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오 5,1-12)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말씀의 초대
엘리야 에언자는 가뭄을 예언한다. 이스라엘의 아합이 그릇된 정치를 했기에 보속이 내린 것이다. 엘리야는 요르단 강 동쪽으로 가서 숨어 지낸다. 이스라엘에는 비가 내리지 않고 가뭄이 계속된다. 예언이 실현되고 있었던 것이다(제1독서). 행복은 인류의 염원이다. 누구나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주님께서는 행복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신다. 가난하고 슬퍼하며 온유와 자비를 갖춘 마음이다. 그러한 마음 자체가 행복은 아니다. 주님께서 그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과 함께하시기에 행복한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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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행복의 첫 번째 조건은 ‘마음의 가난’이었습니다. 어떠한 마음이겠습니까? 욕심 없는 마음일는지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욕심 없는 마음이라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행복에도 어느 정도의 욕심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마음은 ‘자유로운 마음’입니다. 돈과 물질에 얽매이지 않는 마음입니다. 사상이나 이념에서도 자유로워야 합니다. 명예와 권력에도 붙잡히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날의 실수와 잘못에서도 홀가분해야 합니다. 한순간이라도 이러한 마음이 되면 ‘가난한 마음’은 깨달아집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가난은 무소유가 아닙니다. 가난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것을 소유’하게 합니다. 그러나 집착하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재산과 물질을 소유하되 그것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사람과의 관계 속에 살지만 누구에게도 매이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가난한 마음’의 소유자입니다.
가난한 마음이기에 채워 주십니다. 자유로운 마음이기에 주님께서 함께하십니다. 그분께서 채워 주시고 그분의 힘이 떠나지 않는데 어찌 행복하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 ‘가난한 마음’이 행복의 조건이 아니라, 그러한 마음에 주님께서 함께하시기에 행복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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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낮에 너무나 피곤해서 낮잠을 좀 잤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딱 1시간만 자고서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글쎄 몇 시간을 잔 것입니다. 낮잠을 밤잠처럼 잔 것이지요.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리 급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잘 잤다’라는 생각과 함께 개운함이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이 낮잠의 결과는 밤에 나타나더군요. 잠을 자려고 하는데 잠이 와야 말이죠. 이리 뒹굴 저리 뒹굴 뒤척일 뿐 점점 정신이 말똥말똥 해 집니다. 점점 화가 납니다. ‘왜 이렇게 잠이 오지 않는 거야? 왜 낮잠은 그렇게 길게 자가지고서 이 고생인거야? 내일 새벽미사라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이렇게 잠 잘 수가 없으니 어떻게 하지?’
결국 저는 잠자는 것을 포기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좀 지루한 책을 읽다보면 저절로 잠이 오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지요. 하지만 저의 바람과는 달리 그 책을 다 읽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지루했는데, 점점 흥미진진해서 결국은 끝까지 다 읽은 것이지요. 그리고 잠을 자지 못하고 밤을 새고 말았지요. 그렇다면 제가 잠을 자지 못했다고 억울할까요?
아닙니다. 계속 미루기만 했던 책을 다 읽은 것과 함께 이 책에 담긴 좋은 내용들을 간직하게 되어서 오히려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잠이 오지 않는다고 불평과 불만이 가득했지요. 그러나 잠이 오지 않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더군요. 오히려 책을 읽으면서 좋은 시간을 간직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우리들이 쉽게 말하는 행복이라는 것. 어쩌면 이 행복은 쉽게 말하는 만큼 쉽게 얻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행복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고통과 시련 가운데에서도 행복은 우리에게 미소를 지으면서 다가옵니다. 문제는 스스로 행복이 없다고 판단하고 결론내리기 때문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행복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복 선언을 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이러한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이 말씀은 곧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특정한 사람만이 행복하다는 착각 속에 살 때가 참으로 많지요. 특히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의 만족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행복한 것으로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께서는 당신이 우리에게 주시는 행복을 받아 간직하면서,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과연 얼마나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을까요? 혹시 내게 다가오는 행복을 보지 못하면서 힘들고 어렵다는 불평과 불만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내가 행복한 이유를 떠올려 보세요. 그리고 적어 보세요. 없다고 생각했던 행복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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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행운
-김영수 신부-
길가에 무성하게 피어 있는 토끼풀을 보면, 그 풀무더기 속에 숨어 있는
행운의 네 잎 토끼풀을 찾기 위해 수많은 토끼풀을 아무 생각 없이 마구
버리곤 합니다. 우연히 발견한 네 잎 토끼풀은 행운의 상징인 것처럼
고이 간직하지만 흔한 세 잎 토끼풀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어느 날 세 잎 토끼풀의 꽃말이 ‘행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위에 널려 있는 ‘행복’ 대신 우연한 변종인 ‘행운’에 매달리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주는 꽃말입니다.
네 잎의 행운을 찾기 위해 세 잎 토끼풀을 지나쳐버리듯이, 우리도
어디 있는지도 모를 행운을 찾기 위해 내 삶 안에 가득 피어 있는 행복을
지나쳐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행복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람들에게 피어나는 세 잎 토끼풀입니다.
어두운 방은 하룻밤 동안 어두웠거나 백 년 동안 어두웠거나 상관없이
촛불 하나로 밝아집니다. 행운이 우리의 삶을 밝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 속에서 사랑의 촛불을 켜는 순간 삶은 밝아집니다.
그때 우리는 삶을 가득 채운 행복을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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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람
- 조용상 신부-
명동성당에 와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성당 들머리나 마당 또는 가톨릭 회관 쪽에 터줏대감처럼 계신 자매님들이 있다. 이분들은 정신적으로 평범하지 않은 분들이다. 이분들을 바라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그중 몇 분이 사람들에게 돈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좋게 생각하면 불쌍하고 안타깝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기 싫어하고 귀찮게 생각한다.
그런데 그중에 한 분은 좀 다르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가톨릭 회관 주차장에 있는 성모상을 바라보며 자리를 지키는 자매님인데, 그 누구한테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 구걸을 하는 것도 아니요,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돈을 달라거나 시끄럽게 하는 일도 없다. 그냥 아침부터 저녁까지 해가 잘 드는 곳에 앉거나 서서 성모님만 바라보고 있다. 도시락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끼니를 채우기 위해 드시는 빵이나 과자도 비둘기에게 나누어 준다. 처음에는 나도 그분의 모습을 그냥 비정상적인 행동으로만 치부했는데, 3년이 다 되도록 변함없는 그분의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어쩌면 저분이야말로 참 행복한 분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온갖 세상 걱정과 자신의 욕망과 싸우느라 정신없어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잘 모르면서도 그게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정상인’의 눈에는 그분의 모습이 불쌍해 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정말 불쌍한 사람은 무엇이 행복인지도 모르고 또 그 행복을 느끼지도 못하는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닐까?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을 마음에 다시 한 번 새겨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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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중심으로 사는 예언자
- 경규봉 신부-
이스라엘은 아합 왕 시대에 이르러 종교적 위기를 맞이한다. 아합 왕의 왕비 이세벨이 이스라엘의 야훼 신앙을 바알 숭배로 대체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세벨의 영향으로 아합 왕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우상 숭배에 빠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느님께서는 엘리야를 선택하시어 야훼 신앙을 보존하도록 하신다.
