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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내게 찾아온 은총의 병고, 은총의 실패, 은총의 노년기!
베트남의 가경자(시복 전 단계) 구엔 반 투안 추기경님의 감사 기도가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주님, 저를 당신 자녀로 선택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저에게 마리아를 어머니로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에게 교회를 통해 선교 사명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에게 당신의 신비를 열어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를 도와주는 여러 형제자매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제 길을 가로막고 저를 힘들게 하는 이들한테도 감사합니다.
그들은 저를 거룩하게 되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를 이 은총의 독방으로 이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쓴잔을 제게 나누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여러 구절 중에 ‘은총의 독방’이라는 표현이 제 마음에 크게 와닿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독방은 아파트 안에 나 혼자 쓰는 방이 아니라 교도소 안에서 특별 관리 대상자가 쓰는 독방입니다.
독방! 하니 세상 편하겠네, 생각하시지만, 완전 반대입니다. 세상과 사람으로부터 철저하게 단절되어 사무치는 외로움 속에 살아가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추기경님은 그냥 독방이 아니라 은총의 독방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그분은 온전히 자기 자신과 세상을 초월하셨던 분입니다. 온전히 하느님과 일치 안에 살아가니, 머무는 곳이 어디든지 천국을 사셨던 분입니다.
추기경님의 표현을 우리도 자주 사용해야겠습니다. 내게 찾아온 은총의 병고, 은총의 실패, 은총의 노년기, 은총의 죽음, 나와 죽어도 맞지 않는 은총의 그분...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도 비슷한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차가운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도 그는 부단히 초대 교회 교우들을 대상으로 편지를 쓰셨는데, 이런 표현이 우리의 눈길을 끌게 합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에페 4,1~3)
바오로 사도는 그냥 수인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주님 때문에 수인이 되었다는 표현입니다. 주님을 위해 일하다가 수인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지금 주님 때문에 갇힌 것을 크게 기뻐하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통과 역경이라 할지라도 아무것도 아님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태도는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새벽부터 캄캄해질 때까지 하루 온종일 빡센 하루 일과를 보낸 지금, 별것도 아니지만, 주님을 위한 하루였음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기쁘게 잠자리에 들어야 하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양심: 원인 모를 불안 해결법>
오늘 예수님은 세상 것들은 예표를 보고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알면서도 인간 일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예측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작은 잘못이 쌓이는데도 자기 잘못을 바꾸려 하지 않으면 결국 큰일을 벌이고야 만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을 방치하기 때문에 큰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에게 ‘지금 이대로 계속 간다면~’이란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할 것입니다.
세상엔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순간에 미쳐서 큰 범행을 저지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작은 구멍이 큰 둑을 허물어뜨리듯이 큰 잘못도 다 작은 것들이 누적되어 일어나는 것입니다.
문제는 점점 나빠지는 자신의 상태를 알아채지 못하는 것에 있습니다. 왜 알아채지 못할까요? 무엇에 집중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개구리를 물에 넣고 조금씩 끓이면 개구리는 온도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죽고 만다고 합니다. 그 변화를 느껴 재빠르게 물 밖으로 뛰어나오면 살 것이지만 작은 변화는 좀처럼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데 개구리에게 온도를 느끼는 피부가 없을까요? 있습니다. 분명 그것에 신경을 쓰지 못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을 것입니다.
자동차에는 많은 계기판이 있습니다. 연료게이지도 있고 알피엠, 또 속도게이지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로 보는 것은 속도게이지입니다. 다른 것들은 가끔만 보면 됩니다. 그러나 연료게이지만 보다가는 속도에 무감각해져 큰 사고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중요한 것은 이 말씀입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사실 우리가 마지막 심판 때 주님 앞에 나아가기 전에도 우리가 천당 갈지, 지옥 갈지 이 세상에서부터 심판해 주는 우리를 ‘고소한 자’가 있습니다. 재판에서 말하자면 구형을 때리는 검찰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먼저 검찰과 협의가 이뤄지면 재판은 하나마나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부터 우리를 고소하는 검찰이 누구일까요?
그 고발하는 자는 바로 ‘양심’입니다. 양심은 우리가 설계도대로 살아가는지 심판하는 측정기구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가 병이 들어도 아프지 않은 상태와 같습니다. 양심이 심판하는 기준은 마지막 때 예수님께서 심판하시는 기준과 같습니다. 그 심판기준은 그분의 계명입니다. 곧 이웃 사랑입니다. 사람은 이웃 사랑의 계명과 어긋날 때 불안해집니다. 그리고 이 불안은 심판 때 구원을 못 받는 것으로 확증 받게 됩니다.
얼마 전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오신 분을 만났습니다. 70세가 넘어서 처음으로 가신 것입니다. 많은 준비를 하였지만, 처음엔 몸도 아프고 40년 이상 껴 온 반지는 물론 많은 물건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차분해졌습니다. 이 길에서 버리게 되는 것은 결국 ‘불안’이라고 합니다. 가장 혼자가 되는 시간임에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가장 강렬하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힘이 들지만, 나중에는 이 길이 끝나는 게 아쉽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평화를 가진 이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나눔’입니다. 산티아고 성인을 만나러 가는 길에서 무언가 쓸모없는 것까지 지고 가는 게 무겁고 어리석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숙소마다 그곳에 자고 간 이들이 필요 없는 물건들을 두고 간 것이 많다고 합니다. 어떤 스님은 빈손으로 와서 버리고 간 물건들만 사용하며 끝까지 완주하였다고 합니다.
