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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침체에 폭염, 숨막히는 지구촌
글로벌 복합위기 속 40도 찜통더위… 美 폭염난민 급증-佛 전력수급 차질
곡물 생산량 줄어 식량값 더 오를듯… ‘이른 더위’ 한국, 채소값-전력 비상
쏟아지는 땀 이달 중순 미국 인디애나주 사우스벤드에서 울타리 설치 작업을 하는 근로자가 폭염에 쏟아지는 땀을 닦고 있다. 사우스벤드=AP 뉴시스
전 세계가 고물가 고금리 저성장 등 글로벌 복합위기로 신음하는 가운데 폭염까지 지구촌을 덮쳤다. 그에 따른 에너지·식량난은 인플레이션(급격한 물가 상승)과 경기침체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고 있다.
유럽은 예년보다 한 달 이상 빨리 찾아온 40도 무더위에 전력 수요가 급증했지만 일부 국가가 원전 가동에 차질이 생길 위기에 놓였다. 프랑스가 총 발전량의 약 70%를 원자력발전에 의존하는데 폭염으로 강물 수온이 올라 냉각수로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 이미 원전 56개 중 27개가 유지 보수로 정지 상태인데 나머지 원전까지 가동이 어려워지면 전력 공급이 크게 줄어들 수 있다.
‘폭염 난민’도 늘고 있다. 19일 미국 NBC 방송에 따르면 폭염이 강타한 미국 조지아주 메이컨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구세군 회관으로 몰려들었다. 구세군 회관 측은 “전기료 부담 때문에 사람들이 에어컨이 있어도 켜지 않고 이곳에 온다. 작년까지 오지 않던 사람들도 올해는 찾아온다”고 전했다.
곡물 생산량도 줄어 안 그래도 폭등한 장바구니 물가를 더욱 끌어올릴 것으로 전망된다. 영국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미국 아이오와주, 일리노이주 등 일명 ‘옥수수 벨트’에 고온과 가뭄이 계속돼 수확량이 급감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자 미국 시카고상품거래소(CBOT)의 옥수수 선물 가격이 올 1월 13일 1부셸당 5.87달러(약 7600원)에서 이달 16일 7.88달러(약 1만210원)로 34% 뛰었다.
폭염이 지속되면 건설 현장이나 농촌 등 실외 근무 인력 수급에 제약이 생기는 등 노동생산성이 떨어져 인건비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에 따르면 폭염으로 인해 2050년까지 미국 내 건설 부문 생산성이 연간 3.5%(약 12억 달러)씩, 농업 부문 생산성은 3.7%(약 1억3070만 달러)씩 하락할 것으로 전망됐다.
국내에서도 경북 지역에서 평년보다 20일가량 빠른 이달 20일 올해 첫 폭염경보가 내려지는 등 이른 더위로 감자 배추 등 채소류 가격이 오르고 있다. 정부의 전력 공급예비율도 올 들어 가장 낮은 9.5%로 떨어지는 등 전력 수급에 비상이 걸렸다. 장마가 주춤한 25일 전국 낮 최고 기온은 26∼34도로 예보됐다. 강릉이 34도까지 오르는 등 일부 지역에서 다시 폭염이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이은택 기자, 김민 기자, 뉴욕=유재동 특파원
美, 식량수확 줄고 소 폐사… 佛선 전기가격 일주일새 64% 폭등
[복합위기속 폭염 덮친 지구촌-해외]
美, 올해 강수량 예년의 절반 수준… 폭염까지 겹쳐 농작물 직격탄
밀 생산량 3분의 1가량 줄어들고, 옥수수 선물 가격은 34% 급등
가공식품 가격 상승으로 이어져… ‘37도’ 파리는 에너지 위기 심화
17일(현지 시간) 미국 애틀랜타의 한 고속도로 공사장에서 차량 통제 업무를 하는 근로자가 더위를 식히기 위해 물을 마시고 있다. 애틀랜타=AP 뉴시스
미국 켄터키주에서 옥수수 농장을 하는 조지프 시스크 씨는 23일(현지 시간) 회색 반점이 곳곳에 핀 옥수수 이파리를 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 얼룩진 이파리는 가뭄이 너무 오래 이어지고 있다는 경고”라고 했다. 그는 더운 공기로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제발 비가 오기를 간절히 빌고 있다”고 했다. 농장이 밀집한 이 지역의 올해 강수량은 예년의 절반 수준에 그치고 있다. 켄터키주의 한 지역 매체는 “한 달간 이어지고 있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폭염’이 농부들을 위기로 내몰고 있다”고 전했다.
