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ure - Special Feature] 뭍으로 나온 악어, 새가 되고 싶어 하다
다시 쓰는 김기덕론
김기덕 감독이 신작 <시간>을 들고 돌아온다. 그간 국내 개봉 여부를 놓고 말도 많았지만, 영화 외적인 조건들을 떠나 김기덕은 여전히 우리들의 중요한 화두다. 영화평론가 심영섭이 <시간>을 통해 김기덕을 되돌아본다.
오늘만 해도 김기덕 감독의 최근 발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전화를 언론사로부터 세 통 받았다. <시간> 시사회 날 김기덕 감독은 선글라스까지 쓰고 나와서 "아는 사람들 쳐다보고 이야기 못하겠다. 다시는 한국에서 영화 개봉 못할지도 모른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그는 심지어 "오늘이 내 제삿날"이라고 토로하기까지 했다. “아… 그거요. 김기덕 감독이 땡깡 피우는 거죠. 협박이라기보다 땡깡.” 내 말을 그대로 받아 적을 수 없는지 기자는 수화기 너머에서 잠시 머뭇거린다.
바보. 다시는 안 만나줄 거면 "관객이 20만 정도 들면 다시 개봉할 수도 있다" 이딴 소린 왜 하니. 그런데 본인은 하소연이든 불평이든 할 수 없다고 하지만, 사실 그 땡깡 이해가 가긴 간다. 대한민국에서 한 발자국만 벗어나면 김기덕 감독에 관한 전 세계 영화인들의 애정과 지지와 관심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달포 전 갔다 왔던 더반국제영화제에선 만나는 사람들마다 ‘김기덕 감독 신작 봤냐. 나는 김기덕 감독 팬이다. 너는 김기덕 감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던졌다. 지독한 영국인들 때문에 5대조 할아버지가 사탕 수수밭 노동자로 남아프리카에 끌려가 그만 더반이 고향이 된, 새까만 눈이 초롱초롱한 인도인 프로그래머 네이선은 "김기덕 감독의 <빈 집>을 정말 틀고 싶었다. 그런데 프린트가 한 벌밖에 없다고 해서 받을 수가 없었다. 다음 해에라도 꼭 틀겠다"며 미소 짓는다. 나는 그에게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오면 소주를 사주겠노라 했고, 김기덕 감독의 신작인 <시간>을 같이 보자고 약속했다.
김기덕 감독은 정말 이상하게 느낄 것 같다. 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 30만 관객이 안 들까. 점점 착해지고 점점 순해지고 점점 유명해지고 점점 인정받고. 남들은 모두 정말 좋은 영화라고 하는데 왜 내가 태어난 곳의 사람들은 내 영화를 보지 않는 걸까. 대한민국이란 지도에서 한 발자국만 행군해 나가도 마이클 니만이 내 영화음악을 담당하고 싶다고 줄을 서는 지경인데. 그는 이 괴리를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이것 역시 일종의 분열이므로. 해병대 가겠다고 입대 전날 가족들에게 갑작스레 폭탄선언했던 그때처럼, 그는 대한민국에 절연선언을 한다. 다시는 안 놀아, 라고. 아…. 그런데 어쩌나. 고향에서 환영받는 예수는 없는데. 아무리 착해져도, 아무리 순해져도 자신에게 가시관을 씌우는 자들은 자신과 한 탯줄에서 태어난 바로 그 인간들, 고향 사람들 아니던가.
