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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루나 칼럼 >
[나의 금강경 공부 15]
중도(中道) 사상
글 | 조성내
(법사, 컬럼비아 의대 임상조교수)
(금강경 제6분); “만일‘진리’란 생각을 취하여도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걸리게 된다. ‘그릇된 법’이란 생각을 취하여도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걸린다. 그러므로 바른 진리(正法)를 지키지도 말고 그릇된 법을 지키지도 말라.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희들 비구는 내가 말한바 법이 뗏목과 같은 줄을 알라,’하셨다. 진리도 오히려 놓아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그릇된 법이야”
금강경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처의 말씀 중에 하나는 “진리도 뗏목과 같아서, 진리도 오히려 놓아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그릇된 법이야”하는 구절이다.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면, 옳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생각에 집착하면 그게 바로 아상·인상을 만들어낸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아상·인상에 빠지면 뭐가 나쁘단 말인가? 왜 중도이어야 하는가? 왜 한쪽 생각에 집착해서는 안 되는가?
<금강경> 제10분에, “마땅히 형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며, 마땅히 소리와 냄새, 맞부딪침과 어떤 법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니라 ”라고 부처는 말씀하셨다. 어느 한 생각에 집착해버리면, ‘진리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진리의 마음’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어야 한다. 머무름 없이 마음을 내야 하는 것이다. “응무소주 이생기심!” 이 말은 금강경의 핵심사상 중에 하나이다.
(금강경 제17분):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어떤 고정된 법이 있어서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는가?”
“수보리야, 만약 어떤 고정된 법이 있어서 여래가 최상의 깨달음을 얻은 것이라면, 연등부처님께서 결코 나에게 ‘그대는 다음 세상에 반드시 부처를 이루고 이름을 <석가모니>라고 하리라’는 수기를 주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실로 어떤 고정된 법이 있어서 ‘최상의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연등부처님께서는 나에게 수기를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그대는 이 다음 세상에 반드시 부처를 이루리니 그 이름을 <석가모니>라고 하리라’라고 하셨느니라. 왜냐하면 여래라고 하는 것은 모든 법이 여여(如如)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보면 ‘최상의 깨달음’을 가져다주는 어떤 ‘고정된 법’이 없다는 것이다. 진리라고 하는 어떤 정해진 법이 없다는 것이다. 없다면? 없는데, 붓다는 도대체 어떤 법을 통해서 도를 깨쳤다는 말인가? 최고의 깨달음인 ‘고정된 법’이 없다면, 없으니까, 붓다는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닌데도, 연등부처님은 붓다에게 ‘다음 세상에 부처를 이루리니 그 이름을 석가모니라 하리라’ 하였다. 왜 하였을까? 부처는 이 세상에 와서 도를 깨쳤다. 그런데도 정해진 법이 없다고 말했다. 이게 바로 금강경에서 자주 말해지는 즉비(卽非)사상이다. “진리는 없느니라, 그래서 그 이름이 진리이니라.” 하는 게 바로 즉비사상이다. 그렇다면 이게 있다는 말인가? 혹은 없다는 말인가?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다. 이게 바로 중도사상이다. 있다는 것, 상견(常見)에도 걸리지 말고 그리고 없다는 것, 단견(斷見)에도 걸리지 말라는 것이다. 중도란, 한쪽에 치우지지 말고, 양변에서 벗어나 있으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중간에도 집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느 쪽에도 걸려있어서는 안 된다.