폭염과 가뭄이 불러온 미국 농가의 위기는 글로벌 식량가격 상승과 인플레이션 악화로 이어질 조짐이다. 당장 미국 옥수수 선물가격은 올 1월 1부셸당 5.87달러에서 이달 16일 7.88달러로 34% 올랐다.
○ 곡물 수확 급감, 소들 폐사…식품 물가 올라
미국 공영라디오 NPR에 따르면 미국의 대표적 밀 생산지인 캔자스주는 폭염과 가뭄 때문에 올해 밀 생산량이 예년보다 3분의 1가량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이는 밀가루, 빵, 파스타 등 가공식품 가격의 상승으로 이어진다. 캔자스주의 한 목장에서는 폭염에 스트레스를 받은 소 2000여 마리가 폐사해 약 400만 달러(약 52억 원)의 손실이 발생했다. 중부 테네시주에서 목축업을 하는 브라이언 플라워스 씨는 소들이 폭염 스트레스로 우유가 적게 나온다며 “우유 매출이 이전보다 하루 400달러(약 52만 원) 정도 줄었다”고 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발표하는 식량가격지수(Food Price Index·FFPI)는 곡물, 육류 등 55개 농식품의 가격 변화를 나타내는데 지난달 지수가 157.4까지 치솟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된 2020년에 98.1이었던 이 지수는 지난해 공급망 위기가 더해지며 125.7로 올랐는데, 올해 글로벌 복합 위기까지 겹쳐 또다시 대폭 상승한 것이다.
옥수수는 섬유, 가구, 인조 고무, 화장품, 의약품 등 생필품의 원료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식량 위기는 일반 공산품 물가 인상으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가 많다.
○ 파리 시민들 에어컨 쐬러 ‘미술관 피신’
유럽은 러시아의 천연가스 공급 감축으로 비상이 걸린 상황에서 폭염까지 겹쳐 에너지 위기가 심화되고 있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낮 기온이 37도를 넘어섰던 18일 시민들이 에어컨 바람을 쐬기 위해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등 실내 관광지로 피신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프랑스 기상청에 따르면 올해 폭염은 1947년 기상 관측 이래 가장 이른 시기에 시작됐다. 프랑스 일간 르몽드는 “1947∼1989년 사이 42년간 9번의 폭염이 발생했는데 1989∼2019년 사이 30년간에는 무려 32차례의 폭염이 있었다”며 “이제 파리는 에어컨 없이 도저히 살 수 없는 도시로 변하고 있다”고 했다. 냉방용 전력 수요가 급증하자 프랑스의 최근 전기 도매가격은 MWh(메가와트시)당 380유로(약 52만 원)를 넘어서며 일주일 새 64% 넘게 올랐다.
○ 냉방기기 가동 여력 있느냐가 생사 좌우
저소득층과 저개발국 국민들은 더 큰 고통을 받고 있다. 21일 AFP통신에 따르면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의 일부 지역은 최근 기온이 50도를 넘었다. 남부 바스라는 45도에 달했다. 이 지역 인구 상당수는 집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에어컨 없이 부채 등으로 버티고 있다.
