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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행복충전소 † 대명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선한 것을 본받으라/ 요삼 1:9-12
9월은 교육의 달입니다.
사람이 짐승들과 다른 점이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 중요한 것은 바로 교육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짐승들도 어미를 배우며 자랍니다. 그러나 사람들 처럼 체계적으로 교육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죽기까지 배웁니다. 그래서 평생교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옳바른 교육을 받지 못하면 사람답게 살지도 못하며 또한 생존경쟁이 심한 세상에서 도퇴되고 말 것입니다.
늦더위 때문에 공부하는 학생들이 고생을 하였지만 이제는 제법 서늘해져서 공부하기 좋은 계절이 되었고, 또한 천고마비의 좋은 계절이 되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도 성경학교나 선교하교에 많이 참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좋은 것을 본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들도 좋은 것을 옳바로 배울 때에 좋은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좋은 것을 배우고 좋은 것을 본받는 것은 시간이 걸리고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쁜 것을 배우고 본받는 것은 빠르고 쉽습니다.
어린 아이들도 말을 배울 때도 상스러운 말을 쉽게 배우지만 좋은 말은 쉽게 배우지 못합니다. 어른 이든, 아이든 좋은 것을 본받고 따라야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사회를 만들고 좋은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본문 11절에서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본받는다는 것은 따라간다는 뜻입니다.
요한은 본문에서 두사람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본받을 사람과 본받아선 안될 사람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받아야 할 사람은 12절에 나오는 ‘데메드리오’이고 본받아서 안될 사람은 ‘디오드레베’입니다.
1.본받아선 아될 것이 있습니다.
11절 초두에 보면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9절에 보면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가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디오드레베’라는 이름의 뜻은 로마의 주신이었던 제우스의 기르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 역시 초대 교회의 중직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그의 잘못된 점이 9-1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으뜸되기를 좋아했고, 요한을 접대하지 아니했고, 망령된 말로 폅론했고, 남을 접대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방해하고 상처를 주어 교회에서 내쫓았습니다. 한마디로 나쁜 점을 골고루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나서기를 좋아하고, 남을 대접하지 아니하고 대접하려는 사람을 시기하고 방해하는가 하면 악한 말로 남을 비난하고 깍아내리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한마디로 교회 중직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암적인 존재이므로 어디를 가든지 있어서는 않될 사람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어서든지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후하고 넉넉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남에게 유익을 끼치고 덕을 끼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선한 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11절 상반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2절에 보면 “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에게도, 진리에게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거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거가 참된 줄을 아느니라”고 했습니다.
어기서 ‘데메드리오’가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이었는가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시무했던 초대교회 중직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중요한 것은 뭇사람들, 즉 그의 주변 사람들 가운데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고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이신 주님도 그의 행한 바를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 자신도 그를 증거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두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것을 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뭇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담임 교역자인 사도 요한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나아가 진리로부터 칭찬과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선이란 무엇입니까?
쉽게 말해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유익을 끼치는 언행심사를 말합니다.
다시말하면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사람, 꼭 필요한 사람이 바로 선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꼭 필요하고 선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1).화평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한 자라고 했습니다.
마5:9절에 보면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화평케하는 자가 선을 행하는 자입니다. 불평을 조장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불목케하며, 이간질하며, 다툼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악한 자요,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공동체 생활에 있어서 필요한 사람은 화평케하는 사람입니다. 가정에서도 그렇고, 교회에서도 그렇고, 직장에서도 그렇습니다. 화평케하는 사람이 보배입니다.
3).협동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화평케하는 사람은 협동도 잘합니다. 제아무리 일을 잘해도 독불장군처럼 굴면 안됩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IMF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어느 때보다도 협동심이 필요한 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고통을 분담하기 위해서는 서로 서로 희생하고 양보해야 합니다. 자기 유익만을 챙겨서는 안됩니다. 사업주도 희생하고 노동자도 양보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협동입니다. 그러므로 협동은 선한 일이요, 협동하지 않는 것은 악한 일입니다.
막2장에 보면 네 사람이 한 중풍병자를 들것에 메어지고 예수님께 데려가 고침 받은 사실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키도 다르기 때문에 키가 큰 사람은 키를 나추어야 할 것이며, 키가 작은 사람은 발꿈치를 높이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걸음 폭도 각각 다를 것입니다.
그래서 폭이 큰 사람은 좀 천천히 걸아야 할 것이며, 폭이 적은 사람은 좀 빨리 걸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희생하고 양보할 때에 들것의 환자는 안전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협동이 잘되는 곳에는 언제나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3).겸손한 사람입니다.
왜 이렇게 싸움과 다툼이 그치지를 않습니까? 그것은 서로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로 겸손한 마음으로 대할 때에 언제나 화평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잠11:2절에 보면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했고, 잠16:19절에 보면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잠18:12절에는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고 했고, 잠29:23절에는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약4:6절에는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벧전5:5절에 보면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사람은 자신에게는 복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서나 겸손한 자를 좋아하고 기뻐합니다.
찬송가 가사에도 보면 ‘겸손한 자 찾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는 지혜와 능력이 있는 자를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자를 찾으신다는 뜻입니다.
겸손은 비유해서 말한다면 은혜와 사랑과 복을 담을 수 있는 그릇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겸손하지 못하면 아무데도 쓸모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4).좋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바로 의로운 것이요, 선한 것입니다.
롬1:17절에 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롬14:23절에 보면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고 했습니다.
사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은 다 악한 것이요, 죄 중에 가장 큰 죄입니다.
왜 세상이 이렇게 악하고 어지럽습니까?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를 믿는고 하지만 믿음으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이야말로 진정으로 예수 믿는 사람이 요구되는 세대입니다. 옳바로 예수 믿는 사람이 많아 질수록 교회가 달라질 것이며, 가정과 사회가 달라질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본받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좋은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마지못해 교회를 드나드는 사람을 본받으면 마지못해 교회를 출석하게 됩니다. 일을 하지만 믿음으로 하지 아니하고 자기 생각과 뜻대로 하는 사람을 본받으면 그도 그렇게 되고 맙니다. 그리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즐거움으로 하지 아니하고 억지로 하는 사람을 본받으면 그와 똑같은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고, 긍정적인믿음의 사람을 본받으면 좋은 믿음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 처럼 복되고 선한일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히11:6절 말씀과 같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선을 행하는 자의 복입니다.
선을 행하는 자의 복은 믿음과 순종의 사람이 받는 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므로 그들이 이 땅에서도 복을 받되 하늘의 복과 땅의 기름지고 풍성한 복을 받았을 뿐만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믿음으로 선을 행하는 자는 금생과 내생의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창4:7절에 보면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했습니다. 죄를 이기고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선을 행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롬2:10절에 보면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때에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되며, 선을 행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언제나 기쁨과 평강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갈6:9절에 보면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선을 행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려운 일이 많습니다. 희생과 고통이 따르기도 합니다.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갚아주십니다. 믿습니까?
벧전2:20절에 보면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고 했습니다.
히13:16절에는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와 같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선한 행실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사와 같기 때문에 여기에는 반드시 신령한 은혜와 축복이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자신 뿐만아니라 그 후손이 또한 복을 받게 됩니다.
시37:25절에 보면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고 했습니다.
선을 해하는 것은 옥토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당대 뿐만아니라 후손들이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에게 억천만금을 물려주기보다는 많은 사람들에게 선을 베푸는 것이 더 크고 귀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한 것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악한 것은 조금도 본받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가르치심을 따라 화평과 협동, 겸손과 믿음과 순종의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자들에게 주시는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을 여러분들과 여러분들의 후손이 다 받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