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시나이까?"
2사무 7,18-29; 마르 4,21-25 / 연중 제3주간 목요일; 2026.1.29
어두워서 캄캄한 길을 걸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눈의 시력이 아무리 좋아도 어둠을 비추어 주는 빛이 없으면 한 걸음도 선뜻 내디딜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눈은 빛을 받아서 시각을 느끼기에 빛이 없으면 눈은 무용지물입니다. 귀가 소리를 들어야 청각을 느끼는 이치도 마찬가지이지요. 사실은 인간의 몸 전체가 그렇습니다. 하느님과, 그분이 지으신 자연의 보호와 도움 그리고 자극이 없이는 탄생도, 성장도 모든 생존이 불가합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걷는 그 길이 평지가 아니라 산 속이거나 들판이라면 위험은 더욱 커집니다. 계곡에서라면 더 위험하지요.
이러한 이치는 물리적인 차원에서만 타당한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이거나 게다가 집단적인 차원이거나 집단의 경험이 더 큰 단위에서 축적되는 인류의 역사적인 차원에서는 더욱 타당한 진리입니다. 인류 역사를 통해 무수한 시행착오를 목격하신 하느님은 보다 못해 당신을 드러내셨는데 스스로 인간에게 그리고 인류 전체에게 빛을 비추기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인류가 자연발생적으로 발생시킨 종교 양식을 통해서도 알아보지 못하자, 그 빛을 우리가 직접 볼 수 있도록 가까이 보내주셨습니다. 그 빛,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와 있습니다.
이를 일깨워주는 이야기를 소개하지요. 바다에 사는 어린 물고기가 바다를 보겠다고 헤매고 있다는 우화가 있습니다.
[우화] 바다를 찾는 어린 물고기 (The Fish Story)
어느 깊은 바닷속에 배움에 목마른 어린 물고기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어린 물고기는 나이 든 현명한 물고기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어르신, 저는 ‘바다’라는 곳을 찾고 있어요. 바다는 정말 넓고 아름답다는데, 어디로 가야 바다에 갈 수 있나요?"
나이 든 물고기는 허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바다라니? 너는 지금 바다 안에 있잖니."
그러자 어린 물고기가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에이, 이건 그냥 물(water)이잖아요. 제가 찾고 싶은 건 '바다(Ocean)'라고요!"
어린 물고기는 늙은 물고기가 현실을 모른다고 생각하며, 진짜 바다를 찾아 다른 곳으로 헤엄쳐 가버렸습니다.
노인 물고기가 어린 물고기에게, “네가 사는 여기가 바로 바다란다.” 했던 충고대로, 바다물을 보면서도 아니 그 바다 물에서 살면서도 바다를 보겠다고 헤매는 처지가 바로 인간이요, 인류입니다. 성경은, 특히 오늘의 말씀은 바로 이런 인간과 인류의 처지를 적확하게 일깨워줍니다.
성경에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직관적 계시와 더불어 이것이 실현되는 역사적 과정에 대한 진술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왕이 되리라고 예언한 사무엘이 일찍이 하느님 축복을 상징하는 예식으로 기름을 부어 주었지만(1사무 16,13), 그 후에도 사울이 임금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던 40년 동안 다윗은 부하로서 충성을 다 했습니다. 무려 40년입니다. 모세가 나이 여든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동족을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해방시킨 기간과 같지요. 그러는 동안 모세는 백스무 살이 되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윗도 모세와 같은 길을 걸은 겁니다.
그리고 많은 전공을 세워 백성들의 민심을 얻은 가운데, 사울이 전쟁통에 요나탄과 함께 전사한 뒤 백성 지도자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섭리가 실현되는 데에 시간적으로는 40 년이 걸렸고, 이 시간이 역사적으로는 다윗의 노력과 이에 대한 백성의 민심이 채워지는 기간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무엘 상하권을 포함한 구약성경의 역사서에 담긴 역사신학적 관점입니다.
