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53
10월24일[연중 제29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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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동안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복음말씀의 향기'가 오늘 열 살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멀리 올 줄 몰랐습니다. 힘들었던 나를 위로하고 다잡고자 신부님들의 강론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혼자 보기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10년 전 오늘, 본당의 일곱 분께 나눔을 시작했는데 해를 거듭할수록 판이 커져 버렸습니다. 이제는 국내뿐 아니라 북미,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등지의 교우와 성직자까지 1만여 명으로 짐작되는 분들이 매일 '복향'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때로는 밀린 숙제인 양 놓고 싶을 때도 있지만, 늦는다 싶으면 빗발치는 카톡에 정신을 차리곤 합니다. 앞으로도 여러분과 함께 묵상하고 기도하는 일 게을리하지 않겠습니다. 하느님을 향해 가는 길, 동행이 되어 주어 고맙습니다.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3653번째 날에 류상현 스테파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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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6dkcKaXPM68
[서울대교구 기호배 맛세오 신부님 집전(옥수동 본당 보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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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마지막 피정, 어느 젊은 사제의 영적 유언>
존경하는 광주대교구 강기남 요셉 신부님께서 정성껏 번역하신 파블로 도밍게스 프리에토(1966-2009) 신부님의 ‘마지막 피정’(성바오로 출판사)을 행복한 마음으로 읽고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강한 열정과 겸손의 덕을 겸비한 사제, 따뜻한 인간미와 유머 감각을 갖춘 사제, 깊은 성체 신심과 성모 신심의 소유자였던 젊은 사제 파블로 신부님은 스페인 사라고사에 위치한 시토회 봉쇄 수녀원 수녀님들의 영신 수련 피정을 동반해드리러 갔습니다.
그리 길지도 않은 피정이었습니다. 2009년 2월 11일부터 15일까지이니, 불과 닷새 동안의 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파블로 신부님의 피정 강의가 얼마나 재미있고 심오했던지, 수녀님들은 짧지만, 지상천국을 맛본 듯했습니다.
그리 되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 파블로 신부님의 피정 강의는 수녀님들의 마음 속에 주님을 향한 열정이 되살아나게 했고, 믿음에 확신을 갖게 했으며, 다시 한번 주님께로 돌아서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파블로 신부님은 암벽 등반 전문가였는데, 닷새간의 피정 동반을 마친 신부님은 수녀원에서 올려다보이는 몬카요 산을 등반하고 내려오는 길에 실족사하게 됩니다. 겨우 43세였습니다.
책 내용은 말 마디 그대로 파블로 신부님 생애에 있어서 ‘마지막 피정’ 강의록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신부님의 마지막 피정은 마지막이 아니었습니다. 흥미진진하면서도 깊은 영성으로 가득한 신부님의 피정 강의는 이제 한국어로 잘 번역되고, 멋진 책으로 출간되어 한국 땅에서도 계속 울려 퍼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피정’을 읽으면서 너무나 은혜로웠습니다. 마치 파블로 신부님이 강사석에 앉으셔서 영성 강의를 펼치시고 저는 연피정에 참석한 느낌입니다. 딱딱하고 지루한 강의가 아니라 너무나 편안하고 따뜻한 강의였습니다.
마지막 장을 탁 덮는 순간, 8박 9일간의 은혜로운 연피정을 끝낸 기분이었습니다. 이게 웬 횡재냐, 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저도 연피정 강의를 좀 더 정성껏 준비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피정 강의 안에는 여러 감동적인 스토리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성체성사의 사람, 구엔 반 투안 추기경님 이야기, 디하우 나치 포로 수용소 안에서 사제로 서품된 카를 라이스너 신부님 이야기, 32살에 직장암 진단을 받는 볼리비아 선교사 헤수스 신부님의 신앙 간증...
파블로 신부님 자신을 비롯해서 신부께서 강의 중에 소개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허리에 띠를 꽁꽁 동여매고 손에는 환한 등불을 켜 든 사람들이었습니다. 혹독한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과 동료 인간을 사랑했던 분들이었습니다.
죽음과 관련된 파블로 신부님의 말씀은 허리에 띠를 매고 손에 등불을 켠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죽음이란 신랑이신 그리스도와의 영원한 포옹이요, 사랑하는 그분과의 만남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만이 아시는 그 날과 그 시간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에게 묻습니다. 하느님과 만나는 그 죽음의 날, 우리가 맞이할 그 은총의 시간을 한결같은 열정으로 열망하고 경외하며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죽음의 결정적인 마지막 순간에 갖게 될 그 마음과 시선으로 지금 이 순간의 삶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성령께 간청합니다. 죽음의 순간에 중요한 것이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죽음의 그 순간 부차적인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부차적입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 그분만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그것만이 중요합니다.”(마지막 피정, 성바오로)
구입문의: 02) 944-8300, 986-1361, 인터넷 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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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WR7n2qKDZ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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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깨어있으려면 머리는 지치고 마음은 마른다>
영화, 과거를 잃게 되면 인생을 잃게 된다는 내용의 ‘내가 잠들기 전에’의 간단한 줄거리입니다. 여자 주인공은 매일 아침 이전의 기억을 잃은 채 깨어납니다. 남편이 앞에 있습니다. 그저 믿을 뿐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출근하면 어떤 다른 남자에게 전화가 옵니다.
