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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화가 진상용 원문보기 글쓴이: 국화
예술가들의 삶을 보면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 안에서 따듯한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멀리
떨어져서 차가운 눈으로 바라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 옳은가는 그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와 각자의 신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예술가의 길이 어느
것인지 단정하기는 어렵겠지요. 그럼 프랑스의 토마 쿠튀르 (Thomas Couture / 1815~1879)는 어디쯤 서 있는
걸까요?
탈주자 The Fugitive
밤새 내 달려 온 걸까요? 하늘 저편 날이 밝는데 몸은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신은 여기서
멈추면 지나 온 길이 물거품이 된다고 몸을 일으켜 세우지만, 붉게 물든 발과 손은 몸을 간신히 일으키는
정도입니다. 다시 어둡기를 기다려야 할지 아니면 자신을 가두었던 추적자들을 피해 다시 길을 가야 할지
결정해야 할 때입니다. 가다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겠지요. 돌아보면 자기가 속한 세상을 벗어나는 일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떠난 사람들 때문에 역사의 지평이 넓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자주 잊습니다. 남자의 등 위로 하얗게 내리는 빛을 보면서 궁금해졌습니다. 더 이상 탈출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어떤 모습의 세상일까요 ------
상리스에 태어난 쿠튀르는 - 나중에 드로잉에 천재의 드로잉 솜씨를 보였다는 평을 생각하면 - 미술에
대한 재능을 타고 났던 것 같습니다. 열 한 살 때 쿠튀르 가족은 파리오 이사를 갑니다. 15세 무렵, 공예
학교에 입학해서 나폴레옹의 전쟁 장면 묘사로 유명한 앙투앙 장 그로 밑에서 8년간 공부를 합니다.
이어 에콜드 보자르에 입학, 초상화와 역사화의 대가였던 들라로슈에게 다시 2년 간의 공부를 계속하는데,
들라로슈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미망인 A Widow 92.1cm x 73.6cm / 1840
원래 미망인(未亡人)의 유래가 남편을 따라 ‘아직 죽지 않은 여인’이라는 글을 읽은 뒤로는 이 단어를 쓸 때
마다 조심스러워집니다. 과부라고 쓰자니 가지고 있는 어감이 좋지 않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혼자 남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생기를 잃은 여인의 눈과 다문 입술 위에는 한 덩어리 상념이 내려 앉았습니다. 살아 갈 일의
막막함은 살아 있는 사람의 몫입니다. 그러나 잠깐 아닐까요? 남은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말이
여인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니까요.
로마 유학이 걸린 로마 대상을 거머쥐는 것은 많은 프랑스 젊은 화가들의 목표였습니다. 쿠튀르도 당연히
자신이 로마대상을 수상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출품을 했지만 번번히 떨어졌습니다. 열 아홉 살부터 스물
네 살이 되던 해가지 여섯 번이나 응시했지만 결과는 22세가 되던 해 수상한 2등이 최고였습니다.
사실주의 화가 The Realist / 46.99cm x 38.10cm / 1865
작품의 제목대로라면 돼지 머리를 앞에 둔 화가는 사실주의 화가입니다. 사실주의 화가들에 대한 쿠튀르의
불편한 심사가 그림에 담겨 있는데 자세히 보면 퀴트르의 귀여운 비아냥에 웃음이 납니다. 돼지는 미술에서
어리석음의 상징이라고 하죠. 그렇다면 참 어리석은 화가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화가가 의자 대신 앉아
있는 조각상은 제우스의 머리입니다. 고전주의를 우습게 본다고 한 마디 하는 것 아닐까요? 퀴튀르의 작품
속에는 상징이 들어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고 보니 벽에 그리기 위해서 걸어 놓은 소품들도 별 것이
없군요.
심사위원회가 요구하는 화풍과 자신이 그린 화풍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쿠튀르는 로마 대상을 포기
하고 자신만의 길을 걷기로 결심합니다. 가끔 제도권의 높은 벽 앞에서 눈물을 훔쳤던 사람들이 시간이
흘러 그 벽을 무너뜨리는 주인공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데, 참 신나는 일입니다. 적당히 주인공의
배역이 바뀌는 것이 세상 보는 즐거움이니까요.
법원에 가는 재판관 A Judge Going to Court
쿠튀르는 당시 프랑스 재판 시스템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뚜렷하게 무엇에 대해
불만이었는지 자료를 얻을 수 없었지만 그가 남긴 작품 중에도 냉소적으로 재판정을 묘사한 작품이 있습니다.
옆구리에 두툼한 자료를 끼고 법원을 향하는 재판관의 자세가 초라합니다.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는 당당함
보다는 소시민의 구부정한 모습입니다. 길 옆에 있는 집의 문은 열려 있지만 인적은 없습니다. 혹시 재판관에
대한 사람들의 무시를 보여주는 걸까요? 재판 받을 일 없는 닭들만 바쁩니다.