<금강경>제9분에, “만일 아라한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라한 도를 얻었노라’하오면 이는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옵니다.” 아라한 도를 얻었다는 바로 그 생각이 아상·인상에 걸려 있다는 것이다. <금강경>제14분에, “일체의 상을 떠난 사람이 곧 부처님이기 때문이다”라고 수보리는 말하였다. 일체의 상(相)에 걸려있지 않는 것이 중도이다. 상에 전연 걸려있지 않는 사람이 바로 부처이다. 중도에 있어야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삼법인(三法印):
불교에서 삼법인(法印)이라는 게 있다. ①일체는 무상(無常)이고, ②일체는 개고(皆苦)이고 또한 ③일체는 무아(無我)이다. 여기서 무상이라는 말은, 항상(恒常)하지 않다, 항상 변해가고 있다는 뜻이다. 진리라는 것도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변해가기에 고정된 법이 없는 것이다. 진리도 또한 무상인 것이다. 더군다나 사람마다 깨치는 진리의 깊이나 넓이에 있어서 진리가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부처가 깨쳤지만, 부처가 최상의 법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최상의 법이라는 어떤 고정된 법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고정된 법이 없는데 우리가 어떤 것이 ‘진짜 법’이고 어떤 것이 ‘가짜 법’인 줄을 알 수가 있단 말인가?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괜히 우리가 고집을 피워서 “이게 옳단 말이야,” “아니야, 저게 옳단 말이야” 하고, 옳다는 것을 가지고 싸워서는 안 된다. 설령 우리가 생각하기를, A가 옳다고 믿고 있더라도, A에 집착하지 말라고 부처는 말씀하셨다. 옳은 것도 뗏목과 같은 것이고, 또한 그릇 것도 뗏목과 같은 것이다.
원시경전인 <숫타니파아타>에 “내가 너하고 ‘같다’든가, ‘뛰어났다’든가 혹은 ‘뒤떨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런 생각 때문에 남들하고 다투게 된다. 이런 세 가지 생각 중에 어느 것에도 집착되어 있지 않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하고 싸우지 않는다.” 어느 생각에도 집착되어 있지 않는 것, 이게 바로 중도(中道)이다.
그렇다면 중도란 무엇인가?
붓다는 말했다; “나는 육년의 죄악의 뿌리와 나쁜 습성의 종자를 다 뽑아버렸다. 이 이상 더 몸을 학대한다면 다만 신명(身命)이 없어질 뿐, 세간을 뛰어나는 ‘해탈의 성도’와 모든 데에 자재한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성취할 수는 없으리라. 나의 고행은 이에 끝났다. 이 몸의 힘을 길러서 해탈·지혜를 성취할 때는 왔다.” 그리고 붓다는 음식의 분량을 차츰 늘기기 시작했다.
싣달타(붓다)가 숲속에 앉아 선정에 들었을 때다. 우루벨라 촌장의 딸 수자타는 수신(樹神;나무의 신)에게 음식을 바치고 있었다. 수자타는 카필라 성의 태자가 집을 떠나 수도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태자는 또한 미남이라는 소문도 들었다. 수자타는 나란자라강의 숲에 와서 수신(樹神)에게 기도를 드리고 음식을 바쳤다. 여기서 수자타는 태자가 수도를 닦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녀는 수신에게 바치려던 우유와 꿀에 쌀을 넣어 끓인 유미죽을 태자에게 드리면서, 받기를 애원했다. 이때 태자는 물었다.
“그대가 내게 이 유미죽을 주는 것은 무슨 원하는 바가 있는가?”
수자타는 대답하였다
“샤카족의 태자이시여, 나는 태자님의 높으신 이름과 도덕을 흠모하여 왔습니다. 모쪼록 몸 건강하시와 장차 나의 남편이 되어 주소서”
부처는 그녀의 남편이 되어주는 것을 거절하였다
수자타는 다시 간청하였다
“그러면 태자님은 반드시 큰 도를 성취하시어, 도를 성취하시오면 나를 한 제자로 삼아 주소서.
부처는 그녀의 청을 들어주었다. 그녀는 날마다 우유와 꿀 기름으로 끓인 최상의 음식을 싣달자에게 바쳤다.
이때에 지난 육년 동안 싣달타(태자)하고 같이 고행을 했던 다섯 비구 시자(侍者)들은 싣달타가 타락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싣달타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멀리 떠나버렸다.