김기덕, 착한 감독 되다
개인적으로 김기덕 감독의 영화평을 쓸 때마다 항상 생각했던 것 중 하나는 ‘지금 보는 이 영화가 김기덕 감독의 모든 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이었다. <나쁜 남자>를 볼 때도, <섬>을 볼 때도 먼 시간의 눈으로 보자면 그건 어디까지나 김기덕 감독의 긴 필모그래피 중 초기작에 해당하는 것들이란 생각을 하며 봤다. 이 기세로 이 속도로 만들면 얼마나 많이 만들까. 파스빈더가 따로 없었다. 그런데 금번 <시간>을 보며 김기덕 감독의 작품세계도 확실히 중기에 도달했다는 강한 삘을 받는다. 김기덕 감독이 바뀌었다. 사실 개인적으로 그의 작품이 제2기에 들어섰다고 생각했던 시점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부터였고, 그것을 더 또렷이 느낀 건 전작인 <활>부터였다. 큰 맥락에서 보자면 <활>은 <섬>에 대한 변형 버전과 비슷하고 다시 초창기 동물적 리비도의 세계로 돌아간 듯도 했다. 다른 사람의 말은 듣되 제 말을 하지 않는 소녀(<섬>의 희진처럼)는 늙은 노인에 의해 배에 유폐당하고 노인은 하루하루 제 색시 삼을 날만 기다린다. 그러나 소녀가 낚시하러 배에 당도한 청년과 사랑에 빠지자 노인은 소녀를 데리고 해상에 나가 갑작스레 전통 혼례식을 올린다. 그리곤 혼자 남겨진 소녀의 가랑이 사이로 활을 겨눈다. 그런데 그때였다. 노인은, 그것도 군복 입은 남자인 노인은 그 활을 빈 허공에 쏴버리고 물에 풍덩 빠진다. 놀라웠다. 이런 모습 처음이었다. 나는 이전까지 이런 식의 ‘포기’를 김기덕의 영화 세상에서 본 적이 없었다. 포기란 외면의 계율이 내사화되었을 때만 가능한 인간의 행동이다. 남자 아이들은 어머니의 가슴을 포기하는 위대한 결단과 성숙의 과정을 거쳐 남성이 된다. 그런데 그 포기를 김기덕의 남자 주인공들이 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기덕이 착해지기 시작했다. 전혀 변하지 않을 것 같던 과거의 욕망에 종을 치고, 새로운 욕망의 새순이 나타나는 듯 보였다.
김기덕의 하강 욕망
사람들은 오해한다. 아니 질문한다.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는 매춘이 등장하고 여대생을 창녀로 만들었기 때문에 ‘나쁜 영화’인가?(이걸 시선의 문제로 그렇게 누누이 이야기했건만) '악어' '야생동물 보호구역'이란 제목이 암시하듯 초기 작품세계에서 노출되는 김기덕 감독의 세계관은 정글이고, 이 정글은 지전 한 푼에 여자들이 몸을 팔고 회 떠진 물고기들이 오물과 함께 떠다니는 그런 장소였다. 그곳에서 군복 입은 남자들은 투전과 매춘, 개를 잡아 파는 일, 낚시꾼 뒤치다꺼리 등으로 한 세상을 헤쳐 나간다. 그러니 짐승이 자신이 짐승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짐승이 자신이 하는 일을 폭력이라 이름 붙일 수 있겠는가? 김기덕의 남자 주인공들에겐 자신이 하는 짓거리가 죄라는 그런 의식 자체가 부재한다. 김기덕의 정글은 도덕률의 잣대를 가져다 댈수록 재미도 없고 이해도 안 된다. 그때 짐승으로서, 김기덕 감독의 남자 주인공들은 대개 집착하고 추동을 일으키는 ‘하강 욕망’에 의해 행동한다. 그것은 일종의 거대한 자신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충동 같은 것이다.
일례로 당신이 사창가를 휘어잡는 조폭 두목인데 여대생을 사랑하게 되었다 쳐보자. 어떻게 하겠는가? 정답은 몇 주 전 종영한 <101번째 프로포즈>란 드라마에 이미 나와 있다. 거개의 남자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상승함으로써 그녀와 하나 되길 꿈꾼다. 아나운서를 사랑한 백수건달 주인공은 백수생활을 청산하고 아름다운 그녀가 있는 방송국의 세트맨으로 입사한다. 그런데 이런 식의 ‘상승 욕망’이 김기덕 감독의 남자 주인공들에겐 아예 부재했다. 내가 사창가 조폭이면 여대생을 창녀로 만들어 사랑하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하강 욕망은 필시 도덕률의 결을 거스른다. 아니 하강 욕망 그 자체가 김기덕 감독의 자장 안에선 정치적이고 사회계급적인 것과 결탁하는 지점에 다다른다. 사실 <나쁜 남자>는 여대생을 창녀로 만듦으로써 '조폭 출신의 남자와 여대생 출신의 여자는 한 벤치에 앉아 있을 수 있는가?'를 질문하는 영화였다고 본다. <수취인 불명> 중 매춘부였던 어머니의 몸에서 문신을 도려내려는 창국의 폭력은 마치 도려낼 수 없는, 아직도 이 땅을 돌아다니는 역사적 환부를 도려내려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들은 서로에게 지독히 폭력적이지만 헤어질 수도 없다. 아니 어느 순간 정체성의 융합에 이Ⅴ?
