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후서 1장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된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님은 약속입니다. 어떤 다른 종교나 철학에도 없는 절대적인 약속이 있는 것입니다.
그약속은 생명의 약속입니다. 약속이란 쌍방이 모두 구속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이시기 때문에 구속이 아니지만 우리에게는 구속이며, 그 구속이 우리를 가두는 것이 아닌 보호의 구속입니다.
바울이 고난 속에서 일하는 동력은 그가 생명의 구속의 약속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사도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이 말씀은 신실하며,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합당하도다. 죄인들 중에서 내가 우두머리라.
디모데전서 1장 15절
바울은 자신이 죄인들 중에서 우두머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가장 죄를 많이 지었다는 의미 일수 있으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하셨으므로 바울 그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해 낼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므로 내 자신이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로마서 7장 24절 25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약속으로 구속된 사도의 신분인 바울도 자신이 육신으로 죄의 법을 섬긴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에 바울의 죄에 대해서 생각이 들기 보다는 제 자신안의 모습에 대해서 생각이 듭니다.
저도 또한 육신으로 죄의 법을 섬기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저도 모르게 성경나눔을 통하여 성경에 대해서 다른 사람보다 아는 것이 많고 다른 사람을 말로 설득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인하여 저도 모르게 교만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 느껴집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교만함입니다. 교만함은 곧 자신을 하나님앞에서 자신을 높이는 행위로 이것이 우상숭배와 같은 것이 됩니다. 우상숭배에서 우상이 자신이 되는 것이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상숭배라면 각종의 이단들의 형상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것도 포함이 되지만 본질로 우상숭배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치켜세워 내세우는 모든 것들입니다.
성경나눔을 통하여 말씀의 은혜를 받아도 머리는 커지지만 행함에서는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는 제 자신을 보게 됩니다.
바울도 자신을 돌아보며 책망하는데 제 자신이 그러지 못함이 참 우스꽝스럽게 느껴집니다.
이러한 문제는 저만이 가진 문제는 아니라고 느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무엇인가 된 것처럼 생각하지만 결국 바울보다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높아질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가 의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롭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주를 믿으니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더라.
창세기 15장 6절
진정한 의란 사람이 칭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만이 진정한 의입니다.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로부터 은혜와 자비와 평강이 있을지어다.
선조 때부터 순수한 양심으로 내가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함은 나의 밤낮 기도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기억함이며,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를 몹시 보기 원함은 내가 기쁨으로 충만해지고자 함이라.
나는 네 안에 있는 가식 없는 믿음을 기억하노니, 이는 먼저 네 할머니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케 안에 있었고 네 안에도 있음을 확신하노라.
디모데는 모태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모태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매우 간접적인 믿음을 갖고 있는 것에 비해 바울의 칭찬을 볼때 디모데는 모태신앙에도 불구하고 강하고 신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를 일깨우는 것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게 된 하나님의 은사를 불일듯 일어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다른 사람의 믿음을 자라게 할 수 없으나 안수함으로 다른 사람의 하나님의 은사를 일어나게 할 수는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영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이라.
두려워 하는 모든 것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히지만 사람의 지혜중에 최고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두려워하는 것과 조금 다릅니다. 그분은 선하고 공의로우신 분이기에 그분을 두려워하는 것이 공포와 무서움이 아닙니다. 그분이 우리를 심판하시더라도 우리의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자가 두려운 것은 우리의 잘못이 없어도 그 악한자는 우리를 괴롭힐 수 있기 때문에 두려운 것과 다른 것입니다.
너희는 다시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 되는 영을 받았으므로
그에 따라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로마서 8장 15절
그러므로 너는 우리 주의 증거나 그의 죄수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에 따라 복음을 위하여 고난의 동참자가 되라.
디모데후서 1장 1절 ~ 8절
바울이 고난의 동참자가 되라고 디모데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전해진 이 글을 읽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메시지라고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의 동참자가 되는 것이 선교사가 되서 고난을 찾아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도 복음의 고난이 열립니다. 그 때 인내하는 것이 고난의 동참자가 되는 것입니다.
저도 살면서 억울함에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에 그냥 복음을 알기전이라면 악으로 악을 갚고자 하여 손해를 보지 않으려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손해를 입어도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려 합니다. 이것이 그냥 쉬운 것은 아니며
이렇게 작은 것에서 성공할 때 더 큰 고난에서도 순종의 믿음을 이뤄나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