남편은 자신이 사고로 밤마다 기억이 지워진다고 말하지만, 그 사람은 자신이 담당 의사인데 사실 누군가에게 폭력을 당해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옷장의 박스를 보면 사진기가 있는데 그것을 틀어보라고 합니다. 그것 안에는 지금까지 자신이 녹화한 것들이 들어있습니다.
남편이라는 사람을 믿지 말라는 말도 있습니다. 결국 아침마다 그렇게 쌓아놓은 지식으로 자기 남편 행세를 하는 사람을 이겨내고 참 자기를 찾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 주제는 ‘깨어 있음’입니다. 깨어 있음은 지금 주님과 함께 있는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서 죄를 지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현존을 잊고 죄를 지었습니다. 아니 죄를 짓기 위해 주님 현존을 잊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삶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우리가 구원되기 위해 해야 하는 유일한 일은 그러니까 깨어있음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계속 기억하기는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연습』의 로랑 수사님은 주님의 현존을 인식하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몸으로 체험하고 가신 분입니다. 이분은 매 순간 주님의 현존을 인식하려 노력하였습니다. 그 방법은 짧은 기도문을 계속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끊임없이 대화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처럼 의지가 약한 사람은 매 순간 주님과 대화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금방 지쳐버립니다. 책 『정리하는 뇌』는 인간의 뇌가 지친다고 말합니다. 머리로 계속 기억하려다가는 지치는 것입니다. 맛없는 무를 먹느라고 지친 사람과 맛있는 초콜릿을 먹은 사람이 같은 어려운 수학 문제를 누가 끝까지 견뎌낼까요?
당연히 지치지 않은 뇌를 지닌 초콜릿을 먹은 사람입니다. 반면 다른 사람들은 초콜릿을 먹는데 자기만 무를 먹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에너지를 다 소진해버린 사람들은 폭발 직전이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스마트폰을 하며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은 아침부터 지친 뇌를 지니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위 영화의 예처럼 하면 됩니다. 아침마다 자기가 누구인지 되새기면 됩니다.
아침에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머리’로 인식하면 그것이 믿음의 방울이 되어 ‘가슴’에 담깁니다. 이는 마치 발효주를 끓여 증류주로 만드는 과정과 같습니다. 이것이 기도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머리는 살아가며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습니다. 머리로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믿습니다. 성체 앞에 앉아 머리로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생각하면 그것이 증류되어 가슴에 담깁니다. 도수가 낮은 발효주는 많이 마셔야 취하지만, 도수가 높은 증류주는 작은 양만 마시면 금방 취합니다.
따라서 아침에 기도하여 믿음을 가슴에 저장하여 둔 사람은 잠깐만 꺼내서 마셔도 금방 다시 깨어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냥 순간순간 주님 현존을 기억해내려는 사람은 지친 뇌를 가지고 결국 실패한 하루를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 ‘첫 키스만 50번째’도 이와 비슷한 내용입니다. 아침마다 기억이 사라지는 이 여자는 자기에게 청원하는 사람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아침마다 의심해야 하고 아기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자친구는 지금까지의 모든 기억을 짧게나마 녹화해서 매일 아침 1시간만 보면 지금까지의 모든 기억이 되살아나게 합니다.
