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광양 항만 선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松 汀
은재 신석구 목사의 생애
양 홍 석 (전남동지방 칠봉교회 담임)
“내 마음에 예수가 주님으로 들어온 것은 8.15 해방의 감격 속에 있었던 18세 때의 일이다. 상공학교 기계과 졸업반이었던 나는 잊을 수 없는 내 영혼의 아버지 신석구 목사님을 만났다. 한학자로 기독교에 개종하고 협성 신학교를 졸업한 후 소위 동양의 예루살렘 평양이 그리워서 서북지방을 목회지로 택했다는 이 늙은 백발의 목사에게서 나는 끝없는 신의 사랑을 느꼈다. 후에 읽은 빅톨 위고의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미리엘 사제나 도스토예프스키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그린 로시마 장로같은 성자의 사랑스럽고 인자한 모습이 바로 신석구 목사님의 성스런 모습이었다. 그의 뜨거운 눈물어린 설교는 나라를 사랑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으라는 것이었다.
위 글은 변선환 선생님이 1980년초 크리스챤 신문에 기고하신 자전적 글로 바젤 유학이후 신학적사상을 밝혀 놓은 신학연구기고문이다. 신석구목사는 평생 목회자이며 평생 민족을 위한 사람이었다. 오늘 이시간 잠시 그 분을 회상하는 변선환선생님의 글을 인용하며 신석구 목사의 생애를 더듬어보고자 한다.
출생 그리고 의인(義人 : 옳은 사람)이 되고자하는 꿈과 좌절
신석구는 목회자이다. 그것도 참으로 고지식한 목회자였다. 예수를 안뒤 그는 단 한번도 자의로 교회를 떠나지 아니하였고 생이 마쳐지는 그 순간까지 목회를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의인(義人 : 옳은 사람)이 되고자 하던 그의 마음이 만들어놓은 자신의 내면적 인생철학일수도 있다. 오직 그가 목회를 잠시 멈춘 시기는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옥중생활뿐이었다. 수표교목회가 그러하고 진남포목회가 그러했다. 그러하기에 그는 민족을 사랑한 목회자라 한다. 옥중생활과 목회생활이 그에 대해 기록한 매 연표마다 떠나지 않던 목회자, 어찌보면 그의 옥중생활 역시 목회의 일부분이라 할수 있을 것이다. 그의 삶은 목회와 민족을 위한 삶이었고 그의 목회는 민족을 살리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신석구(申錫九)는 1875년 음력 5월 3일 충북 청주군 미원면 개동(현재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금원리)에서 아버지 신재기와 어머니 청해(靑海) 이씨(李氏) 사이에서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윤재(允哉)이며, 호는 은재(殷哉), 죽촌(竹邨), 춘정(春汀)이다.
신석구도 당시 여느 집은 아이들처럼 8세부터 글 공부를 시작했다. 그의 선생은 아버지요 할아버지였다.
어려서부터 한학공부에 대해 소위 위대한 성인들의 설화처럼 3살에 혹은 5살에 사서삼경을 독파했느니 혹은 한시를 지었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없다, 억지로 꾸며낼 필요도 없을뿐더러 신석구는 평범한 여느집 자녀처럼 한학을 시작할 당시만해도 그의 가정은 평범한 선비의 집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의 자서전에서 엿볼수 있듯이 작은 소망이 있었으니 그것은 옳은 사람(義人)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옳은 사람이 되라난 말삼이 귀에 저저서 항상 옳은 사람 되랴는 마암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十三歲時에 비로소 小學을 배호매 참 사람 되는 冊이라 生覺하고 三冬을 꼭 跪坐하야 읽엇다. 그러나 同類가 無함으로 小學을 다 읽은 후에는 跪坐하기도 廢하였다.”
삼동(三冬) 곧 삼년을 필하는 동안 그는 소학(小學)을 무릎으로 시작하여 무릎으로 끝을 맺는 글읽기를 행하였다. 어린 신석구에게 있어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소중한 구도행위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그는 옳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한 행동이 그의 무릎꿇고 책읽기라는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그가 무릎꿇고 책읽기를 멈춘이유를 같은 동류가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연결하여 그러한 점에서 자신의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음이 자신의 결점이라 말하기도 한다. 옳은 사람이 되고자 했으나 자신의 의지가 너무도 약했음을 탓하는 내용이라 할수 있다.
그러나 어린시절이 그리 평탄하지 않았던 신석구로서는 그의 글읽기를 멈추게 된 계기가 동류가 없어서가 아니요, 그의 정신적 디딤목을 잃게 되었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옳을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그의 가계도를 살펴보면 그 짐작이 가능하다.
1881년 6세 어머니(1845-1881)를 잃은 것이 부고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3년뒤인 1884년 할아버지 죽음을 경험한다. 1886년에는 양부인 큰 아버지 별세하고 마침내는 15세되던해 할머니와 아버지(1844-1889)마저 세상을 떠나고 만다. 9년사이 5명의 가족이 어린 석구가 보는 앞에서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리고 신석구는 형인 석규와 함께 15세부터 17세까지 3년간 아버지와 할머님의 삼년상을 치루게 된다.
무릎으로 책읽기를 폐하는 시점이 15세즈음인 것으로 보아 그것은 신석구의 의지의 나약함때문이라기 보다 주변의 상황적 영향이 너무도 강했음을 엿볼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한 점에 미루어볼때 그로인해 그의 무릎으로 글읽기도 멈추게 된것이며 정신적 공황도 시작되었던 것이다.
3년상을 꼬박치루어낸 17세의 소년의 충격은 적잖이 아로새겨졌다.
그리고 사춘기적 가슴속에 정신적 공황과 육체적인 방종이 뒤따른 사실은 예상치 못할 수순은 아니었던 것이다. 소위 1차 타락시기인 당시 신석구는 18세부터 제일 음탕한 시골에 서 유부녀와 동거생활을 시작한다. 하류계층의 여인과의 짧지 않은 동거는 주변인들의 사별이 가져다준 외로움의 도피처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2년여의 짧지않은 시간을 방황의 세월로 보내던 신석구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게 되는 계기는 율곡의 저서를 통해서 였다. 20세가 되던해 율곡의 격몽요결을 통해 학문을 이룬이의 자세에 대해 깨닫게 된것이다.
“栗谷先生의 격몽요결을 보고 先覺하기를 나의 才質과 處地로 큰 文士는 될 수 없으나 이 冊에 쓴대로만 實行하면 義人은 되겠다.”
격몽요결의 내용은 자신의 현재의 모습을 직시하게 하였으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유언처럼 그의 마음속에 메아리친 의인(義人 : 옳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다시 품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그 후로 신석구는 그의 타락된 생활을 접고 평상적인 생활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때부터 서당훈장을 하면서 1897년 스물세살의 젊은이 신석구는 여섯 살 아래인 처녀 전주이씨 이치헌의 맏딸과 백년가약을 맺는다.
그러나 1900년 그 평상심을 사라지게 하는 일이 있었으니 곧 그의 형 석규의 죽음이었다.
“나는 금일까지 권선징악이라는 말에 속았다. 이 세상에 이치라는 것은 없다. 이 세상이란 아무짓을 하여서라도 잘 살면 그만이라고 외쳤다. 그때부터 무슨 불의한 일이든지 기회만 있으면 양심의 가책까지도 눌러가며 기탄없이 행하였다.”
집도 없이 살던 형편인지라 형님집에 함께 거하던 내외는 이후 형의 죽음이후 유복자로 태어난 조카딸마저 책임질 형편이 되니 그 심적 육신적 부담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결국 형 석규의 죽음 이후 두 번의 또다른 유혹의 길에 접어들었던 신석구는 1906년 음력 10월 초겨울 어느 새벽, 1년 9개월이 된 아들 태화(1905-1955)와 부인만을 내버려둔채 자신의 거짓 사망신고를 한뒤 고향을 등지고 만다.
모진세월, 과거를 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해도 안되는 일들, 도저히 납득할수 없는 현실들, 수치와 의인(義人 ; 옳은 사람)이 되고자 하던 꿈이 산산히 부서지는 순간들, 그와 더불어 너무도 여리고 나약하게 살았던 자신을 문서상으로나마 무덤속에 묻어두고 새로운 출발을 위해 신석구는 모든 것을 버린것이다.
