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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창11:1-9절)
몸서리나는 불안과 공포가 우리를 엄습하고 있습니다. 괴롭고 아프고 쓰라린 고독과 절망이 우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막을 홀로 횡단하는 나그네의 것이라면 이해할 수 있겠지만 거대한 도시의 한복판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숨소리를 감촉하고 놀랍도록 발전한 과학의 온갖 문명의 이기를 맛보고 살아가는 소위 현대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불안이요 절망이라고 할 때 여기에 문제가 있고 그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위 다정한 벗이나 혹은 나를 보살펴 주는 가족이나 사랑을 나누는 연인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홍수 속에서 느끼는 고독과 절망과 탄식입니다. 인조문명을 구가하는 요란한 음악이 우리 곁을 떠나고 있습니다. 금년 들어서 음악 콘서트나 가수들의 공연이나 무대가 한 번도 열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화려하게 지은 세종 문화 회관이 문을 닫은 지도 벌써 오래 되었습니다. 극장가가 텅텅 비었고 대형 운동장에는 관객이나 청중이 없는 선수들의 경기만 겨우 이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아도 만나지 못하는 비대면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시대를 바꾸고, 환경을 바꾸고, 불투명한 미래를 앞당기고, 음식 문화를 바꾸었습니다. 교회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예배가 점차 사라지고 소그룹 모임이 정부의 제재를 받고, 믿음이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이기를 싫어하고 만나기를 두려워합니다. 이는 저 창세기의 시날 평지에서 일어난 한 사건과 그 유형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흩어지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얼굴을 대면하기를 싫어하고 대화하기를 두려워하고 홀로 있고 싶어 합니다. 택배 기사들이 물건을 대문 앞에 마구 던져놓고 도망치듯이 달아납니다. 사람을 만날 수가 없고 대화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코와 입을 가립니다. 혹시라도 상대방으로 인하여 병에 걸릴까봐 노심초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가족도, 친족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입을 가리고 코를 막아야 숨을 쉴 수 있고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바벨’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하면서 저 함의 자손 니므롯의 바벨탑 사건을 회고해 보아야 합니다. 바벨의 정신을 찾아보고 바벨의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1. 바벨은 불신앙이요, 불순종입니다.
태초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언어가 하나였습니다. ‘구음이 하나였다.’라는 말을 직역하면 ‘한 입술’이라는 것입니다. 바벨탑 사건 이전에는 인류의 언어가 동일했던 것입니다. ‘언어가 하나이었더라.’는 말 역시 ‘한 낱말’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당시의 언어 형태나 단어나 그 말의 뜻이 같았다는 말입니다. 셈의 후손이나 함의 후손이나 야벳의 후손들이 살아가는 지역을 막론하고 마음이 같았고, 생각이 같았고, 뜻이 같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만 부여하신 특별한 의사소통 기능이었습니다. 바벨탑 사건 이후 혼잡 된 언어는 오늘 날 언어 분석학이 아무리 발달했다 하더라도 그 통일성을 밝혀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언어가 하나였다는 것은 인류가 한 조상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며, 한 가족이요, 한 형제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어가 나누어지므로 인류는 혈통을 달리하고, 종족을 분리하고, 지역을 나누며 분쟁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인류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으로 나아가 타락하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은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기를 작정하셨습니다. 이것이 노아 시대에 일어난 대홍수 사건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아라랏 산에 정착했고 그의 가족들은 방주에서 나와서 그곳을 개척하며 살았습니다. 아라랏 산은 지금의 터키 지방에 있는 가장 높은 산으로서 노아의 후손들이 장기적으로 정착하며 살기에는 부적당한 곳이었습니다. 산은 지세가 험했고 농사를 짓기에는 토양이 거칠었습니다. 노아 시대에는 그곳에 포도나무를 심고 양떼를 치며 유목민으로 겨우 살았지만 후손들이 증가하기 시작하자 삶의 터전이 협소해지면서 그들은 그곳을 떠나 동방으로 차차 옮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아라랏 산에서 바벨론은 정확히 남동쪽이지만 이를 가리켜 ‘동방’이라고 한 것은 기본 방향만을 나타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옮기다’라는 말 ‘나사’는 ‘잡아 뽑다’라는 의미로 유목민들이 이동을 할 때마다 유숙하기 위해 쳐놓았던 장막의 말뚝을 뽑는 것에서 나온 말입니다.