결국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게 둘은 결혼하여 아기를 낳고 살아갑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의 기도’가 있습니다. 저는 아침마다 주님의 기도를 한 시간씩 하며 제가 누구인지 되새깁니다. 살아가면서 가끔 이 믿음을 꺼내서 마십니다. 그러면 하루 동안 거의 주님의 현존을 잊지 않습니다. 물론 증류주도 마시면 말라버립니다. 그러니까 매일 아침 기도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잠들기 전에’는 내가 누구인지 찾기 위해 나 자신이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이고, ‘첫 키스만 50번째’는 애인의 기억을 되살려주기 위해 남자가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주님께서도 아침마다 깨어 있게 하시기 위해 당신 현존을 준비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합니다. 항상 깨어 있는 종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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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지난 10월 1일에 퀸즈성당에서 본당 설립 50주년 기념 음악회가 있었습니다. 어린이, 청소년, 청년, 성인 성가대에서 음악회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날 제게 가장 큰 감동을 준 것은 ‘고향의 봄과 아리랑’이었습니다. 고향의 봄과 아리랑은 멀리 타국에서 들으니 더욱 가슴이 찡하였습니다. 청소년 오케스트라에서 ‘아리랑 랩소디’를 연주하였는데 그동안 들었던 아리랑과는 달리 역동적이었고, 경쾌하였습니다. 청소년들은 같은 아리랑이지만 한과 우수에 젖은 아리랑이 아니라 한류의 힘과 발랄함을 표현하였습니다. 성인 성가대는 ‘나는 천주교인이요와 아베 마리아’를 들려주었습니다. 웅장하고, 장엄한 노래도 좋았지만 더욱 좋았던 것은 제가 성가대원들을 잘 아는 것이었습니다. 유명한 합창단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잘 아는 분들이기에 감동이 더 컸습니다. 그분들은 미국 뉴욕으로 이민 와서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세탁소를 하는 분, 차량 정비소를 하는 분, 음식점을 하는 분,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분, 핸드폰 대리점을 하는 분, 통증 병원을 하는 분, 변호사를 하는 분, 학생을 가르치는 분도 있었지만 모두가 성가를 통해서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아쉽게도 음악회를 다 감상하지 못하고 저는 한국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한국 성지순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뉴욕에서 새벽 0시 50분 비행기를 탔고, 시차가 있기에 다음날 새벽 5시 30분에 인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인천에서 다시 김포공항으로 갔고, 거기서 제주도로가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뉴욕, 인천, 김포, 제주로 가는 여정이었고, 길은 멀었지만 4년 만에 가는 한국이라 기분이 좋았습니다. 제주의 첫날 황사평 순교자 묘지와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순교자 기념관을 순례하였습니다. 황사평 순교자 묘지에는 무명 순교자 27명과 4명의 유명 순교자가 모셔져 있었습니다. 제게 감동은 준 것은 순교자의 무덤도 있지만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복자의 이야기였습니다. 김기량은 제주도 첫 번째 신자이고, 제주도의 첫 번째 순교자이고, 제주도의 첫 번째 복자입니다. 그는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다가 2번이나 난파되었습니다. 한번은 40일에 걸쳐 홍콩까지 갔습니다. 죽음 직전까지 갔던 그는 영국의 상선에 의해 발견되었고, 홍콩으로 인도되었습니다. 그곳에서 한국의 신학생을 만나 교리를 배우고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세례명은 행운의 사나이라는 의미의 펠릭스와 제주도의 사도가 되라는 의미의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제주도의 사도가 된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는 가족들과 이웃들을 선교하여 세례를 받게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다시 난파가 되었는데 이번에는 일본 나가사키까지 흘러갔습니다. 그곳에서도 교회의 도움을 받아 다시 제주도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김기량의 삶에 2번의 난파가 있었지만 모두 하느님의 도움으로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는 제주도의 교우들이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육지로 나갔다가 이번에는 포졸들에게 잡혔습니다. 포졸들은 배교하면 살려준다고 하였지만 그는 기꺼이 순교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삶에 3번째 난파가 있었습니다. 그는 포졸들에게 죽으면 다시 부활 할 것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포졸들은 그를 곤장으로 때려서 죽은 것 같았는데 보통은 그 정도 맞으면 죽었습니다. 그런데 김기량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포졸들은 김기량이 말한 대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포졸들은 곤장을 때리는 대신에 목을 매달아 죽였고, 다시 살아나지 못하도록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복자는 3번의 난파 끝에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성지 안내를 해 주시는 형제님은 교구장이셨던 김창렬 바오로 주교님께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내가 바티칸 교황청에 가서 교황님께 자랑했지. 한국에서 개신교회 신자보다 천주교회 신자가 많은 곳은 제주교구 밖에 없습니다.” 형제님은 주교님께 그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나는데 천주교 신자가 개신교 신자보다 많다고 합니다. 이렇게 제주도에 천주교 신자들이 많을 수 있었던 것은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와 같은 순교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제주도에 천주교 신자들이 많을 수 있었던 것은 제주도 사람보다 제주도를 더욱 사랑하였던 임피제 신부님 같은 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교와 열정으로 깨어 있는 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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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2,35-38: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행복하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35절) 이는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다. 베드로 사도도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1베드 5,8)라 하였다. 주님의 뜻에 대해 깨어 있는 것이다. 절제로 허리띠를 매고 선행으로 등불을 밝히는 것이 언제 오실지 알지 못하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가 꼭 해야 하는 일이다. 이것은 정의와 연관된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는지 일러 주신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36절) 주님께서 오시면 사랑의 명령에 순종한 사람들에게 합당한 상을 주실 것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우리의 등불을 꺼뜨리지 말고 허리에 띠를 동이고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마태 24,42)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38절) 주님께서 어느 때 오시든지 허리를 동이고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그분께서 오셔서 그렇게 사는 우리를 보신다면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37절) 그분은 우리가 수고한 만큼 풍성하게 갚아주실 것이다.