개종 그리고 새로운 삶의 자리
타락과 과거의 슬픔이 고향을 등지게 된 신석구에게 큰 동기를 부여했지만 무엇보다도 신석구가 고향을 떠나게 된 궁극적인 계기는 친구 김진우라는 이로 인해서였다. 김진우라는 이는 전당포를 운영하는 이로서 당시 꽤나 이름있던 양반집 자제였다.
김진우는 신석구에게 그의 전당포 서기를 맡겼다. 글씨에 일가견이 있던 신석구에게는 참으로 좋은 기회가 아닐수 없었다. 그런데 행복도 잠시였고 전당포 사업은 5년만에 파산을 하게 되고 “사기 횡령” 혐의가 김진우에게 씌워지게 된다. 그러한 때 자신의 형편도 딱했던 신석구는 친구 김진우가 노모와 돌볼 가족이 많았다는 연유로 대신하여 자신이 수감생활을 하게 되니 수감기간은 그가 칭병(稱病)으로 석방되기까지 3개월기간이었다.
이제 그에게 있어 그의 고향은 가족도, 과거도, 아이도, 자신도 그 무엇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분들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1906년 초겨울 그는 결국 자신의 이름조차 지우고 자신의 고향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정처없이 흘러간 시간은 한 겨울을 넘기게 될 즈음인 1907년 음력 정월, 신석구를 서울까지 상경하게 한다. 신석구는 그곳에서 우연히 고향 친구 김규흥을 만난다. 그리고 그의 도움으로 윤자정이라는 이의 집 훈장일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방황을 접고 안정된 생활을 하려던 차에, 고향친구 김진우가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그를 찾아오게 된다.
만나야 될 사람은 어디에 있던지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인지 신석구가 고향을 떠난 직후 김진우 역시 청주를 떠나 서울로 올라와 몇가지 일에 손을 대어 보았으나 모두 실패하고 이제 서양 약 몇병을 얻어 시골에 팔러가는 길에 소식을 듣고 신석구를 만나러 왔다는 것이다. 그 뿐아니라 이제 약 몇병을 받아 팔러가는 길에 동참하기를 권한다.
집을 떠나온지 넉달이 되던 때였다. 집도 고향도 모두 떠나온 터였다 그런데 그 방랑의 세월을 접고 이제 새 삶을 시작하여 안정이 되고자 하는때에 다시 고생을 시작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쉽게 신석구는 결론을 내린다.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생한번 못해본이가 저토록 힘든길을 가는데 내가 저를 위하여 고생하기로 시작하였으니 끝까지 도와주어야 겠다는 것이 신석구의 결론이었다. 친구를 위한 의리를 자신의 안녕보다 더욱 크게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우직한 청년 신석구는 결심이 서자마자 바로 윤자정의 집을 떠나 경기도 장단군 장남면(현재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고랑포 마을에 도착하여 전당포를 함께했던 심정으로 약국을 차리게 된다. 친구 김진우는 마치 마련된 곳을 찾아가듯 그를 이끌었고 그렇게 신석구는 고랑포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런데 힘들게 시작된 약국일에 김진우는 좀처럼 관심을 갖지 않았다. 심지어 약국일에는 전념하지 않았고 주변에 이웃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았다.
그리고 며칠후 그 친구를 통해 그 연유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였으니 곧 예수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실 김진우는 약국을 세움이 목적이 아니요, 서양약을 매개로한 전도인의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3개월여간의 끊임없는 친구와 교인들의 전도공세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끝내 신석구는 생애 처음 교회를 출석하게 되니 그 때가 1907년 7월 14일 신석구 나이 33세 되던 해이다. 그는 그의 자서전을 통해 이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참으로 나라를 救援하랴면 예수를 믿어야겠다. 나라를 救援하랴면 잃어바린 國民을 차자야겠다. 나하나 悔改하면 잃어바린 國民 하나를 찾는 것이다. 내가 믿고 傳導하야 一人이 悔改하면 잃어바린 國民 하나를 찻는 것이다. 그리하야 잃어바린 國民을 다 차즈면 나라는 自然 救援할것이다.”
고민의 흔적은 그의 자서전속에 잘 나타나고 있다. 신석구는 청년시절 러일전쟁과 을사조약을 경험하며 나라의 운명이 기운 것은 도무지 참된 도가 없는 까닭(太無道)으로 여긴다. 그러던 중 친구 김진우의 추천으로 예수교를 접한 이후 성경을 사보게 된다, 당시 성경을 사보게 된 이유는 그 내용을 알아 철저히 반대해 보기위해서 였다. 예수교는 유교를 폐하는 사교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성서를 읽던 중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왔노라”라는 말씀을 보며 예수교가 들어온 것은 유교를 폐하러 온 줄 알았는데 유교의 불완전함을 완전케 할 도리가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을 던지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아직은 깨닫지 못하나 유교에서 사람되게 못하는 묘리가 예수교에는 있을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고 ‘사람되게 하는 교리’ 예수교를 받아들이게 된것이다.
3개월에 걸친 친구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윤리적으로 깨끗하다고 할수 없는 죄인인 것을 깨닫는데서 시작된 그의 개종은 기독교가 오히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는 유교의 이념적 가치를 실현하는데 가능성 있는 종교인 것을 깨닫고, 기독교적 윤리 갱신이 국원 회복의 방편이 될것이란 기대감 속에 개종을 결심한 것으로 볼수 있다.
개종과 동시에 신석구는 ‘전도’에 헌신할 것을 결심한다. 그것은 “잃은 사람 찾기, 곧 국권회복의 지름길”로 보았기 때문이다.
“現今 우리 나라는 죄악이 관영하여 주색잡기에 침범치 않는 자가 몇 사람이나 되나, 내가 예수교 진리는 모르나 우리가 다 예수를 믿어서 주색잡기만 아니한대도 잃어버린 국민을 찾는 것이 되겠다. 한 사람 한 사람 전도하여 잃어버린 국민을 찾음으로 나의 의무를 다 할수 있다 하여, 믿기로 작정하던 날 전도하기로도 작정하였다.”
자신이 옳게 되는 것 곧 의인이 되는 것은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요, 국민 하나하나가 의인이 되는 것 그것이야 말로 국권 회복의 길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가 그토록 찾던 道가 삶에 연결되는 순간이었다. 예수를 영접하여 한 전도활동은 죄악에 빠진 민중들의 정신을 회복하여 나라를 되찾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어릴적 소망이던 아버지의 가르침이었으며 율곡선생의 가르침이었다. 그 가르침이 예수교를 만남으로 의인(義人 : 옳은 사람)이 되는 길을 열어준 디딤돌이 된것이다.
사도바울이 눈이 가려져 누워있던 곳에 찾아온 아나니아가 복음을 심고 자신의 길를 떠난것과 같이 신석구에게 있어 김진우라는 친구는 아나니아와 같은 이였다.
그는 33년간 멀어있던 신석구의 눈을 뜨게 해준것이다. 그것은 복음이었고 그것은 나라에 대한 소망이었다. 그것은 그의 어릴적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들어오던 의인이 되는 여정이었으며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다.
예수를 영접한 지 한달 반 후 그의 멀었던 눈을 뜨게 해준 친구 김진우가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지고 같은 고향 출신 정춘수를 새로운 친구로 소개받게 된다. 정춘수는 신석구가 살던 ‘갯골’에서 30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청주군 회인면 두산리(현재 청원군 가덕면 계산리) 동래 정씨 집안의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는 청주 고을에서 알아주는 한학자였다. 정춘수도 나이 열한살에 부모가 모두 별세하였는데 ‘3년 거상’ 동안 한번도 상복을 벗지 않음으로 인근에서 ‘효자’소리를 들었으며 신석구도 어려서 그 소문을 듣고 흠모하면서 한번쯤 만나보고 싶어하였던 인물이었다. 그 고향친구를 이곳 고랑포에서 만나게 된것이다. 정춘수는 사흘 밤낮을 함께 지내며 기독교 교리에 대한 기초적인 내용을 신석구에게 알려주며 개성에서 함께 ‘새 일’을 해보지 않겠냐는 권유를 하게된다. 그리고 미련없이 고랑포 약국일을 정리하고 1907년 8월 말 개성으로 동행하게 된다.
그후 친구 정춘수와 ‘새 일’을 소망하며 개성으로 거처를 옮기고 선교사 리드의 어학선생으로 일하게 된다. 당시 신석구는 선교사 리드의 도움으로 의사가 되고자 하는 꿈을 잠시 품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목사가 될것인가 혹은 의사가 될것인가에 대한 자문을 통해 자신의 꿈을 확고히 하게 된다.