로마대상을 포기한 다음 해인 1840년, 쿠튀르는 살롱전에 작품을 출품합니다. 스승인 들라로슈처럼 역사화
위주의 작품으로 그의 이름을 알렸지만, 호평보다는 악평이 많았습니다. 초기 그의 작품은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딜레마를 묘사한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작품에는 음란하고 타락한 주인공들이 등장했고
이를 본 관중들은 그의 작품에 대해 분노했고 살롱에서는 전시를 거부합니다. 이러 저래 화가로서 초년 운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황금 때문에 The Love of Gold / 154cm x 188cm / 1844
책상에 한 무더기 금화를 올려 놓자 남자와 여자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괴테의 파우스트 중 한 장면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마르가레테가 집 앞에 놓인 보석함을 보고 즐거워할 때 친구인 마르타가 나오고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가 등장하는 장면쯤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작품을 통해 황금에 눈이 먼 사람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황금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관심도 없습니다. 내 것이 될 수
만 있다면 가슴을 보여주는 것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영혼을 팔겠다는 각서에 서명하는 것도 문제가
안됩니다. 몽롱한 남녀들의 눈과 차갑게 가라 않은 파우스트와 뒤에 서 있는 메피스펠레스의 눈이 대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끝없이 자신을 흔드는 것, 무엇이신지요?
1844년, ‘The Love of Gold’로 살롱전에서 메달을 수상하면서 쿠튀르는 처음 승리를 맛봅니다. 그 이전
작품에 비해 밝은 색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들라크루아 드깡의 작품이 영향을 주었겠지요. 세상으로부터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에 대해 인정을 받았다고 생각한 쿠튀르는 넘치는 의지로 더욱 야심적인 작품을 제작
하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그리고 1847년, 그이 필생의 역작이라는 평을 받는 작품이 탄생합니다.
퇴폐기의 로마인들 The Romans of the Decadence / 466cm x 773cm / 1847
가로의 길이가 8m 가까이 되는 이 작품을 완성하는 데는 3년이 걸렸습니다. 로마의 시인 유베날리스의
시 중에서 인용한 구절을 토대로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하는데 대강 이런 구절입니다.
‘전쟁보다 잔인하도다 / 악이 로마를 쓰러뜨리고 세상에 앙갚음을 하는구나’
그림의 한 가운데는 춤을 추는 사람, 술을 마시는 사람 등 방탕한 모습의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림 속에는
이 난장판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 세 명 있습니다. 맨 왼쪽 기둥에 앉아 우울한 표정의 사내 그리고 오른쪽
불만스러운 눈길을 던지고 있는 두 명의 방문객입니다. 7월 왕정 아래 프랑스 도덕의 해이를 비판하고 있는
이 작품은 낭만주의 정점에 있는 작품으로 평가 받습니다. 오른쪽 두 번째에 있는 조각상 보이시는지요?
아, 도대체 이 인간들을 어찌해야 하나 -----
‘퇴폐기의 로마인들’이라는 작품은 그에게 명예와 멍에를 동시에 안겨준 작품이 되었습니다. 쿠튀르는 지금도
그 작품 한 점으로 기억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작품 외에 다른 작품은 별로 언급되지 않습니다. 또 그를
정의하는 작품이 되기도 합니다. 작품 속 세부 묘사는 완벽하지만 전체를 모아 놓고 보면 어색한 작품 그리고
과장된 아카데미화의 가장 나쁜 대표적인 예로 언급되기도 합니다. 쿠튀르의 속이 까맣게 타지 않았을까요?
비누방울 Soap Bubbles / 130.8cm x 98.1cm / c.1859
어린 아이답지 않게 심각한 표정입니다. 비누방울이 올라가는 모습에 마음을 놓은 것 같죠? 오색으로 나는
비누 방울이 꿈으로 가득한 세계로 이끄는 알림판인줄 알았는데 여기서는 인생이 덧없음을 말한다고 합니다.
참 괘씸한 상징이군요. 아이가 앉은 의자 뒤에 걸린 것은 월계수관입니다. 시들어 버린 관을 통해 명예와
영광은 저렇게 덧없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겠지요. 쿠튀르다운 상징이고 모델입니다. 제자였던
마네도 스승의 이 작품을 회상하고 ‘비누방울 부는 소년’을 그렸는데 쿠튀르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쓸쓸함과는
많이 다릅니다.
쿠튀르의 작품에 대해 평론가 고티에르는 신구(新舊) 사이에 자리를 잡은 새로운 유파의 선두주자이자 살롱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었다는 평을 내렸습니다. 어쨌거나 사람들의 관심을 받은 쿠튀르는 새로 자신의 화실을
오픈합니다. 최고의 새로운 역사화가라는 말을 들었던 그는 에콜드 보자르의 시스템에 도전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용감합니다, 쿠튀르 선생님!
재판중인 삐에로 Pierrot on Trial / 32.2cm x 38.1cm / c.1863
삐에로가 식당에서 음료수와 빵을 훔친 죄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피에로는 당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상징입니다. 발 앞에 놓여있는 증거물 앞에 삐에로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습니다. 그를 고발한 사람은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손을 번쩍 든 할리퀸은 삐에로의 변호사입니다. 좀 과장되지만 삐에로를 변호하는 목소리가
쩌렁 쩌렁하게 들리는데 재판관은 졸고 있습니다. 속 터지는 상황입니다.
