국물 한 그릇처럼 작고 따뜻한 일상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인생의 마지막 문을 닫는 순간, 조용히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 참 잘 살았구나. 우리는 서로의 전부였어.” 록키 마운틴의 노을빛 아래에서, 지수는 삶이란 결국 사랑으로 완성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녀의 마음속 등불은 잔잔하지만 꺼지지 않는 빛을 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