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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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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Ⅱ. 들불야학의 성립 및 교육내용 Ⅲ. 들불야학의 역사적 전개 Ⅳ. 들불야학과 민족민주운동 Ⅴ. 들불야학과 광주민중항쟁 Ⅵ. 들불야학의 민족민주운동사적 의의 Ⅶ. 결론 |
Ⅰ. 서론
들불야학1)은 1978년 7월 23일 설립되어 3년여 존속하는 동안 소외된 이들에 대한 헌신적인 교육활동, 학생․노동․문화․지역운동 등 민족민주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광주민중항쟁 기간 중에는 제도권 언론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할 때 항쟁초기부터 마지막까지 각종 '지하유인물'과 '투사회보' 발행, 항쟁 지도부에의 참여를 통해 온몸으로 광주민중항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이런 들불야학을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가 다시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난 시간 동안 광주민중항쟁은 어느덧 박제화 되어 아득한 역사 속의 사건으로 인식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우리는 광주민중항쟁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어야 할 시점에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부패한 권력과 자본은 빈부와 계층간의 격차를 더욱 심각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광주민중항쟁의 정신을 삶의 지표를 삼아 그 지평을 넓혀 가야만 하는 시대적 요구에 직면해 있다. 이는 광주민중항쟁과 한국의 민주화운동사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긴 들불야학에 대한 조명과 올바른 평가를 해야만 하는 당위성이 여기에 있다.
들불야학의 이러한 역사적 역할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학계는 물론 광주․전남 지역사회에서도 마땅히 받아야 할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지금, 본 연구는 한국의 민족민주운동사상 들불야학의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받기 위한 시도의 하나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본 연구논문의 집필에 활용된 자료는 기발행된 문헌자료와 들불야학의 「들불문집」, '강학회의록', '강학토의 일지' 등 내부자료, 그리고 들불야학 출신의 강학 등 관련자들의 구술 증언에 의존하고 있음을 밝혀 둔다.
Ⅱ. 들불야학의 성립 및 교육 내용
1. 설립 배경
한국 근대사상 최초의 야학은 1905년 경남 마산지방에서 설립된 마산노동야학이었다. 교육목표는 주로 문자의 해독 및 민족의식과 계급의식의 고취에 있었다. 야학은 일제 식민지배를 받는 과정에서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나, 일제의 탄압에 의해 민중운동으로 뿌리내리지는 못하였다. 해방 후 야학은 국민운동으로 변화되기도 하고 재건학교, 직업소년학교, 기술학교 등의 형태로 운영되었다. 이들 야학은 압축형 고도성장기를 경과하면서 성격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경제개발의 모순이 사회계층간의 불균형 확대로 나타나고, 이 과정에서 야학은 검정고시 준비를 위한 야학 대신에 노동자들을 의식화, 조직화하고자 하는 노동야학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노동야학에서는 현대산업사회의 구조적 모순 때문에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억압적 현실요인이 전적으로 그들 자신의 나태와 불성실 또는 운명 때문이 아니라 사회구조적 모순 때문이라고 본다. 그 모순의 타파는 그 구조에 희생되고 있는 노동자 자신들의 깨달음과 개선을 위한 행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2)
광주․전남 지역 최초로 설립된 노동야학인 들불야학도 이러한 시대적 요구와 흐름에 부응하여 설립되었다. 그리고 학당이 광천동에 자리 잡은 이유는 당시 광주지역에 대한 사전 실태조사 결과 공업단지라는 지역적 특수성과 저소득 공단노동자 뿐만 아니라 배움의 기회를 상실한 대상이 상대적으로 많다는 점에서였다.
들불야학의 주무대였던 광주광역시 서구 광천동 650번지 광천시민아파트는 주거시설 노후와 주민들의 무질서와 빈곤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지역이었다. 들불야학 특별강학으로 활동했던 고 김영철의 아파트 실태조사에 따르면 총 세대수 171세대의 1977년 1월 총소득은 8,618,400원으로 가구당 평균 소득은 50,400원이었다. 이 소득 중 10,000여 원이 가계비로 충당되기 전에 개인의 유흥비로 지출되어 버려 실질소득은 40,000여 원이었으며, 가구당 평균 180,000원 부채를 지고 있었다. 전체가구의 75%가 요보호 및 빈곤가구에 해당되며 생활이 안정된 가구는 25%에 불과했다. 직업 구성은 남성 292명 중 고용근로자 33%, 일용노동직 24%, 실직 14%, 학생 11%, 무직 10%, 행상 7%의 분포를 보이고 있다. 또 여성 295명중 가사 50%, 고용근로자 17%, 무직 14%, 노동 10%, 학생 6%, 행상 5%의 비율로 구성되었다. 의료시설은 없고 가정 상비의약품을 가지고 있는 가구가 없었으며, 건강의 필요성은 느끼면서도 불결한 환경에 익숙해져 있고 경제적 여유가 없어 보건위생에 무관심하여 질병자가 다수이며, 공동문화시설은 전혀 구비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었다.3)
들불야학은 이러한 지역사회의 필요와 노동운동, 학생운동의 대안으로 인간화(의식화) 교육을 지향하는 노동야학으로서의 성격을 갖고 설립되었다.