“내가 牧師가 되랴는 것은 남을 罪에서 건지랴는 良心이요 醫師가 되랴는 것은 慈善事業을 하랴는 마음이 아니라 돈을 벌랴는 慾心인데 良心은 곧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니 良心의 원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주신 職일 것이다”
그리고 1908년 3월 29일 주일에 개성남부교회에서 왓슨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늦깍이 신앙인 신석구는 그해 4월부터 감리교 협성성경학원에 입학하여 신학 수업을 받기 시작한다. 꿈많던 소년시절이 좌절의 세월을 거쳐 자신의 삶의 자리를 시작하게 되니 그 나이 34세였다.
세례와 더불어 개성북부교회 권사로 주일학교 교사로 전도일에 대한 그의 열심과 흥미를 더욱 더해갔다. 그리고 헤어진지 3년만에 고향에 있던 가족들 곧 부인과 아들 태화, 그리고 태혜, 막내 태헌과 함께 조그마한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된다.
당시 열심이 있던 신석구에게 크램선교사는 안식년 휴가차 미국으로 들어가고(1908년 6월경) 담임자가 공석이 되었을때 성도 800여명의 개성 북부교회를 전적으로 맡아 보게 하였다. 그 기간은 1년 8개월동안이었으며 신석구의 ‘새 일’을 알게 해주는 짧지만 값진 목회기간이었다.
신앙을 접하고 유학자가 아닌 성서교사로서 새삶을 시작한 신석구에게 있어 고랑포와 개성은 인생의 전환점을 가져다 준 장소였다. 그는 그곳에서 예수를 만나고 새로운 친구를 얻게 된다. 방황을 접고 새롭게 시작된 만남은 그의 새로운 삶의 서막이었으며 앞으로 그가 담당해야할 삶의 전주곡이었다.
번뇌, 회심 그리고 좌절을 통한 은혜
전도자로서 길을 걷게된 신석구는 참으로 열심히 그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한가지 큰 고민이 있었으니 왓슨 선교사와 크램(기의남)선교사를 통해 듣게 된 천국이야기가 그 계기가 된다. 다음은 천국에 대한 크램(기의남)의 설교 내용이다.
“내가 어려서부터 부모를 따라 형식적으로 예배당에 다니다가 열 아홉 살 때 거듭난 후부터는 지금 이 자리에서 세상을 떠날지라도 천당 갈줄 압니다.”
내용은 단순했지만 그 말 중에 “너는 천당에 갈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질때 시간이 흐를수록 번민만 더욱 깊어갈 뿐이었다. 점차 설교에도 자신이 없어졌다 강단에 올라갈때마다 찾아오는 그 번민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번민으로 찾아왔다. 그러던 중 교인 몇 명이 장단에 있는 화장사로 피서를 간다며 동행하기를 권하기에 신석구는 특별 산기도를 할 요양으로 동행하기로 한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쉬러온 교인들과 헤어서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그날부터 이어진 기도는 자신을 돌아보는 반성의 기도들이었다. 서른세살부터 거슬러 올라가며 기억나는대로 꼽아 보았던 50여가지 죄목들과 같이 윤리적인 성격들에 대한 죄목들이 아니었다. 간음이나 거짓말 도박이나 속임수 같은 인륜의 죄가 아닌 하나님과 관계를 끊어놓을 죄목들에 대한 기도들이었다. 그리고 온갖 선한 것이라고는 찾아볼수 없는 자신을 보며 절망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사흘되던날, 절망속에 기도하는 신석구는 이전에 경험치 못한 것을 경험하게 된다.
“나의 이때 애통함은 내가 죄로 인하여 지옥의 형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운 것이 아니라 이 죄악으로 인하여 부자의 천륜이 끊어짐을 원통함이다. 그때 이틀 밤 낮은 내 마음이 무덤속에 들어간 것 같았다. 나는 또 엎드려 부르짖어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이제 내가 참으로 예수께서 이 죄인을 인하여 죽으심을 믿으오니 다만 이 믿음만 보시고 사하여 주소서’할때에 주님의 십자가가 내 마음 눈 앞에 나타나며 주님의 옆구리에서 흐르는 피는 내 머리에 떨어지듯 하며 나는 곧 그 십자가 밑에 업드린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에 가슴이 찢어질 듯이 복받쳐 오르던 죄뭉치는 구름 흩어지듯 안개 사라지듯 아주 없어지고 말로 형용할수 없는 평화와 기쁨이 충만하여 넘쳤다.”
1909년 7월 29일 오전 6시. 순간 자신을 괴롭히던 마음의 죄를 떨쳐버리는 중생을 체험하였다. 그 날이후 그는 지금 당장 죽더라도 천국에 갈수 있다는 강한 확신을 갖게 되었고 모든 죄가 사함을 받는다는 것이 나의 의지가 아니요, 곧 십자가의 피로 인함을 머리가 아닌 믿음으로 알게 되니 죄의식이 사라지고 그 후로 찾아온 작고 큰 시험을 이겨낼 신앙의 뿌리를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연단의 과정은 신앙적 시험으로 멈추지 않았다. 1910년 남감리회 한국 선교회 매년회가 개성 한영서원 기숙사에게 개최되었다. 당시 독립연회가 조직되어있지 아니한 터라 지방회도 매년회 기간중에 열렸던 시기이다. 당시 전도사 추천을 받은 신석구에게 불리한 시험이 다가왔으니 곧 당시 자격심사위원들의 질문이었다.
“부채는 없습니까?”
“60원의 부채가 남아있습니다.”
이 짧은 두마디의 문답은 연회 마지막날, 파송기를 낭독하며 신임 전도사 명단을 부를 때 그의 이름은 빠지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은 신앙의 문제로 고민하던 때와는 차원이 다른 연단의 순간이요 고통이었다.
“閉會하는 卽席에서 落選하였다는 말을 드르매 큰 罪나 지은 것 같어셔 東西洋 사람 수백명 뫃인 叢中에서 이 光景을 當하매 生前에 처음 보는 부끄러움이다. 閉會하고 層階에 나려올때에 心中에 忿怒가 떠올낫다, 오- 예수도 돈이 있어야 믿겟구나”
떨어졌다는 자괴심에서 오는 창피함과 창피를 준 당사자인 선교사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그리고 어떻게 가는 줄도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때, 한 음성을 듣게 된다.
“사람 보기에는 네가 부채로 인하여 전도사 직분을 받지 못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네가 아직 전도사 자격이 못됨으로 받지 못한 것이 아니냐? 만일 네가 전도사 자격이 될만하면 하나님께서 부채도 갚아주시지 않겠느냐?”
화장사 기도를 통해 신앙적인 겸비의 은혜를, 전도사 추천시험을 통해 세상에서의 겸비의 은혜를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부채 60원으로 낙마한 권사 신석구는 그 또한 자신에게 허락된 은혜로 깨닫게 된다. 신앙적 그의 회심은 하늘의 음성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 하늘의 음성은 삶의 환경조차 변화시킬것이라는 확신을 그에게 허락한다.
그날 이후 개성을 떠나 목회지를 찾아가게 되니 그곳이 바로 홍천읍교회이다. 만일 이러한 준비가 없이 홍천읍교회에 가게되었다면 신석구는 그 자리에서 다시한번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다. 홍천읍교회는 당시 네칸짜리 집이 곧 예배당이요 사택이었고 교인 또한 어른 4명, 여학생 4명인 교회였으며 이름만 교회일뿐 전혀 아무것도 갖추어지지 않은 매우 빈약한 교회였기 때문이다.
어려움 가운데 신석구는 4년을 홍천에서 보낸다. 홍천읍교회는 눈물도 많이 흘리고 고생도 많이한 신석구의 목회지로 회고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를 찾는 것이 소중한 것임을 깨닫는 자리, 한명의 새신자가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자리였다는 것이 신석구의 회고였다.
함께 공부한 이들은 벌써 중진이 되고 중앙에 자리를 잡아 도시목회를 하던 시기에 그는 그렇게 첩첩산중에 갇혀있는 한 목회지에서 자신을 만들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1909년 2월부터 전도인이 되어 홍천이후 가평 춘천에서 목회하였던 신석구는 1917년 9월 24일 남감리회 매년회에서 드디어 목사안수를 받게 된다.
3. 1운동, 옳은 사람(義人)의 길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만일 내가 국가 독립을 위하여 죽으면 나의 동포 마음속에 민족정신을 심는 것이다.”