엘리야는 아직 가나안의 영향을 받지 않은 요르단 강 동편의 길르앗 출신이다. 엘리야(‘나의 하느님은 야훼이시다’는 뜻)라는 이름 자체가 하느님의 계획을 알려준다. 그는 야훼 하느님의 전권을 가지고, 하느님의 명령을 받아 행동한다. 그는 살아 계신 하느님을 가리켜 맹세하면서 아합 왕의 우상 숭배로 인하여 이스라엘에 극심한 가뭄이 닥칠 것을 예고한다.
바알을 섬기는 우상 숭배자들은 바알로부터 생명과 다산을 기대하지만, 가뭄을 겪어봄으로써 생명을 주는 비를 주관하시는 분이 과연 누구이신지를 알게 될 것이다. 이로 인하여 엘리야는 아합 왕의 박해를 피해 숨어 지내야 했다. 엘리야도 가뭄으로 고통을 겪지만, 하느님께서 돌봐주셔서 살아남는다. 물 흐르는 시냇가(시 23,2 참조)에 까마귀가 있는 것은 낙원의 모습인데, 이는 사람과 짐승이 창조주를 섬기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기보다 우상을 섬기며 살아가려고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기보다 우상을 섬기는 편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짐으로써 쉽게 느낄 수 있고, 허함을 채우기 쉽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상이 여러 형태로 만들어진 조각품이거나, 해와 달, 별, 고목나무와 같은 피조물이어도 관계없다. 어떤 사람이거나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힘, 재능, 미모 등의 능력이어도 관계없다.
그것이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유형의 것이건 무형의 것이건 관계없다. 자신이 그것을 믿고 의지함으로써 안정을 누리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족하다. 사람은 자신의 편안함, 이익과 욕망을 이루기 위하여 우상을 섬기며, 우상을 섬기는 중심에는 언제나 ‘나’가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는 얼마나 허무한가! “당신께서 휩쓸어 가시면 인생은 한바탕 꿈이요, 아침에 돋아나는 풀잎이옵니다. 아침에는 싱싱하게 피었다가도 저녁이면 시들어 마르는 풀잎이옵니다.”(시 90,5-6)는 말씀처럼 ‘나’라는 존재는 한바탕 꿈이요, 물거품이다. 내가 가진 여러 가지 재능이나 내가 믿고 자부하는 능력도 하느님께서 거두어가시면 그 순간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무(無)로 돌아간다. 결국 무에서 왔다가 무로 돌아가는 것이다.
때문에 신앙인은 감사드리는 삶을 산다. 내가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에 감사드리고, 이렇게 산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드리며, 주어진 모든 상황에 감사드린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8)라는 사도 바울로의 말씀처럼 항상, 언제 어디서나,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는 삶이 신앙인의 삶이다.
나아가 신앙인은 ‘나’를 구하거나 고집하지 않는다. ‘나’라는 존재가 하느님께로부터 비롯된 존재임을 알기 때문에 ‘나’보다는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께 맡기는 삶을 산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고(마태 6,10),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도록 자신을 맡기며(마태 26,39), 아버지의 일을 한다(요한 17,4).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그처럼 사시면서 우리에게 삶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하느님의 사람 엘리야는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의 전형이기도 하다. 그는 하느님의 뜻대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삶을 살았다. 그 자신도 배고픔과 목마름의 비참함을 겪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하느님을 위하여, 하느님 중심으로 살면서 우상 숭배자와 대적했다. ‘나’를 삶의 중심에 두지 않고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았다.
우리 모두 우상을 버리고,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자. 나라는 존재가 꿈과 같고 물거품 같다는 점을 깨닫고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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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행복의 8가지 길
- 김동환 신부-
오늘 우리가 들었던 말씀은 너무도 유명한 주님의 설교, 즉 산상 설교의 첫부분인 참된 행복의 8가지 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흔히 진복 8단이라고도 하는 이 말씀은 신앙인의 삶의 자세를 종합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산에 오르십니다. 갈릴레아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군중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산 아래에 자리잡고 앉았을 것입니다. 산에 오르시는 대목은 마치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율법을 받았던 탈출기의 대목을 떠올 릴 수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모세가 십계명으로 이스라엘의 율법을 정한 것처럼 산에 오르시어 새로운 계약의 뜻을 설명해주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행복. 행복이 무엇입니까? 아니 행복하십니까? 예전에 대선에 나온 한 후보는 연설을 하면서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혹은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하고 인사한 기억이 납니다. 살림살이가 나아지면 진짜로 행복해질 까요? 아니 살림이 궁색하면 다 불행한 것일까요.... 진정한 행복은 물질에 매여있는 것이 아니라, 값을 정할 수 없는 가치이기에 하늘에서 또 사람의 마음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8가지 행복에 이르는 길을 요약하면 오직 한가지 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을 두려워하고 주님을 올곶게 섬기는 길입니다. 그러면 행복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우리는 가난에 몸서리치게 거부하고 달아나려 한 때가 있고, 경제적인 성장이 있기 전에는 정말로 고생한 시대가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경제적으로 어렵게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으로 가난하다... 즉 영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은 물집에 얽매이지않고 자유로운 사람을 의미합니다. 집착에서 벗어나서 물질 너머에 있는 영적인 것에 더 가치를 두는 사람을 의미하고 온갖 욕심과 집착을 벗어던진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사는 사람입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과 기대 그리고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결코 이 세상의 환란에 좌절하지 않습니다. 비록 인간적인 슬픔과 괴로움이 있다해도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희망을 둔 이들은 하느님의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땅은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을 찾기 위해 오랜 시간을 광야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그 땅은 온유한 이들 즉 하느님의 새 백성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리고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 모두 행복합니다. 결국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며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옳은 일에 주리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들이고, 그러기에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는 사람들이기에 그들은 행복합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바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은 제사를 바라지 않으시고 자비를 바라신다고 하셨으며, 심지어 제단에서 태우는 연기는 역겹다고 하시며 진정으로 바라는 제사는 회개이고 자비를 형제들에게 베푸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자비를 베푸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로써, 하늘 나라의 시민으로 마땅히 해야할 일인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앞서 선언한 마음이 가난하고, 깨끗한 사람들이며, 온유하고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형제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벗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 자신의 것,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줄 수 잇는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고,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의인인 것입니다.