그래서 김기덕의 모든 영화는 남자-여자 혹은 여자-여자들의 지독한 연애담이기도 하다. 이때 이들이 품은 살벌한 하강 욕망의 면죄부는 ‘고통’과 함께 찾아들어 관객을 설득하려 든다. 김기덕의 영화 세상에서 폭력은 주인공들의 고통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는 하나의 장치로 기능한다. 심지어 <섬>이나 <악어>에서 여성의 육체에 가하는 폭력은, 특히 그것은 성기나 자궁에 집중되는데, 늘 그 뒤의 자신에 의해 폭력의 대상이 되는 남성들의 고통으로 취소되어진다(아니 취소시키려 든다). <해안선>에서 여성을 강제 낙태시켰던 군인들은 그 대가로 상징계를 넘어서 아무에게나 총을 쏘고 반미치광이 상태에서 길거리를 헤맨다. 그런데 이 하강 욕망의 이미지가, 큰 돌을 등에 업고 이 산 저산을 기어 다니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업보에 사무친 중생의 이미지에서 <빈 집>에 이르러선 천사-그림자의 메타포로 갑자기 바뀌더니, 이윽고 <시간>에 도달하자 갑자기 고치에서 깨어난 나비처럼 다른 남자와 다른 여자들이 김기덕의 입에서 튀어 나온다.
나쁜 남자? 아니 다른 남자
<시간>의 지우(하정우)라는 남자 주인공은 강간, 착취, 폭행, 일탈, 침묵 대신 요리하고 사진 찍고 차 마시고 말하는 남자다. 그는 그리움을 느끼고, 도덕적 망설임이 있으며 (성형 수술을 한 새희가 아직도 성형 전의 여자를 사랑하느냐고 물어보자 그는 뚜렷이 당혹해한다) 사진을 찍는다. 그는 부랑아, 범죄자, 살인자가 아니며, <빈 집>의 태석이나 <나쁜 남자>의 한기 같은 떠돌이도 아니다. 그건 여자들도 마찬가지여서 일명 ‘원피스 입은 여자’라 명명할 수 있는 김기덕의 여자들, 늘 꽃무늬 원피스를 입는 신비하고도 원형적인 분위기의 여자 주인공들, <악어> <섬> <파란 대문> <활> <나쁜 남자>의 전통적인 김기덕식 여자 주인공과 달리 <시간>의 새희 - 성형 전 '세희'였던 여인(성현아)은 성형 후 '새희'(박지연)로 이름을 바꾼다 - 는 김기덕 감독의 여자 주인공 중 가장 현대적이고 자기 주장성이 두드러진다. 무엇보다도 이 여자는 그동안 줄기차게 김기덕 감독이 즐겨 취하던 ‘누군?×?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여자’와는 사뭇 거리가 멀다. 새희는 심지어 지우에게 ‘내가 창녀냐?’고 따진다. 솔직히 이 대목에선 나도 목이 멘다. 김기덕의 여자들이 드디어 ‘내가 창녀냐?’고 따지는 경지에 이르렀다(감독은 이미 이러한 변화를 이름자 속에 새겨 넣는다. 예전에 많이 쓰던 이름 선화, 즉 ‘착한 여자’와 달리 <시간>에서는 '새희'라는 ‘새로운 여자’가 등장했다). 사랑에 집착하는 건 매한가지이지만, 그들의 가학이 또는 폭력이 자기 자신에게, 자기 자신의 얼굴이란 기표에 이른다는 것은 놀랄 만한 변화에 속한다. 이걸 아주 엉뚱한 방식으로 상상해본다. <시간>이 <나쁜 남자>나 <수취인 불명>식의 버전이었다면, 과거의 드라마 트루기를 상정한다면, 지우는 새희와의 오랜 만남으로 싫증이 나자 그녀를 강제적으로 병원에 끌고 가 성형 수술을 시킨 후, 그것도 얼굴이 아니라 이쁜이 성형 수술을 시킨 후, 다른 남자와 성 관계를 갖는 것을 고통을 참으며 지켜봐야 했었다. 아, 하느님.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성기가 아닌 얼굴에 폭력을 가한다. 강제적으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주어진 고통이 아니라 스스로가 선택한 고통 속으로 들어간다.