얼마 후 싣달타는 깨쳤다. 깨쳤기에 붓다가 되었다. 도를 알리기 위해서, 붓다는 자기 곁을 떠나버린 다섯명의 비구가 있는 곳, 바라나시의 ‘사슴의 동산’으로 제일 먼저 찾아갔다. 그리고 비구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의 작은 지혜로 나의 하는 일을 헤아리지 말라. 도(道)는 오직 몸을 괴롭게 함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몸과 마음을 편안케 하고 즐겁게 함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고(苦)와 낙(樂)의 두 변두리를 여의고 중도(中道)를 행하는 자만이 도를 얻는 것이니라.”(우리말 팔만대장경, 국민서관 발행, 32쪽)
“그렇다면 중도란 무엇인가?” 하고 부처는 물었다. 중도란 여덟 가지로 되어 있다.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직업, 바른 노력, 바른 기억, 바른 명상이다. 다섯 비구는 부처님의 말을 듣고서 부처의 제자가 되었다.(불교성전; 불교성전편찬회)
성철스님은 “일본의 우정백수와 인도의 바루아(B.M. Barua)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중도사상은, 부처님 이전에도 없었고, 당시에도 없었다. 중도사상은 오직 부처님만이 발견하고 부처님이 성립시킨 새로운 진리이다.”라고 말했다.
진리는 없지만, 없는 것은 아니다:
제 7분에,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아녹다라삼먁삼보리(최상의 깨달음)를 얻었느냐, 또 여래가 말한바 법이 있는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제가 아옵기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은 결정된 진리가 있어서 그것을 아녹다라삼먁삼보리라 하시는 것이 아니오며, 또한 결정된 내용이 없는 진리를 여래께서 말씀해 주셨나이다. 왜 그러냐 하오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진리는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고, 진리도 아니고, 진리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최고의 깨달음’이란, 깨달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없는 것도 아닌 것이다. 성철스님의 책 <백일법문>(78쪽)의 글을 여기에 적어보겠다.
“부처께서는 <열반경>에서 불성을 얘기하시면서 중도를 많이 말씀하셨다. ‘불성은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며, 또한 있는 것이며 또한 없는 것이니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합하는 까닭에 중도라고 한다.’
불성(佛性)은 비유비무(非有非無), 즉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완전히 떠나면 또한 있는 것이며, 또한 없는 것이니(亦有亦無),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융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통하므로 중도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
다른 종교에서는 자기 종교가 절대로 옳으니, 자기 종교를 믿어야 한다고 우긴다. 가령 예수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14;6)라고 말했다. 이슬람의 알라(Allah)나 유태교의 야훼(Yahweh)도 다 똑같은 하나님이다. 그런데 유대교나 이슬람을 통해서는 하나님을 뵙지 못하고, 꼭 예수만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도가 아니다. 이슬람도 또한 마찬가지로, 꼭 모하메드를 통해서만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도 중도가 아니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으니까, 기독교에서는 “이슬람을 믿어도 하늘나라에 간다.”고 말을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슬람이나 유대교에서도 “기독교를 믿어도 하늘나라에 간다.”고 말을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말을 하지 않는다. 꼭 자기네 종교만 믿어야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고 우겨대고 있는 것이다. 중도가 아니다. 그래서 과거에, 수많은 종교싸움이 벌어졌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었다. 불교는 “불교를 믿으라.”라고 우겨대면서 싸운 적은 없었다.
중세기 때까지만 해도, 서양에서 기독교를 믿지 않으면, 잡아다가 죽였다. 근래에 와서는 기독교의 마음이 많이많이 넓어졌다. 기독교를 비난해도, 기독교 신자들이 기독교를 비난한 사람들을 더 이상 해치지 않는다.
하지만 이슬람교는 아직도 배타적이다. 이슬람 국가에서는, 딸이 기독교신자하고 사랑에 빠져서 결혼하면, 가족이 ‘가족의 명예’를 위해서, 딸을 죽인다. 딸을 죽인다! 는 사실, 상상만 해도, 끔찍스럽다, 딸을 낳고 기를 때에는 애지중지 귀여워해주면서 길렀던 딸인데!, 그런 귀여운 딸이 이슬람종교를 믿지 않는 다른 종교를 믿는 남자하고 사랑하고 결혼한다고 해서 죽인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스럽고 무섭다.