1919년 1월 22일 실질적인 ‘조선왕조의 마지왕 왕’인 고종이 68세의 일기로 승하하여 전 국민이 참가하는 국장이 준비되었다. 당시 고종의 죽음을 두고 일본인에 의한 독살설이 유언비어로 확산되고 있어 항일 저항운동의 불씨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상해 신한 청년단에서는 김규식을 강회회담 대표로 파견하기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하는 한편 1919년 2월 초 선우혁을 국내에 밀사로 파견하여 국내 민족운동 조직과 연대에 나섰고 일본에서는 1919년 2월8일 유학중이던 청년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여 대외에 독립의 의지를 알렸다.
이같은 때에 남감리회에서는 1919년 2월 16일 저녁 당시 종교교회를 담임하던 오화영목사와 원산상리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정춘수 목사가 만나 논의한 것으로 그 움직임을 시작한다. 당시 상황에 대한 오화영 목사의 증언이다.
“사천년 역사를 가진 조선을 일조에 일본에게 빼앗기었던 것을 반대하고 독립하고자 하는 희망이야 어찌 말로 하리오. 그러나 다만 시간문제이나 어느때던지 조선은 반드시 우리의 조선이 될줄 알고 오늘날 이 자리에서 이러한 수치를 당하면서도 독립을 기다리고 있던 차에 정춘수에게 독립운동계획을 듣고 이에 참가한 것이라”
종교교회 주일 저녁예배 설교를 위해 방문중이던 정춘수는 박희도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던 독립운동의 움직임을 눈여겨 보던 터에 박희도와 함께 정춘수가 묵고 있던 남대문 밖 신행여관에서 만나 미감리회측과 남감리회측의 연대를 이룬다. 그리고 그 무렵 서울에 올라와 있던 천도교측 인사와 연대 방안을 모색하던 중 이승훈과 연락이 되어 2월 20일 박희도의 영신학교 사무실에서 이승훈, 신홍식, 박희도, 정춘수, 오화영등이 모여 기독교 단일 운동전선을 형성하게 된다.
그 후 정춘수는 원산으로 가서 상리교회 교인 이가순, 곽명리등과 원산 시위를 준비하였고 오화영도 전임지인 개성으로 내려가 김지환, 이경중, 오은영, 이만규등과 함께 시위를 준비하도록 지시한다. 오화영은 개성에서 동지를 모으고 2월 25일 서울로 올라와 박희도, 함태영, 이필주, 이갑성등과 연락을 취하며 3. 1 운동의 장작이 될 모임이 형성하게 된다. 당시에 오화영 목사를 중심으로 형성된 이 모임은 정춘수, 오화영등의 그들의 지인들로 연결된 모임이었다. 그런 연유에서 10년전 개성에서 함께 ‘새 일’을 꿈꾸며 우의를 다졌던 신석구 목사를 심중에 굳히고 있었던 듯 하다.
시골 목회를 하던 신석구가 서울에 수표교교회에 파송되어 온 것은 1918년 11월 겨울이었다.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자신을 찾고 신앙을 찾았던 홍천의 4년의 목회를 정리하고 가평과 춘천에서 목회하던 중 처음으로 서울로 입성하여 안정된 목회지인 수표교 교회를 담임한지 5개월을 접어들었을 때였다. 그러한 때에 서대문안에 있던 피어선 성경학원에서 오화영목사를 만나 민족을 위한 일에 동참하여 줄 것을 종용받는다. 그때 당시의 그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내 生覺에 두가지 어려운 것은 敎役者로서 政治運動 參與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合할가, 둘재 天道敎는 敎理上으로 보아 相容키 難한대 그들과 合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合한가 하야 卽時 對答지 아니하고 좀 生覺하여 보겠다고 하엿다”
신석구의 목회는 나라를 구원하기 위한 방법중 택한 길이었다. 잃은 백성 하나를 구원하는 것은 곧 나라를 위한 옳은 사람(義人)을 만드는 길이요, 그 길은 곧 나라를 세우는 길로 시작된 것이 신석구의 목회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위와 같은 그의 회의는 다소 거리감을 느끼게 할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신앙적 회심과 세상에 대한 신앙적 사고를 거친이후 그의 번뇌는 교역자라는 자신의 위치에서 과연 정치운동인 당시의 시위에 참석하는 것이 옳은가 그렇지 아니한가의 질문이라기 보다 궁극적으로 과연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응당한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되새겨볼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민족사업을 감당하는 것에 대한 신앙적인 질문인 것이다. 그러한 고뇌 중에 1919년 2월 27일 그는 결단을 내리게 되는 계기를 만나게 되니 곧 새벽제단에서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그 後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이 일을 爲하야 祈禱하난대 二月 二十七日 새벽에 이런 音聲을 드럿다. ‘四千年 전하여 나려오던 疆土를 네 代에 와서 잃어바린 것이 罪인대 차질 機會에 차저보랴고 힘쓰지 아니하면 더욱 罪가 아니냐’ 이 直刻에 곳 뜻을 決定하엿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뜻이었고 그것이 곧 신석구의 앞으로의 목회와 민족운동의 기틀이 되었던 음성이었다. 그는 주저함없이 곧바로 그날 아침 오화영목사에게 찾아가 참석의사를 밝힌 후 그날 오후 1시에 정동교회 이필주 목사의 집에서 모인 기독교 대표자 회합부터 참가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승훈, 이갑성, 함태영, 박희도, 최성모, 김창준, 오화영, 박동완, 신석구등이 모였고 그날 모임에서 함태영이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 초안과 일본 정부와 조선 총독부에 보낼 <독립청원서> 초안을 볼수 있었다. 참석자들은 이들 문서에 서명한 후 정식 문건이 나오면 날인하도록 함태영에게 도장을 맡겼다.
2월 28일 밤 손병희의 집에서 3.1운동 거사 장소 태화관으로 정해졌으며 오후 2시 33인 중 김병조, 길선주, 유여대, 정춘수 목사를 제외한 29인의 민족대표는 독립 선언식을 주도하고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경무총감부, 검찰, 지방법원, 복심법원을 거쳐 재판을 받게 된다, 그들은 결국 내란죄를 적용받아 박희도, 박동완, 이필주등과 같이 징역 2년을 선고 받게된다. 신석구의 형량은 구형보다 1년 감한 2년이었다. 여기에 미결수로 복역했던 ‘3백 60일’을 가산하도록 판결하였으므로 결과적으로 3년 징역을 선고받은 셈이 된다. 그를 비롯하여 유죄판결을 받은 37인은 더 이상의 재판은 의미가 없다고 여겨 상소를 포기하고 감옥에서 복역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체포된 1919년 3월 1일부터 1921년 11월 4일 금요일 아침까지 2년 8개월(978일)의 옥고를 치룬다.
시기상조라는 주변인의 말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독립을 거두려 함이 아니요 독립을 심으러 가노라’며 씨뿌리는 자의 대열에 선 신석구는 목회 현장 뿐만 아니라 감옥 안에서도 목회자였다. 아니 그는 옥중에서도 자신의 본분을 잃지 않았다. 몸은 감옥에 있으나 마음은 자유인이었다. 그 중 정태용이라는 이와 관련된 일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1919년 3월 시위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시위에 동참한 이들이 연행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때 연행되어 심문을 받던 사람중에 정태용이라는 젊은 청년이 있었다. 그는 대영성서공회(지금의 대한성서공회) 직원으로 근무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번 시위에 참석한 이후 연행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심지어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때 그를 주목하여 보았던 신석구는 매일 한차례이상 찾아 위로함으로서 젊은 청년의 마음을 신앙으로 치유한다. 그리고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은 청년은 예심에서 면소 판결을 받고 8월 4일 무사히 나갈수 있게 된다.
옥중에서도 시위현장에서도 목회현장에서도 신석구는 결코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목회자였으며 그 분에 음성에 따라 행동한 사람이었다. 2년의 중징계를 받고 옥에 갇힌 상황이었지만 그것은 그가 분명히 들었던 그 분의 음성에 따르는 행동이었다. 시위에 동참하는 것, 옥중에서 생활하는 것 그 모든 것은 곧 그의 목회의 연장선에 있었던 것이다.
