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살 세 근 반
살이 빠졌다. 두어 달 전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아 겸사겸사 종합검진을 받았다. 갖은 검사가 이어졌다. 금식에다 긴장한 탓인지 몸무게가 2kg 남짓 줄었다. 비만인이 들으면 웬 떡이냐 싶겠지만, 원래 평균에 겨우 턱을 걸어놓았던 체중인지라 그 만만 빠져도 얼굴이 까칠할 지경에 이르렀다. 검진 결과, 주치의는 단호한 표정으로 금주령을 내리면서 몇 가지 주의를 덧붙였다.
핼쑥해진 얼굴에 놀란 아내는 고기반찬을 해대느라 정신이 없다. 나이 들어 여간 귀찮지 않을 텐데도 부지런히 동네 마트를 들락거린다. 가까이 사는 큰며느리는 별식을 만들어 아침저녁으로 들이댄다. 포항 사는 둘째에게도 연락이 닿았는지 전복에 조기, 자연산 미역을 바리바리 들고 왔다. 두 식구 먹을 만큼만 품고 있던 홀쭉한 냉장고 배가 갑자기 불룩해졌다.
아무리 먹어도 한번 줄어든 체중은 한 달이 지나도록 요지부동이다. 내려갈 때는 두어 주 만에 급락 직하하더니 삼시 세끼는 물론, 간식에 야식까지 챙겨도 소용이 없다. 나이 들면 어느 정도 몸피를 유지해야 한다던데, 슬그머니 겁이 난다. 아들이 의사고 며느리가 약사면 무슨 소용이 있나. 체중계에 올라설 때마다 가슴이 두근두근한다.
“아버님, 연세가 드셔서 금방 회복이 안 돼요. 맛난 것 많이 드세요. 뭐 드시고 싶은 것 있으면 말씀하세요. 제가 자주 들를게요.”
조급증을 내는 내 마음을 읽은 며느리가 바치는 귀에 단 말에도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겠다.
금식에, 지병인 당뇨에다 나이 탓까지 더해보아도 내린 살이 좀처럼 오르지 않는 까닭이 석연치 않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마를 ‘탁’ 칠 만한 이유가 따로 있었다. 일주일에 서너 번 이어지던 저녁 술자리가 사라진 탓이 큰 게다. 적당한 음주는 몸에 나쁘지 않다는 말 뒤에 숨어 시작하는 술자리는 이튿날 숙취로 이어지는 과음으로 마무리되기 일쑤였다. 열량 많은 소주에, 기름진 안주까지 곁들인 엄청난 영양분을 집밥 하나로 어찌 감당하리.
검진 이후, 만나면 술자리가 벌어지는 저녁 모임은 물론 개별적으로 지인을 만나는 일도 되도록 피한다. 술을 금하라는 주치의의 권고도 권고려니와 속내는 따로 있다. 만나는 사람마다 한두 마디씩 아무런 의미 없이 툭툭 건네는 인사말이 여간 성가신 게 아니어서다.
“얼굴이 좀 야위었네요?”
“안색이 안 좋아 보입니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그들은 사라진 내살 세 근 반의 행방을 추적하기 위해 갖은 유도신문과 넘겨짚기로 눈을 반짝인다. 그분들이 언제부터 내 건강에 이토록 관심을 두었는지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그중에는 진심 어린 격려가 묻어있는가 하면, 연민의 표정이 엿보이기도 한다. 신의 한 수 같은 약방문도 이어졌다. 살을 올리려면, 완전식품인 달걀을 하루에 3개씩 먹어 보시라. 매일 운동이나 등산을 해 보는 게 어떠세요. 술 좀 줄이세요. 스트레스받지 마세요. 온 얼굴에 걱정과 염려의 표정을 한가득 안고 갖가지 처방을 내려 준다. 그 중의 압권은 뭐니 뭐니 해도 이 말이었다.
“수필 그만 쓰세요!”
그분들이 들으면 섭섭하겠지만, 말치레에 지나지 않는 몇몇 격려나 위로는 진정성 없는 얄팍한 건너다봄, 호기심의 등짝에 올라탄 엿봄 이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가벼운 말끝이 소낙비에 잠시 젖었다가 쨍하고 말라버린 웅덩이처럼 허허롭다. 이렇듯 만나서 인사하는 사람 앞앞이 별일 아니라고, 걱정해 줘서 고맙다며 손을 부여잡고 말하는 것이 거북해서 꼭 필요한 자리가 아니면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으니까, 하루돌이로 이어지던 모임이나 행사가 물꼬 터진 논물처럼 줄어든다. 평소에 내가 핸드폰 키패드 번호를 누르는 것보다 벨 울려 받는 경우가 훨씬 드물었다는 방증이다. 금주령에 묶인 나를 제쳐두고 저희끼리만 홀짝거리는 짓거리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금주의 당위성과 연락 끊긴 서운함으로 범벅이 된 회오리바람이 가슴 속에 이는 것은 또 무슨 심사인가. 없는 놈이 잘 삐치듯이, 앵 돌아서는 까칠한 마음이 나도 모르게 불쑥불쑥 솟구친다. 삶이 석양에 기운 이즈음에도 찻잔 속의 작은 일렁임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소아※를 붙들어 맬 방법이 없다.
하기야 말이 그렇다는 말이지, 내살 세 근 반 내린 소소한 일까지 신경 써 주는 친구가 이리 많은 것을 보면, 그리 야박하게 살지는 않았노라 위안 삼는 차에 누가 이런 문자를 보내왔다.
“의사 약사 있는 집 어른 꼬락서니가 그게 뭐요. 우리 사이에 서로 걱정 끼치지 맙시다.”
본 자리에서 바로 키패드를 눌렀다.
“이만 나이에, 허리춤에 달고 다니는 호리병 하나 없이 팔팔한 것도 가관 아니겠소.”
입술로 스치듯 하는 말과 가슴으로 오가는 말은 이렇게 무게가 다르다.
그나저나 도망간 내살 세 근 반은 언제쯤 되찾아 이런 웃기지도 않는 마음의 난리 통을 잠재울거나.
※ 소아小我: 진실도 없고 자제력도 없이 개인적인 욕망과 망집에 사로잡힌 나.
『수필오디세이』 2023.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