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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6. 묵상글 ( 사순 제3주간 수요일. - 소 닭 보듯?.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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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6. 사순 제3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소 닭 보듯?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오늘 모세는 자기 백성에게 하느님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분이라고,
그러니 이런 하느님을 모신 이스라엘 민족은 위대한 민족이라고 추켜세웁니다.
그렇다면 저는 또 우리 배달 민족은 이스라엘처럼 위대한 민족입니까?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선 저와 우리 민족에게도 가까이 계셔 주십니까?
물론이고 당연합니다.
누구에게나 그리고 어느 민족에게나 가까이 계셔 주십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누가 느낍니까?
모두 느끼고 모든 민족이 느끼는 것 아닙니다.
소 닭 보듯 하는 사람 많습니다.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무덤덤합니다.
그런데 소와 닭은 왜 관계가 그렇습니까?
소가 닭을 잡아먹는 동물이라면 그럴 리 없습니다.
소는 잡아먹으려고 닭을 노려보고 닭은 소가 덮칠까 경계하며 볼 것입니다.
서로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입니다.
그렇다고 둘은 친하지도 않습니다.
관심사가 다를 뿐 아니라 호감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런 끌림이 서로 간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소 닭 보듯 관계가 바로 ‘실천적 무신론’의 관계입니다.
실천적 무신론은 존재적 무신론이 아닙니다.
존재적 무신론은 신이란 존재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천적 무신론은 신의 존재 여부에 아예 관심이 없습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곧 상관없고 관심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계시지만 내 삶 안에는 없습니다.
계시긴 하지만 저기 부산에 계신 것입니다.
여기 내게 가까이 있어도 내 삶 안에 없고,
내가 뭘 실천할 때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내 좋을 대로 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하고 원치 않으시면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으면 하고 싫으면 하지 않는 것으로 철저히 자기중심입니다
요즘의 무신론은 대개 이런 무신론입니다.
있냐 없냐 심각하게 고민한 끝에 없는 것이 아니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기에 고민조차 하지 않는 무신론이고,
그래서 존재적 무신론보다 더 나쁜 무신론이 소 닭 보듯 무신론입니다.
하느님이 아무리 가까이 계셔도 소 닭처럼 계시니
하느님의 계명도 간단히 제쳐버리겠지요?
그래서 오늘 모세가 “또한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고
얘기해도 그저 웃기만 하고 코웃음 칠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하느님이 아무리 가까이 계셔도 없는 것이고,
하느님의 사랑 계명이 거미줄의 바람 같을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와 하느님은 소 닭처럼 가까운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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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6. 사순 제3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고등학교 때 처음 타자기를 보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컴퓨터는 보편화되지 않았지요. 따라서 타자기는 너무 신기했습니다. 더군다나 직접 타자를 쳐보면서 종이에 글이 찍히는 것을 보면서 마치 책을 출판하는 것 같은 느낌에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당연히 자판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제 이름을 타자 치는 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특히 두 손가락만을 이용한 독수리 타법이라서 1분에 3~40개의 단어만 띄엄띄엄 타자할 수 있었습니다.
