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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옥련암 원문보기 글쓴이: 산빛노을
법륜 하나
부처님, 그 분
-생애와 가르침-
THE BUDDHA
A SHORT STUDY OF HIS LIFE AND TEACHING
PIYADASSI THERA
삐야다시 스님 지음
정원 스님 옮김
(The Wheel Publication No. 5 A/B)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일러두기
1. 주(註)에 표기된 경(經) 이름 다음의 로마 숫자와 아라비아 숫자는 빠알리어본 경전(영국 빠알리성전협회-P.T.S. 간행) 의 권수와 쪽수를 각각 나타내며,『법구경이나 『숫따니 빠따』뒤의 숫자는 게송 번호임.
2. 여기 나오는 고유명사는 모두 빠알리어 음을 취했음.
3. 아랫단의 주는 원주(原註)이며, 역주(譯註)는 [역주]라고 표시하였음.
부처님, 그 분
그 분 세존 응공 정등각께 귀의합니다.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세월은 끊임없이 흘러가지만 부처님은 조금도 멀리계시는 것 같지가 않다. 그분의 목소리는 지금도 우리들의 귓전에 속삭이듯 일러주고 있다. 삶의 투쟁에서 도망치지 말고 냉철한 눈으로 맞서라고. 그리하여 이생에서 보다 큰 향상과 성숙을 위한 기회를 찾으라고.
인격이야말로 예나 다름없이 지금도 값진 것이다. 더욱이 부처님처럼 인류의 뇌리에 깊은 감동으로 아로새겨져 지금도 그분을 생각하면 무언가 생기가 약동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만드는 분으로 참으로 경이로운 분임에 틀림이 없다.
바르트(Barth)가 ‘그 분이야말로 고요하고 부드러운 위엄을 지닌 분으로, 살아 숨쉬는 그 모두에 대한 자비심과 고통 받고 있는 모두에 대해 한없는 연민을 지닌 분이다. 그리고 모든 편견에서 벗어나 완전한 도덕적 자유를 성취한 분으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귀감이다.’1)라고 말하였듯이.”
"그 분의 메시지는, 형이상학적인 미묘한 문제에 익숙해진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낯익은, 그러면서도 항상 새롭기 만한 근원적 메시지로서, 지성인들의 창조적 상상력을 사로잡았을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깊은 귀의를 받았었다.”2)
불교는 인도의 바라나시(베나레스)시(市) 근처의 사르나트에서 탄생하였다. 처음에는 겨우 다섯의 제자와 더불어 시작됐지만 해가 지나면서 수많은 나라로 전파되었고 오늘날에는 6억이 넘는 인류가 신봉하는 대종교가 되었다. 이렇듯 불교가 장족의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본래 지니고 있는 가치와 합리적 정신에 호소하는 설득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밖에도 불교의 발전을 도운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었다. 법을 전하는 사람들이 불교를 폄에 있어서 결코 삿된 방법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는 점도 그 요인 중의 하나이다. 그들이 사용한 유일한 무기는 바로 보편적인 사랑[慈]과 연민[悲]이었다.
또 다른 나라에 전파되는 과정에서 기존의 신앙을 깨뜨리지 않고 평화롭게 전해졌다는 점 또한 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종교사상 유례가 드문 대대적 전도 사업을 펴면서도 무력이나 강제적 수법, 그 밖에 어떤 비난받을 방법도 쓴 적이 없었던 것이다. 강제에 의한 개종은 불교도들에게는 낯선 얘기이며, 부처님이나 그 제자들이 지극히 못마땅하게 여겼던 일이었다. 불교가 다른 종교를 헐뜯는 일은 일찍이 없었다. 그처럼 평화로웠기 때문에 불교는 문명세계의 다양한 문화권 속으로 널리 전파될 수 있었다.
리스 데이비즈 박사3)는 말한다.
“내가 알기로는, 불교의 긴 역사를 통틀어 불교도들이 아무리 장기간에 걸쳐 득세를 한 곳일지라도 타종교인을 박해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탄생
이 위대한 종교4), 불교의 창시자인 부처님께서는 2500여년 전에 살았었고, 고따마 싯닷타(Gotama Sidd-
hattha)5)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그 분의 아버지, 숫도다나(Suddhodana)는 크샤트리아(무사)계급에 속한 왕으로 현재 네팔 국경지역 근처의 까삘라와투[迦毘羅城]에서 샤카[釋迦] 족의 영토를 통치하고 있었다. 그는 고따마 가문 출신이었으므로 고따마 숫도다나라고 불리었고 그의 비(妃)는 이웃 꼴리야 족의 공주 마하마야였다.