사람이 주는 어떠한 박해나 고통도 그들을 묶는 어떤 사슬도 하늘 나라를 향한 열망을 잠재울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된 행복은 이기적인 행복이 아닙니다. 내 가정, 내 가족만을 위한 안락함을 제공하는 그런 행복이 아닙니다. 내 집안에서만 맛보는 그래서 문을 꼭꼭 닫고서 내것만 챙겨서 행복해하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잊고 사는 그런 행복이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은 바로 베품의 행복이고, 나눔의 행복입니다.
여러분, 세상이 우리를 저버린다 해도 우리 가슴에 품은 행복, 하늘나라를 향한 행복은 영원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 행복하세요. 그리고 옆사람도 행복하길 기원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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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풍을 타지 마라
-김찬선신부-
요즘 참으로 마음 아픈 것은 불행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나친 말일까요?
그렇더라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참으로 많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왜 그렇게도 불행한가?
왜 그렇게 행복하지 않은가?
어제 어디에 가서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강의하며
프란치스칸 기쁨, 행복에 대해 나누기를 하였습니다.
제가 질문을 하였습니다.
고통은 곧 불행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리하게도 아니라고 답을 하였지만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고통 때문에 불행합니다.
적어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가난한 사람은 불행한 것인지 질문을 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고 대답은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돈 때문에 불행합니다.
적어도 돈 때문에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돈 때문에 불행한 이유는 돈 때문에 행복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사람들은 왜 그러면 돈으로 행복하려 하는가?
그것은 사람들이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 삶 사이에 커다란 불일치가 있다는 표시입니다.
실제 삶에서 사람들은
돈이 없어서 무엇을 할 수 없는 고통을 경험하고
돈이 없어서 모욕을 당하는 고통을 경험하고
돈이 없어서 불편한 고통을 경험하고
돈이 없어서 굶주리는 고통을 경험합니다.
돈이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돈이 실제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삶의 모든 차원에서 느끼며 살아갑니다.
무엇을 하든 돈으로 하기에
돈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형성되고
이런 무의식이 우리의 실제 삶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분히 앉아서 생각하면 돈이 행복을 보장하지 않지만
무의식적으로는 돈이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머리의 생각과 실제 삶의 생각이 일치되지 않으면
우리는 돈으로 행복하려 하고
돈으로 불행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이 불행한 삶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의 삶이 행복하지 않은 삶이 되지 않으려면
아니
우리의 삶이 행복한 삶이 되려면
우리의 실제 삶이 무조건 행복해야 합니다.
돈이 있건 없건,
고통이 있건 없건,
모욕을 받건 칭찬을 받건,
사랑을 받건 미움을 받건,
우리의 실제 삶이 이런 조건에 좌우되지 말아야 행복하고
우리의 행복은 이런 外風을 타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행복이 이런 외풍을 타지 않을 수 있을까?
오늘 우리의 복음은
우리 안에 하느님 나라를 소유할 때
外風은 말 그대로 밖의 바람일 뿐,
내면은 잔잔한 행복이 있을 것임을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다시 한 번 저의 행복론을 떠올립니다.
“나는 무조건 행복하다.
행복하지 않으면 나만 손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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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양승국신부-
<밑으로 내려서니>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는데, 찬찬히 주변을 돌아보니 감사할 일들, 행복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뭐니 뭐니 해도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것, 그 하느님께서 과분하게도 ‘하루’라는 은총의 선물을 지속적으로 주고 계시다는 것, 죄인임에도, 나약함에도, 불충실함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기회를 주신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비록 티격태격하지만 홀로 고독에 밥 말아먹으며 외롭게 살아가지 않고 형제들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
자세를 낮추니 세상만사가 은총꺼리들입니다. 밑으로 내려서니 모든 것이 감사꺼리들입니다. 손에 쥔 것을 놓으니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너무나도 과분한 은총 속에 살아가고 있군요. 그렇다면 얼굴을 활짝 펴야 되겠습니다. 행복해 죽겠다는 얼굴로 살아가야 되겠습니다. 너무 기뻐 어쩔 줄 모르며 그렇게 살아가야 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향해 장엄한 어조로 ‘진복팔단’을 선포하십니다.
천국에 오르는 길 여덟 가지를 아주 쉽고도 명료하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천국에 이르는 길은 소유가 아니라 가난임을, 창이나 칼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임을 선포하십니다.
참된 행복은 축척을 통해서가 아니라 버림을 통해서 온다는 것, 참된 기쁨은 올라감이 아니라 내려섬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설파하십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창립자인 돈보스코께서 저희 후배들에게 남겨주신 아주 소중한 유산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예방교육영성입니다.
예방교육의 여러 요소들 가운데 낙관주의와 기쁨이 있습니다. 낙관주의와 기쁨은 살레시오회원들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돈보스코는 철저한 낙천주의자였습니다. 그의 내면에는 언제나 기쁨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의 표정은 대체로 미소 짓고 있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언제나 행복에 겨워있었습니다.
돈보스코의 기쁨, 행복, 그 배경에는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가 있었습니다. 하느님과의 끊임없는 대화가 있었습니다. 에서 나온 결실이었습니다. 돈보스코의 기쁨의 원천은 한 마디로 기도였습니다.
돈보스코께서 지녔던 기쁨은 육적인 기쁨, 말초적 기쁨, 세상의 기쁨이 아니라 복음적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사목적 기쁨이었습니다. 하느님과의 일치를 통해서 느끼는 기쁨이었습니다.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그의 기쁨은 하느님 자녀로서의 기쁨이었습니다. 하느님께 신뢰함을 통해 얻는 기쁨이었습니다. 결국 돈보스코의 기쁨은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흘러나온 기쁨이었습니다.
행복해 죽을 지경인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나처럼 불행한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봐’라는 얼굴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원인이 뭔지 아십니까?
끝도 없이 올라가기만 원하기 때문입니다. 한번 올라가서는 절대로 내려오지 않으려고 기를 쓰기 때문입니다. 한번 차지한 자리를 지켜내기 위해 또 얼마나 고생들이 많겠습니까?
반면에 행복해 죽겠다는 얼굴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 원인이 뭔지 아십니까?
밑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낮은 자리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바닥에서 기어 다니니 추락할 위험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낮은 곳에 서있으니 심신이 편안해서 그렇습니다. 플러스알파로 하느님 안에 살기 때문에 그렇게 행복합니다. 하느님께 모든 것 맡기고 나니 그렇게 행복합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희망이기에 그렇게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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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열며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저는 스포츠를 상당히 좋아합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월드컵 경기 보는 것으로 얼마나 큰 즐거움을 얻는지 모릅니다. 2002년 월드컵 때가 생각나네요. 그때는 우리나라에서 열렸기에 그 열기가 더욱 더 뜨거웠었지요.