일관된 신념, 떠돌이 목회자
1921년 11월 4일 만기 출옥후 원산 남감리회 연회에서는 11월 15일을 기하여 신석구를 원산 상리교회로 파송한다. 신석구의 목회여정 중 참으로 안정된 시기가 아닐수 없었다. 부임한 이듬해 산제동에 목사관으로 열칸짜리 기와집도 마련하고 중단했던 신학공부와 연회 진급문제도 해결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것은 입학한지 14년만에 일이었다. 그리고 1923년 드디어 제 6회 한국연회에서 보아스감독에게 ‘장로 목사’ 안수를 받고 1924년 비로소 진급의 굴레에서 벗어나 장로사(지금의 감리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되니 당시 신석구 나이 50세였다.
그러나 안정된 생활도 잠시, 원산에서의 4년의 생활은 1925년 개회된 제 8회 한국연회에서 끝나고 만다. 4년마다 목회지를 옮기는 것이 당연했던 당시 상황에서는 어쩔수 없는 결정이었지만 당시 파송된 고성구역은 원산과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너무도 열악한 수준이었다. 또한 지방 부흥사업이라는 책임까지 부과되어 당시 고성을 중심으로 통천, 고저, 간성까지 포괄하는 산악지역을 감당케 된다. 그로부터 5년간 다섯교회를 섬기게 되니 아무리 연회 감독이나 장로사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50이 넘은 목사의 여정은 쉬운 여정이 아니었다.
4년에 한번이라는 감리교 당시 규정과는 달리 왜 신석구 목사는 상식으로는 남득할수 없는 파송변경이 이루어졌을까에 대한 질문을 이즈음에서 던져봄직하다. 그러한 이유에 대해 이덕주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첫째, 신석구 목사의 전도와 설교, 목회 능력을 높이 산 선교부와 연회, 그리고 지방회의 경쟁적인 초빙의 결과라는 긍정적 측면이다. 그를 필요로하는 곳이 있기에 그들을 위해 그는 수시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루하지 않고 설득력이 있던 당시 신석구 목사의 설교와 감화력은 그 감격을 원하는 구역으로 전해지고 결국 그가 1년에 한번이라는 이사를 감행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다른 측면에서 이덕주는 그의 잦은 파송은 그를 견제하고 그의 활동 영역을 제한하려는 정치적 의도에서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고 그의 책을 통해 밝히고 있다. 옥고이후에도 변절하지 않고 오히려 강화된 기독교 구국론의 소유자였던 신석구는 일본에게 있어서 눈에 가시였고 그로인해 항상 감시가 따랐던 것이다. 그의 행정은 일일이 경찰 당국에 보고되었고 1년후 고성구역에서의 목회를 접고 춘천읍교회로 파송되었을 당시에서야 미행이 사라진다. 그것으로 그에 대한 감시가 멈춘 것이 아니었다. 1929년 12월 총독부 경무국은 당시 국내외 민족운동 전과자들의 주거와 신분을 파악하기 위한 의도에서 정치범 카드를 작성하였는데 당시 신석구는 ‘제1893호’라는 정치범 카드를 발급받았다. 그는 이것을 항상 지니고 있어야 했다. 당시 이미 변절의 길로 들어선 이들과는 달리 꾸준히 그 영향력을 발휘하던 신석구는 요시찰 인물로서 일본에 주목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두가지 사실중 어떠한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하는지는 앞으로 깊은 연구를 통해 밝혀질 것이나 한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은 잦은 파송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상부에 대한 불신을 표시하거나 자신의 목회지에서 담당해야 할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왕이면 더 좋은 상황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곧 소명이라 생각한 신석구는 결코 상황을 따라 자신을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상황에 이끌리어 자신을 버리는 이들과는 달리 그분의 음성에 경청하며 이미 어릴적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통해 즐겨 듣던 옳은 사람(義人)의 반열에 접어들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원산상리교회에서 파송받았던 신석구에 대한 동아일보의 기사는 그러한 신석구의 영향력에 대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신석구 선생은 출옥하신 후에 시내 수표교 례배당에 목사로 계시다가 그 후 원산 남촌동 례배당 목사로 뎐근하시어 지금까지 기시다가 금년 남감리교 년회의 결의로 강원도 통천 디방 순회 목사로 피임되서서 쉴새업시 산 깁흔 통천디방으로 려행을 하시는데 선생가치 렬성이 만흐신이라 남감리교회에서는 선생에게 만흔 기대를 한답니다”
감리사 그리고 성역 30주년
1930년 남,북 감리교회의 합동이 이루어지고 한국 감리교회 총회가 조직된 이후 1931년 6월 10일 개성 북부교회에서 중부, 동부, 서부연합연회에서 신석구는 강원도 중부연회 이천구역으로 파송되면서 이안지방 감리사도 역임하게 된다. 이안지방은 이천구역과 안협구역을 합친 지방으로 소속된 여선교사 스미스가 지방소속으로 돕고는 있었지만 지방을 순회하며 교회와 교인을 지도하는 것은 전적으로 신석구 감리사의 몫이었다.
당시 산악접경지역이던 이안지방은 어느지방보다 넓었다. 그러나 교세나 재정 형편은 전국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었으니 1931년 당시 지방에 속한 15개 교회 전체 교인이 916명을 기록하고 있었고 그 수치는 전국 23개 지방중 최하위였다. 1년 헌금 총액은 3천 1백 90원과 함께 최하 3위안에 속하는 수준이었으니 내실이 전혀 갖추어지지않은 지방이었다.
이안지역 감리사로 역임할 즈음 신석구는 가족과 떨어져 살고 있었다. 가정은 여전히 궁핍하였으며 막내아들 태헌이 결핵으로 별세(1933년 12월 7일)하고, 그해 만 1년이 된 둘째 손녀 정균도 세상을 떠났다. 이안지방의 시작은 가정적으로나 목회적 상황으로나 신석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상황은 전혀 부재하였다. 그러나 상황을 이기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곧 열악한 환경보다도 사람들에게 희망을 걸고 목회하는 그의 목회적 신념이었다.
지리적으로나 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도 너무도 그를 힘들게 할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순수한 시골의 인심은 복음이 심기워지기에 더욱 알맞은 것으로 파악했으며 헌신된 그의 노력으로 결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부임한 이후 변화가 일기 시작했던 것이가. 곧 거의 폐지될 지경에 처하였던 은행동 교회와 가여주교회가 다시 살아났고 마탄교회도 신앙적으로 활기를 되찾아 부흥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또한 노인교회로 불리우던 이천읍교회가 ‘청년 교회’로 폐지 위기에 처하였던 지하리교회와 율동교회, 저동교회등이 크게 부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진정한 교회의 성장은 지리적 상황과 외적인 측면에 있지 않음을 단호히 이야기 하였다. 곧 진정한 부흥은 영적 갱신을 통해 가능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한 그의 태도는 1932년 1월 기독신보에 기고한 “送舊迎新의 感”이란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읽을수 있다.
“이왕에 우리나라 정치가 극도로 퇴폐함으로 갑오년을 당하야 모든 제도를 변경하고 일흠을 감오갱장이라 하엿으나 사람들이 모다 그전 사람인 까닭에 국정이 날노 더 쇠퇴하여 마침내 국조를 아조 옴기게 된 것이올시다. 그럼으로 교회가 새 교회가 되랴면 몬저 사람이 새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함니다.”
교회 성장에 목적을 두고 숫자에 연연하는 목회자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닐수 없다. 열악한 상황이 목회에 지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열악한 목회자의 심성이 목회에 지장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의 태도는 기독신보에 기고한 “送舊迎新의 感”에서 그러한 목회자의 심성과 교인들의 심성에 심지가 되어야 할 것을 분명히 한다.
“이 세대는 하나님의 말슴보다 사람의 말을 듯기를 더 조화함으로 교역자들도 뭇사람의 마암을 사기 위하야 진리의 말삼을 바리고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랴는 모양이 많습니다. 그런 이들은 바로 말하면 사람이 우슴을 사랴고 배우의 옷을 입고 무대에 나타난 이와 같어서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으로 극장화하는 일이 잇으니 엇지 하나님의 신이 그 가온대 역사하기를 바라며 교인들이 참 은혜 받기를 바라겟슴니가”
그는 이안지방 감리사로서 소중한 열매를 맺은 4년간의 목회를 1935년 4월 25일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중부, 동부, 서부 연합 연회에서 마지막 보고를 함으로 마무리 한다. 그리고 연회 마지막날 그는 천안구역 담임 겸 천안지방 감리사로 파송받는다.