오늘 말씀은 죽음에 대한 대비를 잘하라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으므로 주님께서 우리의 곁을 그냥 지나치시지 않도록 우리가 깨어 있어 그분을 알아보고 맞이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주님은 나의 이웃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사랑받으시기를 원하신다. 이웃을 통해서 그분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대하여 깨어 있지 못한 것이다. 이웃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히 하느님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무엇인가? 주님께서 예기치 않을 때 오실 줄 알고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며 항상 깨어 있는 것이다. 참으로 행복하다는 것은 깨어 있는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언제나 오시는 그분을 만나는 것이며 이를 통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언제나 주님을 만나 뵙고 사랑해드릴 수 있는 삶이 바로 종말론적 삶이며, 이 삶을 통하여 우리는 언제나 주님 앞에 올바로 서 있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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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재림>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5-38)
10월 24일의 복음 말씀인 루카복음 12장 35절-38절, '깨어있어라.'의 내용과 루카복음 17장 7절-10절, '겸손하게 섬겨라.'의 내용을 비교해보면 비슷하면서도 너무나도 대조적인 장면입니다. 12장 35절-38절에서는 종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고, 돌아온 주인이 종을 식탁에 앉히고 시중을 들고 있는데, 17장 7절-10절에서는 주인이 종을 기다리고 있고, 돌아온 종이 주인을 위해서 식탁을 차리고 시중을 들고 있습니다.
두 내용 모두 '주인'은 '주님'을 뜻하고, '종'은 '신앙인들'을 뜻합니다. 17장 7절-10절의 내용은 현실 세계의 일상적인 모습을 묘사하면서 종의 자세를 강조하는 내용이고, 12장 35절-38절의 내용은 주님의 재림 때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종이 얻게 될 행복을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로서는 두 내용을 합해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종'은 주인이 밖에 있든 집에 있든, 언제 어떤 상황이든 주인을 위해서 시중을 들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고,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밖에서 힘들게 일하고 돌아왔더라도, 또는 밖에 있는 주인이 돌아오기를 밤새도록 기다렸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종에게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주인(주님)은 그렇게 충실하게 일하는 종을 주인의 자리에 앉히고 종이 주인에게 하듯이 시중을 들게 됩니다. 밖에서 종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왔든지, 집에서 종을 기다렸든지 간에 주인은 충성스러운 종에게 최상의 은혜를 베푼다는 것입니다. (17장 9절의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라는 말은, 주인이 고마워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종의 입장에서 주인에게 고마워하라고 요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 내용에서 강조하는 것은 주인의 태도가 아니라 종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종의 모습으로 우리를 주인처럼 섬기는 분입니다. 최후의 만찬 때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주인을 섬기는 종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모습입니다. '주인'과 '종'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지만 주님과 신앙인의 관계는 보통 생각하는 주종관계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벗의 관계입니다. (연인 사이라고 표현해도 될 것입니다.)
뜻을 생각하면,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종'은 사실상 '엄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이'입니다. 어린 시절에 혼자서 집을 지키면서 엄마가 돌아오기를 목 빠지게 기다려본 사람이라면 그 심정을 알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은 사랑하는 분이 하루라도 빨리 오시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몽룡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성춘향의 심정?) 그래서 신앙인들이 종말과 재림을 기다리는 것은 잘못한 일을 심판받기 위해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종말 전의 무서운 재앙들을 피하고 싶어 하면서, 또는 지상에서의 수명이 끝나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그 시기가 조금이라도 더 연기되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기다리는 것도 아닙니다. 죄인으로서는 재림하신 주님의 심판이 무서운 일로만 생각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분을 기다리는 처지에서는 온갖 억울하고 서러운 일들을 주님께서 바로잡아주시고 눈물을 닦아주시는 일이 바로 '종말의 심판'입니다. 그것 때문에라도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요한 묵시록을 마치면서 묵시록 저자는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이라고 외칩니다.(묵시 22,20) 바오로 사도도 "마라나 타!"라고 외쳤습니다.(1코린 16,22) '마라나타'는 '저희의 주님, 오십시오.'라는 뜻인데, 주님께서 하루라도 빨리 오시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심정을 표현한 말입니다. 종말과 재림과 심판을 무섭고 고통스러운 일로만 생각한다면, 재림하시는 주님을 무서운 분으로만 생각한다면, '마라나타'를 외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에 지금 그렇게 무서워하고 있다면, 자기가 왜 그분을 무서워하고 그날을 무서워하는지를 먼저 반성해야 합니다. 뭔가 칭찬받을 일을 해서 엄마의 칭찬을 받으려고 기다리는 아이와 뭔가 잘못한 일을 해서 엄마에게 혼날 것을 걱정하고 있는 아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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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오늘도 이어집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준비’와 ‘깨어 있음’입니다. 이야기 상황에 대한 묘사나 제자들의 질문과 같은 도입 문단 없이 예수님의 가르침이 바로 시작됩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가르침을 시작하는 이 말씀은 ‘띠’와 ‘등불’로 오늘 복음의 주제를 요약하여 전달하고 있습니다. 먼저 ‘허리에 띠를 매다.’는 표현은 신속하게 출발할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하라는 의미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겉옷을 입었고, 편안한 활동을 위해서 허리띠로 길이를 조절하였습니다. 두 번째 은유적 표현인 ‘등불을 켜다.’는 ‘깨어 있음’을 의미합니다.(탈출 27,20; 레위 24,2도 참조)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두 은유적 표현을 사용하시어, 제자들에게 준비하고 깨어 있으라고 권고하십니다. 제자들도 주인이 자리를 비웠을 때 임무를 수행하여야 하는 종들과 같은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자신이 돌아왔을 때 종들이 깨어 있는 것을 발견하면 그들에게 상을 내릴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깨어 있는 종의 모습은 모든 이가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종의 비유로써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곧 우리 모두 깨어 있는 종이 되도록 요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에 깨어 있는 종들은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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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과 그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종이 주인에게 문을 열어 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종이 이렇듯 당연한 일을 하였을 뿐인데, 주인이 그 당연한 일을 한 종들을 위하여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힌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듭니다.
