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점 앞 벤치에 앉아 있던 지수는 현재 지민과 같은 병원에서 그를 도우며 근무하고 있는
자신을 생각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여전히 그녀는 그를 지켜보고만 있을 뿐 학창시절보다
관계가 나아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때보다 더 만나거나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다. 그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하는 것을 숨을 죽이며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수술실로 향했다. 그 시간 이후부터는 수술이 연이어 네 번이나
있기 때문에 늦은 밤까지는 꼼짝없이 수술실에 묶여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간암에 걸린 남자 환자, 제왕절개 수술을 할 여자 환자, 녹내장 수술을 할 할머니, 마지막
으로 뇌수술을 할 어린 여자 환자였다. 그녀는 수술실을 왔다갔다 하며 마취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실 마취의들은 마취만 하고 나면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수술 시간 내내
자신이 마취한 환자의 상태를 체크해야 하고 환자가 제 시간에 제대로 깨어나는지를 지켜보
는 것도 중요했다.
일이 어느 정도 끝나니 밤이 꽤 깊어 있었다. 그녀는 병원의 텅빈 로비로 나가 의자에
앉았다.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그때 허리춤에서 호출기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댔다.
로비에 벽에 걸린 커다란 시계를 보니 밤 10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로비의 커다란 홀을 가로질러 안내 데스크의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번
호를 누르자 곧 신호가 떨어졌다.
"마취과 표지수입니다."
지민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어디니?"
"로비."
"응급인데 도와 줘!"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상태는?"
"후송중인데 딥 드로우지야. 스투파로 떨어지려고 해!"
"알았어. 3번방 준비할게."
그녀는 전화를 끊고 빠른 걸음으로 비상구 계단 쪽으로 향했다.
현수에게도 호출이 떨어졌다. 그는 호동을 찾았지만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원래
잠이 많은 녀석이라 잠을 자고 있을 만 한 곳을 다 찾아 봤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생각다 못해 화장실로 가 보았다. 화장실 문을 하나씩 전부 열어 보았다. 끝에서 두 번째
의 문을 열어 젖히자 호동이 좌변기에 앉아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현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시간을 다투어 처리해야 할 일이 쌓였는데 어떻
게 저렇게 한심하게 잠이나 자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사람의 생
명을 좌우하는 일을 해야 할 사람이... .
그는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어."
그리고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나와, 박호동! 당장 나오지 못해!"
호동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어났지만 잠이 덜 깨 좌변기 밑으로 굴러 떨어질 뻔했다.
현수는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 혀를 찼다. 호동은 충혈된 눈을 껌벅였다.
호동은 현수를 따라 다급하게 비상구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계단에는 길다란 철봉이 층
과 층 사이의 공간을 관통하듯 이어지고 있었다.
현수가 가다 말고 뒤를 돌아보자 호동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아직도 잠에서
덜 깨어난 것이었다.
현수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이따가 당직실로 와!"
호동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또 구타를 당하거나 기합을 받을 게 뻔했다.
그에게 당직실은 공포의 장소였다.
그들이 응급실의 주차장으로 가 보니 강지민, 인턴, 간호사는 이미 와 있었다. 현수는 지
민에게 고개를 숙여 늦어서 미안하다는 표시를 하고는 호동의 가슴을 팔꿈치로 쳤다. 호동
은 비명을 삼키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응급차가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내며 도착했다.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은 환자를 신속하
게 스트레치카로 옮겼다. 그리고 응급실로 밀고 들어갔다. 현수는 쉴 새 없이 압부백을 눌
러 댔다. 환자는 6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노인으로 입에서는 거품이 일고 눈은 뒤집어진
채 옆으로 축 처져 있었다.
호동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환자의 상태가 너무 심각해서인지 그의 목소리에는 이
미 잠이 달아나 있었다.
"MRI 찍을까요?"
지민은 플래쉬로 환자의 동공부터 확인했다.
"그건 시간이 오래 걸려! 일단 CT부터 찍어! 뭐해? 빨리 라인 잡아!"
간호사가 환자의 혈관을 찾아 주사 바늘을 꽂느라 허둥거렸다. 지민과 현수는 환자의 옷
을 벗겼다.
그 옆에서는 40대 중반쯤의 여자가 거의 곡을 하다시피 울부짖고 있었다. 그녀는 진한
화장을 한 얼굴이었는데 통곡소리만 클 뿐 눈물은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지민은 자신도 모르게 환자와 여자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환자와 부부라면 나이
차가 너무 많이 난다 싶었다. 간호사는 팔목에 주사바늘을 꽂은 후 거기에다가 반창고를
붙였다.
지민이 호동에게 소리쳤다.
"츨루이드 주입하게 쇄골하정맥에서 큰 라인 하나 확보해!"