얼마 전, 스포츠 채널을 보다가 2002년의 열기를 다시 한 번 기억하게끔 한국과 이탈리아의 경기를 재방송 해주고 있었습니다. 전반 초반 이탈리아 비에르 선수의 헤딩 선제골을 당했지요. 그런데 저는 선제골을 먹고도 한골 먹었다고 아쉬워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이 경기의 결과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 뒤 이탈리아의 빗장수비에 막혀서 계속해서 1:0으로 지고 있었습니다. 경기가 거의 끝날 무렵, 이제 중계방송을 하던 아나운서와 해설자는 걱정과 패색에 짙은 멘트를 계속 내보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 중계방송을 듣고 있던 2006년을 살고 있는 저는 어떠했을까요? 과연 제가 이 아나운서와 해설자처럼 큰 걱정을 하면서 경기를 보고 있었을까요? 물론 그 당시만 해도 저 역시 큰 걱정에 싸였었고, 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경기 결과를 모두 알고 있었던 저로써는 도대체 염려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걱정하는 멘트를 하는 아나운서와 해설자의 모습에 웃음까지 나오더군요. 왜냐하면 후반 43분에는 동점골이 나올 테고, 연장전에 가서는 안정환 선수의 멋진 결승 헤딩골이 나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결과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즉 결국은 우리나라가 승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도무지 걱정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긴장이 넘치는 경기를 흐뭇한 미소를 띠면서 편하게 볼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들의 삶도 이렇지 않을까요?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에 대한 확신과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텐데, 우리들은 그러한 확신 없이 불안감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너무나 힘들다고 하면서 불행한 자기 자신을 자책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행복한지를 말씀해주십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정말로 행복한 사람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하지요. 왜냐하면 이 세상의 관점으로는 도무지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바로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관점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것이지요.
미래에 대한 확신만 있다면 비록 지금의 상황이 지치고 힘들지라도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 희망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행복한 사람입니다.
힘들다고, 어렵다고 포기하지 맙시다.
빠다킹 신부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시오
-이봉하수사-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에 하나가 ‘행복하십니까?’이고, 가장 많이
하는 말 또한 ‘행복하십시오’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람은 행복할 권리가 있고
행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행복은 기준점이 없기 때문에 일상 안에서 매순간
행복을 느끼며 산다 하여도 어제보다,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행복해지고 싶은
것이 사람살이입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돈에 대한 욕심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행복의 척도는 외적으로 심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지만,
그 행복의 기준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에덴동산이 모델일 것입니다.
그래서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변하면서 행복의 의미도 변해가고 있는
현실 앞에서도 사람은 일생 동안 원초적인 행복을 향해 걸어가야 하는
존재인가 봅니다. 보이는 행복을 먼저 찾으며 그것이 행복의 조건이고 전부인
것처럼 돈이 있어야 행복하다는 사람은 돈을, 권력과 명예가 있어야 행복하다는
사람은 권력과 명예를, 여행을 해야 행복하다는 사람은 평생 여행을 하면서
행복을 찾아가지만 과연 어느 누가 만족하리만큼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고백하면서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을까요? 2004년 4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선종하시기 전에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시오’라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 안에서의 사랑 고백이며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권고라고 생각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김지영 신부-
◆오늘부터 우리는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할 수 있는 ‘산상설교’(마태 5,1-7,29)의 말씀을 듣는다. 그리스도교 사랑의 대헌장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을 말씀을 통해 나는 진정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유다인 지혜의 저수지라고 할 수 있는 탈무드에 보면 ‘사람은 태어날 때 두 손을 불끈 쥐고 태어나는데 세상을 떠날 때는 두 손을 가지런히 펴고 간다. 왜 그럴까?’라고 묻는다. 탈무드의 가르침은 이렇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모든 것을 다 두 손 안에 넣겠다고 두 손을 불끈 쥐고 태어나지만 결국에는 모두 비우고 버리고 가야 하기 때문에 손을 가지런히 펴게 된다’.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고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물질적인 가난을 뛰어넘는, 곧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진정 행복하다는 말씀인 것이다. 여기서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내적으로 풍요로운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결국 욕심을 버리고 물질적인 집착을 떨치고, 그래서 하느님에 대한 그리움, 사랑으로 마음이 가난해지는 것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라는 가르침인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다운 제자로 살아가려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채우고 소유하기보다는 끊임없이 내주고 비우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예수님의 가르침 안에서 발견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하겠다. 진정으로 마음이 가난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과 정성을 기울이며 살아가고 깊이 반성하며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항상 기도해야 하겠다.
흐르는 강물처럼
-양승국신부-
가까운 곳에 그림 같은 강, 그야말로 ‘흐르는 강물처럼’ 포스터에 나오는 강이 흐르고 있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가끔씩 강둑 따라 산책도 하고, 낚싯대를 드리우기도 합니다.
지난 주말 ‘눈먼; 가물치나 한 마리 잡아볼까 하고 루어 낚싯대를 들고 강으로 갔더니, 접근성이 좋은 자리는 이미 다른 ‘꾼’들이 자리를 잡고 있더군요.
할 수 없이 천신만고 끝에 강 건너편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막상 건너 가보니 멀리서 보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그곳은 그리 좋은 포인트가 아니었습니다. 할 수 없이 더 좋은 자리를 찾기 위해 강을 따라 내려가는데 거의 밀림수준이었습니다. 쓰러진 고목 밑을 통과하고, 사람 키가 훨씬 넘는 수풀도 헤치고 다녔습니다. 늪에 빠지기도 했고, 바위를 기어 올라가기도 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헤매다가 드디어 좋은 포인트를 찾았습니다. 적당한 크기의 바위, 적당한 강폭과 깊이, 너무나 기뻤던 나머지 얼른 바위위로 올라가는 순간, 저는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습니다. 바위 위에는 아이 팔뚝 굵기 정도 되는 흙빛 살모사가 또아리를 틀고 앉아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겁을 한 저는 뒷걸음질 치다가 바위에서 미끄러져 강에 빠지기까지 했습니다.
겨우 제대로 된 다른 자리를 찾아 낚시를 하면서 이런 제 모습이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했습니다. 한 마리 잡아보겠다고, 목숨까지 거는 제 모습이 웃겼습니다.
돌아보니 잠시 지나가는 행복, 그야말로 찰나적인 행복,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행복이라 여기고, 목숨을 걸며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잠깐의 손맛을 보기 위해 목숨까지 걸면서, 참된 행복, 진정한 행복, 영원한 행복, 보다 가치 있는 행복을 얻기 위해 과연 나는 무엇을 했나 많이 반성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에 이르는 길을 소개하고 계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박해를 받는 사람들...”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참된 행복에 이르는 길을 하나하나 살펴보니 너무나도 역설적(逆說的)입니다. 피눈물 흘리고, 박해받고, 울고 있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의 진의를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하지요. 재산의 유무야말로 행복의 척도다, 슬픔이 없는 삶, 피눈물 흘리지 않는 삶, 고통이 없는 삶, 굴곡이 없는 삶, 안정되고 평화로운 삶이 최고라고 말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주변에 둘러서 있던 바리사이들, 사두가이들, 율법학자들은 속으로 비웃었을 것입니다. 자기들끼리 눈짓을 하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몸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여러 가지 이유로 피눈물 흘리고 애통해하던 사람들, 힘겹게 현실을 견뎌가던 사람들, 그래서 결국 겸손해진 사람들의 마음은 희망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유념할 것이 있습니다. 현실적인 가난, 고통, 상처, 눈물이 무조건 좋은 것, 귀한 것,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성서는 모든 극단을 피합니다.