그리고 궁정 예언자 나탄은 다윗이 시작한 유다 지파의 왕조는 사울의 벤야민 지파와 달리 하느님의 축복을 받으리라는 시온의 계약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2사무 7,5-16). 그러자 다윗은 하느님께 찬송의 노래를 읊어 올렸습니다: “주 하느님, 제가 누구이기에, 또 제 집안이 무엇이기에, 당신께서 저를 여기까지 데려 오셨습니까? … 당신 종에게 복을 내리셨으니, 당신 앞에서 영원히 있게 해 주십시오”(2사무 7,18.29). 그리고 이런 다윗의 기도를 전해들은 후대의 유다인들은 이를 바탕으로 모두가 하느님을 찬송할 수 있도록 시편 8장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주 저희의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존엄하십니까!
하늘 위에 당신의 엄위를 세우셨습니다.
당신의 적들을 물리치시고 대항하는 자와 항거하는 자를 멸하시려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당신께서는 요새를 지으셨습니다.
우러러 당신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당신 손의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저 모든 양 떼와 소 떼 들짐승들하며
하늘의 새들과 바다의 물고기들 물속 길을 다니는 것들입니다.
주 저희의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존엄하십니까!“(시편 8,2-10).
시편에는 이처럼 다윗이 하느님을 찬송한 기도 뿐만 아니라 이름없는 백성들이 억압과 착취를 견디다 못해 탄원한 기도도 들어와 있고, 하느님께서 하늘을 쪼개시고 직접 내려와서 거짓 목자들 대신 당신 백성을 이끌어 달라는 청원 기도도 들어와 있습니다. 후대에 ‘시편’이라는 이름으로 형성된 과정만 해도 무려 천여 년입니다. 후대 유다인들은 이 150 꼭지에 이르는 아나빔들의 기도를 수집하고 편집하여 ‘시편’이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시편은 아나빔들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그의 이름을 따서 ‘다윗의 노래’라는 별칭으로 불렀습니다. 이는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이 하느님께 지혜를 청했고 또 실제로 지혜로 백성들을 다스린 치적을 기억해서, 후대의 잠언과 지혜를 수집하고 편집하면서 ‘솔로몬의 지혜’라고 별명을 붙인 유래와 비슷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마르 4,21) 하고 등불의 향도 내지 기수 기능을 강조하셨습니다. 다윗이 하느님께 기도 드리고, 솔로몬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지혜로 살아간 역사의 등불은 오늘날 시편과 잠언 지혜서로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시편 기도는 거의 암송하실 만큼 친숙하셨습니다. 신약성경 전체에서 시편이 인용된 사례만 해도 백 군데가 넘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의 신앙생활에서도 시편 기도가 깊숙이 들어와 있었음을 반영하는 사례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이 아름다운 전통을 계승하기 위하여 교회는 시편 기도 150장을 기본으로 하되 후대의 역사에서 실현된 기도들을 주로 편집하고, 신구약성경의 찬미가를 삽입하여 전례력에 따라 성무일도서를 편찬하였습니다. 16세기 트리엔트 공의회 당시 교황 비오 5세 시절부터 시작하여 20세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황 바오로 6세가 전례헌장의 지침에 따라 공포한 것입니다.(교황교서 Laudis canticum, 1970.11.1)
그리고 이를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는 의무로까지 규정했으며, 평신도들에게는 적극 권장해 왔습니다. 이는 신자들이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역사와 하느님께로부터 계시받은 신앙 진리를 간직한 이 역사와 진리의 등불을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지 말고 등경 위에 놓으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등불을 믿는 이들 앞에서와 세상에서 비추면,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입니다. 등불에 담긴 지향이 그렇게 실현되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역사신학의 관점에 따라서, 하느님의 섭리와 이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과 심판이 따라올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나 또 더 나아가서는 민족적으로나 인류 전체에 있어서나 이 진리는 실현되는 시간 단위만 다를 뿐 동일한 하느님의 섭리가 실현되는 과정이기에,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으려는 노력과 실현하려는 노력이 필요해지고 이 점에 있어서도 다윗이 읊은 기도는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우리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시나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