호동은 얼떨떨한 얼굴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네? 네... ."
호동은 간호사에게서 길고 굵은 주사바늘을 건네 받았지만 빼서 치켜들고만 있을 뿐 막상
어디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헤매고 있었다. 이를 본 지민이 그를 밀쳐 버리며 주사바늘
을 빼앗아 들었다. 그러자 호동은 그대로 벽에 쿵하고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지민은 그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환자의 우측 빗장 뼈 아래를 몇 번 눌러 보
더니 빼앗은 커다란 주사바늘을 사정없이 쑤셔 넣었다. 피가 금방 역류되어 나왔다. 그는
그 끝을 클립으로 묶어 주었다.
다음은 CT 촬영을 해야 했다. 의료진들은 환자를 데리고 촬영실로 갔다. 현수와 호동이
환자를 촬영 베드에 옮겨 눕혔다.
그동안에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은 CT실 기사가 빠른 손놀림으로 환자의 데이터와 촬영
부위에 대한 정보를 입력했다. 그리고 환자의 머리를 동그랗게 생긴 원통 모양의 기계 안
으로 들여 넣고 나서 버튼을 눌렀다.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촬영이 시작되자 기사가 옆에
있는 모니터로 옮겨앉아 이미지를 필름으로 전환시켰다.
현상실에 있던 지민이 필름이 올라오자 잽싸게 뽑아서 출구를 향해 뛰어나갔다.
그가 나가면서 소리쳤다.
"3번 방으로 옮겨!"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스트레치카로 옮겨진 환자는 자동문을 지나 수술실로 들어갔
다. 호동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수술복으로 갈아입기 위하여 갱의실로 뛰어들어갔다. 혼
자서 남아 우두커니 환자를 지키고 있던 호동이 비장한 얼굴로 호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면
도칼을 빼 들었다.
그는 잠시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에 살벌한 기운이 서렸다. 그는 환자의 턱을
한 손으로 제꼈다. 환자의 가느다란 목이 드러났다. 이윽고 호동은 면도칼을 목을 지나 이
마로 가져가더니 숙달된 손놀림으로 머리를 밀기 시작했다.
지수와 그녀의 바로 아래 연차의 마취의가 빠른 손놀림으로 머리가 빡빡 깎인 환자의 입
을 벌리고 개스관을 주입한 후, 손목과 발목, 그리고 가슴 부위에 리드를 부착했다.
이때 갑자기 삐- 소리가 나며 심전도계의 시그널이 플랫으로 변했다.
지수가 급하지만 나지막한 목소리로 지민을 행해 말했다.
"플랫이야!"
그러자 형광판에서 사진을 보며 현수와 이야기하고 있던 그가 잽싸게 환자에게로 뛰어 들
어 가슴 부위를 주먹으로 힘껏 내리쳤다. 다시금 환자의 심장이 뛰기 시작하고 뚜-뚜- 하
는 시그널로 변했다.
지민이 호동에게 명령했다.
"혹시 모르니까 흉부외과 지원팀에게 콜 때려!"
"예!"
호동은 대답을 하면서 동시에 전화기 쪽으로 달려가 버튼을 눌렀다.
현수는 환자의 머리에 핀 프레임을 들이대며 말했다.
"핀 박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에 못이 박혔다. 환자의 머리는 시약
으로 뒤덮이고 노란색의 투명한 셀롤로이드가 발라졌다. 수술실 간호사는 수술대 위에 장
착된 선반 위에 하얀색 천을 덮고 각종 미세한 수술 도구들을 올려놓았다.
한편 흉부외과 당직실에서 가운을 입은 채 곤히 자고 있던 레지던트 한 명이 요란하게 벨
이 울리는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호동의 다급한 목소리에 그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나
머지 레지던트 두 사람을 깨웠다. 세 사람은 문을 박차고 나갔다.
수술실에서는 지민이 손에 메스를 쥐고 두 개골의 표피를 갈랐다. 피가 흘러내렸다. 현
수가 재빠르게 피를 제거하고 집게가위로 표피층을 벌려 주었다. 허연 해골뼈가 드러났다.
지민은 톱날이 달린 도구를 쥐고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휘잉~ 하며 톱날의 끝이 돌아갔
다. 톱날 끝이 크르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뼈를 파고들었다. 호동은 냄새가 역겨운
지 미간을 찌푸렸다.
흉부외과 지원팀은 전속력을 다해서 비상구 계단을 내려가 수술실 쪽으로 달려갔다. 그
들은 뛰어가는 도중에 가운을 벗어서 손에 들었다. 그들은 갱의실로 들어가 빠른 동작으로
수술복을 집어들었다. 숙달된 몸놀림으로 속옷을 훌렁훌렁 벗어 던지고 수술복을 걸쳤다.