그로서는 처음으로 합동이전의 미감리회 선교구역이었던 곳으로 파송된 셈이다.
천안지역은 아산, 온양, 연기, 충북음성, 진천, 경기 진위지역을 담당하는 광할한 지역이었다. 그 지역 역시 이안지방처럼 광할한토지에 전국 최하의 교제와 경제적인 면을 기록하는 지방이었다. 당시 천안지방은 25개 교회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입교인 10인이상 되는 교회가 15개 교회에 불과하였고 10인이상되는 교회중 10개 교회마저도 담임자의 생활비를 지급할수 없는 수준이었다. 결국 생활비를 지급할수 없는 교회들은 목회자를 데려올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그 열악함은 이안지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석구는 구역 담임자로서 천안읍교회와 천흥교회를 돌아보는 것과 천안지방 감리사로서 지방 내 25개 교회를 순회하며 60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헌신적으로 그 직분을 감당하였다.
그러한 그의 모습에 감사의 의미가 준비되었으니 곧 ‘신석구 감리사 성역 30주년 기념식이었다. 30대 초, 친구 김진우를 좇아 전당포를 하던 시절, 모든 것이 파산되고 친구를 대신해 옥고까지 치루고 과거의 자신이 잃어 사망신고까지 하고 떠나왔던 고향, 그리고 4개월여의 방황세월을 거쳐 고량포에서 예수를 만나 새로운 삶을 꿈꾸던 시절, 그 곳에서 만난 정춘수 목사와 밤을 지새며 ’새 일‘을 꿈꾸었던 시간들, 그 모든 시간들을 넘어 강산을 세 번 바꿀 30년이란 세월이 지난 것이다.
신석구의 인고의 목회, 하늘의 음성에 순종하는 목회의 세월이 조금이나마 이땅에서 회고가 되는 시점이 아닐수 없다. 1937년 음력 5월 3일 오후 2시 천안읍교회에서는 이장한 목사의 기념사와 양주삼 총리사의 축사로 많은 인원은 아니었으나 천안읍교회 창립이래 가장 큰 잔치를 치루어내었다. 그리고 그는 또 다시 역사의 굴레속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신사참배거부, 그리고 친구의 변절
1937년 천안읍교회에서의 성역 30주년 기념식이 마쳐진 이듬해인 1938년 일제는 ‘문화통치’를 내세우며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허용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서 내부적으로 철저한 감시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그 여파는 기독교내에도 스며들었고 1935년부터 기독교계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한 일제는 1938년 이후 교회에서도 참배를 강요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1938년 9월 개회된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였고 비슷한 시기에 천주교, 성결교, 안식교, 구세군, 성공회등도 신사 참배의 뜻을 밝혔다. 감리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감리회는 총회에서 직접적으로 가결하는 결의를 보인 것은 아니었으나 신사참배는 종교적 행위가 아닌 국민으로서 의무를 행하는 것이라 하며 수용논리를 작용하게 된다. 신사참배에 대해 보수적 신앙인들을 포섭하기 위해 내세운 비종교적 행위라는 말은 결국 애국적인 행위라는 뒷받침이 따라오게 된다. 곧 신사참배 수용자들은 스스로 천왕의 지배를 받는 황국신민임을 당연히 여기고 일본과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상황은 정부의 요시찰 인물이었던 신석구에게 피해갈수 없는 길이었다. 천안경찰서에는 1938년 봄 이후 주기적으로 신석구를 호출하여 조사를 벌였고 심지어 설교도중에 연행되기도 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해 7월 천안 경찰서로 연행되어 긴 조사를 받은 후 2개월의 구류를 치루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천안경찰서의 요시찰 대상이던 신석구는 천안 경찰서의 감시를 떠나 교단의 지시로 4년의 임기를 무사히 마치고 진남포 신유리구역으로 파송받게 된다.
진남포 지방은 교세나 제정 규모에서 전국 상위에 드는 부자 지방이었고 지리적으로 평양과 진남포 중간에 위치하여 교통도 좋은 지방이었다.
그러나 신석구의 생애 중 평탄함이란 단어는 맞지 않는듯 하다. 사회적인 감시를 떠나 오니 이제는 교회의 감시와 문제가 그를 사로잡게 된다.
그 사건은 신석구가 천안을 떠나 진남포로 옮긴 무렵인 1939년 9월 돌연 김종우감독가 별세를 통해 시작되었다. 그 후임으로 개성부터 ‘새 일’을 꿈꾸며 3.1운동 거사도 함께 한 친구 정춘수가 후임감독으로 된것이다.
감독이 된 정춘수는 그 해 10월 18일 개회된 일본 메소디스트교회 대표자들과 회합하여 일본과 한국의 합동문제를 논의하게 된다. 언어상으로는 합동이었지만 결국 ‘일본교회에 조선교회의 흡수통합’이라는 감리교 혁신안의 초안을 마련하게 되니 1941년이후 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일을 시행하기에 이른것이다.
그는 1941년 3월 기독교 조선 감리회 연회를 해산하고 <기독교 조선 감리교단>이라는 혁신교단을 조직한다. 교단은 당시 일본 교회의 것을 그래로 채용한 것으로 총리원을 교단본부로, 연회를 교구로, 감독을 통리자로, 목사를 교사로, 권사를 권도사로 바꾸어 불렀고 입교인, 세례아동, 원입인같은 명칭도 정회원, 연소회원, 객원, 구도회원등으로 구분했으며 반세기 넘게 지켜왔던 감리교회 신앙전통이 크게 변질시켜 버린다.
예배와 집회 때마다 국기배례와 궁성요배, 국민서사 낭독은 기본이고 신사나 신궁에 참배해야 했으며 교회안에서까지 일본 국조신 신위를 봉안한 작은 제단인 “가미다나”를 설치도톡 지시하였다. 심지어 구약은 일체 읽지 못하게 하였으며 신약에서도 마태복음이나 야고보 같은 유대적 성경은 가르치지 못하게 하였다.
정춘수가 이끄는 혁신교단의 만행은 이것으로 마무리 하지 않고 1943년 가을에 체제 혁신을 단행하여 그 명칭을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이라 칭하니 한국 감리교회 신앙과 역사 전통은 완전히 소멸되고 만 것이다.
그리고 고향친구이자 ‘새 일’을 꿈꾸며 함께 개성으로 입성하였던 두 친구는 1941년 3월 6일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일제시대 마지막연회에서 만나게 된다.
한 친구는 감리교 최고자리인 감독으로 회의를 주재하였고 한 친구는 연회 정회원의 자격으로 회의 주관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연회가 끝날무렵 신석구는 직간접적으로 고향친구 정춘수와 그의 혁신교단으로 인해 “자동은퇴” 명령을 받게 된다.
새로 개정된 혁신교단의 헌법에 의하면 은퇴해야하는 목회자의 연령이 65세로 낮추어 재조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연고로 어처구니없게 3월 11일에는 은퇴 찬하식에 참석하게 되었고 원익상, 강조원, 유시국, 이동응, 이하영등과 함께 혁신교단의 법에 따라 법적 은퇴를 하게 된다.
이같은 상황에서 목사 파송권을 가지고 있던 교구장 이호빈 목사는 당시 법개정에 무리가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후임목사가 결정되기 전까지 각 개교회에 시무하게 한다며 대리 목사 명분으로 당시 신석구 목사가 속해있던 신유리교회로 파송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으며 1944년 3월 진남포에 내려온 정춘수 감독이 교회 통폐합 조치를 발표함으로 그 해 4월이후로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에서 목사직 면직 통보를 받게 된다. 은퇴하지 않은 은퇴목사 신석구는 고향 친구에게 직간접적인 두 번의 버림을 받게 된것이다.
이즈음에서 잠시 정춘수를 살펴봄도 재미있는 연결점이 될 수 있겠다.
1874년 2월 11일 신석구가 태어나던 전 해 충북 청주에서는 정춘수가 태어난다. 그는 97년까지 한학을 수학하였고 1903년 원산 남산동 교회에서 개최된 하디선교사의 성회에 참석하여 감화를 받아 결신하고 그 이듬해 6월 세례를 받았다, 1905년도 매서인으로 활약하며 1906년에는 전도사 직책을 받고 교역에 나서 개성북부교회에 부임했다. 1907년 수표교 임시 강습소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협성신학교에서 수학 1911년 제 1회 졸업생으로 졸업을 하게된다. 1908년도에 입학하여 10여년후인 1922년 48세의 나이에 졸업한 신석구와는 대조가 되는 부분이다. 1913년에 정춘수목사는 서울 종교교회 담임으로 부임하게 되고, 1919년에는 민족대표 33인중 한사람으로 원산지역 만세운동 주도로 징역선고를 받는다. 그러나 그의 변절은 이때부터 조금씩 진행되어진다.