오월 보름날, 때는 봄철, 나무는 잎과 꽃, 열매가 무성하고 사람과 새, 짐승들이 모두 즐거움에 젖어 있을 때였다. 그때 마하마야 왕비는 당시의 풍습에 따라 아기를 낳기 위해서 성대하게 꾸민 마차를 타고 까삘라와투를 떠나 친정인 데바다하로 여행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행은 중도에 끝나 버렸다. 왕비는 두 도시 사이에 위치한 아름다운 룸비니 동산에 이르자 꽃이 만발한 무우수 아래서 아들을 낳았다.
룸비니(현 지명은 룸민데이)는 바라나시에서 북쪽으로 백마일 거리에 있으며 눈 덮인 히말라야의 영봉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 그로부터 316년 후 아쇼카 황제6)는 싯닷타 왕자가 태어난 성지임을 표시하는 거대한 석주를 세웠다. 석주에는 아쇼카 문자 93자로 된 다섯 줄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데 그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석가족의 성자, 붓다, 여기서 탄생하셨도다.’
(hida budhe jāte Sākyamuni)
이 거대한 석주는 지금도 볼 수 있다. 서기 7세기 중엽 중국의 구법승 현장 법사가 여기에 왔을 때는 석주는 이미 벼락으로 부러져 있었지만 ‘어제 깎은 듯 생생하다’고 했다. 그 후 오랫동안 잊혀져 오던 룸비니 동산은 1896년 저명한 고고학자 커닝엄 장군7)에 의해 발굴, 확인됨으로써 룸비니의 전설이 역사적 사실로 입증되었다.
왕자가 태어난 지 닷새째 되던 날, 왕은 여덟 명의 현자를 청하여 아기의 이름을 짓고 또 왕자의 앞날을 점쳐 달라고 부탁했다. 현자들은 왕자에게 ‘목적을 달성한 사람’이란 뜻으로 싯닷타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 바라문들은 심사숙고한 후 일곱 명은 두 손가락을 펴보이면서 말했다.
“오! 왕이시여! 이 왕자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 전 세계의 통치자인 전륜성왕(轉輪聖王 Cakravarti)이 되어 온 세계를 다스릴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세속을 떠나 출가한다면 왕자님은 정등각자(正等覺者)가 되어 사람들을 무지에서 구해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 가장 현명하고 젊은 콘단냐만은 왕자를 바라본 후 오직 한 손가락만 펴 보이면서 말했다.
“오! 왕이시여! 이 왕자는 언젠가는 진리를 찾아 떠날 것입니다. 그래서 정등각자가 될 것입니다.”
왕자가 태어난 지 이레 만에 어머니 마하 마야 왕비가 세상을 떠났다. 아기는 이모 고따미 빠자빠띠에 의해 양육되었다. 이들이 아기에게 쏟은 정성은 극진하여 아기는 온갖 호강을 다 누리며 자랄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부왕은 왕자로서 받아야 할 교육에도 세심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왕자는 갖가지 학문에 능통하게 되었고 무술에 있어서도 누구보다 뛰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싯닷타 왕자는 어린 시절부터 가끔 깊은 명상에 빠져들곤 하였다.
네 가지 충격적인 체험
왕자가 장성하자 부왕은 아들이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어 왕실의 훌륭한 후계자가 되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현자 콘단냐의 충격적인 예언이 항상 뇌리를 떠나지 않았고 정말 어느 날엔가 왕자가 훌쩍 집을 떠나 고행자의 떠돌이 생활로 뛰어들까봐 두려운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당시의 관습대로 왕자를 열여섯 살 어린 나이에 꼴리야 성의 수빠붓다 왕과 빠미따 왕비의 외동딸이며 왕자의 외사촌인 아름다운 야소다라 공주와 결혼시켰다. 공주는 왕자와 동갑이었다.
왕자의 생활은 참으로 호사스러웠다. 기록에 의하면 왕자는 인도의 세 계절에 맞는 궁전을 각기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세속생활의 즐거움이라면 무엇 하나 빠진 것이 없는 가운데 춤과 노래, 사치와 쾌락에 파묻혀 괴로움이라고는 전혀 모르고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듯 아들을 쾌락 속에 묻히게 하여 세속에 붙잡아 두려는 부왕의 노력도 결국에는 허사였다. 호기심어린 아들의 눈으로부터 인생의 모든 고(苦)를 감추려는 숫도다나 왕의 노력은 오히려 싯닷타 왕자의 탐구심만 키워 주어 결과적으로 진리와 깨달음을 구하려는 결의를 더욱 굳혀 줄 따름이었다. 철이 들면서 왕자는 차츰 세상의 비애에 대하여 눈을 뜨기 시작했다.