종과 주인의 역할이 바뀐 듯합니다. 세상에 어떤 주인이 이러한 변화를 자처할까요? 어떤 주인이 자신의 종을 위하여 시중을 들까요?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이 비유는, 우리가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예수님께서 주인이시지만 기꺼이 종이 되어 주신다는 복음의 핵심을 전합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깨어서 성실히 주인을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다만 잠을 자지 말라는 뜻은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깨어있음’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먼저,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주인을 기다리는 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인이 자리를 비웠다고 해서 종이 주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다음으로, 주인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인은 반드시 돌아옵니다. 주인이 오지 않으리라는 생각도, 상상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늦더라도 주인은 반드시 돌아옵니다. 주인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는다면, 종은 주인이 들어올 문을 바라보지 않고, 등불을 끄고 잠을 자거나 술을 마실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한 종이 되기를 바라지, 불행한 종이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행복한 종이 되고자 깨어 노력하는 사람과 행복한 종이 되기를 바라면서도 깊은 잠에 빠지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돌아올 주인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종입니다. 행복한 종이 되시렵니까? 아니면 불행한 종이 되시렵니까? 선택은 온전히 우리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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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분도회 왜관수도원 이성근 사바 신부님]
오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의 모습을 통하여 종말에 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깨어 기다리다 주인을 맞이하는 종은 상급을 받으리라는 내용입니다. 물론 그 이면에는 불충한 종은 벌을 받으리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지만 종말의 근본적인 내용은 만남입니다.
지금은 거울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이지만 그때는 얼굴을 맞대고 보듯이 모든 것이 분명하리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에게 그때는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가장 바라고 느낄 수 있는 최고의 기쁨과 행복이 하느님을 만나는 일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종말은 고통과 혼란이 아니라 기쁨과 행복의 완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기다리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런 기쁨을 기다리며 그 희망으로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종이 주인을 기다리는 것은 겁이 나거나 불안해서가 아닙니다. 주인이 돌아오면 자신을 축복해 주리라는 기쁨에 차서 취하는 자세입니다. 주인이 종의 식사 시중을 들어 줄 것이라는 말씀에서, 우리가 머리로 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하느님의 커다란 신비와 축복이 드러납니다. 이제 종은 더는 종이 아니라 벗이 된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내일 복음에서 듣게 될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복음 12장 40절)라는 주님의 권고는, 어떤 위협이나 협박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다가올 무한한 행복에 마음을 활짝 열고 희망 속에 살기를 바라시는 정감 가득한 말씀이며, 우리에게 당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나누어 주시고자 하는 사랑 가득한 마음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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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류지인 야고보 신부님]
<행복한 기다림>
간혹 외부 소임이 길어지는 날이면 대문을 닫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남기곤 합니다. 어느 날 늦은 귀원 시간을 알리고 해질녘에 도착하였는데 수도원 대문은 이미 굳게 잠겨 있었습니다. 고단했던 하루 파견을 마무리하는 마음에 한 줄기 싸늘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마땅히 돌아와야 할 보금자리에 반기는 사람 하나 없는 쓸쓸한 기분이랄까요?