포월에서 초월의 의지로
왜? 왜? 김기덕의 주인공들이 달라졌는가. 그들은 여전히 사랑으로 구원 받으려 든다. 소유함으로써 사랑하려 든다. 그러나 그들의 의지가 달라졌다. 나는 분명 이것을 ‘의지’라고 했다. 의지는 욕망과 달리 뭔가 자발성이 있다. 이건 제2기 이후 김기덕 감독 세계의 핵이기도 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 인생과 계절을 빗댄 은유, 성경 구절을 본 딴 <사마리아>와 <빈 집>을 거쳐 <시간>은 제목조차도 추상적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주인공들은 주어진 업보를 초월하려 하고, <사마리아>의 아버지는 죄의식으로 가득 찬 일방차선에서 차를 꺾으며 <빈 집>의 주인공은 말 그대로 ‘집’이라는 주거 혹은 머무름의 기능을 비워내며 인간에게 주어진 공간성을 탈피했었다. <활>의 활 역시 그것이 날아서 간다는 점에서 공간을 초월하는 물체 아닌가. 그리하여 필연적으로 이제 김기덕 감독의 손에서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마지막은 시간밖엔 없게 되었다. 시간과의 싸움이야말로 인연과 업보를 훌쩍 뛰어 넘으려는 신의 욕망에 가까운 무한대의 싸움이기도 하다. 정말로 거대한 돌을 업고 바닥을 기듯이, 대상을 감싸 안으며 간신히 넘어갔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포월의 의지로 충만했다면, 불과 몇 년 사이에 김기덕의 영화들은 포월에서 초월로, 훌쩍 경계 자체를 날아서 넘으려 든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비극은 발생한다. 초월은 오직 신만이 가능한 것 아닌가. 오직 신만이 공간과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그것은 신들의 깊은 욕망이다.
푸른 수염의 유폐 심리
이 지점에서 우리는 김기덕 감독 그가 초월의 길에 이르기까지 걸어야 했던, 공간적 변이 혹은 그의 영화들에 끈질기게 나왔던 유폐 장치들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왜냐하면 유폐의 논의는 결국 초월의 논의와 필시 만나게 될 터이니). 초창기 다른 많은 필자들처럼 나 역시 김기덕 감독의 ‘물의 이미지’에 눈을 앗기며 늘 간과했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서 물 위에 뜬 절, 저수지 위에 뜬 간이 가옥, 바다 위에 고립된 배는 다름 아닌 ‘감옥’이었다는 것이다. <악어>에서부터 시작해 <빈 집>까지 줄곧 김기덕의 남자 주인공들은 감옥에 간다. 항상 남자 주인공들만 가는 것도 신기하고, 항상 그 감옥에서 나온다는 것도 신기하다. 이런 유폐에 대한 선택은 그러나 비단 김기덕 감독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기형도는 사랑을 잃고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라고 슬퍼했으며, 결국 한 뼘 동굴에 들어가 누움으로써 안식을 찾는 이승우의 <나는 아주 오래 살 것이다>에도, 개인적으로 여자 김기덕이라고 생각하는 천운영의 소설집 <바늘>에도 유폐의 욕망은 표표히 살아 숨 쉰다. 유폐는 모든 상처받은 자들의 특권이다. 유폐란 외부의 폭압성에 대항하여 사랑받지 못하는 분노나 상처 입은 영혼들이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기착지, 유일한 탈출구다. 타인에게 발송되는 초대장을 지우고, 거대한 수취인 불명의 세상에서 기꺼이 유폐는 외로운 안식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김기덕의 유폐는 어디까지나 동물성이다. 그의 남자 주인공들은 이 유폐에 대해 매우 양가적인 면을 보인다. 박찬욱의 주인공들과 달리 김기덕 감독에겐 죄목이 중요하지 않다. 살인이든 사기든 폭행이든 사회적, 물리적 힘에 의해 강제 투옥을 당한 남자 주인공들은 오히려 이 유폐에 대한 두려움을 더 수동적인 여성 타자에게 투사시킨다. 이런 관점에서 김기덕의 주인공들은 일종의 다른 여성들을 유폐해놓는 푸른 수염들은 아닌가. 그러한 유폐를 통해 그들은 여성의 자궁 혹은 더 원시적인, 원형적인, 신화적인 상상계적 공간으로 탈출하고 싶어 한다. 아니 되돌아가고 싶어 한다. 자신이 짐승이 아니라 인간임을, 남성임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들은 선화라는 여대생을 사창가라는 육체의 감옥에 유폐하고(<나쁜 남자>), 한 소녀를 물 위의 배에 가두어 키웠으며(<활>), 정체불명의 여자들을 물속의 집에 처박아 두었다(<악어>, <섬>). 이 유폐하고 유폐당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욕망이고 절망인가 하는 것을 알기 원한다면, 김기덕 영화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수갑과 철사 같은 속박의 시각적 이미지를 보라. 그들은 처음에는 자신의 몸을 잘라 수갑에서 벗어났고(<악어>, <야생동물 보호구역>), 철사를 아예 삼킨 후 즉 속박물을 함입한 후 그것을 형사의 목을 조르는 도구로 사용함으로써 탈주했으며(<수취인 불명>), 그 후엔 동료의 희생으로 사형의 위기에서 벗어나(<나쁜 남자>), 마침내 자수를 함으로써(<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최후에는 다른 사람의 등 뒤에 존재함으로써 그러니까 누군가의 수호천사-그림자(<빈 집>)가 됨으로써 감옥에서 벗어난다. 즉 물속의 집에서 물 위의 집으로, 그리고 지상 위의 방 한 칸으로 그의 집이 점차 점차 뭍에 접근할수록 김기덕 감독의 공간들은 현대의 도시 안으로 진입하면서 주인공들에게 더 초월적인 방식의 탈옥을 부추긴다. 이제 김기덕의 남자 주인공들은 견고한 상징계를 물리적 방식이 아니라 초월적으로, 추상적으로 탈옥하기까지 한다. 물리적 경계는 중요하거나 존재하지도 않는 듯 감옥에서 훌쩍 벗어난다.