가난이, 고통이 소중하다고 가르치시는 이유는 가난이나 고통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대체로 겸손해지고, 하느님 두려워할 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자라고 해서 모두 나중에 불행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이면서도 덕스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겸손하게 가난한 이웃들 위해 자신이 가진 바를 아낌없이 나누고 섬기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 겸손하고, 다 하느님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질투로 마음을 가득 채우고 하느님 두려운 줄 모르고 갖은 악행을 저지르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결국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박해를 받는 사람은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은 사람,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 하느님께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고통이나 박해를 저주하지 않으며, 끝까지 인내하며,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에게는 상급 중에 가장 큰 상급인 ‘하늘나라’가 선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복되다, 그 임께 몸을 숨기는 사람이여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1열왕 17,1-6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엘리야)
복 음 : 마태 5,1-12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많은 노력들을 기울입니다. 특히 우리 시대는 그 어떠한 시대보다도 여러 면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행복해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좋은 것을 찾아 잘 먹고 잘 입으며 자녀 교육을 통해서 행복을 추구하고자 모든 것을 헌신하고 있지요.
그런데 힘들게 노력하는 것에 비해서 참으로 외롭고 힘든 시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늘 불안하고 허전하며 평화롭지 못하고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가 노력하는 만큼의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길은 과연 어디에 있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시대보다도 훨씬 전인 지금으로부터 이천 오백 년 전 그리스 로마시대는 특히 인간의 행복에 대해서 아주 깊이 연구하고 활발하게 토론했던 시기입니다. 그 당시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인간의 행복론에 관하여 깊게 연구했고 책 또한 많이 썼지요. 그 당시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행복론에 대한 대표적인 학파로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주의를 추구하는 학파로, 또 스토아학파는 금욕주의를 추구하는 학파로 알려져 있는데 중요한 것은 두 학파 모두가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또 그것이 어떻게 지속될 수 있는지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좀더 파고들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흔히 쾌락주의의 선봉자로 알려진 에피쿠로스학파는 인간 행복의 출발을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좋은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추구해 보고 그것이 나쁘면 다시 더 좋은 것을 추구하는 식으로 인간의 욕구에 따라 움직였지요. 그래서 좋은 음식을 먹고 더 좋은 옷을 입으며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면 더 좋은 것을 추구하는 등 행복의 출발을 육체적인 쾌락을 만족시키는 오감에서부터 시작했지요.
그에 비해서 스토아학파는 인간의 참된 행복은 좋은 것을 먹고 입는 등 오감을 만족시키는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욕망을 자제하여 정신과 영혼을 풍요롭게 할 때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금욕주의가 발달했지요. 이렇게 각자 다른 관점으로 출발한 두 학파 중에 오래지 않아 에피쿠로스학파가 없어지고, 스토아학파는 그리스도교 신학과 철학의 바탕이 되어 천주교 신학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많은 수도자들과 신학자들이 스토아학파에 영향을 받아서 오늘날의 신학을 형성하였지요.
궁극적으로 사람은 입고 먹는 등 인간의 본능을 충족시키는 데에서는 행복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인류 역사 속에서 많은 철학가나 신학자들에 의해 내려진 결론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를 살면서 가끔 저는 마치 2500년 전으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에피쿠로스학파 사람들 같은 사람들로 온통 넘쳐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원하며 더 좋은 것, 또 더 좋은 것을 끝없이 찾아 헤매면서 행복해지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끊임없이 소비하고 또 한쪽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추구하고 있지요. 그렇게 먹고 입고 소비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더 많이 벌어야 하고 더 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밤낮없이 노력하면 행복할 줄 알았던 사람들에게 오히려 늘어난 것은 걱정거리요, 두려움이라는 사실입니다. 너무 먹고 마신 결과 많은 사람들이 고혈압과 비만, 당뇨병 등으로 생명이 위태롭게 되었지요. 그래서 이제는 먹는 것을 자제하느라고 전쟁을 겪고 있습니다. 마치 수도자들처럼 살아야 병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국민 건강을 위하여 정부 차원에서 비만과 싸우는 나라들이 늘어가고 있지요. 또 많은 재산과 사회적 성공이 행복을 가져다 주리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추구했지만 결과적으로 얻은 것은 끝없는 피곤과 불안감뿐입니다.
그 결과 ?이래서 되겠는가? 정말 삶의 참된 행복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하는 심각한 성찰이 터져 나왔지요. 1960년대 미국의 히피족이나 요즈음 우리 시대의 웰빙 문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장사꾼들의 잇속이 개입되어 이 웰빙 문화가 좀 천박해졌지요. 실은 정신과 영혼의 안락함을 위해서 추구한 것이 웰빙 문화로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덜 먹고 덜 입으며 자연으로 돌아가려고 애쓰며 요가와 기 수련을 통해 참된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자녀 교육을 통해서 행복을 보장받으려고 본능적으로 매달리고 있지요. 그러나 그 결과 또한 기대했던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헌신해서 자녀 교육에 바쳤는데 얻은 것은 외로움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투자하고 노력했지만 노후에 노력한 만큼의 뒷바라지를 받기는커녕 늙어서도 계속 자식 뒷바라지를 해야 하고, 물려줄 재산이 없으면 소외되어 길거리에 나가 앉는 경우가 그 어느 시대보다도 많은 불행한 시대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입니다.
그러면 참된 행복은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추구하는 재산이나 건강, 자녀 교육에서는 인간의 참된 행복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요? 아니지요. 거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그것이 삶의 기본인데 그것을 떠나서 어디서 행복을 추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행복이 있는 그 곳에서 우리는 왜 불행만을 만나고 있는 것일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재물과 건강과 자녀 교육에 있어서 하느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어졌기 때문이지요. 하느님 사랑과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사랑이 없이 단지 현세적인 안락함만을 위하여 재물을 추구하고 건강을, 자녀 교육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인격과 도덕이 밑받침되지 않은 재물은 이웃에게 아픔을 주고 본인에게는 갈증만을 줄 뿐입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효가 바탕이 되지 않은 재물은 언제든지 그 관계를 해칠 수가 있지요. 건강도 마찬가지고 자녀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 교육에 있어서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 없이 이기적이고 출세 지향적인 아이로 키우는 것이 어떠한 결과가 가져오는지를 우리 시대는 너무나도 잘 알게 되었지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 바탕이 된 재물은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모두를 잘 살게 하지요. 또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자녀 교육은 인류를 평화롭게 하고 번성시키는데 기여합니다. 건강도 마찬가지이지요. 우리 시대에 참된 행복을 찾기 어려운 이유는 가장 중요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지요.