*사33:20 우리 절기의 시온 성을 보라. 네 눈이 안정된 처소인 예루살렘을 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그 줄이 하나도 끊이지 아니할 것이며..
저들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였습니다. ‘평지’라는 말 ‘비크아’는 ‘나누인 사이’라는 말로 산과 산 사이에 있는 평평한 골짜기를 의미하지만 70인 역은 ‘페디온’이라 하여 ‘넓은 평지’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장소는 새로운 유목지를 찾아 길을 떠난 사람들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았을 것입니다. ‘시날’은 바벨론과 에렉과 악갓이 포함된 지역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유브라데 강과 힛데겔 강 사이에 있는 바벨론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이기도 합니다.
*단1:2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
저들은 시날 평지에 도착하자마자 전체 회의를 열고 그곳을 자신들의 영원한 정착지로 정하였습니다. ‘서로 말하되’ 이 말을 직역하면 ‘각자 그 이웃에게 이야기하다.’라는 말로서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뜻을 물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배척하며, 인간끼리의 중지를 모아 일을 결정하되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결의하는 어리석음을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당시 저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홍수였습니다. 시날 평지는 유브라데 강변에 위치한 아주 기름진 유역이었지만 그곳은 방주가 도착했던 아라랏 산과 비교할 때 너무나 낮은 저지대이며 상습 침수 지역이었으므로 작은 홍수 피해라도 발생하면 피할 곳이 없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노아 홍수 같은 큰 홍수가 임하면 모든 사람과 생명이 전멸하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약점과 문제를 보완하고 영원히 안주할 계획을 세우기 위하여 전체 회의를 소집하여 각자 합당한 의견을 내고 지혜를 모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들의 관점에서 보면 지극히 타당하고 합리적인 방안이었습니다만 하나님 편에서 보시면 불신앙과 불순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형상대로, 자기의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축복하셨습니다.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문화 명령은 땅에 충만하게 퍼져 나가고 땅을 정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정복하라’는 말 ‘카바쉬’는 ‘발로 밟다’라는 의미로 마음대로 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뜻을 좇아서 땅에 포함되어 있는 광대한 자원을 개발하며 유용하게 사용하라는 축복의 명령입니다. 그렇다면 노아의 후손들은 이 축복의 명령을 받고 원대한 꿈을 가지고 모든 피조세계를 정복하며, 다스리며, 개척해야만 했습니다. 자기 속에 받은 하나님의 형상을 발전시켜 땅의 개척자, 땅의 관리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인류는 아담을 머리로 하여 인류 사회를 조직하고 발전시키며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협동하고 개척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의 자손들은 시날 평지에서 만족하고, 거기를 자신들의 주거지로 제한하고, 온 지면에 흩어지기를 싫어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축복의 뜻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명령에 불복종한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불순종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거역한 불신앙적 행동인 것입니다.
저들은 하나님께서 왜 홍수로 이 땅을 심판하셨는지 그 의미에 대해서 알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홍수를 지면에 내려 생명 있는 모든 것을 다 멸하셨는지 그 원인과 결과를 깊이 생각하거나 깨닫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홍수 심판 이후에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쉽게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불신앙이 저들을 사로잡아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들과 맺은 언약은 바로 무지개 언약이었습니다.
