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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초일(詠初日)
떠오르는 태양
조광윤(趙匡胤, 927~976)
아침 해가 솟아올라 환한 빛 눈부시고
이 세상 모든 산이 불타는 듯 벌겋다
둥그런 태양이 순식간에 떠올라서
온갖 별과 조각달을 단숨에 물리치네
太陽初出光赫赫(태양초울광혁혁)
千山萬山如火發(천년만산여화발)
一輪頃刻上天衢(일륜경각상천구)
逐退群星與殘月(축퇴군성여잔월)
어둠과 추위를 물피치고 빛과 열을 주는 태양은 고마움을 넘어 생명의 원천
이다. 그래서 원시사회에서부터 태양은 절대적 존재로서 숭배의 대상이 되었
다. 이집트 등 여러 고대국가에서는 태양신을 숭배했으며 고대 중국에서도 황
제는 태양과 같은 존재로서 천명을 받들어 이 세상을 지배하는 신의 대리인 즉
천자(天子)였다. 송나라를 건국한 태조 조광윤은 집안 대대로 군인 출신이었으나
책 읽기를 부지런히 했고 황제가 되어서도 과거제도를 확립하고 송나라의 문치
주의 전통을 세웠다. 송 태조는 자신을 태양으로 형상화했다. 하지만 지금은 민
주주의 시대다. 민심이 천심이고 국민이 하늘이다. 이 시와 같은 권위주의는 끝
났다.
[작가소개]
송태조 조광윤[ 宋太祖 趙匡胤 ]
송왕조를 세우고 문치주의의 터전을 마련한 창업황제
출생 – 사망 : 927 ~ 976
조선의 정조 즉위년 8월 8일, 정조는 경연 자리에서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임금을 내신 까닭은 백성을 위함이다. 송태조는 ‘짐(朕)은 백성을 위하여 지키노라.’고 말했다는데, 참으로 절실하고 합당한 말이다.(…) 송태조는 비록 학문을 깊이 익히지 못했지만, 현철한 임금이었다.” 과연 송태조 조광윤은 황제가 되기까지 밤낮 말에 올라 전쟁터를 달린 군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다스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장군이던 시절 늘상 수레에 책을 가득 싣고 다녀서, “뇌물을 실은 수레라고 합니다”라는 참소를 들은 황제가 직접 확인해 보고는 놀랐다는 일화가 있다.
진교 회군으로 새 왕조를 세우다
907년, 당나라의 절도사 주전충은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당왕조를 무너뜨리고 후량(後梁)을 세웠다. 그러나 그의 왕조는 겨우 17년 만에 후당(後唐)으로 교체되었고, 다시 후당은 14년 만에 후진 (後晋)으로, 후진은 11년 만에 후한(後漢)으로, 후한은 불과 4년 만에 후주(後周)로 바뀌었다(뒤로 가면서 주나라에서 당나라까지 역대 중국의 유력한 왕조들의 이름을 거꾸로 되짚는 격이라 재미있다). 모두가 지방행정권과 군권을 가진 절도사가 힘을 얻자마자 창을 거꾸로 잡고 제위를 찬탈하는 식이었다.
이렇게 다섯 왕조가 뻔질나게 교체되었으나 이들은 사실 화북 일대를 대략 장악했을 뿐, 변방에서는 오(吳), 오월(吳越), 민(閩), 초(楚), 형남(荊南), 남당(南唐), 남한(南漢), 북한(北漢), 전촉(前蜀), 후촉(後蜀)의 10개 소왕국들이 잇달아 나타났다 사라지고 있었다. 이 시대를 ‘오대십국’ 시대라고 한다(이 밖에 독립왕국을 선포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독자영역을 지배했던 절도사들도 여럿 있었다).
한편 북방에서는 거란족이 요나라라는 이름으로 강력한 왕조를 세우고, 후진의 고조에게서 만리장성 이남의 ‘ 연운16주 ’를 빼앗는 등 중국을 위협하고 있었다. 실로 위진남북조 시대 이후 3백여 년 만에 찾아온 중국의 분열기요 혼란기였다.
