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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종교신문]후천개벽의 사상가들-해월 최시형의 개벽사상(상) | [2005.06.21:] |
1 | 사건으로 본 한국의 종교-해월 최시형의 동학2세 교주 승계 베일 | [2004.10.28:] |
전국 돌며 ''보따리 포교''...東學 꽃 활짝 피워 | [2002.08.29:] |
전국 돌며 '보따리 포교'...東學 꽃 활짝 피워 | ||
(2)천도교 2대교주 최시형 | ||
19세 되던 1845년 흥해의 밀양 손씨와 결혼하였고,화전을 일구며 생활하였다. 28세 되던 해에는 경주시 신광면 마북동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지었으며, 이 때 마을대표인 집강(執綱) 임직을 맡아 6년간 성실하게 소임을 수행했다고 전한다. 35세 되던 1861년 6월에 해월은 경주 용담에 명인이 났다는 소문을 듣고 90리 길을 걸어 수운을 찾아갔다. 이 때 첫눈에 감명받아 동학에 입도한 그는 매달 서너차례 수운을 찾아가 지도 받았다. 1861년 1월 해월은 자신의 집이 있던 검곡에서 매일 밤 계곡밑 개울의 얼음을 깨고 찬물에 목욕하면서 수련하였다. 이와같은 수련을 계속하던중 해월은 신비한 종교체험을 하게 된다. 즉 찬물속에서 수련하던 중 홀연히 공중으로부터 "건강에 해로운 것은 찬 물에 갑자기 들어가 앉는 것이니라"는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훗날 수운이 이 소리를 "큰 조화를 받은 것이라"고 칭찬했으며, 자기가 '수덕문'을 초하여 읽을 때 그 소리를 들었을 것이라고 인정하였다. 1862년 7월 해월은 수운이 경주 서면의 박대여의 집에 있음을 영적으로 알고 찾아간 일도 있었다. 이 때 수운은 해월에게 비로소 포교를 허락하였다. 그는 그가 살던 검곡을 중심으로 포교했으며, 그 후 영덕,상주,흥해,예천,울진,청도 등 주로 경주 이북의 여러 지역을 돌면서 포교하였다. 1862년 9월 수운이 이단의 가르침을 편다는 혐의로 체포되자,해월은 각지의 도인들을 경주로 모이게 주도하여 관청에 집단항의 함으로써 5일만에 석방되도록 했다. 이듬해 7월 해월은 경주이북 즉 경상도 북부지역의 교도를 총괄하는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에 임명되었고, 8월14일에는 수운으로부터 도통을 인계 받았다. 이튿날 수운은 해월에게 "용담물이 흘러 흘러 네 바다의 근원이 되고,검악에 사람 있어 일편단심이로다"라는 시 한 수를 지어 주었다. 1864년 3월 수운이 대구감영에서 처형되자,동학은 비밀리에 포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이 때 해월은 강원도 등지의 산악지대에 은거하면서도 기도와 수련을 계속했고 흩어진 교도들을 모으는 일에 열중하였다. 1865년 7월에는 수운의 유족들이 해월을 찾아와 의탁하였고,10월28일에 그는 수운의 탄신향례를 지내면서 "사람은 곧 한울이라. 고로 사람은 평등하여 차별이 없나니, 사람이 인위(人爲)로써 귀천(貴賤)을 분별함은 곧 천의(天意)를 어기는 것"이라고 설법하였다. 수운의 3년상 기제(忌祭)인 1866년 3월 10일에는 제례를 모신 후 해월이 "적서(嫡庶)의 차별을 철폐하고,대동-평등(大同-平等)의 의(義)를 실천하라"고 설법하였다. 당시 해월은 신분제의 폐습을 타파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으며,제자들이 방문하여 인사하면 반드시 맞절로 대했고 항상 경어를 사용했으며, 아녀자들이라도 옳은 말을 하면 이것이 바로 한울님의 말씀이라며 경청했다고 전한다.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나 민심이 소란해지자 찾아오는 도인이 늘었으며,이에 해월은 수운의 탄신일과 순도일에 신도들이 정기적으로 모이고 필요한 제수를 마련하기 위한 계를 조직한다. 이로써 제의를 통해 교도들을 결집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교도들의 결속을 위한 정기적 모임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해월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설법을 하며 교화활동을 주도하게 된다. 1867년 3월에 해월은 양천주(養天主)의 법설을 발표하였고,1875년 1월 수운의 둘째아들 최세청마저 사망하자, 해월은 수운에 대한 제사권을 가짐으로써 교권을 장악하였다. 1871년 영해교조신원운동이 실패하자 해월은 다시 산중으로 도피하였으며,그해 겨울 영월에서 49일 특별기도를 행하고 교단부흥을 도모하였다. 