*창9:13-16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이것이 저 유명한 무지개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신 언약은 그 본질에 있어서 영원불변합니다. 그러나 언약이 주어지는 형식과 증거는 시대마다 달라지는데 아담이 타락으로 인해 생명이 단절되었을 때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 언약’을 주셨고, 모세 시대에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주신다는 언약을 주셨습니다. 다윗 왕에게는 다윗의 위를 이을 영원한 왕에 대한 언약을 주셨고, 이사야 시대에는 고난 받는 종의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노아에게는 무지개 언약을 주심으로 물 심판으로부터 보호를 약속하셨습니다. 이 언약은 특별히 노아의 후손뿐만 아니라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과 맺은 언약이며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않게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노아의 후손들은 홍수에 대한 불안이나 염려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비가 많이 오더라도 저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믿고 의지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 뒤에 일어나는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서 감당하시기 때문입니다.
구름이 한 지역에 모인다는 것은 큰 비가 내릴 전조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먹구름을 볼 때마다 노아 홍수 같은 물 심판이 일어나지 않을까 불안해 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염려에서 자유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무지개 증표를 주신 것입니다. 무지개는 주로 소나기가 그친 후 햇살이 비칠 때에 나타납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하여 햇살을 등진 맞은편에 무지개가 나타나면 하나님께서 홍수 심판을 기억하시고 홍수가 다시는 없을 것이라는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는 말이 한두 번도 아니고 무려 15회나 반복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신실하게 준행하신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들은 홍수 심판에 대한 염려나 불안을 떨쳐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홍수에 대비하여 인간적인 모든 방법을 동원하기로 결심하고 방안을 강구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홍수 재난에 대비한 것입니다. ‘자’라는 말이 반복되어 나오는데 이는 서로를 격려하거나 권유할 때 사용하는 말로 ‘준비하자.’ ‘시작하자.’라는 구호입니다. 저들은 구호를 힘차게 외치면서 뜨겁게 일을 진행시켰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열심이기는 하나,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고 그 언약을 무참히 짓밟는 악한 행위입니다. 즉 하나님과 맺은 계약에 대한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신앙한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행위 언약을 무참히 짓밟았습니다. 그 후에 아담의 십대 손 노아는 무지개 언약을 받았지만 그의 자손들은 이 언약마저도 하루아침에 밟아버리고 걷어치웠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의 약속을 무시하고 멸시해버린 것입니다.
현대는 이러한 불신앙의 사조 위에 ‘혼잡’으로 건설되었습니다. 바로 유물론, 무신론, 과학지상주의, 실존주의, 실용주의, 자연주의, 황금만능주의, 세속주의가 동맹을 맺고 혼잡의 철옹성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현대 철학이 한 수를 뜨고 있습니다.
18세기 라메뜨리는 말하기를 ‘사고하고 의지하는 모든 것은 감각 중에 그 기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현대 실증주의 사상을 낳았습니다. 포이엘바는 말하기를 ‘종교는 곧 없어진다. 그리고 그 자리에 물질이 대신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유물론주의자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말하기를 ‘신은 죽었다.’고 했습니다. 니체가 말하는 신은 유대인의 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류가 자랑하는 예술, 음악, 문학이라고 하는 것 역시 불신앙에서 그 출발을 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현대 예술은 향락의 도구가 되고 부속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술이라는 미명 아래 온갖 것을 만들고 생산하지만 지저분하기 짝이 없고, 모두 일종의 우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현대 교육 역시 불신앙에서 출발했습니다. 인간이 교육과제를 직접 만들고 그것을 주입식으로 가르칩니다. 생명체가 진화했다는 것을 원리로 하여 창조 세계를 부인하고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부르짖습니다. 과학이라는 것 역시 불신앙에서 출발했습니다. 과학은 얼른 보기에는 그럴듯하지만 그것이 자연을 훼손하고 파괴하고 모든 환경을 오염시키며 멸망의 지름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현대판 니므롯이 ‘바벨’ 즉 혼잡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전 세계의 교회마저도 온갖 미명의 연합 운동을 펼치고 있으며 그 결과 교회는 생명체, 유기체가 아니라 죽음을 소개하는 공동묘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불신앙의 동맹, 이것은 혼잡입니다. 이 불신앙의 집합주의는 역사적으로 전체주의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결국 적그리스도 세력의 집단으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2. 바벨은 과학지상주의입니다.