오늘 예수님께서 참된 행복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그 핵심은 궁극적으로 하느님께만 미래의 희망을 두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추구하는 재산과 건강, 자녀 교육과 출세는 참된 평화와 영원한 삶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의 인간의 삶이 힘겨운 이유는 그 방향과 기본 출발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바탕이 되지 않았기에 열심히 노력할수록 오히려 어려움만 가중되고 있는 것이지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뒷받침되지 않은 재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뒷받침되지 않은 출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뒷받침되지 않은 권력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눈물을 자아내고 있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은 하느님 안에 있음을 누누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먹고 마시며 소비해 가는 행복 추구로는 결국 우리 모두가 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오염되고 파괴된 지구가 가리키고 있는 생명시계가 절망의 끝인 12시를 향해 달음질치고 있다고 하지요. 스토아학파의 자기 절제, 정신과 영혼을 키우는 노력들이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가져다주는 바탕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참된 행복은 하느님 안에서 질서를 잡을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재물과 건강, 모든 출세와 자녀 교육도 그 때 더 풍요로울 수 있음을 기억하고, 하느님께서 주신 참된 행복을 찾아 누리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 산상설교의 첫 계단 : 진복선언 †
-박상대 신부-
오늘부터 연중 10주간이 시작된다. 연중시기는 예수님의 공생활을 따라잡는 시기라는 말을 했다. 예수님의 공생활을 따라 잡는다는 말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통해 공생활의 철학과 정신을 배워 익힌다는 것이다. 지난 연중 9주간까지 해서 마르코복음(1,14-12,44)을 들었고, 오늘 연중 제10주간 월요일부터 연중 제21주간 토요일까지는 마태오복음(5,1-15,30)을, 그 다음부터 연중34주간까지 토요일까지는 루가복음(4,16-21,36)을 듣게된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이 전하고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 중 백미(白眉)라고 말할 수 있는 산상설교(5-7장)의 첫 장으로서 "진복선언(眞福宣言)"이다. 예수님의 일상은 말씀과 행적, 가르침과 기적으로 이어진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새로운 모세로 등장하여 "더 나은 정의"를 선포하신다.
산상설교와 비슷한 평지설교가 루가복음에도 보도되는데 이는 산상설교에 비해 그 분량이 매우 적고 간단하다.(루가 6,20-49) 루가의 평지설교는 행복선언(20-23절), 불행선언(24,26), 원수사랑과 보복금지(27-36절), 형제에 대한 판단금지(37-42절), 본성을 따르는 행위(43-45절), 그리고 말과 행동의 일치(46-49절)의 순서로 엮어져 있다.
마태오복음이 산상설교의 첫머리에 "9개의 행복선언"을 보도하고 있는 반면, 루가는 4개의 행복선언과 4개의 불행선언을 들려준다. 원전(原典)이 되는 예수어록에는 4개의 행복선언이 전해지는데, 마태오는 5개를 추가하여 9개로 편집하였고, 루가는 4개를 충실히 옮겨 쓰면서 4개의 불행선언을 덧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행복(불행)선언의 짜임새를 보면, 우선 대상(對象)이 언급되고, 다음에 행복(불행)선언이 따르고, 마지막으로 그 이유가 될만한 보상(補償)이 언급되는 구조를 이룬다.
예를 들어 "가난한 사람들아!"는 대상을, "너희는 행복하다"는 선언을,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는 그에 합당한 보상을 말한다.(대상->선언->보상)
이 구조를 따라 선언문을 살펴보자.
마태오복음의 9개 행복선언:
① 마음이 가난한 사람 -> 행복 -> 하늘나라,
② 슬퍼하는 사람 -> 행복 -> 위로,
③ 온유한 사람 -> 행복 -> 땅,
④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 행복 -> 만족,
⑤ 자비를 베푸는 사람 -> 행복 -> 자비,
⑥ 마음이 깨끗한 사람 -> 행복 -> 하느님 대면,
⑦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 -> 행복 -> 하느님의 아들,
⑧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 -> 행복 -> 하늘나라,
⑨ 예수님 때문에 모욕, 박해, 비난을 받는 사람 - 행복 - 하늘의 큰 상.
루가복음의 4개 행복선언:
① 가난한 사람 -> 행복 -> 하늘나라,
② 굶주린 사람 -> 행복 -> 배부름,
③ 우는 사람 -> 행복 -> 웃음,
④ 예수님 때문에 미움, 추방, 모욕, 누명 받는 사람 -> 행복 -> 하늘의 큰 상.
루가복음의 4개 불행선언:
① 부유한 사람 -> 불행 -> 위로 끝,
② 배부른 사람 -> 불행 -> 굶주림,
③ 웃는 사람 -> 불행 -> 슬픔과 울음,
④ 칭찬 받는 사람 -> 불행 -> 거짓 예언자와 동급.
예수께서 행복하다고 선언하는 대상은 바로 사람이다. 그런데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 그 사람이 지녀야 할 덕목과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환경)가 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의 가난함, 슬퍼함, 온유함,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말라함, 자비를 베풂, 마음의 깨끗함, 평화를 위한 노력, 옳은 일 때문에 당하는 박해, 예수님 때문에 받는 모욕과 박해와 비난이다.
그러나 이 중에는 그 자체로 긍정적이지 않고 부정적인 것도 있다. 부정적인 대상이나 그런 상태가 행복일 수는 없다. 이런 대상이나 이런 상태에 처한 사람이 복된 자로 선포되는 이유는 이런 경우에 예수님의 복음이 더 잘 수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곳에 하느님의 강함이 더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람들 속에서 드러나는 약함은 곧 하느님의 강함이다.
"부른 배로는 기도할 수 없다"는 브라질 카마라(1909-1999) 대주교의 말이 참으로 옳다는 생각이 든다. "가난한 이들의 형제"라 불리는 카마라 대주교는 브라질 동북부의 거대 빈민지역인 레시페-올린다 대교구에서 평생을 찢어지게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면서 군부독재에 맞서 가난한 이들의 고통에 대한 관심을 끊임없이 촉구했다.