이 때 그는 각지의 동학 접주를 모이게 하여 대인접물(待人接物)에 관한 설법을 통해서 "사람을 한울같이 섬기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가르침을 내렸다. 한편 해월은 1865년 영양에 은거하던 동안 수운의 가르침을 구술하여 문자화했으며,마침내 1880년과 1881년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편찬하여,1882년 2월과 이듬해 5월에 충청도 목천에서 간행하였고,1888년에는 인제에서 간행하였다. 1885년 9월 해월은 상주에서 한울님이 베를 짠다는 천주직포설(天主織布說)을 설법하면서,어린이나 부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을 한울같이 섬기도록 강조하였다. 그 후 1889년 11월 금산에서는 아기를 포태하였을 때 지켜야 할 내칙(內則)과 부녀신도가 일상생활 속에 닦아야 할 내수도문(內修道文)을 지어 배포하였다. 1884년 10월에는 육임제(六任制)를 구상하였고,1887년 6월에는 늘어나는 교도들을 육임소(六任所)를 설치해 조직화했다. 계속되는 피신생활중에도 해월은 1891년 7월에는 '새소리도 시천주 소리'라는 유명한 설법을 하였다. 그리고 1893년에는 동학의 단위조직인 포제도(包制度)를 새로 만들었고,여러 의례의 틀도 마련하였다. 한편 동학교세가 점차 커지자 해월은 1892년에는 공주와 삼례에서 평화적인 시위로 교조신원운동을 벌였으며,1893년 2월에는 서울 광화문앞에 많은 교도들을 모아 복합상소를 올려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했다. 이어 3월에는 충청도 보은과 전라도 원평에서 수만명을 모아 수운(水雲)의 신원(伸寃)과 신도들에 대한 탄압중지를 요구하면서 탐관오리의 제거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기치로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운동을 일으켰다. 1894년 3월에 동학혁명운동이 시작되자 해월은 신도들의 뜻을 따라 4월에 충청도 청산에 신도들을 집결시켰고,9월에 전봉준이 재기포하자 이에 적극 호응하여 그는 보은에서 침략자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한 기포령(起包令)을 내려 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에 따라 충청,경기의 동학군들이 그달 하순부터 각지에서 기포하기 시작하여,10월초에는 보은 장내리에 수만명의 동학군이 집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인해 우월한 무기에 밀려 패퇴를 거듭하던 동학군은 흩어졌으며,해월은 그해 12월 강원도 인제에서 1년쯤 은신하였다. 해월은 1896년 2월에는 집단지도체제를 만들었고,1897년 4월 5일 수운의 득도기념일을 맞아 향아설위법(向我設位法)이라는 제례법을 새로 만들었는데,기존의 벽을 향해 차리던 제례방식을 버리고 나를 향해 차리도록 한 것이었다. 이 때 그는 "앞으로 모든 의례의 차림은 벽을 향해 차리지 말고 나를 향해 차리도록 하라. 한울님이 내 몸 안에 모셔져있거늘,어찌 나를 버리고 다른 곳을 향해 차리겠는가"라 했다. 1897년 7월부터 노환으로 고생하던 해월은 12월 24일에는 도통을 손병희에게 전수하였다. 72세 되던 1898년 4월 원주에서 체포된 해월은 서울로 압송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마침내 6월2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해월은 '최보따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일년에도 수십차례 거처를 옮기는 피신생활을 하면서도 포덕과 교화를 통해 동학을 꽃피웠다. 그는 가는 곳마다 나무와 꽃을 심었으며,잠시라도 틈이 나면 멍석을 짜고 짚신삼고 새끼를 꼬는 부지런함을 보여 가르침을 실천했다. 해월은 한울을 기를 줄 아는 사람이라야 한울을 모실 줄 안다는 양천주(養天主)를 주장했으며,사람이 곧 하늘이니 사람 섬기기를 하늘 섬기듯 하라는 그의 사인여천(事人如天)사상은 인간존중 및 평등사상의 극치라 할 수 있다. '까막눈'에도 불구하고 해월은 수운의 가르침을 경전으로 간행하고 실천함으로써 동학의 유지와 확대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며,교세확장과 교단의 재정비를 통해 동학을 하나의 교단으로 정립하였다. 한편 그의 어록은 '천도교경전'의 '해월신사법설'(海月神師法說)로 엮어져 있다./김 탁(철학박사)
<사진>해월 최시형. |
( 2002/08/29 16:3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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