그 뒤에 실력을 향상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두 손가락의 독수리 타법으로는 실력 향상이 불가능했습니다. 저의 이 독수리 타법을 본 누군가가 양손을, 그러니까 모든 손가락으로 타자를 하면 속도가 빨라진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계속된 연습으로 양손을 모두 사용할 수 있었고, 또 타자기 자판도 모두 외우면서 속도가 비약적으로 향상했습니다. 한때, 1분에 800타까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 당시에 두 손가락만 사용하는 독수리 타법만을 고집했다면 실력 향상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습관을 몸에 익히면서 비로소 향상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과거의 방식에만 매여있으면 어떤 발전도 이룰 수 없습니다. 새롭게 변화하는 모습을 만들어 갈 때, 우리는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와 너무 다른 이 현재를 살면서, 이 현재에 맞게 신앙생활도 계속 변화 발전시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그때가 좋았어.’만을 외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과거에만 매여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만을 강조하면서 그 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조항은 모두 613개에 이르지요. 사실 이 조항 613개를 거슬러 올라가면 십계명이 되고, 또 이를 다시 줄이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됩니다. 이 사랑이 율법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거에 매여있는 종교 지도자들은 사랑은 보지 않고 613개의 조항만을 봅니다. 사랑의 삶을 살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으로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내용이 녹아 들어갔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율법과 예언서의 완성은 사랑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매인 삶이 아니라, 지금 실천해야 하는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랑 안에서만 우리는 하느님 나라로 힘차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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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영원하다(르누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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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6. 사순 제3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마태 5,19)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들과 다른 점을 하나를 들라면, 아마도 그것은 그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 하나를 들라면,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복음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나 그리스도인이 다른 이들과 구별 짓게 하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으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이는 복음을 예표하고 있던 구약의 율법이, 이제 복음 안에서 완성(실행, 성취, 채워짐)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온몸으로 율법과 예언을 실행하셨고, 결정적으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요한 19,30)고 하시면서 모든 것을 완성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계명을 실행하는 이가 복됨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마태 5,19)
이는 계명을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알고 있는 것을 말로 선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킴’으로써 계명을 ‘실행’하고, 그 실행으로 가르치는 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 그레고리우스는 말합니다. “설교자에게는 법이 하나 있는데, 설교하는 바를 실천해야 한다는 법이다.” 그리고 어제 우리가 기념했던, 유명한 설교가였던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가르치는 바를 행동으로 파괴시킨다면, 사람이 법을 안다고 자랑하는 것이 쓸모없는 일이다.”
그렇습니다. 율법은 지켜질 때라야, 비로소 그 ‘행위 안’에서 실현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스스로” 자신의 의지로 그것을 하는 일입니다. “스스로” 한다는 것은 ‘사랑의 원의’로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계명을 주신 분을 사랑하기를 원해서 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사랑이 율법을 완성합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1요한 2,5)
그리고 그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하오니, 주님! 제가 말씀의 계명을 스스로 지킴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이가 되게 하소서.
말이 아니라 행실로 사랑하고, 행실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고,
비록 작은 것 하나라도 깊은 사랑을 담고 행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마태 5,19)
주님!
제 안에 새겨진 사랑의 법이 제 행동의 뿌리가 되게 하소서!
제가 행동으로 가르치게 하시고,
가르친 바를 행동으로 파괴하지 않게 하소서!
말이 아니라, 행실로 사랑하게 하시고
작은 일에도 사랑을 담아 행하게 하소서.
