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비哭婢/문정희
사시사철 엉겅퀴처럼 푸르죽죽하던 옥례 엄마는
곡哭을 팔고 다니던 곡비哭婢였다
이 세상 가장 슬픈 사람들의 울음
천지가 진동하게 대신 울어주고
그네 울음에 꺼져 버린 땅 밑으로
떨어지는 무수한 별똥 주워 먹고살았다
그네의 허기 위로 쏟아지는 별똥 주워 먹으며
까무러칠 듯 울어대는 곡哭소리에
이승에는 눈 못 감고 떠도는 죽음 하나도 없었다
저승으로 갈 사람 편히 떠나고
남은 이들만 잠시 서성일 뿐이었다
가장 아프고 가장 요염하게 울음 우는
옥례 엄마 머리 위에
하늘은 구멍마다 별똥 매달아 놓았다
그네의 울음은 언제 그칠 것인가
엉컹퀴 같은 옥례야, 우리 시인의 딸아
너도 어서 전문적으로 우는 법 깨쳐야 하리
이 세상 사람들의 울음
까무러치게 대신 우는 법
알아야 하리
<시 읽기> 곡비哭婢/문정희
타인을 위해 울 수 있는 능력
눈물을 두 종류로 나눈다면 그 기준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흔한 분류는 그 눈물의 원인을 기준으로 기쁨의 눈물과 슬픔의 눈물로 나누는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기준은 그 눈물이 향하고 있는 대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마디로 자신을 위한 눈물이냐, 다른 사람을 위한 눈물이냐.
자기 연민에 취해서, 엄살을 좀 부리고 싶어서, 아니면 너무 속상한 일이 있어서 흘리는 눈물들은 모두 자신을 향한 눈물이다 잘 우는 편은 아니지만 나 역시 살아오면서 이런 눈물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향한 눈물은?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눈물 흘린 적이 마지막으로 언제였던가. 가끔 TV나 인터넷을 통해 정말이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기막힌 사연을 목격하곤 한다. 그리고 그 사연의 당사자가 너무 불쌍하게 느껴진 나머지 ARS 전화를 누르거나 후원계좌를 메모해 약간의 돈을 보내기도 한다.
내가 그럴 때 흘리는 눈물은 순도 100퍼센트 그 사람을 향한 눈물인가, 감히 그렇게 말하지는 못하겠다. 사실 그것은 ‘알량한’ 눈물이므로, 그 순간에 잠깐 동정을 느끼고 눈물이 났을 뿐, 난 그들의 삶이 내 삶에 너무 깊게 들어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깊게 들어오면 올수록 내 삶이 힘들어질 것 같으므로, 그저 약간의 돈으로 얼른 죄책감 비스름한 감정에서 빠져나와 내 눈물은 진정되고 내 삶은 별 다른 변화 없이 흘러가야 하므로.
‘곡비’는 옛날 양반 집안에 상이 났을 때 대신 애절하게 울어주던 노비라고 한다. 시인은 다른 아닌 현대판 곡비,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전문적으로 우는 법’을 깨쳐야 하는 사람이라고, 그 울음을 통해 다른 이의 아픔을 치유하는 사람이다. 시인은 다른 이의 눈물에서 재빠르게 못 빠져나오는, 혹은 빠져나오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다. 아무리 애써도 내가 시를 쓰지 못하는 이유를 알겠다.
―김경민, 『시 읽기 좋은 날』, 쌤앤파커스,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