정춘수목사는 거사현장이나 독립선언식에 미처 참가하지 못하였다가 경찰에 자진 출두 체포되어 법정진술을 하게된다. 당시 자신은 ‘조선자치’의 의미가 독립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원조를 받자는 의미이고 차후에는 최초목적을 달하지 못한 점을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에 종교사업이나 하겠다는 심경을 밝혀 1년 6월의 징역을 받는다.
반면 거사 하루전인 2월 27일 새벽기도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참석하게된 신석구는 33인 회동을 가진적도 없고, 만세운동 한번 주도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라 독립의 확고한 의지를 굽히지 않아 당시 대표단들이 최고형이던 2년 6월형을 채우고 나오게 된다. 개성에서 시작하여 ‘새일’을 해보자던 그들의 꿈은 점점 현실과 타협하는 이 소위 시대를 잘 타는 도시목사와 현실과 맞서며 뜻을 굽힐줄 모르는 시골목사로 양분되기 시작한 것이다.
정춘수는 후에 1939년 기독교조선감리회 감독을 선임되면서 극단적인 친일행각을 시작한다. 심지어 1944년 3월, 서부연회 진남포지방회에서 정춘수 감독은 교단의 이름을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으로 바꾼 ‘혁신교단’의 국방헌금으로 ‘비행기 3대’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순방을 시작한다. 그리고 전국 34개처 예배당을 폐쇄한다고 공표하고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지방회를 순방하며 교단 간부인 이동욱 목사와 김인영 목사를 대동하고 진남포에 내려오게 된다. 정춘수 감독은 진남포지방에서도 신흥리교회와 대두리교회를 폐쇄하고 진남포중앙교회로 통폐합한다고 선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 신석구 목사는 목사직 면직통보를 받게 된다.
그러나 시대적 물결을 타고 잘 나가던 정춘수 목사와 신석구 목사는 1945년 해방과 동시에 운명이 바뀌기 시작한다. 정춘수목사는 ‘친일파 목사’로 교회 안팎에서 비난을 받았고 마침내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조사도중 그는 “아홉 교회를 살리기 위해 한 교회의 희생은 불가피했다”는 논리를 내세웠으며 구금되어 있는 동안 “참된 진리를 발견했다”며 천주교 개종을 선언하여 다시 한 번 감리교인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결국 감리교 감독까지 지냈던 그는 천주교 평신도가 되어 쓸쓸하게 말년을 보내다가 1951년 고향에서 피난 중 별세하였다.
한시대를 살았고 한시대에 같은 무리에 속한 사람일지라도 참으로 다른 모습이었음을 우리는 보게된다. 신석구에게 ‘새 일’을 꿈꾸게 하는 이는 정춘수였다. 그리고 그러한 뜻에 의기 투합하여 그들은 그들의 새일을 이루기 위해 꿈을 품고 개성으로 향한다. 그들이 품은 ‘새일’이란 ‘전도’의 사명이었다. ‘전도’는 곧 신석구에게 있어 ‘교인만들기’가 아니요, 잃어버린 국민을 되찾아 잃어버린 나라를 찾기위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사람은 교단의 가장 높은 자리에서 잃어버린 국권을 굳건히 하는 일에 힘쓰게 되었고 한 사람은 교단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잃어버린 국권을 찾기에 힘을 쓰게 되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현실이 아닐수 없다.
해방후 여정과 마지막 목회
시국이 중대한 변화를 생길때마다 ‘예비검속’ 명단에 들어가 있던 신석구는 언제나 연행되었고 장기간 혹은 단기간의 유치장신세를 져야했다. 1941년에는 일본군의 하와이 공격시 연행되어 1개월여 유치장 신세를 지고 1945년 설교를 하던 도중 그해 5월 연행되어 유치장에 또다시 들어가야만 했다. 당시 그의 설교였던 ‘새날의 빛’이라는 봉사와 희생으로 세워질천국에 대한 내용이 일본인들에게 가시가 된것이었다. 그러나 그를 가두게 된 연유는 ‘대동아전쟁 전승기원 예배 및 일장기 게양’을 거부했다는 이유였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결국 3개월여를 옥살이 하던 신석구는 1945년 8월 16일 영문도 모른채 유치장에서 나오게 되었고 조선이 해방되었음을 듣게 된다. 71세의 노인 신석구목사는 그렇게 다시 진남포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당시 상황에 대한 손자 성균의 회고담이다.
“사실 그때 저도 정신이 없었지요, 그해 3월에 춘천 중학교를 졸업하고 진남포로 내려와 군대 예비소집장을 받은 후 평양 고사포부대에 입영이 내정되어 훈련까지 마치고 배속을 기다리던 중에 해방을 맞은 겁니다. 나보다 두달 전에 출생한 동갑내기까지 입영한 상황이었어요, 해방의 감격보다는 전장에 나가 죽지 않게 되었다는 감격에 하루를 어떻게 지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튿날 할아버지가 계시는 용강경찰서로 간겁니다. 우리는 할아버님을 모시고 진남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일제는 물러갔다. 그리고 이제는 그가 설교하기 원했던 새날의 빛이 밝아오는 듯했다. 그러나 1946년, 신석구에게 새날의 빛이 오기에는 아직 겪어야할 시련이 남아있었으니 곧 1946년 3월 해방후 처음 맞은 3.1절 기념행사때의 일이었다.
1946년, 3월 1일은 해방후 처음 맞이하는 3.1절이기에 나라 전역은 그 기대감이 들떠있었다. 해방의 기쁨에 부푼 백성들에게 이 날은 너무도 의미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 기념사업은 공산당측에서 먼저 시작을 열었다. 그들은 기념행사를 개최하기로 하고 ‘애국반’을 통해 소집 동원령을 내리고 지도자들은 별도의 모임을 준비하였다.
때를 같이하여 기독교측에서도 별도의 기념행사를 준비하기로 하고 2월 22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모임을 가진다. 감리회의 송정근, 박대선, 이피득, 조윤승목사, 장로회의 김화식, 황든균, 김인준, 이학봉, 변린서목사등 40여명이 모여 기념식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튿날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당시 준비주체였던 목회자들이 내무서장으로부터 반강제적 회유와 협박을받아 서약서를 받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서약서를 받지 아니한 박대선등 11명의 목회자는 유치장에 갇히게 되고 만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40일정도 지난 3.1절 행사 이후에야 석방되었다. 그러나 목회자 상당수 연행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장대현교회에서는 그 외 목회자들과 오천여 신도들이 모여 행사를 이루어내었고 기념식을 거행할수 있었다. 그러나 그조차도 결국 20여명의 내무서원들의 습격으로 난장판이 되었고 이춘생목사외 신도 수명이 연행당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반면 당시 신석구목사는 평양중앙방송에 출연해 3.1운동에 관한 연설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33인의 하나로 입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변절하지 않은 목회자로 대외적인 인지도가 있던터라 기념사업을 위해 공산정권에서 포섭하기위한 준비작업이었다.
뜻깊은 자리인지라 기념사업에 동참하기위해 방송국을 찾은 신석구목사는 다소 심기가 불편해졌다. 이미 준비된 원고가 있었고 그 내용 또한 신석구 목사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결국 신석구 목사는 자신의 의지대로 연설을 하였고 20분 예정이 되어있던 방송은 소란한 소리와 함께 10분만에 중단되고 만다. 그리고 중앙정치보위부로 연행되어 며칠동안 조사를 받게 되니 그로부터 신석구목사는 일제가 아닌 공산정권에 ‘요시찰 인물’로 낙인되어진다.
이후 송정근. 이피득목사등 서부연회 관계자들과 함께 기독교 민주당(후 기독교 자유당) 창당 작업에 참여하였고 1947년 2월에는 북조선 인민위원회 고위층 공산당 정책 비판 감상문 제출을 제출하여 자신의 생각을 숨김없이 밝힌다.