행실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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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6. 사순 제3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율법은 삶의 규범입니다. 유다인들의 율법은 613개 조항에 이릅니다. 그 가운데 248개 조항은 명령, 365개 조항은 금령이었습니다. 이것은 거슬러 올라가면 십계명이 되고, 더 줄이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됩니다. 한 마디로 줄이면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무시하거나 소용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의미를 알고 지켜야 합니다. 정신을 알고 지키면 삶이 풍요로워집니다. 그러나 율법이라는 도구를 절대시하면 하느님과의 관계도 멀어지고 사람과의 관계도 형식화됩니다. 따라서 껍데기만을 지킬 것이 아니라 내용을 지켜야 합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랑자체이십니다. 우리가 가야 할 최종목적지도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5,1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돌판에 새겨진 율법, 의무로 주어진 규정을 지키는 것에 머물지 않고, 성령의 도움으로, 자기 공로가 아니라 은총으로 채워주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율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을 채우는 것입니다. 형식에 내용을 넣어주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라’, ‘하지마라’고 했을 뿐, 예수님처럼 몸소 백성을 어루만저 주시고 일으켜 세우시고 공감하며 소통하는 일은 하지 못했습니다. 율법의 한계를 뛰어 넘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근본정신을 사랑으로 요약하셨습니다. 율법의 완성은 계명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계명 준수만으로는 율법이 완성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교통법규를 지키는 것도 법이니까 지킨다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안전과 공공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고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나의 생명을 지키는 차원에서 준수한다면 그것은 큰 사랑의 행위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에, 더 신경을 쓰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지만 내용과 의미를 살리는 노력이 더 필요합니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5,19). 하신 예수님 말씀은 우리를 언행일치의 삶으로 초대합니다.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는 바를 실천하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서 결정한 것, 쏟아놓은 말들을 미루지 말고 그분의 뜻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에페6,6).해야 하겠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1233)’.하고 고백한 율법 학자를 떠올리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을 실천하여 율법을 완성하는 날 될 수 있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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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6. 사순 제3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구의 인사이동으로 뉴욕에서 댈러스로 떠나면서 이동방법을 생각하였습니다. 비행기로 가면 4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자동차로 가면 23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신문사의 후임신부님과 코네티컷 신부님이 함께 해 주기로 해서 저는 자동차로 이동하기로 했습니다. 비행기로 이동하면 간편하지만 불편함을 감수하고 자동차로 이동하기로 한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미국에 살면서 한번쯤은 자동차 여행을 하고 싶었습니다. 마침 동행하기로 한 신부님들이 있어서 10일의 일정으로 댈러스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첫째 날은 필라델피아로 가서 지냈습니다. 동부에 있는 교구 사제들과 식사를 하였습니다. 둘째 날은 버지니아 비치에서 머물었습니다. 아침에 바다에서 떠오르는 붉은 태양을 보면서 하느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셋째 날은 노스캐롤라이나의 샬롯에 머물렀습니다. 샬롯의 한인성당은 제가 대림특강을 했던 곳입니다. 넷째 날은 조지아의 애틀랜타에 머물렀습니다. 저는 2006년에 애틀랜타 한인성당에서 대림특강을 했었습니다. 다섯째 날은 루이지애나의 뉴올리온즈에 머물렀습니다. 그곳에서 재즈 음악을 들었고, 사순시기 전에 있는 축제를 보았습니다. 남부의 열정을 볼 수 있었습니다. 뉴올리온즈에서 2일을 머물고 일곱째 날에는 텍사스의 휴스톤에서 머물렀습니다. 휴스톤의 한인성당 신부님이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설날 미사를 휴스턴 한인성당에서 함께 했습니다. 휴스톤에서 2일을 머물고 드디어 뉴욕을 떠난 지 10일 만에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 도착했습니다.
이번 여행에 감사할 일들이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꼼꼼하게 일정을 챙겨주고, 운전을 해 주었던 신부님들에게 감사합니다. 신부님들은 좋은 숙소를 예약하였고, 한국 식당을 찾아 주었습니다. 축제에 대한 정보를 검색해 주었습니다. 신부님들이 함께 하지 않았다면 혼자서는 엄두를 낼 수 없는 여행입니다. 여행 중에 저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매일 아침 미사를 봉헌하고 출발하였습니다. 고단한 일정 중에서도 서로를 배려하는 신부님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후임 신부님은 제게 인수인계를 잘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긍정의 마음, 먼저 경청하는 소통의 마음,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던 겸손의 마음을 배우겠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여행 중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그 말이 좋은 인수인계였다고 말하였습니다. 뉴욕에서 바로 댈러스로 이동했다면 저도 적응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 10일간 여행하면서 충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제가 없는 동안에 본당의 미사를 집전하고, 자리를 지켜준 보좌 신부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보좌 신부님이 없었다면 이번 여행은 어려웠습니다. 전임 신부님이 비자 문제로 먼저 귀국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좋은 날씨를 허락해 주시고, 시간을 허락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 운전에 대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특히 장거리 운전에는 신경을 써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2시간 정도 운전하면 잠시 쉬는 것이 필요합니다. 