*창11:3-4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고..
‘견고히 굽자’라는 말을 직역하면 ‘굽고 또 굽자’라는 말인데 햇볕으로 벽돌을 건조시키는 것이 고대인들의 일반적인 방법인데 비추어 볼 때, 불로서 벽돌을 굽는 이 방법은 당시 문명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증거해 줍니다. 당시는 B.C 3,000-2500년 경이기 때문에 지금으로부터 약 4500-5000년 전에 이미 벽돌을 불에 구웠다는 것입니다. 내화 벽돌의 기원이 이처럼 오래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자연석이 풍족하지 못했던 시날 지역에서 가마를 이용하여 벽돌을 구워내는 방법을 개발한 것은 문명의 개가였습니다. 왜냐하면 불에 구운 벽돌은 자연석보다 더 내화성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했는데 벽돌과 벽돌을 견고하게 집착시키는데 진흙이나 회반죽 대신에 역청을 사용한 것입니다. ‘역청’ 이라는 말 ‘헤메르’는 ‘끓다’라는 말 ‘하마르’에서 나온 말로 바벨론이나 사해 부근의 지하 분수지에서 기름처럼 끓어오르는 ‘아스팔토스’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은 ‘도시’ ‘성읍’을 의미하며 ‘대’는 탑을 의미합니다. 곧 대제국 건설과 이를 기념하는 탑을 건설하는 것인데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성’은 인간이 살아가는 주거 공간을 의미하고 ‘대’는 인간이 신과 교통할 수 있는 종교 시설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는 바벨론 왕국 시대 때에는 그들의 신 말둑을 섬기는 신전으로 변하였고 그 숫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이것을 ‘지구라트’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지구라트의 최초의 모형이 바벨탑이며 이 건축 공사를 실행한 주체는 니므롯 왕조였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지구라트의 잔해를 분석한 결과 당시 저들이 쌓았던 바벨탑의 크기는 높이가 210m 로서 지금의 건물로 계산하면 약 70층이나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벨론 제국의 왕 느부갓네살은 시날 땅에 화려한 왕궁을 지었습니다. 그 안에 왕후를 위하여 하늘 궁전을 지었는데 이 건축물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이러한 과학 지상주의는 점차 발전하여 16세기에 접어들면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르네상스 운동이 그것입니다. 산업은 기계화되고 기술은 날로 발전하였습니다. 농업 위주의 산업이 공업화 되고 하늘에는 비행기가 날고, 바다에는 거대한 배들이 항해를 시작하였습니다. 인간은 컴퓨터를 만들었고 이제는 인공지능이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우주 과학은 사람을 우주로 보내고 달나라로 보내고 우주와 세계를 아주 가깝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 과학만능주의가 되었습니다.
실로 과학의 업적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고 머지않아 과학은 모든 분야 즉 의학, 물리학, 생명공학, 기계공학, 할 것 없이 인간이 상상할 수없는 업적을 이루고 말 것입니다. 과학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종교는 약자의 아편일 뿐이다. 인간은 때가 되면 죽는다. 내세 같은 것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현대인들은 너무나도 자기 이성을 믿습니다. 현대인들은 지나치게 자기 기술을 믿습니다. 현대인들은 너무나도 미래의 과학시대를 믿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한 가지 몰랐던 것은 그렇게 수고하고, 그렇게 애써서 만든 바벨탑은 언어의 혼잡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모든 지식, 모든 수고, 모든 노동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한 번 돌아봅시다. 인간이 지은 저 높은 건물, 저 거대한 운동장, 저 아름다운 도시들이 코로나 바이러스 앞에 맥을 추지 못하고 무용지물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병균 한 마리 때문에 지구상에 살아가는 전 인류가 벌벌 떨고 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바를 몰라 당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과학 지상주의의 결론입니다.
3. 바벨은 사탄주의요, 인본주의입니다.
*창11:4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내고..