전력 인프라가 열악한 상황에서 급증하는 전력 수요에 맞추기 위해 발전소를 무리하게 가동할 경우 정전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 폭염에 정전이 발생하면 인명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 미국 중서부 지역에선 극심한 가뭄으로 수력발전소의 수위가 낮아져 가동률이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 중서부 지역 15개 주에서 전력망을 운영하는 업체인 MISO는 이 중 11개 주에서 정전이 발생할 위험이 크다고 이달 초 밝혔다.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 지역에서는 노숙인 수천 명이 40도가 넘는 더위를 길거리에서 견디고 있다. 지난해 이 지역의 폭염 사망자 339명 중 최소 130명이 노숙인이었다.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 공공의료·재난센터의 데이비드 아이젠먼 국장은 “더위 때문에 하루에 16명이 사망한 적도 있다”고 했다. 미국 NBC 뉴스는 “냉방기기를 살 수 있느냐, 또 가동할 돈이 있느냐는 이제 삶과 죽음을 가르는 문제가 됐다”고 전했다.
김민 기자, 이은택 기자, 파리=김윤종 특파원
유럽, 40도 웃도는 폭염에 고통… 中은 물난리에 신음
[복합위기속 폭염 덮친 지구촌-해외]
북아프리카 뜨거운 바람 영향… 스페인-獨-佛 등 살인적 더위
獨-그리스선 산불에 주민 대피소동… 中남부, 60년 만에 기록적 폭우
광둥성 홍수-산사태로 50만명 피해… 전문가 “기후변화 탓 이상고온”
유럽 대부분 지역이 때 이른 폭염으로 신음하고 있다. 스페인뿐 아니라 독일도 최고기온이 이미 40∼43도를 넘겼다. 프랑스도 100년 만에 가장 더운 5, 6월 날씨를 기록하면서 남서부 지역의 각종 행사가 취소됐다. 이 같은 유럽의 이상고온현상은 북아프리카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이 주요 원인이라는 분석이 많다. 북아프리카 사막의 고온 건조한 먼지바람은 곳곳에서 산불을 일으키기도 한다. 독일 베를린 남서부 지역에서 17일 시작된 산불은 19일 도심에서 20km 떨어진 지역까지 번져 주말 동안 수백 명이 대피했다. 소방 인력 수백 명과 군 헬기까지 진화 작업에 동원됐고, 20일 폭우가 쏟아지면서 불길은 잦아들었다.
그리스에서도 에비아섬 중심부에서 산불이 번지면서 불길이 민가 800m 앞까지 접근해 주민들이 대피했다. 스페인 카탈루냐 지역 소방 당국은 지난 한 주간 산불이 200건 이상 신고됐다고 밝혔다.
한 지역의 폭염은 다른 지역의 집중호우로도 이어진다. 기온이 1도 올라갈 때마다 대기의 습도가 7% 증가하며, 이로 인해 물을 많이 머금고 있던 공기가 갑자기 폭우로 쏟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21일 CNN에 따르면 최근 중국 남부에서도 60년 만에 기록적인 폭우가 내려 최소 32명이 사망했다. 남부 광둥성에서는 홍수와 산사태로 50만 명이 피해를 입었다. 17만7600명이 대피했고, 1729가구가 파괴됐다. 광시, 광둥, 푸젠성의 강수량은 1961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신화통신에 따르면 이 세 지역은 5월 1일부터 6월 15일까지 평균 621mm의 비가 내렸다. 이는 2021년 내내 중국 전 지역에 내린 강수량 평균 672.1mm와 맞먹는 수치다.
전문가들은 기후변화와 이상고온 현상이 맞물려 있다고 지적한다. 국제 통계사이트 아워월드인데이터에 따르면 1960년 9400t에 불과했던 전 세계 화석연료 사용에 따른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2020년 약 3만5000t으로 급증했다. 3월 인도와 파키스탄에서 122년 만에 가장 높은 기온이 기록되는 등 두 지역의 폭염 발생 빈도가 산업화 이후 30배가량 잦아졌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4월 유엔 산하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가 발표한 제6차 평가보고서에는 각국이 제시한 온실가스 배출 감소 목표치를 달성한다고 해도 지구 온도는 향후 10년간 1.5도 높아질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도 담겼다.
김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