조광윤은 927년, 후당의 수도 낙양에서 근위장교 조홍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3백여 년 전 위진남북조의 분열을 해결했던 수문제 양견의 경우 태어날 때부터 유력한 가문이었으나, 가난한 군인의 아들인 조광윤은 집안 덕을 거의 보지 못하고 21세 때 집을 나와 천하를 떠돌아 다녔다. 그러다가 곽위라는 절도사의 부하가 되었는데, 곽위는 950년에 후한을 무너뜨리고 후주의 태조가 되었다. 이때부터 조광윤의 출세길이 열리기 시작해서, 2년 뒤 근위대장의 신분으로 수도 개봉에서 근무하다가 태자 시영(柴榮. 곽위의 아들들이 일찍 죽음에 따라 양자로 들어가 태자가 되었다)의 눈에 들어 그의 친구이자 오른팔이 된다. 그리고 시영이 954년에 즉위하면서(후주 세종) 가장 유력한 장군으로 떠오른다.
조광윤은 북한과 후주가 고평에서 충돌했을 때 죽을 위기에 처한 세종을 구하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명성을 날렸으며, 그 뒤에도 다섯 번 전쟁에 나가 모두 승리를 거둠으로써 마침내 절도사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이 지긋지긋한 난세를 내 손으로 끝장내겠다”며 천하통일의 뜻을 품고영토를 넓혔으며, 내정에도 충실하여 민생과 재정을 안정시켰던 ‘오대십국 최고의 명군’ 세종이 그만 959년의 거란 원정길에 병사하고 만다. 황제의 자리는 졸지에 일곱 살에 불과했던 시종훈(공제)에게 돌아갔다. 어린 황제와 강력한 절도사. 오대십국 시대의 정변 조건은 완벽하게 갖춰졌다.
마침내 960년, 거란군의 침공을 물리치기 위해 출정했던 조광윤은 ‘진교의 변’을 만난다. 개봉 북쪽의 진교역에서 머물다가 술에 취해 잠든 그에게 부하 장수들이 억지로 황제의 옷을 입히고는 황제로 추대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조광윤이 계획적으로 쿠데타를 해 놓고 꾸며낸 이야기일 것이라고 여기는 수가 많다. 하지만 거란군의 침공은 분명히 있었으며, 당시 그가 출정하면서 인질이 될 수 있는 가족들에게 아무런 대비도 없이 출정했다는 점 등을 들어 실제로 “얼떨결에 황제”가 된 것이리라고 보기도 한다. 아무튼 조광윤의 군대는 진교에서 회군하여 황궁을 점령했다. 그리고 공제의 양위를 받아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송이라고 했다. 스무 살 때만 해도 당장 어떻게 하루를 살아갈지 기약이 없던 그가 3백 년 송왕조의 태조가 된 것이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나라의 근심을 없애다.
뜻밖에 전 황제가 죽고 어린 황제가 즉위하는 ‘행운’을 맞이한 것도, 그 기회를 활용해 역성혁명을 벌인 것도 수문제나 송태조나 똑같았다. 하지만 송태조는 즉위 후 자신에게 제위를 넘겨준 어린 황제를 비롯한 전 왕조의 황족을 살육했던 수문제와 달리, 시종훈과 그 친인척들을 정중히 대접했다. 또한 한고조나 명태조 같은 창업황제들과 달리,자신을 황제로 이끌어 준 공신들을 ‘토사구팽’시키지 않았다-굳이 따지자면 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적어도 그 과정에 피비린내는 전혀 없었다.
황제가 된 몇 달 후, 송태조는 진교에서 자신을 황제로 받든 석수신, 왕심기, 고희덕, 장령탁, 조언휘 5대 공신을 불러 술자리를 가졌다. 그리고 거나하게 취했을 무렵 이렇게 말을 꺼냈다. “경들이 없었더라면 어찌 지금 짐이 이 자리에 있었겠소? 진심으로 감사하오.(…) 하지만 한편으로 불안하기 짝이 없소. 물론 짐은 경들을 전적으로 믿지만, 경들 중 누군가의 부하들이 언젠가 딴 마음을 먹고 술 취한 주군에게 황제의 옷을 입힐지 알 수 없지 않소?”
그런 말을 듣고 “그것도 그렇군요”라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다섯 공신은 혼비백산하며 그 자리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송태조는 그들에게 계속 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아, 인생이란 무엇이오? 절벽 틈을 달리는 말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을. 모두들 하나같이 부귀를 원하지만, 얼마 안 되는 삶을 편안히 살다가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 그것뿐인데, 그나마 지키기 힘드니 말이오.(…) 그러니 경들은 각자의 병권과 지위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면 어떻겠소? 그러면 여생은 아무 염려 없이 평안할 수 있을 것이오.”