나눌 줄 모르는 사람의 목적지는 십자가의 예수님이 아닙니다. 지옥입니다. 그럴 때 양심에서 불안한 감정을 내보냅니다. 이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양심의 문제와 심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유의배 신부의 방 안에 붙여 놓은 글을 다시 상기해야 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죽을 때 두려움이 없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12,54-59: 법정으로 가는 길에서 화해하도록 힘써라.
예수께서는 날씨를 미리 알고 폭풍을 예고할 수 있는 사람이면, 장차 일어날 중요한 일을 마음의 눈으로 보라고 하신다. 중요한 일이란 마지막 시대에 만인의 구원을 위해 당신을 희생으로 바치시는 것이다. 위대하고 값진 구원의 수난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이루어진다. 이제 그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리고 그들은 넘치는 행복을 누릴 것이다. 복음의 재판관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주님께서는 우리 목숨이 다하기 전에 죄와 형벌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우리는 모두 죄를 지은 자들이다. 아직 재판관에게 가기 전에, 즉, 살아있을 때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를 온갖 빚과 형벌에서 자유롭게 해 주고, 온갖 두려움과 번민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주님의 은총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더러움을 씻지 않으면, 재판관 앞에 서서 판결을 받고, 피할 수 없는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 합당한 벌을 받는다.
살아있는 동안에 죄를 벗어버리고 변화되지 않으면 우리의 죄가 오백 데나리온이건, 오십 데나리온이건 탕감받을 자격이 없다. 우리는 감옥에 갇혀 징벌을 받는 것으로 빚을 갚아야 할 것이다. 거기서 마지막 한 푼까지 갚지 않으면 결코 나오지 못할 것이다. 진정한 변화를 우리가 살아있을 때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이 형벌을 면해줄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뿐이시다. 우리가 변화하지 않아 하느님께 죄를 짓게 되면 우리를 재판관에게 넘겨 재판관이 우리를 옥리에게 넘기게 하는 고발자는 누구일까? 우리는 빨리 그를 찾아 합의를 봐야 한다. 그 고발자는 바로 하느님 말씀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며 올바로 살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께 죄를 즉 빚을 지지 않는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시인 헤르베르트는 책 읽기의 무용함을 말합니다. 누군가 그에게 고전을 읽으라고, 그 책들이 수백만 명의 인생을 바꿔놓았다고 말하지만, 자신은 그 책을 읽은 뒤에도 달라진 게 없다고, 솔직히 말하면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푸념했습니다.
헤르베르트의 이 말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습니다. 요즘에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제 책을 출판했던 출판사 사장님께서도 요즘 너무 힘들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책을 사서 보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책값이 너무 비싸다는 이유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이지요.
도움이 되지 않는 책 읽기인 것 같지만, 분명히 도움이 됩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고가 넓어집니다. 작가의 상상력에 저의 상상력을 더해서 새로운 삶을 떠올려 지금을 다르게 살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작가의 통찰에 공감과 비판을 반복하면서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갑니다. 제목이 기억나지 않아도 머릿속에서 나의 이야기를 탄탄하게 만들어 줍니다.
주님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과거의 일회적 말씀이 아니라, 지금에도 선명하게 울려 퍼지는 말씀입니다.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묵상을 통한 마음의 변화로 지금도 새롭게 다가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전혀 변하지 않는다고 또 어느 성경 말씀인지도 모르겠다고 하시면서, 읽지 않는 것이 오히려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것이 된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냥 자기변호일 따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변화는 예측하여 대비하면서, 절박하게 닥친 시대의 변화는 왜 올바로 읽지 못하느냐고 꾸짖으십니다. 이렇게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는 사람을 향해 “위선자들아~”라고 하시지요. 읽을 수 있음에도 읽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통해, 각종 전례를 통해 주님의 말씀은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일이 더 중요하다고, 바빠서 주님을 알 시간이 없다고 하는 것은 모두 위선적인 모습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삶은 분명히 마지막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 세상 삶을 마치고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삶이 영원한 것처럼 사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심판자 앞에 섰을 때 과연 지금까지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대단한 것으로 생각될까요?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모두 사랑의 삶으로 나아가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단순히 이 세상 삶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핵심 사항이 됩니다. 그런데도 주님을 알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의 명언: 해안이 시야에서 사라져도 괜찮다는 용기가 있어야 새로운 수평선을 향해 헤엄칠 수 있다(윌리엄 포크너).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4)
우리의 머리맡에
반짝이는 희망의 등불을
걸어놓은 이가
그리스도이시며
성령이시라네.
한 분이신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성령께서는
우리의 믿음과
세례를 통하여
만물 안에서
언제나 변함없이
거룩히 빛나고 계신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우리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많은 불행들은
우리의 잘못된 습관과 행동에서
비롯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러한 데에서 자신을 성찰하고
변화시켜 나가는 한편,
어리석은 사람은
남 탓만 하면서 불평과 불만을 쏟아 놓습니다.
삶의 지혜는 인간적 지식이나
능숙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앎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앎은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실천이 따르지 않는 앎은 머리로만 아는 겁니다.
모든 사건에 담긴 표징과 암시,
복선을 잘 읽을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눈에 보이는 자연의 징조는 알면서
시대를 읽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내 삶에서 반복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지식은 있으되 삶의 지혜는 갖추지 못했던
위선자들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입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4,1-6
형제 여러분,
1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2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3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4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5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6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54-59
그때에 54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55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56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57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58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59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