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대를 이어 일본에 충성한 대표적 친일파 일가인 이완용 집안은 조부와 부친, 손자 3대에 걸쳐 작위를 세습했다. 이완용 일가 가계도. | | | |
29일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1차 명단에는 대를 이어 친일행각을 벌이거나 형제가 앞다퉈 일본에 충성을 맹세한 경우도 많다.
이들 대부분은 조부나 부친의 작위를 세습받아 일제가 패망하기 전까지 호의호식하며 지냈다. 가장 대표적인 '친일가족'은 이른바 '을사오적'의 한 명인 이완용 일가.
1905년 을사조약 당시 이완용은 내각총리 대신으로 을사늑약 체결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에 대한 공로로 이완용은 '훈1등 백작' 작위를 받았다. 이후 이완용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과 부의장, 조선귀족원 회원을 지냈고, 작위도 후작으로 승급(1920년)됐다.
이완용의 아들인 이항구는 친일단체 간부를 지냈고 손자인 이병길은 조부 이완용의 후작 작위를 그대로 물려받은 '습작자(작위를 세습한 사람)'다. 조부에서 손자까지 3대에 걸쳐 일제에 충성한 집안인 셈이다.
이완용 일가의 친일 뿌리는 3대에만 머물지 않는다. 당시 <대한민보> 기사(1909년 7월 27일자)에는 "이완용의 친인척 중 현직관인이 60명 이상에 이른다"고 돼 있다. 친인척 중 수작자(작위를 받은 사람)만 해도 이윤용(형), 조민희(처남), 민병석, 임선준(사돈), 이항구(아들) 등 5명이나 된다.
이런 죄과 때문에 이완용의 손자 이병길은 해방 직후 반민특위에 체포돼 몰수형(재산의 1/2)을 당했다.
[3대 친일]조부 작위 습작받았다가 해방 후에도 장관
| | | ▲ '을사오적'의 한 사람인 이완용. | | ⓒ2005 병합기념조선사진첩 |
이완용 일가에 못지 않은 집안이 이하영 일가다.
이하영은 외부대신이던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을 맺어 일본의 재정고문을 국내로 불러들였고, 이듬해인 1905년 법부대신으로 임명됐다. 1907년 중추원 고문을 거쳐 1910년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이하영의 아들 이규원 역시 '시종원경'을 지내며 부친 작위를 물려받은 '습작자'다. 손자인 이종찬은 1937년 일본 육사 49기로 임관, 만주와 남양군도 등에서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며 소좌까지 진급했다. 해방 후 이승만 정권 아래서 육군참모총장, 육군대학 총장, 허정 과도정부에서 국방부장관 등을 역임했다.
이하영 일가도 이완용의 아들, 손자처럼 3대에 걸친 친일파로 분류되지만 이종찬에 대한 평가는 조금 다르다.
일본군 소좌를 지낸 이종찬은 해방 후 조부와 부친, 자신의 친일행각을 참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이승만 전 대통령의 '부산파동' 당시 계엄령 선포 거부,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 협력 거부 등 일화는 유명하다.
[2대 친일] 대 이어 충성한 윤웅렬·윤치호, 현헌·현영섭 부자
두 일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이 대를 이어 부일협력한 집안도 많다. 윤웅렬·윤치호 부자가 대표적인 사례다.
윤웅렬은 대원군에 의해 발탁된 군인 출신으로 갑신정변 등 격변기에 나카사키와 상해에 2차례나 망명하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1910년 일본의 조선 강점과 함께 조선으로 들어와 남작 작위와 매국 공채 2만5000원을 발행했다.
윤웅렬의 아들인 윤치호는 한때 독립협회 회장, 독립신문 주필, 만민공동회 지도자 등 항일 활동에 나서기도 했으나 '105인 사건'에 연루되 옥고를 치른 뒤부터 친일에 나서게 된다. 1945년 12월에 사망한 윤치호는 중추원 고문, 귀족원 의원을 지내다 일본 패망 직전 '이토 치카우'로 창씨개명했다.
현헌·현영섭 부자도 대를 이어 충성한 집안 중 하나다. 부친인 현헌은 중추원 참의를 지냈고, 아들인 현영섭은 '조선어 전폐론'까지 주장한 극렬 친일파다. 특히 현영섭은 1937년 친일단체 '녹기연맹'에 가입해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1938년 펴낸 책 <조선인이 나아갈 길>에서 현영섭은 "언젠가는 조선인이 완전히 일본민족이 될 운명에 있다"고 주장했다. 중일전쟁 발발 직후에는 전국 시국순회강연회를 통해 조선 젊은이들을 전선으로 내모는 데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밖에도 손지현(조선총독부 고등문관)-손영목(도지사), 민병석(중추원 참의, 자작)-민홍기(습작자)·민복기(판·검사)도 29일 발표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에 나오는 대표적 친일파 가족이다.
[형제·사돈·부부 친일] 순종에게 일본 왕실 참배 종용한 왕실 외척
형제가 앞다퉈 친일 행렬에 동참한 사례로는 송문화(중의원 참의)-송문헌(도지사) 형제, 김인승(미술가)-김경승(미술가) 형제를 들 수 있다. 김인승·경승 형제의 경우 화가와 조각가로서 탁월한 재능을 일제 지배를 미화하고 침략전쟁을 독려하는데 쓴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 왕가의 외척도 친일행각에는 뒤지지 않았다. 순종의 장인인 해풍대원군 윤택영은 1910년 일본으로부터 후작 작위와 함께 매국공채 50만4000원을 발행했다. 그러나 윤택영은 1927년 파산 선고로 작위를 상실하게 된다.
윤택영의 동생 윤덕영 역시 1910년 자작 작위를 받은 인물이다. 윤덕용은 순종에게 일본 왕실을 참배하도록 종용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행위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윤덕영도 중추원 고문과 중추원 부의장 등 고관대작을 역임했다. 그의 처 김복완도 애국금차회 회장을 맡아 친일에 앞장서는 등 대표적인 친일 '부부'로 손꼽힌다.
이 밖에도 친일 부부로는 '국경의 밤'을 쓴 시인 김동환과 최정희가 있다. 김동환은 1941년 지원병보급 혈정대강연회 연사로 참가하거나 임정대책협의회 발족을 주도하는 등 침략 전쟁 독려에 적극 나섰다. 이 시기 '권군취천명'이라는 전쟁 독려 시를 쓴 사실도 잘 알려졌다.
김동환의 아내인 최정희는 초기에 순수소설을 주로 썼으나 1942년부터 <장미의 집>, <야국초>와 같은 단편소설과 수필을 통해 친일 성향을 드러냈다.
함께 친일에 나선 사돈들도 있다. 정미칠적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송병준 농상공부대신은 일진회 조직 등의 공로로 1910년 훈1등 자작 작위와 매국공채 10만원을 받았다. 중추원 고문을 지낸 송병준은 1920년 백작으로 승급될 정도로 일본 천황의 총애를 받았다. 송병준의 아들인 송종헌도 역시 '습작'을 했다.
송병준의 사위인 구연수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적극 가담했다고 알려져 있다. 사위와 장인이 나란히 친일에 나선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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