이튿날 서운한 마음에 해당 수사님께 문을 닫아 걸은 이유를 따져 물었습니다. 그러자 깜짝 놀라면서 당신이 문을 열어 놓고 늦게까지 안내실을 지키며 기다렸던 시간이며, 문지기 역할을 잊었을 것으로 판단한 다른 수사님이 대신 닫은 대문을 재차 열어놓았던 사정과 불 켜진 방을 보고 확신하여 다시 문을 잠그러 내려갔던 수고로움까지 상세하게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담당 수사님의 세심한 배려에 비해 한참은 모자란 저의 가난한 사랑이 여실히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주인과 종으로 대비되는 성경 속 기다림의 결과는 양쪽 모두의 행복을 향하고 있습니다. 종이 주인을 기다리는 지당한 희생은 주인이 종을 자신과 같은 식탁에 초대하면서 행복으로 바뀝니다.
기다림의 지루함과 고단함을 설렘과 간절함으로 바꾸는 기적 같은 변화는 바로 상대를 향한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사랑을 확인한 이상 그들은 이제 어떠한 기다림도 행복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생활성서 2023년 10월호 '소금항아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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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행복하여라, 깨어있는 종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1베드 5,8-9)라고 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누구나 자기의 몫이 있는데 그 몫에 충실하지 않으면 생각지도 않은 어둠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이만하면 됐다’ 는 안일함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이 다하여 하느님 안에 편히 쉬기까지 최선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방심이나 어중간은 없습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깨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깨어 있는 사람은 미래를 준비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축복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인을 충실히 기다리는 종에게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납니다. 종이 주인처럼 대접받으며 주인이 그의 종처럼 처신합니다. 결국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축복이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그러면서도 내일 당장 떠날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음이 행복입니다.
가끔 예고 없는 가정방문을 합니다. “사람의 아들도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마태 24,44)는 예수님의 말씀을 핑계로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행복해하는 분도 있지만 당황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집 정리를 잘해놓으신 분은 더없이 기뻐했고, 그렇지 못한 분은 신부에게 자기 속을 다 보인 것 같아서 무안해했습니다. 그러나 소위‘열심하다’는 분의 가정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면 제가 오히려 미안해했습니다.
물론 집 정리가 잘 되었다고 마음도 꼭 맑은 것은 아닙니다만 신앙생활을 충실히 하는 사람은 그만큼 가족 구성원 누구에게도 짐을 지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늘 준비된 모습이 가정 안에 화목함과 평화를 이루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리고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모습에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사실 집 정리를 못 해서 부끄러운 건 그래도 다행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우리의 마음이 부끄럽지 않아야 합니다. 따라서 잠시라도 악마에게 틈을 주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마음의 준비와 영혼의 깨어있음은 하느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것입니다. 깨어있어서 행복한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벌어지는 일들은 종들 각자의 행동에 따라 결정됩니다. 항상 깨어 안팎으로 정리 정돈을 하며 주인을 잘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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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35년째 보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분명히 매일 보고 있고, 처음부터 끝까지 1년에 한 번씩은 다 봅니다. 그러나 멈추지 않고 지금도 계속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 책은 어떤 책일까요?
바로 성무일도입니다. 신학교 들어가면서부터 바치기 시작했던 성무일도, 그 책을 한 번도 바꾸지 않고 여전히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함께해서 많이 낡았고 성무일도 안에는 많은 밑줄이 그어 있지만, 이 성무일도를 오래되었다고 버릴 수가 없습니다. 사실 세상의 책은 몇 번 보고 나면(몇 번 계속 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도 합니다) 지겨워서 펼치지도 않게 되지요. 하지만 성무일도는 다릅니다.
성경책도 그렇습니다. 지금 본당에서 매주 금요일에 성경 강의를 하고 있기에 계속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신부님은 성경 많이 읽었고 공부도 많이 하셨으니까 강의하는데 그렇게 어렵지 않지요?”라고 이야기하십니다. 분명 많이 읽었고 또 공부도 계속하지만, 그럴수록 모르는 것투성이입니다. 마치 처음 보는 책인 것처럼 늘 새롭게 다가옵니다.
주님의 말씀은 과거 일회적으로 하신 말씀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울려 퍼지는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지금 우리의 삶에 비추어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을 단순한 옛날이야기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 보입니다. 지루하고 시대에 맞지 않는 주님의 말씀이 절대로 아닙니다. 따라서 계속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분명 당시에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그렇게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서 ‘알람’ 기능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것이라 말씀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 말씀은 지금의 우리에게 생생하게 울려 퍼지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언제 오실지 모를 예수님을 끊임없이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모습처럼,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을 갖추고서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으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탈출 때의 모습을 상기시켜 줍니다. 구원이 닥칠 때 곧바로 그분을 따라나서려는 것이었습니다. 허리에 띠를 매는 것은 깨어서 잘 준비해야 한다는 의미 말고도 구원의 때가 가까이 다가왔음도 뜻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기뻐합니다.