결국 여성들의 유폐 공간인 물속의 집, 배, 섬 등이 상징계의 그물망에서 벗어난 신화적이고 원형적이며 심지어 자궁적인 퇴행적 공간이라면, 감옥은 그것에 대항하는 견고한 물리적 감옥, 아버지의 법이 숨 쉬는 상징계적 공간이라 하겠다. 김기덕의 남성들은 여성들을 유폐시킴으로써 자신을 강제적으로라도 기다리게 만들어버린 그 공간으로 헤엄쳐 되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런데 <시간>에 이르면, 늘 구체적 공간을 점유하거나 서사의 일부로 존재했던 물리적 감옥이 점차 사라지고(물위의 섬이라는 원형적, 신화적 공간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포스터에서 보여주듯 두 사람을 휘감은 철사의 이미지인 시간, 즉 더 추상적인 관념으로 속박은 대치된다. 이제 초월의 의지와 유폐의 욕망은 정말 제목처럼 ‘시간’에 대한 탐구로, 시간을 어떻게 탈출할 것이냐 하는 아주 다른 질적인 문제로 비화하는 것이다. 여전히 이미지는 생생하고 구체적이지만, 제2시기를 맞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 세상은 거대한 관념과 추상의 세계로 방향을 선회한다.
순환하는 시간 속으로
이제 새희는 시간의 뫼비우스 띠 위에서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남자의 반응이 그걸 깨닫게 만든다(그러한 면에서 지우는 미노스 같은 유폐자는 아니지만 일종의 촉발자라 할 만하다). 여자는 남자에게 이렇게 외친다. 시간이 무서웠어. 모든 것을 변하게 하는 시간. 그 시간을 잡기 위해 여자는 특단의 대책을 내린다. 오롯이 남자를 떠나 성형 수술을 받는 것. 즉 ‘육체-액자’를 파열하고 그 안에 든 ‘기표-살로 만든 명함-얼굴’을 바꾸기로 결심한다. 이윽고 나타난 새로운 여자 새희에게 지우는 괜스레 끌린다. 그러나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수록 여자의 얼굴은 더욱더 슬프게 변한다. 그??고 새희가 성형 수술을 받고 병원에서 나올 때, 세희는 새희와 부딪혀 의미심장하게도 그녀의 액자를 부수어 놓는다. 이 대목은 영화의 마지막에서도 반복된다. 이것은 제목 그대로, 순환하는 시간성에 대한 김기덕식 탐구서다. 전작 <나쁜 남자>에서 창녀촌에 유폐된 여자는 바닷가에서 찍은 얼굴 없는 사진을 발견하고, 뫼비우스 띠처럼 꼬인 시간 속으로 들어가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남자와 두 번째 사진을 찍었다. 이 지점까지만 해도 시간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처럼 물리적인 순환을 하는 시간, 계절과 인생을 빗댄 낯익은 시간, 매우 구체적 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빈 집>에서 태석과 선화가 자신이 살던 집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똑같은 집이란 공간이 더 이상 예전의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두 남자와 한 여자가 동거 가능한 판타지의 공간으로 변화된 것처럼 <시간>에서 김기덕 감독은 훨씬 근원적이고 철학적인 질문, 시간성에 대한 사유를 시작한다. 흥미로운 것은, 성형 수술이라는 이 살들의 파열과 변형에 의한 자기 정체성에 대한 탐색이, 시간을 잡으려는 몸짓이, 메를로 퐁티가 이야기하는 살의 철학, 모든 인간은 다 살로써(즉 육체로써) 사유하고 생활하고 실존하며 결국 시간의 변화를 느?ㅄ募? 이 프랑스 철학자의 이야기를 마치 잔혹한 현대판 동화식으로 번안해둔 듯 보인다는 것이다(사족이지만 이 경우 많은 서구의 감독들이 신체 윤곽의 파열을 성차의 문제와 결합시켜 여성과 남성, 인간과 동물이라는 경계를 뛰어넘으려는 반 자연화된 욕망을 담는 소재로 활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김기덕 감독은 육체의 변형에 의한 성차의 교란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즉 새희는 성형 수술을 통해 남성이 되려 하거나 영화 <신데렐라>처럼 괴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간으로부터의 탈옥은 탈출의 명수인 후디니도 해내지 못했다. 