19세기 재판 절차에 대해 쿠튀르의 경멸이 가득 찬 싸늘한 눈초리가 느껴집니다.
문학적인 주제와 전통에 충실한 드로잉으로 걸작들을 제작하던 쿠튀르에게 벽화 제작의뢰가 들어 옵니다.
그러나 세간 사람들이 그의 벽화에 대해 악평을 하자 그는 벽화를 접습니다. 성격도 깐깐했던 모양입니다.
1860년, 45세의 나이에 쿠튀르는 그가 태어났던 상리스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지도하는데 몰두
합니다.
가시 밭 길 The Thorny Path / 130.8cm x 190.5cm / 1873
상징이 많이 담긴 작품입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퇴폐적인 당시 프랑스 사회에 대한 풍자가
가득하다는 것이죠. 마차에 앉아 네 명의 사내가 끄는 마차를 조정하는 여인은 매춘부입니다. 마차를 끄는
네 명의 남자는 사회적 지위와 나이가 다 다른 모습입니다. 맨 앞에 있는 거의 벗다시피 하고 뒤를 돌아보는
남자는 탐닉에 빠진 사람입니다. 잘못된 중년의 모습이죠. 그 다음 남자는 당시 중세의 노래를 패러디 해서
부르던 음유시인의 모습인데 젊은이의 상징입니다. 그 다음은 학생입니다.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을 열심히
기록 중입니다. 답답한 노릇이죠. 일상의 실제 모습을 무시하는, 젊은 귀족들의 모습을 대표하는 이미지이죠.
마지막 남자는 군인입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자책감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는 길은 가시
나무 길과 엉겅퀴로 된 고난의 길입니다.
모두들 정신 안 차릴 거야?
버럭 지르는 소리가 들려 그림을 봤더니 길 옆의 석상이 내지르는 호통이었습니다.
쿠튀르에 대한 평가를 보면 화가에 관한 것도 있지만 뛰어난 선생님이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자세한 그의
교수법을 알 수 없지만 그의 제장 중에 마네, 푸뷔 드 샤반 그리고 팡탱 라투르가 있습니다. 마네는 6년간
쿠튀르의 화실에서 공부를 했는데 제자들을 뛰어난 역사화가로 만들겠다는 스승의 지도 아래 아카데믹 화법을
배웠지만 결과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자연을 자연스럽게 스케치하는 법과 상대적으로 자유
분방한 붓 터치는 쿠튀르에게 기댄 바가 큽니다.
바다 근처 풍경 Landscape near the Sea / 46.7cm x 55.4cm / 1876
가을 오후의 바닷가이겠군요. 앙상한 가지의 나무는 하늘로 손을 뻗었고 잠시 벗어 놓은 모자는 바람에
굴렀습니다. 하늘은 점차 구름에 어두워져 가고 있는데, 기울어가는 햇빛은 언덕의 그림자를 만들고 있고
이따금 나무를 흔드는 바람 소리만 들립니다. 웃옷을 벗어 놓은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이 없는
풍경은 쓸쓸합니다. 가방이 열린 채로 있는 것을 봐서는 멀리 간 것 같지 않은데 --- 삭막한 가을 바닷가에
무엇을 던지러 왔을까, 문득 궁금해집니다.
마네의 걸작 중 ‘풀밭 위의 점심’ 과 ‘올랭피아’에 등장하는 여인의 이름은 빅토린 뫼랑입니다.
뫼랑은 열 여섯의 나이에 쿠튀르의 화실에서 모델 일을 시작합니다. 화실로 그림을 배우러 온 마네를 만났고
그녀는 마네 작품의 주요 모델이 됩니다. 마네가 스승의 화실에서 건진 것 중 가장 큰 것은 혹시 뫼랑이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을 해봤습니다.
어린 과자 장수 The Little Confectioner / 65.7cm x 54.8cm / c.1878
모자를 쓴 모습이나 입은 옷 그리고 손에 든 쟁반 위에 올려진 컵을 보니 과자를 팔기 보다는 만드는 소년
같습니다. 햇빛을 등지고 있어 얼굴이 어둡지만 굳게 다문 입술에는 의지도 엿보입니다. 쿠튀르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그려진 작품을 보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혹시 다가 올 시대를
위해 그 자신만의 화해와 소망의 표시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아이와 과자 --- 희망과 달콤함,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1867년, 52세가 되던 해 쿠튀르는 미술과 관련 된 책 2권을 출간합니다. 한 권은 자신의 미술 기법에 대한
것이었고 다른 한 권은 풍경화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있는 곳을 찾아 오는 젊은 화가들을 지도하는
한편 책을 낸 쿠튀르의 목표는 분명했습니다. 에콜드 보자르로 대표되는 기존의 화화 교육의 권력에 대한
비웃음이었던 것이죠.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하든 자신의 뜻을 분명히 한 쿠튀르는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쿠튀르는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요?
첫댓글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