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이야기-낙엽은 지는데
돌이켜보니 어언 48년 세월이 흘렀다.
1973년 그해 겨울, 중학교 동기동창인 친구 넷이 내 고향땅 경북 문경 점촌 읍내 시장터 어느 술집에 모여 앉았다.
희구 친구가 있었고, 은우 친구가 있었고, 순태 친구가 있었고, 그리고 내가 있었다.
두 달 전인 그해 10월 1일로 대검찰청 총무과 인사부서에 초임 발령받아 공무원이 된 나를 축하해주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막걸리 한 되를 담은 노란주전자가 들어왔다 싶으면, 어느새 그 주전자는 비워지고 다시 막걸리를 채워 와야 했다.
안주라고 해봐야 김치에 파전에 해장국 해서 별 것 아니었지만, 우린 권커니 잣거니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술잔을 주고받았다.
너나 할 것 없이 취기 또한 깊었다.
그러나 밤이 이슥해져도 누구 하나 ‘이제 그만’이라고 말하지를 않았다.
우정 쌓기에 푹 빠져서 그랬다.
그렇게 자정을 넘겼다.
그때만 해도 밤 12시 통금이 있는 때여서, 주모는 안달이 났다.
시장통 순찰을 도는 경찰관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통금 위반으로 경찰서에 잡혀가야했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안달하는 주모를 내 그렇게 큰소리 쳐 안심시키고는 ‘대검찰청 검찰서기보 시보 기원섭’이라고 소속과 직급과 이름이 새겨진 명함크기의 노란색 공무원증을 그 술집 문밖에 내 걸었다.
9급 국가공무원인 말단 검찰수사관이긴 했지만, 그때만 해도 시골에서는 먹혀드는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속내로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성깔 있는 경찰관이나 방범에게 걸리면 꼼짝 없이 파출소로 끌려갈 수밖에 없고, 통금 위반으로 즉결로 넘겨지는 수모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호기롭게 내 신분을 내세워 버티다가는, 더 큰 사건으로 비약될 수도 있겠다하는 생각까지도 했다.
그러잖아도 이미 그때쯤에 내 동기 두엇은 고향땅을 찾아 검찰수사관입네 하고 객기를 부리다가 검찰고위층으로부터 혼찌검이 난 사건까지 있었고, 전국 검찰에 처신을 자제할 것을 당부하는 공문까지 하달되어 있던 판이었다.
그랬으니 내 겉으로는 그렇게 큰소리를 뻥뻥 쳤지만, 마음속으로는 혹시나 자칫 징계를 당하지나 않을까 하면서 취기 중에도 전전긍긍이었다.
“좀 걱정되는데, 괜찮겠어?”
내 그 전전긍긍하는 속내를 알아챘던지, 희구 친구가 그렇게 내 의중을 떠보고 있었다.
“맘대로 하라지. 경찰은 검찰수사관을 함부로 못하게 돼 있어. 아마 문밖에 걸어놓은 공무원증을 보고 슬그머니 가 버릴 거야.”
속내로는 빨리 판이 끝났으면 하고 바라면서도, 입으로는 그 속내와는 달리 내 그렇게 큰 소리를 쳤다.
어쨌든, 우린 그렇게 밤을 새우면서 우정을 쌓았다.
문득 그 추억이 떠올랐다.
2021년 11월 20일 토요일인 바로 오늘의 일로, 맏이네가 사는 개포동 한신아파트 뜰을 거닐면서 그랬다.
단풍든 은행나무에서 노란 은행이파리가 바람에 흩날려 떨어져 바닥을 뒹구는 풍경을 보고 있노라니 최백호가 부른 ‘낙엽은 지는데’라는 그 노래가 떠올랐고, 그 노래를 떠올리다보니 가을만 되면 그 노래를 부르곤 하는 희구 친구까지 생각이 이어지게 된 것이다.
내 오늘 낮 12시쯤에 아내와 같이 맏이네 집을 찾아간 것은, 아내가 어제 문경 ‘햇비농원’ 우리들 텃밭에서 담은 김장김치를 나눠줄 요량에서였다.
차를 몰아 맏이네 집으로 향하는데, 기쁜 소식 하나가 날아들고 있었다.
“30분쯤 늦는다고? 서현이를 데리러 간다고? 다 나았다고?”
옆자리 아내가 맏이와 그렇게 전화통화를 하는 그 내용을 듣고, 나는 지금 펼쳐지고 있는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지난주 월요일에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은 손녀 서현이가 외갓집에서 격리치료를 받아왔었고, 그 치료가 오늘로 음성 판정을 받으면서 완치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2주 가까이 나와 아내를 염려케 했던 상황의 종결이었다.
맏이가 서현이가 그동안 격리되어 있던 처가로 가서 서현이를 데려오는 동안에 나와 아내는 그 아파트 뜰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 기다리는 사이에, 그 뜰을 아름답게 물들인 은행단풍 풍경에 빠져들게 되었고, 노랗게 물든 은행이파리가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풍경을 보면서, 그렇게 옛 추억을 연상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돌아오는 서현이의 건강한 모습을 기대하면서, 내 ‘낙엽은 지는데’라는 그 노래에 또 한 번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다음은 그 노랫말 전문이다.
마른 잎 굴러
바람에 흩날릴 때
생각나는 그 사람
오늘도 기다리네
왜 이다지
그리워하면서
왜 이렇게
잊어야 하나
낙엽이 지면
다시 온다던 당시
어이해서 못 오나
낙엽은 지는데
지금도 서로서로
사랑하면서
왜 이렇게
헤어져야 하나요
낙엽이 지면
그리워지는 당신
만날 수가 없구나
낙엽은 지는데♪
첫댓글 젊은 시절 동기들과 멋진시간을 보내고 그값진 추억을 간직한 당신이 멋진 삶을 살고 있는것 같아 좋아여
술 못먹는 난 소위시절 서울여자 부모님께 인사 시키고 귀경새벽열차에서 우연히 만난 고향 동기가 권한 소주 한잔에 열차 화장실에서 하늘이 노래지면서 잠시 의식을 잃은 적있는 경험이 있다네 빈속에 얻어 마신 소주한잔이 내가 취한건지
아님 체한건지. ??
그 술을 준 고향 친구가 누군지
기억이 안나는 나이가 되었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