또한 송태조는공신들의 자녀와 자신의 자녀를 혼인시켜 서로 딴 마음을 먹지 않도록 하자고 권했다. 결국 석수신 등은 황제의 뜻에 따라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 지방으로 내려갔다. 이 일을 두고 “술잔을 들면서 공신들의 병권을 없앴다”고 하여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이라 하는데, 오대십국 내내 정권을 불안케 했던 절도사들의 병권을 술자리 한 번으로 해결해 버렸다는 말이라, 곧이듣기 힘들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 다섯 명의 공신 중에는 한신이나 조광윤처럼 두드러지는 인물이 없었다는 점, 그리고 당시 오대십국의 혼란에 지긋지긋해 하던 민심 등을 고려하면 아주 어이없는 이야기도 아니다.
송태조는 절도사들에게서 독자적 군지휘권, 행정권, 재정권 등을 순차적으로 빼앗아서 그들의 독자세력화를 막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을 중앙에서 파견되었다가 일정한 임기를 마치면 교체되는 문관 출신으로 교체하여, 지방의 반란 가능성에 쐐기를 박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오대십국 때에는 고려 무신정권 시대처럼 유력한 문무 귀족들이 모여 국정을 좌우하는 추밀원이 정치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송태조는 이 추밀원에서 무관과 대귀족을 배제하고는 종래의 재상부를 강화했다. 이로써 군사 문제는 황제 직속의 비서관들이 추밀원에서 담당하고, 그 외의 국정은 재상부에서 담당함으로써, 무관들은 권력을 직접 행사할 수 없게 되며 문관이라도 재상부의 범위를 넘어 군사지휘권까지 손에 쥘 수 없게 되었다. 그만큼 황제의 권력이 강화된 것이다.
왕권을 튼튼히 하는 한편,통일 사업에도 열을 올렸다. 963년에 형남을, 965년에 후촉을, 971년에 남한을 멸망시켜 송나라의 영역을 넓혔다. 이들 소왕국들은 방만하고 부패한 정치운영으로 질서가 무너진 상태였기에 병합이 쉬웠다. 다만 오월 지역을 뺀 강남 일대를 차지하고 있던 남당은 간단치가 않았는데,오월과 남당을 이간질하여 서로 싸우게 한 뒤 모두멸망시켰다(975년). 당시 남당의 후주(後主) 이욱은 서현을 사신으로 보내 “우리는 후주(後周) 시대부터 대국을 섬겨 신하의 도리를 다해왔다. 무슨 명분으로 우리를 공격하느냐?”고 물었는데, 송태조는 화를 내며 “천하는 하나의 집이다! 그대는 자기 집안에서 남이 코를 골며 자고 있다면 참을 수 있느냐?”고 외쳤다고 한다. 이로써 오대십국의 잔재는 남쪽의 오월과 북쪽의 북한만이 남았는데, 이는 송태조의 사후인 978년과 979년에 각각 병합되었다. 한편 최대의 안보 불안 요인인 북방의 거란에 대해서는 무력으로 맞서기보다 많은 공물을 주면서 회유하는 식으로 대응했다.
형의 문치주의를 계승한 송태종 조광의
송태조는 괄괄한 무인 출신답게 곧잘 버럭 성을 내기도 했는데, 곧바로 자신이 지나쳤다고 반성하며 잘못을 바로잡았다고 한다. 또한옷 한 벌을 빨고 또 빨아가며 입고, 생일 같은 잔칫날에도 일반 가정 수준으로 상을 차리게 하는 등 죽을 때까지 검소함을 실천했다. 그래서바야흐로 사회의 주축으로 떠오르고 있던 사대부 들에게도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더구나 송태조는이들 사대부를 적극적으로 조정에 받아들이는 정책을 취했다. 바로 과거 제도의 강화였다. 황제가 직접 시험 문제를 내고 합격자를 뽑는 전시(殿試) 제도를 처음 도입하고, 과거의 규모와 횟수를 크게 늘려 여기서 뽑은 관리들을 종래 세습 귀족들이 차지하고 있던 관직에 충원했다.