나나 우리 가족만이 굶지 않고, 웃으며 편히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의 삶인가? 아니다. 찢어지게 가난해도 웃음과 울음을 함께 나누며 더불어 사는 삶 속에 예수님도 함께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사회·경제적 구조 속에서 가난과 배고픔, 슬픔과 억압받음 자체가 참 행복은 아니다. 이는 단지 참 행복을 위한 조건으로 제시되고 있으며, 이러한 조건에서 자신을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할 때 참 행복은 시작된다.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 맡긴다는 것은 무위(無爲)가 아니라 정의(正義)와 평화(平和)를 위해 일하고 노력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복선언은 단순히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예수님의 바램이나 원의(願意)라기보다 도래한 하느님나라에 들기 위한 더 나은 정의로서 모든 사람을 향한 요구인 동시에 행복의 약속인 셈이다.........◆
<산으로 오르셨다>(마태5,1-2)
-유 광수신부-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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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신앙인들의 대헌장이라고 한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가르쳐 주신 내용이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예수님한테 배운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오늘 예수님이 제시해주신 행복의 길을 다시 한번 보면서 우리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그 길을 걸어가는 은혜로운 하루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먼저 예수님께서 군중을 보시고 왜 산으로 오르셨는가? 라는 질문을 해 보게 된다.
성서에서 산이란 하느님이 계신 곳이고 하느님의 뜻이 밝혀지는 곳이다. 예수님이 산에 오르셨다는 것은 당신이 바로 하느님이시고 바로 그곳에서 하느님의 뜻을 밝혀주시겠다는 것이다. 또한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갔다."는 말은 당신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마치 임금이 어떤 중대한 것을 선포하기 위해 옥좌에 앉으시고 그 선포 내용을 듣기 위해 신하들이 임금 앞에 도열하고 있는 모습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이 산에 올라 앉으시고 입을 열어 가르치신 내용은 앞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할 아주 중요한 내용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시나이 산으로 인도하였고 그곳에서 산에 올라가 야훼 하느님을 만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할 십계명을 받았다. 이 십계명은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하나의 지침이 되었고 그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 야훼 하느님께 충성하는 것이었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주는 하나의 길잡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인가? 예수님을 따라서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고 그곳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오늘 산에서 가르쳐 주신 내용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지켜야할 내용이고 그 내용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 우리가 소위 말하는 진복팔단이라고 말하는 5장 3절에서부터 시작하여 7장이 끝까지이다. 이것을 우리는 산상설교라고 말한다. 즉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지키면서 살아가야 할 대헌장인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나이 산에서 받은 십계명과 같은 것이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갔다."라는 것은 산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는 제자들의 자세이다. 예수님이 먼저 산에 오르셨듯이 우리도 산에 올라 가야 한다. 산은 하느님이 계신 곳이고 하느님의 가르침이 선포되는 곳이라고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이 계신 산으로 오르는 사람들이고 그곳에서 밝히신 하느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며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의 것을 따라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오늘 우리가 산에 오르는 길은 어떤 길인가?
즉 예수님이 산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갔다면 오늘 우리가 산에 앉아 계신 예수님께 다가 가는 길은 어떤 길인가? 산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가지 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오늘 하느님이 계신 산에 오르는 길은 여덟가지 길이다.
즉 예수님이 산에 앉으셔서 가르쳐 주신 여덟가지 진복팔단은 오늘 우리가 산에 오르는 길인 것이다. 여덟가지 길이 있지만 그 중에서 어느 한가지만이라도 열심히 오르면 산에까지 오를 수 있다. 과연 나는 여덟가지 길 중에서 어떤 길을 통해서 하느님이 계신 산으로 오르고 있는가? 처음에는 조금 혼란스럽고 힘들 것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오르다보면 여덟 개의 길이 결국 하나로 모아질 것이며 그렇게 힘들이지 않고서도 정상까지 오르게 될 것이다. 한꺼번에 모든 길로 오르려고 하지 말자. 내가 오를 수 있는 길부터 오르기 시작하자. 그러나 제일 먼저 올라야 할 길은 "마음이 가난한 이들!"이라는 길을 걷는 것이 좋다. 마음이 가난하다면 다른 일곱가지 길은 휠신 쉽게 오를 수 있으리라.
오늘 복음은 또한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즉 우리가 복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신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공짜로 복을 주시지 않는다. 복을 받을 만한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에게 또 복을 받을 만한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란 바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다. 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을 걸으면 복은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복을 받고 싶어도 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을 걷지 않으면 복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한 이들"이라고 하였다. 즉 복을 받을 수 있는 상태에 있는 이들을 강조하고 있다. 마음이 가난하지 않으면, 온유하지 않으면,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르지 않으면 등 복을 받을 수 없다. 즉 행복해질 수 없다. 행복할 수 있는 상태에 들어서 있는 사람만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 교회의 큰 문제점은 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을 걷지 않으면서 공짜로 복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 복을 받기 위해서 자기가 할 일을 열심히 하면 복은 가만히 있어도 굴러 들어오는 것인데 그런 복을 받을 수 있는 생활은 하나도 하지 않고 복만 받으려고 하니 그런 얌체가 어디 있는가? 묵주기도 몇 번하고 미사 참례 몇 번했다고 복이 그냥 굴러들어 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구체적으로 행복해지게 해주는 일들을 한가지씩 실천할 때 복을 받는 것이다.
칸트는 "행복한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행복을 누리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행복을 직접 목적으로 삼지 말고 행복을 누릴만한 자격이 있는 행동을 하고 또 그러한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행복한 삶을 바란다. 나름대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여기 저기에 가서 배우고 행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는 방법을 통해 행복해 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사실 예수님도 우리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해 질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진복팔단이라고 하는 여덟가지 내용들은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즉 우리가 행복해지려면 반드시 걸어가야 하고 실천해야 하는 내용들이다. 이 행복은 이 세상이 가져다 주는 행복과는 다르다. 또 이 세상이 추구하는 행복관과도 다르다.
증권투자가가 설명회에 나와서 하는 말이 "분명히 여러분이 알아야 하는 것은 이 세상에는 공짜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즉 증권에 투자하는 사람들은 다 나름대로 자기 이익을 위해서 투자를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투자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증권에 투자하는 사람이 꼼꼼히 따져보고 알아보고 투자해야지 남의 말만 듣고 투자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행복은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행복을 누릴만한 자격이 있는 행동을 하고 그러한 인간이 되는 사람만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행복은 다른 사람한테서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노력해서 획득하는 것이다.
그 방법이 오늘 복음에서 가르쳐 주셨다. 돈을 벌기 위해서 증권에 투자한다면 하늘에 복을 쌓기 위해서 어디에 투자를 하는가? 하늘 나라는 공짜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갈 말을 하고 행동을 하고 그런 자격이 있는 사람만이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행복관 가운데 어떤 것을 지키고 있는가?