1947년 2월즈음에 인민위원회 고위층으로부터 내려온 지시로 신석구 목사에게 인민위원회 창설에 대한 감상문 제출을 종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의견을 결코 꺽지 아니하였고 그들이 원하던 내용에 반하는 발표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해방 후 두 번째 맞이하는 3.1절 기념행사시 진남포 도립극장에서 3, 1절 기념강연을 하며 민족주의와 기독교 신앙을 표명함으로 공산당과 분명한 구분을 두게 된다.
그때마다 수차례 연행과 석방을 반복하였으니 그 의지가 어떠하였는지 미루어 짐작할수 있겠다.
이렇듯 일제가 자리를 떠난후 그와 대립하던 공산정권과의 마찰은 그의 생애 후반부를 장식한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최우선 관심은 교회와 목회였다.
그는 용강경찰서에서 해방을 맞아 석방된후 진남포 아들 집에서 요양을 한 후 곧바고 해방 직전 시무했던 유사리교회에 부임하여 목회를 재개한다. 그리고 그해 10월 평양중앙교회에서 개최된 서부연회 재건 연회에서 용강군 금곡면 우등리 광량만 교회로 파송되어지고 당시 진남포지방 뿐 아니라 평양 여러 교회와 기독교 모임에 초청을 받아 설교와 강연을 하면서 많은 청년들에게 감동을 주게 된다. 이즈음에 18세 청년 변선환은 신석구 목사를 만난 듯 하다. 그리고 당시 신석구목사를 만나 목회와 사회를 아우르는 그의 신념과 삶에 영향을 받게 되고 그의 권유로 신학을 시작하게 된다.
그의 목회는 사회와 연장선상에 있었다. 결코 그 끈을 끊을수 없었으며 자의가 아니라 할지라도 사회가 그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결코 세상과 격리된 것이 목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 영혼을 살리는 길이 나라를 살리는 길로 여겼던 신석구목사에게 목회와 사회운동은 결코 별개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바른 소리를 전하는 것이 그의 소명으로 알았던 목회자였다. 그러한 연고로 그는 일제와 공산정권에 쓴소리하는 인물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었으나 그는 여전히 올곧은 목회자이며 구국운동가였다.
생의 마지막 여정
1949년 4월 어느날 진남포 중앙교회 최승걸 장로에게 낯선 청년이 찾아와 자신은 남쪽에서 올라온 비밀요원이라고 하면서 “메이데이(5월 1일)을 기하여 남쪽에서 국군이 진격해 올것이니 미리 요원들을 모아 국군 환영집회를 준비하자”며 반공인사 포섭에 도움을 청한다.
의심나는 구석이 있었지만 국군 진격이란 말에 기대감을 품고 그를 시장에서 잡화상을 하던 비석리 장로교회 승윤홍이란 이에게 소개한다. 그 무렵 최승걸장로는 신덕교회 전도사 일도 함께 보고 있었기 때문에 대신 승윤홍을 소개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남쪽에서 왔다는 정체불명의 청년은 승윤홍의 집에서 동거하면서 일을 진행하기 시작한다. 그는 승윤홍을 앞세우고 진남포 지방 내 교회를 순방하며 소위 반공인사를 포섭한다. 당시 감리회에서는 최승걸, 홍만호, 이현봉 장로와 이호묵권사, 장로회에서는 송영길목사, 승윤홍, 그리고 학교 교사였던 안인원등 30여명의 명단이 작성된다. 그리고 그 비밀 요원이라는 청년이 신석구목사를 만났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명단에 신석구 목사의 이름도 기입된다. 그들은 진남포 비석리 장로교회 지하실에서 1차 회집을 거치고 최승걸, 이현봉 장로등을 대표로 5도 연합본부에 파견까지 한다. 실로 속전속결로 이루어진 진행이 아닐수 없었다. 그리고 2차회집시 진남포지부 결성대회로 준비하며 서명날인하기로 하였으나 후로 미루고 해산하였는데 그것이 정체불명의 청년을 통해 시작된 정체불명의 모임의 마지막이었다.
1949년 4월 19일 새벽, 명단에 오른 이들에 대해 일제 검거에 들어가니 곧 이 일이 “진남포 4.19사건”이다. 신석구 목사가 이 비밀 회합에 참석하였는지에 대하여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명단에 포함되어있을뿐 아니라 공산정권에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있던 신석구목사는 수사의 그물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결국 문애리교회에서 채포되어 연행된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최승걸, 이현봉 장로와 신석구목사는 징역 10년형을 언도받는다.
그리고 이듬해, 1950년 6월 25일라는 잊지못할 민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난다. 신석구 목사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전히 인민교화소에 수감된 상태였다.
1950년 10월 3일, 38도선을 돌파한 유엔군은 10월 8일에 개성을, 10월 13일에는 금천을, 17일에는 급기야 평양 바로 남단에 위치한 대동군 율리까지 파죽지세로 진격해 올라왔다. 그리고 10월 19일 유엔군이 평양일대가 완전 점령하고 공산군이 청천강 이북으로 퇴각하며 평양이 완전히 탈환된다.
수형번호 : 소 150호 신석구
10월 차입분을 보내달라던 9월 26일, 면회소의 만남에서 손자 며느리와 증손녀를 본것을 마지막으로 신석구목사의 생사에 대해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1950년 9월 26일에서 10월 23일사이 어느 하루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할 뿐이다. 후퇴하는 공산군이 방패막이로 처형했을 수도 있고 갑자기 모든 소문이 그친 기점인 10월 10일이 그 기점일수도 있다.
“19일 교화소 문이 열리고 가족들이 시체를 찾으러 들어가서 우왕좌왕하는 중에 누군가 ‘10일에 교화소 안에서 총소리가 들렸다’하더군요, 그러자 가족들은 일제히 ‘그러면 10일에 죽인 것이다’하며 방성대곡하였어요, 그리고 선친께서도 10일밤 꿈에 할아버님을 뵈었다고 하셔서 우리는 10일 총살설에 심증을 굳히게 되었지요”
역사의 뒤안길에서,,
한국 정부는 그의 항일 독립투쟁 업적과 공헌을 기려 1963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복장)을 추서하였고, 1968년 7월 9일 국무회의에서 신석구 목사 국립묘지 의관장 의결로 인해 1968년 9월 18일에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선열 묘역에서 의관장을 거행하였다.
또한 목회자 신석구목사를 배출한 감리교 신학대학에서는 1978년 3월 1일 대학내 ‘감신 출신 민족 대표상’을 건립하여 다른 다섯분과 함께 그의 흉상이 새겨졌다.
1980년 8월에는 그의 고향 청주에 있는 청주시 3.1운공원에 충북도민의 성금으로 정춘수목사와 함께 동상이 건립되기도 했다.
10월 어느날, 76세의 고령의 목사는 모든 생애를 마감하고 그에게 늘 음성을 들려주시던 그 분곁으로 돌아갔다. 어려서 부모로부터 옳은 사람이 되라는 교육을 받아 어린나이에도 그 뜻을 배우고자 3년동안 무릎으로 책을 대하던 어린 소년 신석구는 비로소 어릴적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통해 배우고 되고자 했던 옳은 사람이 되는 꿈을 이루었다.
어찌보면 그것이 신석구목사가 어린 시절에 그를 남기고 떠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유지일수도 있었다. 일생동안 평탄한 삶보다 고난의 삶이 많았던 목사, 뜻을 정하고 행하기 이전에 오직 그 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그 분의 음성에 철저히 순종한 목사, 그 분의 음성이 있었기에 목회현장이 형무소가 되었던 목사, 그의 꿈은 현실이 되었다. 옳은 사람(義人) 신석구는 옳은 목회자였으며 옳은 민족운동가였다. 그의 목회는 곧 국권을 회복하는 길이었고 민족을 살리는 길이었으며 그것이야말로 그가 평생에 소망이던 옳은사람(義人)이 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 참고문헌 -
국가 보훈처, “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은재 신석구 선생”. 1996. 3
기독교 대한 감리회 원로목사회보 제 1 호, 1987
김진형, <수표교교회 역사>, 수표교교회, 1994
변선환, 나의 삶 나의 생각, 1994, 경향신문
변선환,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 1984. 3.18 중앙일보
사단법인 3.1운동 기념사업회. “독립운동사 12인의 생애와 사상”. 1997. 3
은재 신석구 先生 國立墓地 安葬式 典帖
이덕주, <새로쓴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개종이야기>,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3
이덕주, <신석구연구>, 기독교대한감리회 홍보출판국. 2000
조이제 外 역사위원회, 한국감리교 인물사전, 기독교대한감리회 홍보출판국.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