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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이야기◈ 스크랩 역사기행 逆인가 忠인가 - 금성대군 단종복위운동
레아 추천 0 조회 179 10.01.13 09:55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난 여름, 우리나라 성리학의 원류를 찾아서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을 보고자 멀리 순흥땅을 밟았다. 그러나 내가 보고 온 것은 숭고하다는 성리학의 선비정신도 아니고,  오묘한 성리철학도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역사의 슬픈 한 자락이었다.

 

 

계(竹溪), 순흥땅을 휘돌아 유유히 흘러가는 이 물결은 그 역사의 한 자락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대나무가 많은 시내라고 하여 죽계라 하였는데, 소백산에서 발원하여 순흥마을에 이르러 선비촌과 소수서원을 돌아

낙동강 상류로 흘러간다.

 

아홉구비를 돌아가며 절경을 이루는 상류는 고려 충숙왕 때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안축( 1287~1348)의 '죽계별곡'의

배경이 되었고, 퇴계 이황도 그 구비구비 아름다움에 이름을 붙여 '죽계구곡'이라 하였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순흥땅에

이르러서는 피의 역사와 맞딱뜨리게 된다.

 

순흥은 한강 이북은 송도라 하고 한강이남은 순흥이라하여 '남순북송'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번성한 고을이었다.

적어도 세조 3년(1457년)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복위를 꾀하다 발각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성대군은 1426년 세종과 소헌왕후사이에서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이유(李瑜)이고, 8살때 금성대군으로 봉해졌다.

1437년에는 제1차 왕자의 난때 죽은 방석의 양자가 되어 그의 제사를 모시게 된다. 수양대군의 동생이면서 숙부가 된 것이다.

수양대군의 이름도 이유(李?)이지만, 음은 같고 뜻은 다르다.

 

방석의 양자로 들어간 금성대군은 왕실의 종친으로서 수양대군과 맞설 세력으로 부각되고 있었다. 정적제거를 위하여

수양대군은 종친들과 역모를 꾸몄다는 죄목으로 금성대군을 경기도 삭녕으로 유배를 보낸다. 1455년 자신을 보필하던

중신들이 하나 둘 제거 당하자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자신은 상왕이 된다. 1456년(세조2년)에 성삼문, 백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김문기 등이 단종 복위운동을 하다 발각되어 모두 처형된후, 단종은 1957년(세조3년)에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다.

이때 금성대군도 경기도 삭녕에서 경상도 순흥으로 유배지를 옮겨 가장 중벌에 속하는 위리안치(圍籬安置)의 형을 받게 된다.

 

조 3년(1457년), 이곳 순흥에서 금성대군은 부사인 이보흠과 함께 단종복위을 꾀하게 되는데, 재향품관(在鄕品官),

군사(軍士), 향리(鄕吏) 등 이른바 영남사인들을 규합하여, 격문을 지어 은밀히 사방으로 보내, 의사 협객들을 순흥고을로 모여

들게 하였다. 군비를 모으고, 무기를 장만하고, 군사를 조련하는 등 거사를 위한 준비가 진행되던 중에, 밀의를 엿들은 순흥부의

한 관노의 밀고에 의하여 관군의 습격으로 순흥고을은 불바다가 되고 피바다가 되었다.

순흥으로 들이닥친 관군은 사방 10리 이내의 세 살 이상 양반남자를 모아 닥치는 대로 참형했다고 한다.

이른바 정축지변(丁丑之變)이다. 이후 순흥도호부는 폐부가 되고 풍기, 영주, 봉화 3개의 고을로 나뉘어 속하게 되었다.

 

금성대군도 사약을 받았는데 그의 나이 31세때의 일이다.

이보흠은 박천에 유배되었다가 금부도사에 의해 교살 되었다. 혹자는 사육신에 이보흠을 더하여사칠신(死七臣)이라

일컫기도 한다. 영월의 단종도 이로 인하여 폐서인이 되었고 1457년 10월 24일에 17세의 나이에 죽임을 당하고 만다.

 

 

시의 참형장소가 바로 죽계제월교(竹溪霽月橋)였고, 수천 순흥사람들의 피는 '죽계'를 따라 7Km에 이어지며 지금의

안정면 동촌1리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죽계천을 '피걸'(피의 개울)로 동촌마을을 '피끝마을'로 불렀다고 한다.

 

죽계제월교는 '청다리'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기도 한데, 그 때 살아남은 아이들을 관군이 차마 죽이지

못하고, 서울로 데려와 키운데서 '순흥 청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라는 말이 생겼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제월교(霽月橋)라는 이름은 정축지변이 있은지 253년뒤에 퇴계 이황이 명명한 것인데, 주돈이의 글에 나오는 '장마 비가 멎은 후

맑은 하늘 같은 기운'을 뜻하는 제월광풍(霽月光風)의 준말이다. 송도에는 '선죽교요, 순흥에는 제월교가 있다'라고 하여

충절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로 퇴계선생이 이 이름을 정했다고 한다.