시날 평지에서 거대한 탑을 쌓으려고 했던 사람들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비가 가장 많이 왔던 때를 기억하며 그보다 더 높은 하늘까지 탑을 쌓으려고 계획하였습니다. 저들은 탑을 쌓으면서 북쪽에 높이 솟아 있는 아라랏 산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 높은 봉우리보다 더 높은 탑을 쌓으면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안전할 것으로 믿었습니다.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자는 것은 사탄의 생각입니다.
*사14:13-14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자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노아의 후손들은 이미 사탄의 교만의 경지에 도달하였습니다. 자만심이 최고조에 달했던 것입니다. 겨우 벽돌 몇 장 불에 구워서 탑 하나를 만들었다고 감히 하나님을 대적한 것입니다. 불에 구운 벽돌은 물이 스며들지 못하기 때문에 무너질 염려가 없습니다. 벽돌과 벽돌 사이에는 역청이 발라져 있어서 방수가 철저히 되어 그 안에 피난하면 안전할 것입니다. 이 탑을 쌓기만 하면 이제부터 홍수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이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필요도 없고 이제는 먹고 마시고 놀아도 책망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염두에 둘 필요도 없고, 구름 속에 무지개가 있든지 말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비가 오든지 말든지 오직 인간의 지식으로, 지혜로, 지능으로, 능히 편히 살고 안전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름을 높이고 인간의 이름을 온 세상에 널리 알리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부질없는 허영심입니다. 바벨 공사는 그 목적과 행동과 존재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배역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하는 일에 그 목적과 행동에 있어서 항상 중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의 목적과 행동이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주권으로 지표가 확립되어 있지 아니할 때 그 역사나 사건이나 행동의 존재 가치는 벌써 상실되고 없는 것입니다. 저들은 하늘까지 높아지고 싶었습니다. 자신들의 인생에 하나님이 필요가 없고 오직 자신의 일은 자신들이 결정하고, 해결하고, 집행하고, 다스리려는 생각입니다. 하늘까지 높이지려는 인생을 향하여 예수께서 엄히 책망하셨습니다.
*마11;23-24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우리의 이름을 내고’ 이 말을 직역하면 ‘우리 스스로를 위하여 이름을 새기고’라는 말입니다. 이는 바벨탑을 건축한 일차적 동기입니다. 유대인 철학자 필로에 의하면 당시 사람들은 각자 벽돌에다 자신들의 이름을 새겼다고 합니다. 그 탑이 인류 역사 속에 영원히 존재할 것을 믿었고 후손들에게 자신들의 이름을 전하기 위하여 벽돌에 이름을 새긴 것입니다. 참으로 무신론적인 인본주의와 허망한 인간의 명예욕을 드러내 줍니다.
실제로 세계 어느 나라에나 있는 성벽이나 건축물에는 그 건축물을 시공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비록 작은 성이지만 우리나라의 북한산성이나 남한산성을 가보면 돌에 자신들의 이름을 새기고 영원히 기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늘에까지 높이 쌓은 탑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벽돌 하나하나에 새겨진 사람들의 이름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 건축자들의 이름은 역사 속에서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이름을 드러냄이 없이 예수를 위하여 헌신하며 충성되게 살아간 주의 종들의 발자취는 인류 역사에 길이 남아 있습니다.
인본주의는 공명주의입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특색입니다. 현대인은 이 세상에서 하늘을 정복하려는 자들입니다. 땅과 바다는 이미 거의 정복했기 때문에 하늘까지 정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생의 고통과 질병까지도 지구상에서 완전히 퇴출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영원한 낙원을 만들고 인간이 거기 주인이 되어 자기 이름을 내려는 것입니다. 노아의 자손들은 이러한 정신적 바탕에서 저 거대한 시날 평지의 공사를 착공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날 인본주의 종교요, 인본주의 문화요, 인본주의 철학이요, 인본주의 예술이요, 인본주의 정치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자기를 믿고, 자기의 이름을 내고, 자기의 삶을 이룩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입니다.