인간으로서 신의 욕망에 도전한 이들은 오인된 정체성과 지워진 얼굴을 가지고 영원히 시간의 미로 속을 헤맨다. 여자가 성형 수술을 하면서까지 시간의 부식에 대항했다는 것을 안 남자는 자신 역시 성형 수술을 한 후 여자 곁을 떠난다. 여자는 남자를 찾으러 이 남자 저 남자를 전전하지만, 결코 남자를 찾을 수는 없다. 그들은 마침내 시간의 미궁 속에 갇히고야 만다.
얼굴, 그 힘센 기표의 세계로
그런데 왜 성기가 아니고 얼굴이란 말인가. <섬>에서처럼 '강간'이라는 야만의 결혼식을 올려서라도 가지고 싶어 했던 여성 성기를 포기하고, 감독은 <시간>에서 끊임없이 ‘지워진’ 얼굴의 되돌이표 속에서 새로운 서사를 이끌어 간다. 그러니까 지우는 세희와 즐겨 찾던 단골 카페에서 스스로를 ‘새희’라 소개한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어느 날 그는 사랑해라고 반복해 쓰여 있는 그래서 뭔지 잘 모르겠는 편지를 받는다. 새로운 새희와 사랑에 빠지는 지우 앞에 새희는 사진으로 만든 가면을 쓰고 나타나 자신이 바로 그 세희였음을 고백하고, 지우는 그녀를 성형해준 외과 의사를 찾아가 자신 역시 성형 수술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게 해달라는 주문을 한다. 이 성형을 한번 ‘기억’의 문제로 바꿔보자. 뭐 생각나는 영화 없을까. 여자는 남자와 헤어진 상처가 너무 괴로워 라쿠나 클리닉에 가 남자와 연관된 기억을 모두 지운다. 새로 나타난 여자친구는 남자를 알아보지 못한다. 변심한 여자 친구에 충격을 먹은 남자, 그 이유를 알아봤더니 여자 친구가 기억을 지웠다는 것이다. 남자 역시 여자 친구와 관계된 기억을 똑같은 병원에 가서 지우기로 한다. 바로 <이터널 선샤인>의 줄거리다. 이밖에도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사랑에 관한 기억과 시간성의 문제는 허진호의 <봄날은 간다>에서도 역시 탐구된 주제였다.
그러나 기억의 미로가 아니라, 김기덕은 그러한 시간성의 문제를 철저히 ‘얼굴’이라는 기표에 천착함으로써 구체화, 물질화시킨다. 세희는 예전의 얼굴을 다시는 찾을 수 없다는 성형외과 의사 앞에서 ‘예쁘게’가 아니라 ‘다르게’ 해달라고 주문한다. 그녀는 지우에게 ‘맨날 똑같은 얼굴이라서 미안하다’고 한다. 기호학을 찾을 것도 없이 기표는 오직 차이에 의해서만 존재한다(고양이라는 기표가 고양이인 까닭은 그것이 강아지도 닭도 해도 달도 아닌 시각적, 청각적 표상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김기덕 감독의 세계에서는 유난히도 이 기표가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될 때 갑자기 그 힘이 무척이나 세지는 경우가 왕왕 있다. 일례를 들면 <나쁜 남자>에서 한기는 거리에서 불량배를 만나자 종이를 접어 눈 부분만을 남긴 후 그것으로 남자의 목을 찌른다. 종이가 유리가 되는 상황. 나무 막대 두 개가 갑자기 드라큘라를 물리치는 것처럼, 갑자기 십자가라는 힘센 기호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세희는 종이로 만든 가면, 정말로 조악하고 파열되기 쉬운 기표로 다시 한 번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이때 종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명함을 찢은 상태다. 살로 만든 명함인 얼굴을 찢었고, 마침내 종이 가면을 찢는다. 종이라는 것이 주는 일회성의 세계. 이제 완전히 정체성을 잃은, 진정한 기의와 만나지 못하는 얼굴은 어떤 방식으로든 기호의 그물망에 잡힐 수가 없다. 새희는 5개월 후 다시 만나러 오겠다는 지우를 찾아 헤맨다. 즉 지우라는 기표와 접속해 지우라는 진짜 기호를 만나길 열망한다. 그녀는 지우를 확인하기 위해 손으로, 촉감으로, 피부의 느낌으로 육체가 아는 기표적 방식을 다 동원하지만 끝내 ‘지우’ 혹은 ‘지우라’라는 명령형으로도 들리는 이 사내, 하나의 온전한 기호를 소유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타박타박 걸어오는 시계 소리