혼자 하면 힘들기에 교대해 주어야 합니다. 초행길이기에 교통법규를 잘 지켜야 합니다. 운전에는 3가지 방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준법운전입니다. 준법운전은 교통법규를 잘 따르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고는 교통법규를 어기면서 시작되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신호체계를 따라야 합니다. 자신의 운전 실력을 믿고 과속해서도 안 됩니다. 둘째는 안전운전입니다. 운전을 잘 하는 사람은 교통의 흐름을 잘 파악합니다. 앞의 차량과 뒤에 따라오는 차량을 살펴봅니다. 추월하려는 차량은 추월할 수 있도록 배려합니다. 운전하기 전에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갑니다. 운전하기 전에 미리 차량을 점검합니다. 타이어의 상태, 엔진 오일 점검, 가야할 목적지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해 놓습니다. 운전을 많이 해야 하는 사람은 안전운전을 잘 해야 합니다. 셋째는 양보운전입니다. 운전하면서 길가에 고장 난 차가 있으면 내려서 도움을 줍니다. 본당에서 차량 봉사를 원하면 기꺼이 봉사합니다. 짐을 들고 걸어가는 어르신이 있으면 모셔다 드립니다. 이런 분에게 운전은 사랑을 실천하는 선행이 됩니다. 운전 중에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이런 분에게 운전은 기도하는 시간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준법운전은 물론 안전운전에 양보운전까지 해 주었던 신부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율법의 완성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부귀보다 가난을, 건강보다 질병을, 장수보다 단명함까지도 택할 수 있는 결단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내가 원하는 것을 먼저 상대방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주님께서 지고가신 십자가를 나도 따라 지고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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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6. 사순 제3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밥 태워먹은 기억이 있으십니까? 지금은 누구보다 밥 잘하는데 말입니다. 반찬 만드는 법 몰라서 애태운 기억이 있으십니까? 물론 지금은 누구보다 반찬을 척척 잘 만들어 내지만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요리사에게 물었습니다. “세상에 요리사가 몇 명이나 될까?”라고 하니까, 요리사가 대답했습니다. “세상의 어머니 숫자 만큼이겠지!”라고 말입니다. 음식을 나름대로 완성한 요리사의 수가 바로 어머니의 수와 같다는 말입니다. 모든 어머니가 요리사라는 말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음식을 하고 그 음식의 맛을 더하려고 부단히 노력해서 나름의 완성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실패에도 포기하지 않지요. 왜냐하면 사랑하는 가족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율법과 계명을 말입니다. 지금은 미완성이란 말씀입니다.
그 미완성된 율법과 계명을 완성하시려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분의 길은 이러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기적을 일으키고, 사랑과 자선을 베풀고 고난을 격고 매를 맞고 십자가를 지고 못 박히고 죽으셨던 그 길이 바로 예수님의 완성을 이루려는 길이었습니다.
이러한 미완성된 상태를 완성하시려 예수님은 스스로 지키고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 율법과 계명을 완성하는 길이고 또한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계명을 완성해 가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당신의 삶으로, 십자가의 길로 말입니다.
사랑해서 서로 만나고 가정을 이룹니다. 이것이 완성입니까? 아니지요? 이것이 미완성에서 완성으로 가는 길의 시작입니다. 그렇게 세상풍파 속에서 지키려하고 서로를 안아주려 할 때 완성에 점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닐는지요!
하느님의 자녀로서 세례를 받습니다. 이것이 완성입니까? 아닙니다. 물론 세례는 완성된 것이지만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길은 이제 시작인 것입니다. 그렇게 수많은 유혹을 이겨나가고, 그분에게 의지하는 법을 배워갈 때 하늘나라에 다다를 것입니다. 그렇게 세례의 길이 완성되어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걸으신 완성의 길을 우리도 걸어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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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짓는 것보다 어려운 것
꼬마 아이가 엄마한테 혼나고 있습니다.
이거 네가 그랬지?
꼬마 아이는 이내 눈이 붉어집니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꼬마의 엄마는 말합니다.
네가 그랬다고 인정하니까
이번 한 번은 봐줄게. 알았지.
그 꼬마는 참으로 용기 있습니다.
죄짓는 것보다
죄를 인정하는 것이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나이가 들수록 인정하는 것이 수월해지나요?
아니면 이런 핑계와 거짓으로 모면하려 하나요?
주님 보시기에 어떤 모습이 더 예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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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6. 사순 제3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이 답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 분별의 잣대-
제가 자주 소개했던 기도이자 사랑의 표현이었던 만세육창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기상하여 하루가 시작되기전 양손을 활짝 펴들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태극기 앞에서 날마다 부르는 “만세육창-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수도원 만세-”입니다. 그런데 어제 반가운 카톡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만세를 부르자’ 라는 글이었습니다.
“두 팔을 하늘 높이 쳐들고 만세를 부르자.
만세를 부르면 회색빛 심장이 뚝 떨어져 나간다.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가도 힘들다고 징징 울지 말자.