어느 날 왕자가 마부 찬나를 데리고 왕실 정원으로 놀러가다가 일찍이 보지 못했던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노쇠한 한 늙은이가 기력이 완전히 쇠잔하여 슬픈 목소리로 울부짖고 있었다.
“왕자님, 도와주세요. 나를 일으켜 세워주세요. 제발, 좀 도와주세요. 집에도 못가고 죽을 것 같아요.”8)
이것이 왕자가 경험한 최초의 충격이었다. 또 두 번째는 가죽과 뼈만 앙상하게 남은 버림받은 한 사내의 모습을 본 것이었다. 병 때문에 전신의 기력이 탈진되어 인간다운 우아함이나 기쁨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비참한 모습이었다.9) 세 번째로는 사랑하는 사람의 시신을 어깨에 메고 화장터로 가면서 비통해 하는 어느 친족들의 장례행렬을 만난 것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이런 비참한 광경들에 왕자는 엄청난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마부의 말에 의하면 그 자신도, 사랑하는 아내 야소다라도, 그 밖의 모든 친척들도, 아니 그 누구도 예외 없이 늙고, 병들고, 죽기 마련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런 일이 있은 지 며칠 되지 않아 왕자는 한 출가 사문과 마주치게 되었다. 사문은 시선을 아래로 한 채 앞만 바라보며 신중한 걸음걸이로 고요하고도 침착하게, 초연하고도 걸림없는 당당한 자세로 걷고 있었다. 왕자는 사문의 평온한 모습에 깊이 감동되었다.
찬나는 이 사문이, 생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진리를 찾아서 청정한 삶을 살고자 집을 떠나 세속을 등진 사람이라고 일러주었다. 순간 왕자의 마음속에 출가에 대한 깊은 생각들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왕자는 깊은 사색에 잠긴 채 궁중으로 발길을 돌렸다. 고뇌와 번민에 싸여 답답하기만 하던 마음속에 마침내 한 가닥 서광이 비쳐든 것이다. 궁궐 밖 세상을 접하면 접할수록 이 세상에서는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왕자는 더욱 더 확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궁궐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야소다라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나에게 장애(Rāhula 라훌라)10)가 생겼구나’ 라고 말하면서 왕자는 궁궐로 들어갔다.
1) 쟈와할랄 네루, 『인도의 발견』 켈커타 판 143쪽.
2) 같은 책 137쪽.
3)〔역주〕리스 데이비즈(Dr. T. W. Rhys Davids) : 영국의 언어학자. 19세기말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쳐 부인과 더불어 빠알리어와 근본불교 연구에 큰 기여를 했음. 특히 빠알리성전협회(Pāli Text Society. 약자로 P.T.S.)를 창설, 초대 회장직(1881~1922)을 맡아서 빠알리경의 로마자(字) 표기 영역사업을 헌신적으로 전개, 서방세계에 근본 불교를 소개 보급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음. 『장부(Dīgha Nikāya)』의 영역 등 많은 저술이 있으며, 특히 빠알리-영어사전(Pali-English Dict, 1921)은 오늘날에도 독보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불후의 대작이다.
4) 여기에서 종교(religion)라는 말은 흔히 이해되고 있는 서구적인 의 미에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way of life)’이란 뜻으로 씀.
5) 산스크리트어로는 Gautama(성) Siddhartha(이름).
6)〔역주〕아쇼카 황제 : 인도를 최초로 통일시킨 영주(英主). 보리수잎, 일곱『미래의 종교, 불교, 주해 5) 참조.
7)〔역주〕커닝엄(Cunningham, 1814~1893) : 영국 웨스트민트 출생. 인도 고고학의 아버지라 불림. 원래 엔지니어였으나 1831년 이후 인도 고고학에 전념. 1834~1854년까지 마니칼라, 사르나트, 비슬라 등의 유적을 발굴. 유적지 발굴을 통하여 불교역사의 재발견을 이룸. 만년에는 화폐학연구에 전념하다가 런던에서 죽음. 논문은「캐시미르 사원에 대한 일련의 저작」외 24권의 고고학 보고서가 있으며 인도역사가들에게는 귀중한 문헌이다.
8) 에드윈 아놀드, 『아시아의 빛』 보스톤 1914.
9) 같은 책.
10)〔역주〕부처님의 아들 이름인 라훌라(Rāhula)는 빠알리어로 장애라는 뜻이다.
첫댓글 부처님의 생애.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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