*잠28:26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
바벨탑 건축의 두 번째 동기는 ‘온 땅에 흩어짐을 면하자’라는 것입니다. 대홍수를 경험했던 인간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방주에서 나온 그들은 처음에는 겸손한 자세로 새 생활을 시작하였고 차츰 안정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안정된 생활에 익숙하면서 인구가 증가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지혜를 모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그들이 관심을 가졌던 몇 가지 사실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첫째, 인간은 혼자서는 아주 미약한 존재이지만 여러 사람들이 힘과 지혜를 모은다면 큰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흩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자신들이 뭉친 힘으로 천연 재해나 홍수 재난이나 하나님의 심판들도 능히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인간이 역사와 문화의 주인이기 때문에 인본주의적 세계 질서 정립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인간들이 모이기만 하면 국가를 만들고 왕을 세우고 힘을 모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뚜렷한 자의식과 자기 잠재력의 비전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들을 실현할 수 있는 규합된 힘을 과시하기 위하여 도시를 건설하고 집을 짓고 도로를 만들고 탑을 높이 쌓고 문화를 창출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마음을 같이 하고, 뜻을 같이 하고, 힘을 모으자 이 세상에서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인류 최초의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강 문명이 태동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 문명의 발상지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한 가지 실수를 한 것은 자신들의 삶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을 제외시켰던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진정한 주인이신 하나님을 배제시키고 인간들이 사탄이 되어 천지와 만물의 주인이 되고자 한 것입니다. 저들의 허물은 함께 모여서 원대한 이상과 꿈을 가지고 그것을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결실을 맺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공로는 인간에게로 돌아가고 모든 영광은 인간이 독차지하는 그야말로 사탄의 왕국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어리석은 계획을 수포로 돌리시기 위하여 대화의 매개체인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바벨탑 건축을 중단시켜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고 진행하는 인간의 모든 계획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잠19:21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딘일 언어를 주신 것은 서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선물을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는데 악용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혜의 선물을 거두어 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탑 공사 현장을 직접 둘러보시고 난 후 인간이 바벨탑을 쌓았던 동기가 한 족속이요 언어기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단일 민족이 단일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의사소통이 원활하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대로 악을 행하기에 담대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이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무능하셔서 인간들의 악을 막지 못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불순한 생각이 절정에 달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들이 하나가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현재 사용하고 있는 언어를 혼잡하게 하였습니다.
‘혼잡하게 하다’라는 말 ‘발랄’은 ‘뒤섞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를 어떻게 섞으셨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한 가지가 아니라 수천 가지, 수만 가지로 나누어서 분리시키고 변화시켜 버린 것입니다. 언어의 분리로 말미암아 인간들은 온 지면으로 흩어졌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는 단순히 인류를 징계하려는 목적만이 아니라 애초에 인간을 지으신 목적에 부합하려는 것입니다. 인간이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계획하시고 명령하신 축복이며, 따라서 인간의 역반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자신이 이를 강권적으로 성취시킨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과 계획을 역사 속에 성취시키는 신실한 분이십니다.
‘바벨’이라는 이 단어의 유래에 대해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다.’라고 하였습니다. 인간들은 언어가 동일한 사람들끼리 온 지구상으로 흩어졌고 그들끼리 민족을 만들고, 나라의 경계를 정하고, 인류 역사를 이룩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벨은 결코 재앙이 아니라 축복이요 선하신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행17:26-27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오늘 날 고대 바벨탑의 유적으로 가장 유력시되는 탑이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유브라테스 강 동쪽에 자리 잡고 있으나 기초만 남아 있을 뿐 흔적이 별로 없고, 하나는 유프라테스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역청과 벽돌로 된 구조물이 아직도 7층 높이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 탑을 보면서 시날 땅에만 살려고 했던 인간들의 작은 마음과 교만했던 마음을 회개하고 인간을 온 땅에, 온 우주로 보내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진정한 바벨의 축복을 깨닫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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