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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30일(목)
* 시작 기도
주님...
이사야 선지자 당시 앗수르의 침략 야욕으로 인하여 남유다는 좌불안석입니다.
그들은 틈만 나면 그들을 상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애굽을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 것을 천명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애굽은 신이 아니라 연약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소유한 말의 수효도 의지하지 말 것은 주께서 손을 펴시면 돕는 자나 도움을 받는 자가 다 엎드러져 멸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사 31:1-3).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그 엄한 명령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습니다.
오늘 나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주를 믿는다고 말은 청산유수처럼 잘도 하지만 옛 사람은 끊임없이 애굽으로 달려가는 것을 봅니다.
마치 애굽이 내가 바라보고 달려가야 할 목표지점처럼 여기는 것 같습니다.
애굽은 세상인 것을 알면서도 이를 버리지 못하는 나를 주님의 공의로 심판하소서.
애굽으로 향하는 나의 마음을 다스려주옵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오니 나를 불쌍히 여기사 긍휼을 베푸소서.
이 하루도 주님과 연합하여 동행하기 원합니다.
나를 장악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왕상 22:29-40
제목 : 무심코 활을 당겨 왕의 갑옷 솔기를 맞힌지라.
29 이스라엘의 왕과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니라.
30 이스라엘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나는 변장하고 전쟁터로 들어가려 하노니 당신은 왕복을 입으소서 하고 이스라엘의 왕이 변장하고 전쟁터로 들어가니라.
31 아람 왕이 그의 병거의 지휘관 32명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작은 자나 큰 자와 더불어 싸우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왕과 싸우라 한지라.
32 병거의 지휘관들이 여호사밧을 보고 그들이 이르되 이가 틀림없이 이스라엘의 왕이라 하고 돌이켜 그와 싸우려 한즉 여호사밧이 소리를 지르는지라.
33 병거의 지휘관들이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아님을 보고 쫓기를 그치고 돌이켰더라.
34 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겨 이스라엘 왕의 갑옷 골기를 맞힌지라. 왕이 그 병거 모는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하였으니 네 손을 돌려 내가 전쟁터에서 나가게 하라 하였으나
35 이 날에 전쟁이 맹렬하였으므로 왕이 병거 가운데에 붙들려 서서 아람 사람을 막다가 저녁에 이르러 죽었는데 상처의 피가 흘러 병거 바닥에 고였더라.
36 왕이 이미 죽으매 그의 시체를 메어 사마리아에 이르러 왕을 사마리아에 장사하니라.
38 그 병거를 사마리아 못에서 씻으매 개들이 그의 피를 핥았으니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거기는 창기들이 목욕하는 곳이었더라.
39 아합의 남은 행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건축한 상아궁과 그가 건축한 모든 성읍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40 아합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 나의 묵상
크로노스의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마치 사람이 주체가 되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카이로스 즉 영원에 계신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감독하시는 일이 크로노스의 스크린에 투영되는 것이다.
아합의 국정 선지자 400명은 왕과 백성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지지하는 자들로서 무조건 왕의 의견에 동조하는 무리들이다.
그런데 이 일은 천상 어전회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거짓말 하는 영을 왕의 선지자 즉 국정 선지자들의 입에 넣게 하셨고 결국 그들은 그분의 계획대로 말하게 된 것이다.
(왕상 22:23)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
결국 시드기야를 비롯한 모든 국정 선지자들은 거짓말하는 영에 의해서 아합에게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서 전쟁을 하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전쟁터에 가서 아람 군대의 한 병사가 무심코 쏜 화살에 맞아 죽게 된 것이다.
그것도 갑옷을 입었지만 하필 화살이 갑옷의 틈새를 뚫고 들어가서 맞았다.
사실 전쟁터에서 위험한 순간은 아합보다도 그와 함께한 여호사밧에게 먼저 찾아 왔다.
아람의 전차 지휘관 32명이 이스라엘 왕을 찾아 싸우려고 하다가 왕복을 입고 있는 여호사밧을 발견하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자기는 이스라엘 왕이 아니라고 소리쳤다.
