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에 육당 최남선(1890~1957)은 저녁마다 바람을 쐬려고 장손(長孫)의 자전거를 빌려 타고 동네를 돌았다. 장손은 체구가 육중한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다 넘어질까 봐 마음 졸였다. 할아버지 걱정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자전거 걱정이었다.
육당의 장손 최학주(70)씨가 쓴 전기 '나의 할아버지 육당 최남선'(나남출판)이 나왔다. 육당의 직계 후손이 육당 전기를 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 3·1 운동으로 옥고를 치르던 무렵의 육당 최남선. /나남출판 제공
학주씨는 육당이 말년에 중풍으로 쓰러진 뒤 한 방에 데리고 자던 손자다. 그는 서울대 공대 졸업 후 도미(渡美)해서 뉴욕에 뿌리를 내렸다. 제약회사에서 은퇴한 뒤 2006년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기억과 구전(口傳), 가족이 남긴 일기와 편지, 육당의 저작과 각종 사료(史料)를 집대성해 '인간 최남선'의 민얼굴을 생생하게 복원했다.
육당은 선대가 일군 가산 30만원(현재 가치 300억원)을 몽땅 돈 안 되는 출판사업과 문화사업에 쏟아부었다. 자기 자신은 역사 연구에 매진하면서도 아들에겐 "문과 공부는 고생스러우니 하지 말라"고 말렸다. 일제의 패망을 예감하면서도 제자들에게 "학병에 나가라"고 했다. 후대는 육당을 변절자라 욕하지만, 저자는 당시 육당이 '일본이 망한 뒤 우리 힘으로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면 군대를 아는 인재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그는 육당이 '신간회'의 주역 홍명희와 신석우를 움직여 좌우합작운동이 태동하게 만든 '숨은 공신'이었다고 주장한다.
말년의 육당은 불우했다. 그는 광복 후 '반민족 행위자'로 기소돼 치욕을 겪었다. 6·25를 거치면서 장녀는 인민군에 학살되고 사위는 납북되고 장남은 요절하고 막내아들은 좌익이 되어 월북했다. 그 와중에도 육당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장손이 "졸업생 답사를 대필해달라"고 조르자 못 이기는 척 원고지 6매 분량의 글을 대신 써줬다. '인간적인 할아버지'였다. 요즘 말로 하면 '손주 바보'였던 셈이다.
뉴욕 자택에서 전화를 받은 저자는 "50대 이하 젊은 세대가 할아버지 세대, 아버지 세대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시류와 여론에 따라 막연하게 '친일이냐, 아니냐' 논쟁을 벌이고 있어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윗세대의 삶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해 이 책을 썼고, 내 주장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학계에서 좀 더 다양한 토론이 이뤄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육당을 전공한 역사학자 이영화(50)씨가 저자와 최근 7개월간 500통 이상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세부사항이 정확한지 감수했다. 이씨는 "육당의 생애에서 '공백'으로 남아 있던 많은 부분을 채워주는 책"이라면서 "저자가 육당의 후손인 만큼 주관적인 측면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육당을 폄하하지도, 미화하지도 않고 역사적 인물로서 있는 그대로 복원하려 한 시도로서 가치가 크다"고 했다.
☞육당 최남선은…
역사학자이자 시인이다. 한국 첫 종합잡지 '소년'을 창간하고 '열하일기' 등 한국 고전 35종 59책을 중간(重刊)했다. '언문'이라 불리던 우리말에 '한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기초해 옥고를 치렀다.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8년 일제 말기 친일 행적을 문제 삼아 육당을 친일파 명단에 포함시켰다.
<중앙일보>
“육당의 꿈은 조선의 세계화, 친일은 오해입니다”
프랑스 유학 준비 당시(1932년)의 육당 최남선 일가. 결국 가진 못했지만 유학을 위해 육당이 머리를 자른 유일한 사진이라고 한다. 뒷줄 왼쪽부터 큰딸 한옥, 삼남 한검, 차남 한웅, 장남 한인. 앞줄 왼쪽부터 부인 현영채, 육당, 사위 강건하. [나남 제공]
1919년 3.1운동 때 기미독립선언문을 쓴 당대의 천재 육당 최남선(1890~1957). 육당에 대한 기억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친일파로 전락했다는 꼬리표가 붙는다. 그 꼬리표 때문에 해방 직후 ‘반민족행위 처벌법’에 따라 친일파로 분류됐다. 이후 세간의 평가는 별로 변하지 않았다. 시대가 변하면 인물평도 달라지는 것일까. 3.1운동 92주년을 맞는 오늘 ‘최남선 친일론’에 대한 반론이 정면으로 제기돼 눈길을 끈다.
반론의 주인공은 육당의 장손 최학주씨다. 최씨는 3.1절을 하루 앞둔 2월 28일 『나의 할아버지 육당 최남선』(나남)을 출간했다. 책에 담긴 최씨의 주장은 이렇게 요약된다. “할아버지 육당의 꿈은 조선의 세계화였습니다. 친일은 오해입니다.”
육당 직계 가족의 첫 본격 증언이다. 40년 넘게 뉴욕에 거주하고 있는 손자 최씨는 1941년 서울에서 태어나 육당이 타계할 때까지 17년을 함께 살았다고 한다. 육당이 자신을 비롯한 가족에게 전한 말과 글을 토대로 책을 썼다. 최씨는 육당 타계 한 해 전 자신이 찍은 육당의 사진을 비롯해 공개되지 않은 가족 사진을 책에 실어 생동감을 더했다.
육당이 친일파로 분류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조선사편수회 편찬위원으로 가담한 일과 중추원 참의를 맡은 일이다. 최씨는 육당이 당시 누구보다 앞장서서 조선 민족의 시조인 단군의 역사적 의의를 중시했음을 강조하면서 “육당이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간 것은 일본 학자들이 부정하는 단군과 조선사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최씨는 또 육당이 단군의 존재를 단지 한반도의 조선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동북아시아의 중심으로 부각시켰다면서 이는 “세계사의 일부로서 조선사를 정립하려 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육당 연구’로 2002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학위를 받은 이영화 박사는 “육당 최남선의 친일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논쟁적인 반박이 제기된 것”이라며 “우리 국민들이 최씨의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중추원 참의를 맡은 데 대해 이 박사는 “중추원이란 아무런 실익이 없는 자리였는데, ‘중추원 대문도 간 적이 없다’는 육당의 말을 나는 믿는 쪽”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