오실 주님을 잘 맞이할 준비를 지금 하고 있나요? 주님의 말씀은 과거의 일회적인 말씀이 전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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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편히 오세요>
루카 12,35-38 (깨어 있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편히 오세요>
설레는 마음으로
내게 오시는
당신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언제든
원하시는 때에
편히 오세요
어디든
원하시는 곳에
편히 오세요
기쁨과 희망으로
내게 오시는
당신께
기쁨과 희망이
되어드리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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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불행으로부터의 회개>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 깨어 있는 사람.”
저는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며 어쩌면 오늘 주제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회개가 묵상이 되었습니다.
불행한 사람이란 불행에 주저앉은 사람이고 행복한 사람이란 불행에서 회개한 사람이라고 묵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행복에 깨어있어야 하고 반대로 불행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내가 왜 불행해야 해? 나는 무조건 행복할 거야! 불행하면 나만 손해잖아? 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도 내가 불행하길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께서 시중드신다는 것도 고작 밥상에서 시중드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행복 시중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시중드시는 것이 고작 밥상에서뿐이겠습니까? 엄마만 해도 자식에게 배나 부르라고 밥해주지 않고 행복하라고 해주지 않습니까?
어제도 저는 예약 밥상을 했고 이 밥상을 차리기 위해 지난주 시골에 갔을 때부터 재료 준비하고 정성을 다해 밥상을 차렸는데 만약 어제 드신 분들이 그 정성과 사랑은 느끼지 못하고 그저 음식이 맛이 있네, 없네, 하며 드셨다면 저는 매우 섭섭했을 것이고, 드신 분들은 사랑을 느끼지 못한 것이고 행복에 깨어있지 못한 것이지요.
오늘 독서에 비추어 복음을 읽을 때 우리는 은총에도 깨어있어야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가 이렇게 얘기하기 때문입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불행한 사람은 죄에 머물고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죄에 짓눌려 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복하려면 죄의식에서 벗어나 은총을 느껴야 합니다.
나의 죄로 향했던 시선을 하느님 은총으로 돌리는 것, 너의 죄로 향했던 시선도 하느님 사랑으로 돌리는 것, 내 죄가 큰 것만큼 하느님 용서가 큰 것을 느끼는 것,이것이 회개이고 은총에 깨어있는 행복입니다.
은총에 깨어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죄에 머물고 죄에 짓눌려있는 불쌍하고 불행한 내가 아닌지 돌아보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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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깨어 있어라>
- “행복하여라, 깨어 있는 종들! -
“깨어 있어라.”
우리 문도미니코 수사님의 종신서원 상본 성구이기도 합니다. 요셉 수도원 성전 뒷면 양쪽에도 깨어 있음을 상징하는 환히 빛나는 눈을 지닌 커다란 올빼미 그림이 걸려 있고, 제의실 방에도, 제 집무실에도 늘 초롱초롱 빛나는 눈을 지닌, 깨어 있음을 상징하는 필란드 흰 올빼미 도자기 작품이 놓여 있습니다.
영성생활의 궁극목표가 깨어 있음입니다. 끊임없는 기도가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깨어 있는 삶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평생 끊임없이 계속되는 공동체의 전례기도도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는 공동체의 일치요 깨어 있는 삶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도입니다.
깨어 있음은 사랑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쁨입니다.
깨어 있음은 은총입니다.
깨어 있음은 순수입니다.
깨어 있음은 침묵입니다.
깨어 있음은 겸손입니다.
깨어 있음의 평화입니다.
깨어 있음의 일치입니다.
깨어 있음은 행복입니다.
깨어 있음은 훈련입니다.
깨어 있음의 은혜가 끝이 없습니다. 막연한 깨어 있음이 아니라 주님께 희망을 두고 주님을 기다릴 때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깨어 기다림의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한두 번의 깨어 있음이 아니라 늘 한결같이 깨어 있는 삶입니다. 깨어 살 때 맑고 향기로운 삶입니다. 언제 어디서 주님이 오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은 어떤 분입니까? 제가 특히 좋아하는 전례기도서 3시경 찬미가 2절에서 소개되는 주님입니다.
“진리여 사랑이여 목적이시여, 우리의 다함 없는 행복이시여, 주님을 사랑하고 믿고 바라며, 주님께 도달하게 하여주소서.”
주님을 기다리기에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깨어 기다릴 때 오늘 지금 여기서 만나는 살아 계신 주님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인을 주님으로 바꾸면 실감 나게 이해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믿는 모든 이들이 주님을 기다리며 깨어 있을 것을 촉구하는 주님의 명령이요 짧지만 강렬합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흡사 영혼의 등불을 환히 켜 들고 깨어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이어 계속되는 주님의 당부말씀입니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행복하여라, 깨어 있는 종들!”