2. 운영체제
들불야학의 조직은 야학의 제반업무를 논의‧결정하는 기구로 ‘강학회의’가 있다. 또 야학업무를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처리하기 위한 부서로는 행정강학, 수업강학, 학생강학, 행사강학, 세미나강학, 특별강학, 대기강학, 문집강학, 교재강학이 있다. 그 외에 졸업강학‧학생자문위원회, 수련회, 학생회의가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강학회의’는 모든 현임 강학들이 다 참여하는 회의로 정기적으로 매주 토요일 개최된다. 이는 제반 현안에 대한 논의 및 의결하는 최고 기구이다. 또 긴급 및 특별 내용이 발생하였을 경우 개최되는 ‘임시강학회의’가 있었으며, 현안에 따라서는 졸업강학들까지도 참석할 수 있다.
다음으로 업무분장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4) ‘행정강학’은 학당 모든 업무를 총괄하며 대외적 업무처리를 한다. 제도권의 교장과 유사한 역할을 수행한다. ‘행정강학’은 특별한 지위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야학의 대표로 지도력과 연륜, 업무눙력을 요구한다. ‘수업강학’은 각 과목에 대한 수업 평가, 평가보고서를 작성한다. 특히 제도권 교육의 내용과 방법에 있어 일정한 차이가 있다. ‘학생강학’은 학생들의 학당에서 나타나는 생활상의 문제 파악, 이성 문제, 출결을 파악한다. 그리고 ‘행사강학’은 학당에서 주최하는 모든 행사를 주관하며, 대외행사관계를 담당한다. 지역주민이나 천주교회의 행사에의 참여, 자체 체육대회 등을 기획한다. ‘세미나강학’은 강학들의 인식 및 지적 능력을 높이기 위해 매주 실시되는 세미나를 담당한다. 그리고 ‘특별강학’은 야학의 유지 및 발전에 필요한 역량이나 경험 등을 가진 활동가들을 특별강학으로 위촉하고, 그들로 하여금 수업을 맡도록 한다. 예를 들면, 박효선 특별강학은 문화운동가로서 연극과 관련된 내용을 중심으로 문화수업을 담당하였다. ‘대기강학담당강학’은 대기강학의 모집과 교육, 그리고 정식강학으로 확정되기까지의 과정을 담당한다. ‘문집강학‘은 문집발간을 담당한다. ’교재강학‘은 수업용 교재 개발 및 제작을 담당한다. 그리고 ‘졸업강학‧학생자문위원회‘는 졸업한 강학과 학생들의 지속적 만남과 활동을 위한 모임이다. 이는 또한 앞으로 졸업할 강학과 학생들에 대한 자문과 경험을 교환 및 제공한다. ’학생회의‘는 학생들의 ’침묵의 문화‘를 떨쳐버리고 자기 의견을 형성하고 발표하는 의식화, 인간화의 한 공간이다. 이는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진행하며 매주 토요일에 개최된다. 마지막으로 ‘수련회’가 있다. 이는 특정안건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한 경우나 강학들 간의 단합을 목적으로 이뤄지며, 보통 학당을 떠나 준비된 장소에서 진행된다.
들불야학 운영체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갖는다. 첫째, 모두가 대등하다는 점이다. 참여 강학들 모두가 서열이 없이 대등하다. 때문에 어떤 논의나 결정도 구성원 개개인의 충분한 의견 개진과 판단 후에 이뤄진다. 이는 행정강학이 대표자이지만 특별한 권한을 갖지 않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강학(講學)이란 단어가 상징하듯이 강학과 학생간의 관계도 대등한 위치에서 만나고 대화한다. 지시와 명령, 복종과 보복이 아닌 자각과 자율, 그리고 책임을 중심에 놓는 인간관계 및 노동 문화를 추구한다. 둘째, 대화와 토론을 바탕으로 운영된다는 점이다. 모든 결정 및 논의 방식이 철저한 대화와 토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분명한 이해와 눈높이 대화를 추구한다. 셋째, 지역주민들과의 관계강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들불야학은 지역주민들과 공동체 형성에 많은 관심을 갖고 노력한다. 즉, 그들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행사 참여 및 초청, 교육, 특별강학제 등 여러 사업 등을 수행한다.