수술실 안에서는 환자의 BP를 측정하는 그래프가 불규칙하게 변하더니 차츰 그 진폭이
작아졌다. 모니터를 보고 있던 지수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앰플 병을 손가락을 튕겨 땄다.
"하트 레이트가 떨어집니다. 아트로핀 앰플 1cc 주입합니다."
지민이 말했다.
"올려 주세요."
그녀가 앰플 안의 용액을 주사기로 빨아들였다.
"2cc로 올립니다."
그녀는 링거 선에 아트로핀을 주입했다.
지민은 손에 삼각형 모양으로 떨어져 나온 골 조각을 쥐고서 현수를 향해 지시했다.
"듀라 섹션해요!"
현수가 자리를 바꾸어 뇌막을 걷어 내는 동안 간호사가 렌즈 부분만 구멍을 내 놓고 비닐
로 싼 대형 스코르를 환자의 머리 위에 위치시켰다. 지민이 그 앞의 기계의자에 앉아 페달
을 누르자 의자가 로봇처럼 윙윙거리며 환자에게로 다가갔다.
그때였다. 현수가 지민의 앞을 가로막았다.
"안지오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지민이 힘을 주어 말했다.
"기다리면 죽어!"
현수는 그래도 정색을 하며 말했다.
"잘못하면 징계 받습니다."
이때 계기판을 관찰하던 지수가 긴장하며 말했다.
"힘들 것 같습니다! 하트 레이트가 없어요!"
그녀는 재빨리 또 다른 주사를 주입하고 지민은 현수를 제치고 스코프에 눈을 갖다 대려
다가 지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절망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시 후, 스코프를 들
여다보던 지민의 눈이 극도의 긴장으로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결국 스코프에서 눈
을 떼고 말았다. 그가 턱짓을 하자 간호사가 환자 위에 설치된 선반을 치웠다.
그때 흉부외과 지원팀들이 갱의실을 나와 마스크의 끈을 조여 매면서 3번 수술실로 향했
다. 그들은 수술실로 들어서려다가 말고 지민이 환자의 눈을 벌려 플래쉬를 비추는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모두들 지민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지민은 환자의 양쪽 동공이 완전히 퍼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서서히 구부리고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숨막히는 정적이 찾아들었다. 이윽고 심전도계의 시그널이 삐- 하고 늘어
지는 소리를 내며 플랫으로 변했다.
닥터 표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익스파이어했습니다... ."
모두들 맥이 풀리는 듯 고개를 떨구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지민이 침착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타임 체크하세요."
현수가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말했다.
"환자의 사망 시각 02시 36분입니다."
흉부외과 팀들이 수술실을 나가 되돌아갔고 지민은 다시 환자의 머리 쪽으로 다가갔다.
그를 지켜보고 있던 지수가 시선을 딴 곳으로 돌려 버리고 말았다.
지민과 지수가 수술실을 나왔다. 그녀가 찝찝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야, 강 선생. 니 잘못 아냐... ."
그가 말없이 계속 걸었다.
"어디 가?"
그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보호자한테... ."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그는 계속 걸어갔다. 그녀는 잠자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통보하고 나 좀 만나."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응급실에 있을 거야."
그녀는 속이 상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뒤에서 다른 의사들이 걸어나왔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환자가 사망할 때마다 크게 실망하는 그를 보면 가슴이 답답해졌다.
언젠가 어린 환자가 수술 도중 숨졌을 때는 그의 눈에서 눈물까지 반짝이는 걸 봤었다.
그녀는 수술이 끝나고 나오는 그를 데리고 호프집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에게 의사는 환
자의 병을 치료할 뿐이지 운명을 바꿀 수는 없다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어. 그래도 살릴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면 미쳐
버릴 것만 같아. 살아났으면 그애는 조금만 지나면 마음껏 뛰놀 수 있을 것 아니니."
"잊어버려. 어쩔 수 없는 일을 가지고선 그렇게 고민만 하면 뭐하니?"
그는 알아들은 듯 고개를 또 끄덕거려 놓고서는 술을 계속 마셔댔다. 결국은 평소에 잘
마시지도 않던 술에 금방 취해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그녀는 그를 부축해서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를 방에 눕히고 옷과 양말을 대충 벗긴
다음 이불을 덮어 주고 그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아직까지 소년과도 같은 순수한
마음과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염려스러웠다. 앞으로 어떤 험한 일을 겪
으며 살지 모르는 의사 생활을 해야 하는 그가 큰 상처를 받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녀는 큰 변화가 오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신경외과 마취의로 옆에서 그를 지켜 주고 싶
었다. 사실 그의 마음을 차지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고 싶지만 아직은 그가 마음을 열지
않아서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착잡한 마음으로 일어나서 그의 집을 나왔다.
첫댓글 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