그냥 이스라엘 왕이 아니라고 소리친 것만으로는 지휘관들이 확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아님을 보고 쫓기를 그치고 돌아갔다고 증거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해답은 병행구절인 역대하 18장에 나온다.
(대하 18:31) 병거의 지휘관들이 여호사밧을 보고 이르되 이가 이스라엘 왕이라 하고 돌아서서 그와 싸우려 한즉 여호사밧이 소리를 지르매 여호와께서 그를 도우시며 하나님이 그들을 감동시키사 그를 떠나가게 하신지라.
여호사밧이 단지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지휘관들이 떠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호사밧을 도우셨고, 또한 전차 지휘관들을 감동시키셔서 그가 이스라엘 왕이 아님을 알게 하시므로 떠나게 된 것이다.
오늘 이 본문을 보면서 두 사람의 운명을 본다.
아합은 아람의 한 병사가 무심코 쏜 화살에 맞았는데 그것도 갑옷의 틈새를 뚫고 들어가 맞아서 죽었다.
그런데 여호사밧은 아합보다도 더 위험한 상황에 처했음에도 하나님의 도우심과 적군들을 감동케 하심으로 위경에서 건져내셨다.
사람의 목숨은 내가 지킨다고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셔야만 지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것은 언약을 유지하기 위하여 조건의 규정, 즉 계명을 지키는 자를 사랑하시고 돌보신다.
(출 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일방적으로 출애굽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시내산 언약을 맺으신다.
그 언약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계명을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출 20-23장까지의 계명이다.
이 계명을 지켜 쉐마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고 하나님과의 언약이 유지되어 돌보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언약 안에 있지 않으므로 해서 하나님은 그들을 돌보지 않으셨다.
(히 8:9)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계명을 지켜 언약 안에 머무르는 것은 자신의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최고의 방법은 사랑이다.
사랑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다.
하나님은 이것을 원하신다.
이와 같이 아합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의 계명을 지킬 리 만무하였다.
그래서 그와의 언약이 깨지고 결국 그는 버림받은 자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머무는 자였다.
아람과의 전쟁에서 그는 군대로 싸우려 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먼저 의지하였다.
아람의 큰 무리가 공격해 오니까 여호사밧도 두려웠다.
하지만 그는 두려워서 그냥 떨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로 자기의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모든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때 모든 백성들도 함께 하나님께 간구한 것이다.
여호사밧은 이렇게 기도한다.
(대하 20:12)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이때 하나님은 야하시엘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대하 20:15) 야하시엘이 이르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여호사밧은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의뢰하는 자였다.
그래서 성경은 그를 평가하기를 대하 20:32절에서 ‘여호사밧이 그의 아버지 아사의 길로 행하여 돌이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이런 여호사밧을 그가 위경에 처했을 때 돌보시고 지켜주셨다.
심지어 하나님은 그를 죽이려는 적군들의 마음까지 감동시키셔서 그들을 떠나게 하시고 여호사밧을 지키신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셨다.
그 구원을 위하여 우리는 무엇 하나 얹은 것이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걸어버리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를 지시는 주님은 당신의 죽으심으로 우리와 새 언약을 맺으셨다.
그래서 우리는 새 언약 백성이다.
언약 백성이라는 의미는 우리 역시 이 언약을 유지하기 위하여 지켜야 할 조건의 규정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지켜야 할 조건의 규정, 즉 계명은 무엇인가?
이제 우리는 구약의 유대인들처럼 율법을 지켜서 언약 안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은 다른 것이 아니라 ‘파레시아’이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아들을 힘입어 담대하게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아버지께 나아가는 자인데, 무엇으로 나아갈 것인가?
그것은 무엇을 지켜서가 아니라 오직 아들을 힘입어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나는 할 수 없으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곧 파레시아요, 또한 언약을 유지하는 조건의 규정이다.
히브리서 10:32절 이하에 보면 아들의 생명을 받은 후에 여러 가지 고난을 받는다.