그런데 무슬림들은 ‘알라’(Allah) 신을 앞장세운다. 알라를 위해서 무슬림들은 살고 있는 것이다. 알라를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즐겁게 희생할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 생각은 다르다. 우리가 종교를 믿는 이유는, '나'를 위해서, '내 가족'을 위해서, '내 주위사람'을 위해서, 종교를 믿는 것이다. 우리가 병이 들었을 때, 우리가 어떤 불행에 빠졌을 때, 어떤 곤경에 빠졌을 때, 제발 도와달라고, 신에게 구원을 청하기 위해서 우리는 종교를 믿는 것이다. 물론 궁극적인 목적은 종교를 믿음으로 해서, 죽음 후에, 천국에 가기 위해서 이지만, 하여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신을 모시는 것이다. 신에게 우리를 도와주소서! 하고 빌기 위해서 신을 모시는 것이다. 신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 우리는 평소에, 신(神)에게 집(교회, 성당, 회교당)도 지워주고, 신에게 밥도 주고 그리고 돈도 주고 있는 것이다. 이게 다 ‘나’와 ‘우리 가족’을 위해서인 것이다. 그런데 이슬람은 알라(Allah) 신을 위해 모든 인간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십여 년 전만 해도 아프가니스탄에서, A라는 무슬림(이슬람신도)이 기독교로 개종했었다. 개종했다고 해서 A를 잡아다가 영창에 가두었다. 아프가니스탄 무슬림들은 길가로 나와서, 개종한 A를 죽이라고 데모를 했었다. 그런데 다행히 미국대통령 부시가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에게 전화를 했다. 죽이지 못하게 했다.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개종한 기독교인을 몰래 비행기로 태워서 이태리로 보내버렸다. 이슬람에서는 중도 사상이라는 게 없다. 알라 신을 위한 종교이지, 인간의 자유를 위한 종교는 아닌 것이다.
따지고 보면, 예수의 말씀도 “천국에 가기 위한” 뗏목과 같은 것이고, 그리고 이슬람의 알라 말씀도 “천국에 가기 위한” 뗏목과 같은 것이다. 예수나 알라의 말씀에 집착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나 알라의 말씀을 거역해서도 안 된다. 뗏목을 타고 천당에 가기 위해서는 예수나 알라의 말씀도 필요한 것이다. 중도는 뗏목을 타기 위한 입장권인 것이다.
<숫타니파아타> (법정스님 번역)
다음은 원시경전인 <숫타니파아타>에 써진 구절들을 여기에 적어보겠다;
922 눈으로 보는 것에 탐내지 말라. 저속한 이야기에서 귀를 멀리 하라. 맛에 탐착하지 말라. 세상에 있는 어떤 것이라도 내 것
이라고 고집하지 말라.
974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에 대한 탐욕을 이겨 내라.
714 윤회의 흐름을 끊은 수행승에게는 집착이 없다. 해 야 할 선도 버렸고, 하지 말아야 할 악도 버렸기 때문 에 번뇌가 없는 것이다.
741 어떤 괴로움도 모두 애착으로 인해 일어난다. 모든 애착을 남김없이 없애버린다면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는다.
779 생각을 가다듬고 강을 건너라. 성인은 소유하고자 하는 집착에 더럽히지 않으며, 번뇌의 화살을 빼고 애써 정진하여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바라지 않는다.
어떤 것에도 머무름이 없어야:
중도(中道)라는 것은 양변에도 집착하지 않고, 또한 중간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부처님의 가르침에도 집착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버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말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붓다가 열반에 드시기 전이다. “우리는 누구를 믿고 누구를 따라야 합니까?” 하고 아난이 물었다. 이때 부처는 ‘누구를’ 따라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해탈이라는 것은, 부처도 남을 해탈시켜주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스스로가 해탈해야 한다. <열반경>에서, 부처는 자귀의(自歸依) 법귀의(法歸依)라고 말씀하셨다. “너 자신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스스로 도를 닦아나가라”고 말씀하셨다. 계율을 지키면서 중도의 입장에서 수행하라고 일러주셨다. 어떤 것에도 머무름이 없어야 해탈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해탈한다는 것은 무척 어렵지만, 그래도 수행하고 또 수행하고, 그리고 오래오래 수행하다 보면, 생사윤회하면서 언젠가는, 어느 생(生)에서는, 해탈하게끔 되어 있는 것이다. 해탈! 이게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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