<빈 집>에서 감독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전한 육체나 자궁의 경계를 허물어서까지 한 기호를 기의에서 분리해 스스로 어떤 분해된 기표의 조각들로 만들려 했었다. 그런데 이 낯선 기표의 세계, 그것이 불러오는 현실감의 증발은 늘 사무치게 낯설고 이질적이고 충격적이다. 누가 <시간> 속의 이미지, 잡지를 오려 붙인 얼굴, 볼이 텅 빈 조각 얼굴, 순서가 뒤바뀐 토르소 조각, 물 위에 뜬 손 같은 기표 조각들을 망막에서 사라지게 할 수 있는가. <빈 집>에서 선화의 사진 역시 조각조각 분해돼 액자 속에서 재배열됐다. 기표를 분해하고 재배열함으로써 감독은 아주 낮선 이질적 세상, 기의가 증발해버리고 그저 기표만이 둥둥 떠다니는 세상 속으로 관객들을 안내한다. 사실 김기덕 감독은 에곤 실레 같은 회화 작품들을 곧잘 영화 속에 끌어들이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방식 역시 그것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사회적, 예술적 맥락 없이 뚝딱 자신의 영화 속에 그 이미지만을 가지고 들어오는 식이다. 기표가 기의를 떼버릴 때, 이제 기표는 더 이상 자신이 몸담았던 본래의 맥락들을 상기시키거나 교육시키려거나 훈계하거나 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에서 인천 모도에 있는 조각상들은 어떤 시 속의 한 단어처럼 그냥 떠올랐다 사라진다. 바다는 커다란 캔버스처럼 펼쳐지고 신체는 본래 그 육체라는 커다란 맥락에서 분절되어 그 자체의 결로 그저 존재한다. 그런 면에서 <시간>에서 굳이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을 끌고 들어온 것은 매우 이례적이지만 이 또한 의미 있는 일로 보인다. 사실 이 소설 속에서 아흔 살 노인은 과거 단 한 번도 결혼하지 않고 수백 명의 창녀들과 관계를 맺어왔다. 그런데 그가 어떤 ‘소녀’를 보는 시간, 그 순간에 그의 호화로웠던 성적 편력의 과거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소녀는 노인에게 성욕을 일으키거나 자신의 과거를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노인의 죽어가는 육체를 그저 맞닥뜨리게 한다. 즉 과거의 시간은 노인 자신의 역사 안에서 어떤 기의도 받지 못한다.
이 ‘구상적 추상주의’의 세계가 바로 김기덕의 작품세계다. 그는 말을 믿지 않는다. <시간>에 이르러선 다소 수다스러워졌지만, 대부분 그의 주인공들은 들을 수 있으되 말하지 않는 축에 속했다. 그의 대부분의 주인공들이 극히 대사가 적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 즉 그들은 가장 강력한 기호인 언어를 죽도록 배척해왔다. 그렇게 함으로써 김기덕의 주인공들은 항상 상징계의 그물망에서 도주 혹은 탈주하는 데 성공한다. 이 맥락에서 살펴보면 <시간>의 첫 장면에 나오는 회중시계 소리도 '시간'이란 타이틀과 함께 아주 육중하고 둔중하게 그냥 타박타박 관객에게 걸어올 뿐이다. 개인적으로 이 시계 소리가 그저 소리라는 것이 더없이 중요하다고 본다. <올드보이>의 타이틀 장면을 떠올려보자. 박찬욱 감독은 살바도르 달리식의 흘러내리는 시계의 시각적 이미지와 시계 소리, 그리고 음악이라는 청각적 이미지들이 완벽히 조화되도록 화면을 꾸몄다. 그러나 <시간>의 첫 장면은 시계의 시각적 이미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시간이란 글자와 소리라는 단순하고 구체적인 청각 이미지로 관객들에게 다가간다. 이때 시간이라는 기표는 마치 시계 초침처럼 찰칵대면서, 글자라는 기표가 시계라는 기호를 대치한다.