비방과 환난으로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심지어 재산을 몰수당하는 상황이 와서 모든 것을 다 빼앗길지라도 오직 한 가지는 빼앗기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파레시아, 즉 담대함이다.
(히 10: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뒤로 물러나지 말고 인내해야 하는 이유다.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의 은혜를 받고 언약 백성으로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주어진 계명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자였다.
중요한 것은 언약 백성이라는 사실이 그저 막연하게 다가왔을 뿐만 아니라 언약을 위하여 지켜야 하는 조건의 규정이 무엇인지, 아니 그런 규정이 있는 줄도 몰랐다.
모태신앙으로 살아왔고 또한 신앙인으로 세례도 받았으며 나름 은혜도 받고 열심도 있어서 목사가 되었지만, 나는 겉만 목사였지, 실상은 양을 잡아먹는 삯군이었다.
목사가 언약 안에 사는 방법을 모르니 나를 통하여 목양을 받는 양들에게 썩을 양식만 주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신선하고 영양가 있는 양식을 주어야 하는데 썩어 냄새나는 죽을 양식을 주었고 시원한 생수를 주어야 하는데 모래알만 씹고 결국 그것에 질식하여 죽게 만든 것이다.
이런 내가 삯군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나 혼자의 영혼만 죽이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을 끌어 모아서 그들까지 죽이는 자였다.
예수님의 호된 책망을 받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과 똑같은 자였던 것이다.
왕과 백성들이 듣기 원하는 소리를 들려주고 그 말을 확증해 주는 아합 당시의 국정 선지자가 바로 나였다.
그들의 말을 들은 아합은 결국 죽고 말았다.
그동안 생명 없이 행하면서 전했던 썩을 양식을 먹은 이들에게 나는 부끄럽고 죄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그런 내게 주님은 복음으로 찾아 오셨다.
그리고 내게 아들의 생명을 주셔서 만들어진 생명에서 태어난 생명이 되게 하셨다.
내 자신에게 있는 고질적인 죄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던 내게 죄를 알게 하시고 십자가의 은혜로 해결해 주셨다.
내가 받은 십자가와 무덤에 장사지냄 그리고 부활의 복음을 이제는 썩을 양식이 아니라 생명의 양식으로 내게 주신 양들에게 전한다.
이들은 내게 주신 양들이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이다.
주님은 그런 영혼들을 나에게 맡기신 것이다.
나의 마지막 사명은 이 영혼들에게 생명의 양식인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 세세토록 있는 주의 말씀인 복음을 먹이는 일이다.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이 나의 할 일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죽기에만 합당한 나, 나도 나를 용납하지 못하는 나를 용납하셔서 당신의 생명을 주시고 ‘내 형제’라 불러주시며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셨사오니 이 은혜를 어찌 감당할 수 있으리요?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양들을 주님의 뜻이 아닌 내 뜻대로, 주님의 방식이 아닌 내 방식대로 먹였던 자입니다.
내가 먹인 것은 생명의 양식이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썩을 양식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양들은 그것을 먹으면서 즐거워했습니다.
들으면서 만족하고 먹으면서 기뻐했지요.
그러나 그 기쁨과 만족은 그들의 육신만 즐겁게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려 하였고, 그들이 원하는 말을 들려주므로 내가 그들에게 명성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나는 아합의 귀를 즐겁게 해 주는 국정선지자와 다를 바 없는 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참된 생명의 양식을 줍니다.
내가 그 양식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었으며 무엇보다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이요 세세토록 있는 주의 말씀인 복음을 먹고 아들의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제 내가 먹은 그 양식인 주의 말씀을 주어 먹게 하므로 그들도 나와 같이 아들의 생명으로 살게 하소서.
오직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 나로 하여금 그 영광의 빛 가운데 살게 하소서.
지금 이 시간이 영원을 잇대어 영생의 맛을 보는 순간이오니 주여, 영원한 현재로 임하여 나를 품으소서.
내가 주의 품안에 거하겠나이다.
당신은 나의 전부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