일어나서 만세를 부르자.
몸에서 툭 소리를 내며 고통이 떨어져 나간다.
만세를 부르면 힘이 난다.
치욕도 살비듬처럼 가볍게 떨어져 나간다.
아무데서나 벌떡 일어나 만세를 부르자”
-<10cm 예술> 김점선-
몸과 마음을 다한 만세보다 절박한 기도도, 사랑도 없을 것입니다. 호기심에 이름을 검색해 봤더니, 1946년 출생, 2009년 3월22일 별세. 홍익대 대학원 서양학과 졸업. 1년 365일, 하루 24시간 내내 그림을 그리고 싶어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했던 화가로 소개되어있었습니다. 만63세로 타계하기 전까지 참으로 치열하게, 가열차게 살았던 화가이자 시인이었습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엔 답이 없습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은 분별의 잣대입니다. 삶은 싸움이자 전쟁입니다. 젊었을 때에는 공부와 싸우고, 중년에는 일과 싸우고 노년에는 병마와의 싸움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의 싸움은 믿음의 싸움, 희망의 싸움, 사랑의 싸움, 인내의 싸움입니다. 특히 노년에 병고를 겪는 분들을 보면 고통의 삶자체가 “십자가의 길”임을 봅니다.
새삼 습관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영성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 습관입니다. 노년에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습관으로 삽니다. 몸에 밴 습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무엇보다 일찍부터 하느님 믿음을, 희망을, 사랑을 선택하고 훈련하여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노년의 병마와의 싸움에 승리도 이런 신망애(信望愛)의 훈련이 잘 되어 습관화되어 있을 때 가능함을 체험합니다.
제가 근래 참 많이 강조한 “선택-훈련-습관”의 도식입니다. 이런 면에서 수도공동체가 평생 날마다 바치는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보다 더 좋은 신망애(信望愛)의 훈련은 없을 것입니다. 마침 오늘의 다산 어록과 공자의 말씀도 좋았습니다.
“공부는 사람을 깨닫고 사람을 사랑하는 과정이다. 그 시작은 나를 알고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다산
“번지가 인(仁)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지(知)에 대해 묻자 공자가 답했다. ‘사람을 아는 것이다.’-논어
사랑과 앎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사랑할 때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해서 사람이요 공부중의 평생공부가 사랑공부입니다. 인생은 사랑의 학교요, 우리는 죽어야 졸업인 영원한 현역의 평생학인(平生學人)입니다. 저는 이런 자세로 매일 강론을 씁니다. 아무리 공부해도 신망애(信望愛)에는 영원한 초보자같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율법”과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율법 사랑은 얼마나 단호하고 결연한지요! 율법이나 예언서야 말로 하느님 사랑의 총화라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이들의 완성은 사랑뿐임을 깨닫게 되며, 이어 예수님의 복음은 사랑의 구체적 실천을 알려주는 내용들이 소개됩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사랑은 율법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듯 율법을 사랑한 예수님이요, 율법 하나하나가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기에 그토록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의 어떠한 세부조항도 소홀히 다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추상적이 아니라 율법의 준수를 통해 구체성을 띄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본능적으로 표현을 찾습니다. 사실 모든 율법준수나 수행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연을 사랑하고, 기도를 사랑하고, 노동을 사랑하고, 공부를 사랑하고, 정결을 사랑하고, 성독을 사랑하고, 단식을 사랑하고, 순종을 사랑하고, 가난을 사랑하고, 수도생활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수행과 더불어 마음의 순수에 내적자유요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그러다 보면 저절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요 분별의 잣대임을 깨닫게 됩니다. 제1독서 신명기 모세를 통한 주님 말씀은 이런 사랑의 수행에 한결같이 충실한 우리들에게 주는 말씀처럼 아주 고무적입니다.
“너희는 그 사랑의 율법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사람들이 너희의 지혜와 슬기를 보게 될 것이다...우리가 부를 때 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또한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를 가진 위대한 민족이 어디 있느냐?”