정말 흥미로운 것은 그가 시간성에 대해 탐구하면서도, 정작 영화라는 매체가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시간 이미지로서의 영화 만들기에는 거의, 아니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즉 대부분의 감독들이 시간을 탐구한다고 했을 때, 내용과 형식을 조화시키려 든다. 예를 들어 송일곤 감독은 영화의 시간성을 탐구하기 위해 <마법사들>에서 여자 주인공의 자살 사건을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도록 재배열하고, 전혀 편집 없이 한 컷이 한 신이 되게 하는 극단적 롱테이크로 시간성을 테스트해봤다. 그러나 김기덕 감독에게 영화란 어디까지나 아주 구체적이고 강렬한 이미지로 분절되는 하나의 화시 즉 ‘그림시’이지, 편집이나 길게 찍기 등의 방법을 통해 시간을 필름 속에 각인하는 그런 오쏘독스한 정통 방식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
결론적으로, 나는 가끔 짐승이었던, 악어였던 김기덕 그가 그립다. 카를로비바리영화제 사진 속에서 생전 처음 양복 입은 그를 볼 때처럼 가끔 요즘 그의 영화들이 매우 낯설 때가 있다. <빈 집>이 걸작이라고 모든 평론가들이 입을 모을 때마다 한강에 다시 악어가 어슬렁거렸으면 싶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알겠다. <시간>에 이르러 마침내 이들 야생동물들이 내뿜는 동물적 에너지로 충만했던 한 세계가 허심탄회하게 명멸하는 걸 목도하게 된다. 이 영화 속에서 틀림없이 당신은 전작들의 팔팔한 에너지와 보는 이를 압도하는 직설의 힘이 슬그머니 빠져버린 김기덕, 한결 서정적이고 부드러워진 김기덕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는 변화된 자기를 좀 알아달라고 땡깡, 하소연, 투덜, 불평, 불만, 협박, 애원 같은 모든 제스처를 취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사랑받기를, 관객들과 접속하기를, 그는 대한민국과 절연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도 변하지 않는 것은 있다. 아마도 영원히 변하지 않?弩만? 하는 것들. 여전히 그는 파열을 통해 새로움을 꿈꾼다. 고체화된 시간을 깨부숴 다시 시작하자고 말한다. 결국 스크린을 통해 재현되는 파열되는 육체의 이미지 속에서 깨닫는다. 살점과 핏물을 담은 거대 용기인 우리 인간에게 구속이란 외부의 폭압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육체가 거대한 새장이고, 낡아가는 가죽 부대이며, 시간의 부식판이라는 것을. <시간>은 김기덕 감독의 작품 중에서 가장 어둡고 비관적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부터 시작된 종교적 초월성의 의지는 결국 실존적 초월성에 이르렀지만, 구원은 아직 멀다. 아니 애초부터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마저 든다.
이제 그는 어디로 갈까. 어디로 날까. 홍상수가 공간적, 서사적 반복 속에서 시간 게임을 하고, 박찬욱이 드디어 <친절한 금자씨>에서 ‘용서’의 기미를 보이며, 허진호 감독이 ‘계절로서의 인생’이라는 은유 속에 갇혀 있을 때, 김기덕 감독은 ‘초월’로 공간과 시간을 훌쩍 날아 관객의 품안으로 스며든다. 뭍에서 기어 나온 악어, 새가 되고 싶어 한다. 언젠가 그가 ‘새’가 되는 날, 그는 어쩌면 영화 찍기라는 이 구도와 치유의 작업에서 스르륵 손을 떼는 것은 아닐까. 그는 입버릇처럼 영화 찍기가 아니더라도 아주 많은 재주가 있다고 자랑했었다. 아무튼 그날이 오기 전까지 그는 아주 빨리 또 다른 14번째 영화를 만들 것이 틀림없으므로. 이제는 다시는 국내 개봉을 안 한다고 하니, 틀림없이 나와 인터뷰도 안 해줄 터이니, 해외판 DVD라도 사서 그의 영화를 보렸다. 또 쓰렸다. 또 만들렸다.
"어차피 이 땅에서 나는 부작용이나 이물질이라고 생각한다. 그 부작용이 작용하게 해보고 싶었다." - 김기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