여기 또 행복 선언이 나옵니다. 주님을 기다리며 깨어 있는 이들이 바로 참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여기 나오는 주님은 섬기러 오신 겸손한 분임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우리가 깨어 기다리는 분은 바로 우리를 시중들러 오신 겸손한 주님이십니다. 참으로 평상시 깨어 주님을, 형제들을, 겸손히 섬기며 오실 주님을 깨어 준비하며, 기다리며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를 너무 잘 아시며 오실 때 이런 우리를 식탁에 앉히신 다음 시중을 드신다고 합니다. 얼마나 따뜻하고 위로가 되는 장면인지요! 바로 우리가 오매불망, 순수한 마음으로 한결같이 깨어 기다리는 분은 이런 겸손하신 주님이십니다. 겸손하신 주님은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의 아담과 그리스도의 비교를 통해 분명히 드러납니다. 한 사람 아담과 한 사람 그리스도와의 비교입니다. 참으로 한 사람의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지요!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분은 바로 이런 그리스도입니다. 아담의 실패를 순종으로 일거에 만회하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시는,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주님입니다. 이런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분발하여 깨어 있게 합니다. 언젠가 오시는 주님이 아니라 날마다 미사를 통해, 기도를 통해, 말씀을 통해. 형제들과 만남을 통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늘 깨어 기다리는 삶이 절대적입니다. 이래서 깨어 있음의 훈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요즘 널리 시행되고 있는 향심기도, 비움기도, 묵상기도, 관상기도의 수행이 목표하는 바로 이런 깨어 있는 삶입니다. 저 역시 늘 호흡에 맞춰 성구를 되뇌며 오전, 오후 30분씩, 명상기도를 수련해오기 30년이 넘었습니다. 참으로 깨어 있음의 훈련에 좋은 기도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가 평생 바치는 공동전례 미사와 시편 성무일도 역시 끊임없는 회개와 깨어 있음을 위한 참 좋은 기도입니다.
“깨어 있어라!”
늘 깨어 살 때 참 행복입니다. 깨어 살 때 늘 영원한 오늘, 영원한 현재를 삽니다. 오늘이 내일입니다. 깨어 지낼 날은 오늘입니다. 오늘 깨어 잘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이니 걱정은 저절로 내려놓게 됩니다. 일일일생 하루로, 일 년 사계로, 우리 인생 여정을 압축하면 현재의 시점이 나오고 더욱 분발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 깨어 환상이나 거품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됩니다.
제 경우를 보면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로 압축하면 시점時點은 오후 4:30분, 일 년 사계一年四季로 압축하면 시점時點은 초겨울, 이런 확인이 죽음도 머지않았다는 자각과 더불어 깨어 있는 삶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이 또한 깨어 살기 위한 참 좋은 실제적 수행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깨어 준비하며 주님을 기다리며 살도록 용기와 힘을 주십니다. 다음과 같이 깨어 기다리다 주님을 맞이하는 행복한 종처럼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12,3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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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12,37)
'순종과 회개!'
오늘 복음(루카 12,35-38)은 '깨어 있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루카 12,35-36)
유다인들은 혼인 잔치를 밤에 거행합니다. 그 때문에 손님들이 잔치를 끝내고 돌아가는 시간은 한밤중이 됩니다. 그래서 종들은 문을 열어주기 위하여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잠을 자지 않고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 안에서 '주인'은 '그리스도이신 주님'이십니다. '종들'은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들'이고, '문을 두드리는 주인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실 때, 예수님께서 오르시는 하늘을 유심히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합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고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그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11)
'그리스도의 재림'은 '모든 것의 종말'을 의미하며, '최후의 심판 시간'을 의미입니다. 아무도 알 수 없는 이 엄청난 시간 앞에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깨어 있음'입니다. 예기치 않은 시간에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늘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깨어 있음과 준비'는 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고, '불순종에서 순종으로 돌아오는 회개'입니다.
오늘 독서(로마 5,12-21)는 '한 사람의 순종'과 '한 사람의 불순종'을 전하고 있는데, '아담의 불순종'으로 죄와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우리가 살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순종하는 사람, 회개하는 사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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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e6kJ2pUY9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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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 12, 37)
행복의 출발점은
주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더없는 행복
더없는 소중한
관계입니다.
행복은
행복한
깨어 있음에서
비로소
시작됩니다.
깨어 있음은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행복은
깨어 있음의
올바른
실천입니다.
깨어 있는
나눔
깨어 있는
자아의
비움입니다.
깨어 있음은
마음에 주님을
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깨어 있음의
은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깨어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참된 행복입니다.
사랑하기에
깨어 있고
사랑하기에
행복한 것입니다.
예수님 없는
행복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행복을
가져다주는
행복의
원천이시기
때문입니다.
행복을
이끌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는
마음으로
일상을
내맡기는 것이
행복입니다.
내어 맡기는
오늘이 가장
행복한 날입니다.
내어 맡김이
깨어 있음이요
깨어 있음이
가장 좋으신
주님과 함께 하는
가장 큰
행복입니다.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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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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