또한태묘 안에 ‘맹서비’를 세워 두 가지 유훈을 후손에게 남겼다. 하나는 “후주의 시씨 자손들을 죽이지 말고 우대하라”였고, 또 하나는 “사대부와 상소를 올린 사람을 죽이지 마라. 아무리 불쾌한 말을 하더라도 죽여서는 안 된다”였다. “이를 어긴 자는 천벌을 받으리라”는 경고도 덧붙였다. 이로써송나라는 중국 사상 최초의 ‘사대부의 나라’가 됐으며, 당시 사대부의 위상은 뒤를 이은 원, 명, 청에서보다도 훨씬 높았다.
송태조는 생전에 비빈이나 자녀 문제를 둘러싼 잡음을 남기지 않았으나, 사후에는 약간의 의문이 남았다. 976년, 그가 갑작스레 50세로 숨을 거두자 송황후는 자신의 아들인 진강혜왕 조덕방에게 제위를 물려주려고 급히 입궐하라 했다. 그러나 정작 나타난 것은 송태조의 동생인 조광의(趙光義)였다. 그는 놀란 황후에게 이른바 송태조의 비밀 유언이라는 것을 내밀었는데, 거기에는 동생 조광의를 차기 황제로 삼는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를 재상 조보를 비롯한 대신들도 추인함으로써 조광의가 2대 황제, 송태종으로 즉위했다. 이를 두고 과연 그런 비밀 유언이 있었을까, 조광의의 조작이 아닐까, 아니 송태조의 죽음 자체가 조광의의 음모의 결과가 아닐까 하는 추측들이 있다. 한편 당시 송태조의 세 번째 황후로서 권력욕이 강했던 송황후를 배제하기 위해 송태조가 결단을 내린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런 쑥덕공론이 일고 있음을 모를 리 없던 송태종은 형의 문치주의정책을 더욱 강화시켜 사대부를 우대하고 무신들을 억눌렀다. 이는 빛과 어둠을 함께 남겼다. 역대 최고의 문치주의 결과 소식, 구양수, 황정견, 매요신 등 천재 문인들이 나타나고, 왕안석, 사마광 같은 대정치가 겸 문필가도 나왔다. 또한 범중엄, 장재, 주돈이와 남송 시대의 주희, 정이, 정호, 육구연 같은 사상가들이 나와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유학을 창시하기도 했다. 과학기술도 발달해서 심괄 같은 ‘르네상스적 천재’가 활약하는가 하면 “중국의 4대 발명”이라는 종이, 나침반, 화약, 인쇄술 중 종이를 제외한 세 가지가 송나라 때 확립되었다.행정체제 개선과 농업기술 발달에 힘입어 경제적 풍요 또한 이루어졌다. 이후 원나라가 남송을 멸망시킬 때, 쿠빌라이의 조정에서 지내던 마르코 폴로는 “내가 본 세상의 어떤 나라도, 그 절반만한 부를 지닌 나라가 없었다”고 감탄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문을 앞세우고 무를 억누르는 정책은 만성적인 국방 불안과 정치 갈등을 가져왔다. 요나라(거란)의 위세에 송나라는 제대로 대응할 힘이 없었으며, 결국 1004년에는 “전연의 맹약”을 맺어 요에게 사실상 굴복하고서 평화를 허락 받았다. 하지만 얼마 뒤에는 다시 여진족의 금나라가 일어나면서 화북 지방을 빼앗기고 남송이 되었으며(1127년), 북벌의 꿈도 헛되이 다시 원나라에게 유린된다(1279년). 중국의 통일왕조 치고 송나라만큼 이민족의 침입에 무력했던 왕조는 없다. 또한 온 천하 사람이 사대부 되기를 바라고, 사대부는 과거 급제를 바라고, 급제자는 고위직을 바라다 보니 시험 지옥과 당리당략에 따른 당쟁을 면하지 못했다.
송태조는 오랜 분열과 혼란을 극복하고 통일왕조를 세운다는 사명을 수문제와 같이 훌륭히 완수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거의 피를 흘리지 않았고, 백성을 위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새로운 문명의 기반을 이룩한 점은 수문제보다 훌륭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피 흘리기를 회피하는 자는, 언젠가 크게 피를 흘리게 될 위험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송태조 조광윤 [宋太祖 趙匡胤] - 송왕조를 세우고 문치주의의 터전을 마련한 창업황제 (인물세계사, 함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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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무공 선생님
댓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오월에도 더욱 정진하사
좋은 글 많이 쓰시길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