여덟가지 가운데 몇 가지나 실천하고 있는가?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행복은 마음의 영이 가난함에서 시작된다. †
오늘은 연중 제10주간 첫날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 참복을 내려주시는 날이기도 합니다. 다른 어떤 내용보다도 그리스도교의 중심에 서 있는 오늘 산상수훈은 우리 신앙인에게 많은 묵상거리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마태오가 전하는 산상수훈은 성서 전체, 나아가 세계 문화 전체를 통틀어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가장 완벽한 수준의 윤리 체계를 보여 주는 수훈입니다. 마태오 사가는 예수께서 공생활 전기간에 걸쳐 행하신 여러 강론(discourse)를 5부분으로 나누었는데, 산상 수훈은 그 첫 부분입니다.
한편 산상 수훈이 갈릴래아 지방의 어느 한 산상에서 행해진 예수님의 설교 전문 그대로인지 아니면 마태오가 다른 여러 기회에 예수께서 나누어 하신 말씀까지 함께 편집 구성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각각 견해가 다르나, 예수님은 여기 기록된 내용 그대로의 산상 수훈을 하셨고 유사한 내용으로 다른 기회에도 자주 설교하셨다고 보는 것이 가장 지지받는 학설입니다. 그러나 오늘복음의 산상설교가 예수님의 설교 내용을 토씨 하나까지 그대로 옮겼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태오가 예수의 어록을 집성하면서 핵심 부분만을 정리 게재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러면 묵상을 시작하면서 오늘복음에서 전하는 '산상수훈'의 신앙적 의미를 먼저 묵상하겠습니다. 산상수훈 중 8복에 대한 기록을 분석해 보면, 예수께서는 이 설교를 통해서 ①복 있는 자의 조건과 ②참 복의 내용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8복이 모두 지상의 일시적 물질과 명예와 쾌락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영원한 행복과 관련된 사실임을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행복의 일부가 아니라 행복 자체를 다루고 있는 이 8복은 그 조건으로 하느님을 향한 성실한 성도의 신앙 자세를, 그 결과로서 영원한 하늘나라의 기쁨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우리는 하늘나라가 비록 종말론적이기는 하나, 영적으로 지금 이 땅에서도 그 하늘나라에 동참하고 있듯이 이 8복도 이땅에서 오늘날 영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또 해야 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예수님의 산상수훈과 같은 영적생활에 매우 멀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영적 부요보다는 물적 부요에 대해 너무 집착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물적기준에 의한 행복과 불행의 문제, 그리고 가난과 부유의 문제 등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참 그리스도인의 길인지?
오늘복음에서는 적어도 물적기준에 관련해서 복을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믿고, 무엇을 바라며 어떻게 해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바로 오늘복음을 깊이 고민하며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 오늘 복음의 가르침대로 살았던 사람들이 지금 어디서 어떠한 행복을 누리고 있는지를 잘 살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의 가장 위대한 행복은 우리가 오늘 묵상하는 이 진복팔단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매우 혁명적이며 역설적이고 도전적인 조건이 우리 크리스챤의 행복의 원천이라고 주님께서는 엄숙하게 천명하고 계십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대부분 세상 사람들이 싫어하거나 어렵게 생각하는 것들인데, 여기에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와 온 땅을 걸고 행복을 약속하십니다.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고 믿기 어려운 행복의 조건들입니다. 그러나 이 행복은 세계의 모든 종교와도 통하는 진정한 행복의 조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행복은 먼 훗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그 조건을 채울 때 즉시 이루어진다는 것으로도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다시말하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행복의 비결은 장차 누릴 것일 뿐 아니라, 지금 여기서 누리게 된다는 어조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 모두가 진정 행복해지기를 바란다면 바로 실천에 옮겨야 할 것입니다.
그 첫 번째 행복의 조건이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이 되라는 조건입니다. 이 마음의 가난이란 것은 다음에 나오는 모든 행복의 첫째 조건이고 기본적인 조건이며 전체적인 조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은 하늘나라의 주인이 된다는 선언을 하시고 계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음의 가난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묵상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가난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가난이란 말은 부유함의 반대가 아닙니다. 즉 돈이 없고 집이 없고 가진 것이 없는 것을 가난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마음의 가난이란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 등에 대한 욕심에서의 초탈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쉽게말하면 재물적으로는 풍족하다라도 마음은 항상 근검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원래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 가야할 인간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자기가 마음대로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줄 알고 하느님께 감사하며 하느님의 은혜로 생각할 줄 아는 마음이 진정한 가난입니다.
한 마디로 마음을 비우는 자세를 말합니다. 마음을 비우면 자연히 겸손해집니다. 마음을 비우면 욕심이 없어집니다. 마음을 비우면 분노도 질투도 그 어떤 잡념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 겸허히 무릎을 꿇고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는 진솔한 고백을 할 수 있는 자세가 진정한 마음의 가난입니다.
예수께서는 결코 깡통을 차고 빈민굴에서 하루하루 얻어먹는 생활을 축복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빈곤은 축복이 아니라 때로는 나태와 게으름의 자업자득일 수 있다는 것도 배제해서는 안 됩니다. 빈곤 그 자체가 축복이 아니라, 마음의 영의 가난 즉 마음을 비우는 것이 축복이라는 말은 우리 그리스도교의 절대적인 최고의 행복 헌장이며 그리스도교의 핵심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윤리의 기준입니다.
둘째는 "슬퍼하는 사람"에게 행복을 선언하셨습니다. 역시 그 자체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슬퍼하는 사람에게 행복을 선언하신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슬퍼하는 사람은 자기 죄와 이웃의 죄, 그리고 세상의 죄악에 대해서 슬퍼하고 통회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동시에 이웃의 고통을 보고 마음 아파할 줄 알고 동정을 할 줄 아는 마음을 말합니다.
진정 울어야 할 일은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해 드린 것에 대한 참회의 눈물입니다. 세상의 부정과 부패, 비리와 부조리, 패륜 등을 보고 가슴 아파 하며, 하느님께서 마음 상해하실까 걱정하고 애통해 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을 아는 이의 눈물입니다.
지면 관계로 진복 8단 모두를 다 해설할 수는 없지만 모든 진정한 행복은 세상 사람들이 마음속으로는 좋아하면서도 실제 행동으로는 그리 쉽게 실천하지 못하는 가히 혁명적이며 도전적인 삶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이를테면 제3행복의 조건인 온유함이 그렇고, 제4행복의 조건인 정의가 그렇고, 제5행복의 조건인 자비, 제6행복의 조건인 마음의 청결, 제7행복의 조건인 평화 제일주의, 제8행복의 조건인 정의에 대한 박해의 각오 등이 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진복 8단을 분석을 해보면 우리가 왜 행복하지 못한지를 알 수 있고 또 이것은 어느 한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부단히 노력하며 닦아 나아가야 할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덕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진복8단 제1장에서 제시하고 있는바 최고 최대의 행복의 조건은 마음의 가난 즉 마음을 비우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다. 마음이 온갖 탐욕과 교만과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으면 그 어떤 경우에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주는 행복은 모두가 너무나 짧고 허망한 것이지만 마음의 비움을 통해서 얻는 행복은 영원한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
[두올묵상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