 

한편, '다리밑에서 주워 왔다'는 말은 후에 소수서원이 생기고 여기서 공부하러 온 전국의 유생들의 문란했던 생활을

반영하는 말로 전해지기도 한다. 아마 이 참혹했던 역사를 희석시키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찾았을 때 다리밑에서는 가재를 잡는지 물고기를 잡는지 아이들이 물속에서 뜰채를 들고 열심히 물속을 헤집고 있었다.

 

 

 

 

 

 

 

 

 

 

 

 

 

 

은 '생각이나 헤아림을 중단한 상태에서 마음을 고요하게 간직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논어의 '경건함을 가지고 자기를

닦는다(修己以敬).'와 주역에서 '경건함을 가지고 마음 속을 곧게 만든다(敬以直內).'라 하여 수양의 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중국 송대의 성리학에 와서는 경의 의미에 '마음을 한 가지에만 집중시켜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더해졌다.

특히 성리학이 우리나라로 들어와서는 인간 본연의 착한 마음을 회복하는 방법으로 '경'을 강조하면서 이황(:1501~1570)에

이르러서는 이 '경사상'이 절정에 달한다.

 

주세붕(周世鵬:1495~1554)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을 건립하면서 성리학의 중심사상인 '敬'자를 바위에 새겨 놓은 뜻은

유생들이 늘 보면서 마음을 닦으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그 글자에 붉은 칠을 한 이유는? 단종복위 운동때 죽계에서 죽은 원혼들이

밤마다 울어서 그 원혼을 달래려고 글자에 붉은 칠을 하였다고 한다.

 

 

종은 승하한지 60년이 지난 중종11년(1516)에 서인에서 노산군으로 복권이 되었고, 숙종 7년(1681년)에는 노산군에서

노산대군으로, 숙종24년(1698년)에는 왕으로 복위되어 시호는 '순정안장경순대왕(純定安壯景順大王)'으로 묘호를 '단종'으로 하였다.

단종이 한을 품고 죽은지 241년만의 일이었다. 이와 더불어 순흥도 숙종9년 (1683년) 다시 순흥부로 복원이 되었고, 여기에

그동안 逆臣이었던 인사들이 복권 된 것은 숙종 30년(1704년)이다.

 

숙종45(1719)년에 순흥부사 이명희가 단소를 설치하였으며, 영조18년(1742) 경상감사 심성희가 3개의 단을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앙에는 금성대군, 왼쪽에는 이보흠부사, 오른쪽에는 연루되어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위패를 모시는 단으로 매년 봄과 가을에 제를

올린다고 한다. 금성대군단 왼쪽에는 ‘금성대군성인신단지비()’라는 글씨가 새겨진 금성단비가 세워져 있는데,

왕조의 인신(人神)을 위한 제단의 사례는 극히 드물다고한다..

 

 

 

 

 

수서원에 들어가는 초입에 한 쌍의 돌기둥이 서있다. 사찰에서 기도나 법회 등 의식이 있을 때 당(幢)을 달아 두는 기둥인

당간(幢竿)을 지탱해주기 위한 기둥이다(幢竿支柱). 서원입구에 당간지주라니! 원래 이곳은 통일신라이래로 '숙수사'라는 절이

있던 곳이다. 그러나 단종복위운동의 실패로 이 절 마저도 폐사되기에 이렀다. 후에 중종37년(1542년)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회헌 안향이 공부를 했다던 숙수사의 옛터에 사묘(祠廟)을 건립하니 소수서원의 시초가 되었다.

절에서 서원이라는 극적인 전환이 조선이 숭유억불 정책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장소가 아닐 수 없다. 그것도 우리나라

성리학의 근원지라고 할 수 있는 장소로 상징적인 의미가 큰 것 같다.

 

순흥은 안향을 위시하여 순흥안씨의 관향이다. 단종복위운동(정축지변)의 실패는 순흥안씨의 멸문지화를 가져왔다. 순흥도호부의

2,000명의 인구 중에서 순흥 안씨만 700명이 죽었다고 전한다. 정축지변이후 100년동안 순흥에 드나들지도 못했으며 순흥이 복원

된 뒤에도 순흥을 떠났던 안씨들도 거의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픈 역사를 아는지 죽계는 지금도 도도히 흐르고, 역사도 같이 흐른다.

현대는 순흥과 같은 아픔이 다시는 없을 것 같지만, 역사는 그렇지 않았다.

60여년전에 제주도에서 일어난 4.3사건이라는 광풍이 또 하나의 현대사의 아픔을 남겼다.

반역의 땅으로 낙인 찍혀, 그 후손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음은 물론 숨죽여 통곡할 수 밖에 없었다.

2003년에 대통령의 공식적인 사과가 있었지만, 제주인들 사이에 깊이 밖혀 있는 갈등들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면 상처가 아물까. 오랜 시간이 흐른후 그 상처의 흉터가 희미해져갈 때 쯤이면 역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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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01.13 21:48

    첫댓글 성공은 충신이요 실패는 곧바로 역적~~만약 금성대군 일파가 단종복위에 성공했다고 한들 금성대군의 척신들 옆에서 단종이 과연 임금노릇은 제대로 했을까~하는 회의가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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