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순정효황후
106년 전인 1910년 8월 22일 ‘오늘’ 창덕궁 대조전에 딸린 작은 전각 흥복헌(興福軒)에서는 역사적인 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복이 일어난다’는 이름과 달린 그 건물에서는 500여년을 이어온 조선왕조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회의는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한일병합 조약 체결에 관한 전권을 위임하
기 위한 것으로 회의는 일사천리로 끝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때 한 여인이 병풍 뒤에서 나와 옥새를 치마폭에 감춰버렸다. 그녀는 순
종의 부인인 순정효황후였다.
순정효황후는 순종의 첫 번째 비였던 민씨가 세상을 떠나자 13살의 나이에 황태
자비에 올랐다. 나이 많은 황태자의 비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 세간에서는 아버지의 욕심을 탓하기도 했다.
순정효황후의 아버지는 윤택영으로 탐욕이 남달랐던 인물이었다. 딸을 황태자비
로 만들기 위해 막대한 빚을 로비자금으로 뿌렸고, 부원군이라는 지위를 얻자 사
치와 유흥에 빠져 채권자들에게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기도 해 ‘채무왕’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던 파렴치한 아비였다.
그런 아비와 달리 어린 나이에 황태자비에 오른 순정효황후는 나라와 왕실의 영위를 생각하는 반듯한 딸이었다.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하자, 황후로 책봉되고 4년이 되지 않아 나라의
주권을 내주는 지아비의 모습을 보면서 결국 옥새를 치맛자락에 감추고야 마는 불충 아닌 불충을 저지른 것이었다.
지엄한 황후의 치마를 들쳐 옥새를 꺼내올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에서 아비인 윤택영과 큰아버지 윤덕영이 달려들어
옥새를 빼앗고야 말았다.
황후의 치마폭에서 옥새가 사라지면서 세계역사에서는 대한제국이라는 나라가
사라졌다. 이완용이 일본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한일병합에 조인한 후 1주일
이 지나 8월 29일에 순종황제의 조칙으로 발표되면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
대한제국이라는 이름만 사라진 게 아니었다. 극악무도한 일본은 우리의 이름과 말을 빼앗아 갔고, 국가의 상징이 태극기와 애국가도 금지했다. 서슬 퍼런 총칼로 독립운동을 탄압해 많은 애국지사들이 형장의 이슬이 됐다. 주권을 잃은 나라의 서글픔이었다.
주권을 내 주던 그날, 옥새를 부여잡고 마지막까지 나라를 지키려 한 사람이 열일곱의 아직은 앳된 황후밖에 없었다는 것이 우리의 기막힌 역사였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