그대로 오늘 사랑의 계명을 충실히 준행(遵行)하는 위대한 민족, 가톨릭교회 신자들인 우리를 두고 하는 말씀처럼 들리니 용기백배, 사기충천해지는 느낌입니다. 주님은 하루하루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전례시 보고 들은 사랑을 우리 모두 마음 깊이 새기고 실천하고 전하라 명하십니다. 오늘날 교육의 결정적 취약점인 ‘신앙과 전통의 전수(傳受)’ 역시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습니다.
“너희는 오로지 조심하고 단단히 정신을 차려, 너희가 두 눈으로 본 것들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 그것들이 평생 너희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여라. 또한 자자손손에게 그것들을 알려주어라.”(신명4,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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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6. 사순 제3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의 완성>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사랑과 맞서는 사랑을
사랑과 벗하는 사랑으로
사랑을 가르는 사랑을
사랑을 모으는 사랑으로
사랑을 가두는 사랑을
사랑을 놔주는 사랑으로
사랑을 말리는 사랑을
사랑을 돋우는 사랑으로
사랑을 허무는 사랑을
사랑을 이루는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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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6. 사순 제3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8)
복음서에 율법이 요약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주 하느님께서 만드실 새 하늘과 새 땅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되면, 그에 따라 옛것은 사라질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율법에서 가장 작다고 여겨지는 것 조차도 영적 상징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 모든 것이 복음서에 요약되어 있음을 알려 주는 사실적인 표현입니다.
-히에로니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4 존재는 거룩하다
만일 천사가 피조물을 아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면, 밤이 찾아올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천사가 하느님을 떠나서 피조물에 관심을 가지면 황혼이 밀려들 것이다." 반면에 천사가 하느님 안에서 피조물에 관심을 가지면 동이 틀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천사가 하느님이 얼마나 순수한 존재인지를 안다면, 그때야말로 밝은 대낮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존재가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알고 깨달아야 합니다. 존재를 갈망하지 못할 만큼 하찮은 미물은 없습니다. 나무에서 떨어진 송충이조차도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하여 다시 나무줄기를 타고 높은 곳으로 기어오릅니다. 이토록 존재는 고귀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죽기를 바라고, 하느님이 우리를 생명보다 더 나은 존재로 데려가시기를 바랍니다. 이 더 나은 형식의 존재 안에서 우리의 생명은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존재가 되는 한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기꺼이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면, 더 나은 형식의 존재가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132)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 2절: 그레고리오 개혁과 성직 서임권 논쟁
성과:
교회의 내적 생활을 위한 그레고리오 개혁의 직접적인 결과로 교회 안에서 교황의 수위권적 지위의 놀라운 확대를 확인할 수 있다. 레오 9세 이래 교황들은 교회 통치의 고삐를 점점 잡아당겼다. 그들은 로마 내외에서의 개혁 교회회의를 통하여 자신들의 영향력과 의사를 관철하였다. 교황 사절 제도의 확대는 개혁이 실행되도록 돌보았고, 동시에 도처에서 교황의 권위를 현존하게 하였다. 교황좌로의 항소, 특히 미해결의 주교 선거에 대한 항소가 늘었고, 그래서 교구에 직접 개입할 기회를 교황에게 제공하였다. 선거인들이 합의하지 못하였을 때, 교황은 임명권 이전에 의거하여 그 점유권을 재빨리 요구하였다. 잘못이 있는 주교들에 대하여 교황청은 처벌과 파면이란 단호한 수단을 취하였다. 수도 대주교들은 11세기 이래 자신들의 팔리움을 가지러 직접 로마로 가야 했다. 또한 12세기부터는 특별한 순명선서를 하고, 정기적으로 - 4년마다 - “교황청 방문”을 위하여 로마에 나타나야 하였다. 또 정치적인 것의 비신성화 내지 세속화는 사제와 평신도 사이의 경계선이 더욱 현저하게 그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국왕과 제후들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지 않게 된 성직자들은, 직접 보편교회에 속하는 일종의 초국가적인 단체로 결합되었다.
13세기에 세계적인 탁발 수도회들에서 교황권을 지지하는 인물들이 나왔다. 그러나 그밖의 성직자들도 초국가적으로 성장하였다. 보편적인 교회는 서구 그리스도교에 새로운 공동체 의식을 가져다주었다.(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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