3. 교육내용
들불야학의 교육 목표는 '사랑이 밑받침된 진정한 인간 교육의 실현'이었으며,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업방향을 학기별로 구분하여 설정하였다. 즉 1학기는 '사랑의 교육', 2학기는 '비판의 교육', 3학기는 '방향의 교육'으로 설정하여 공동체의식을 바탕으로 한 인간화 교육을 지향하고 있다.5)
교육목표 달성을 위한 교육방법은 주입식 교육의 탈피, 강학과 학생의 대화를 통한 문제제기형 교육이었다. 들불야학은 P. Freire의 교육관6)에 입각하여 가르치면 배우고 지시하면 따르는 주입식 교육의 양태를 지양하고 있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상호 주체적인 입장에서 문제를 발굴해내고, 해결하고 실천하면서 함께 배워갈 수 있는 문제제기형 교육을 지향하였다. 또 개별화교육, 집단화교육, 한 문제에서 연관된 새로운 문제를 찾아내는 집중식 교육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의 학교교육을 생각할 때 상당히 전향적인 학습방법이었다.
교육과정은 중학과정에 중심을 두었으며, 학제는 6개월을 한 학기로 3학기제로 이루어졌으며 1년 6개월을 수학하면 졸업하게 되었다. 수업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8시부터 10시까지 진행되었다.
교과목은 1학기에 국어․영어․수학․과학․한문․국사를 강의했으며, 2학기는 국어․영어․한문․수학․일반사회․국사를 강의하였다. 3학기는 일반사회․국사․수학․신문(작문)을 강의하였다. 또 각 학기별로 특별강학 수업인 문화․생활지도․레크레이션 등이 있었고, 노동야학의 성격상 세계노동운동사, 노동법, 신문보기 등도 개설되었다.
<표1> 각 학기별 교과목과 수업 방향
학 기 |
교 과 목 |
수업 방향 |
1학기 |
국어?영어?수학?과학?한문?국사 |
사랑의 교육 |
2학기 |
국어?영어?수학?한문?일반사회?국사 |
비판의 교육 |
3학기 |
일반사회?국사?수학?신문(작문) |
방향의 교육 |
자료 : 들불야학, “광천들불야학”, 1979. 7.
이런 일련의 과정으로 미루어 볼 때 들불야학은 사실상 제도교육이 시행하고 있는 대부분의 교육과정을 소화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들불야학은 소외된 자들을 위한 비공식적인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과 노동자들의 인간화․의식화 교육을 충실히 해내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Ⅲ. 들불야학의 역사적 전개
들불야학은 1978년 7월 23일 1기 입학식을 시작으로 하여 광주전남의 학생운동, 노동운동, 지역문화운동, 민족민주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광주민중항쟁에 강학들과 학생들의 참여 이후 1981년 7월 사실상 해체된다. 본 장에서는 들불야학이 활동했던 기간을 태동기, 시련기, 발전기, 항쟁참여기, 해체기로 시기구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표 2> 들불야학의 시기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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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동기 |
시련기 |
발전기 |
항쟁참여기 |
해체기 |
시기 |
1978.6~1979.1 |
1979.2~1979.10 |
1979.11~1980.4 |
1980.5~1980.5 |
1980.6~1981.5 |
1. 태동기
들불야학의 태동기는 둘불야학이 설립되기 전인 1978년 4월 처음으로 야학설립에 관한 논의가 시작된 이래로 제2기 입학식 전까지이다. 들불야학의 설립준비는 1978년 4월부터 시작되었다. 야학설립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들은 광주 출신으로 당시 서울대 재학중 시위로 제적된 김영철, 전복길, 군 입대를 위해 휴학 중이던 외국어대 최기혁, 전남대에 재학중인 박기순, 나상진, 임낙평, 신영일 등이었다. 당시 김영철, 전복길, 최기혁은 서울의 구로공단 인근 신림동에서 '겨레터 야학'을 운영해 본 경험이 있었다.7) 이들은 여러 차례의 세미나를 통해 한국사회 일반에 내재된 모순을 절감하고, 이의 해결을 위한 노동운동의 필요성을 느끼고 노동야학 설립에 동의하게 된다.
1978년 7월 23일 들불야학의 제1기 입학식이 거행된다. 당시의 상황을 1기 강학 신영일은 「들불문집」창간호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8)
“7월 중순에 광천동 천주교회 신부님과 교회측의 세심한 배려, 지역사회 주민들의 긴밀한 협조 아래 광천 천주교회 교리 강습실을 학습장소로 정하고 학생 모집에 따른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교재와 교구를 우리 손으로 만들고 수업에 따른 수차의 세미나와 공부를 통해 준비 작업을 모두 끝냈다. 7월 23일! 신부님과 학생 35명, 강학 7명, 지역사회 주민, 광천 시민 아파트 가동 반장님(김영철), 광천동 공단측 인사 몇 분을 모시고 역사적인 광천 들불야학 제1기 입학식을 가졌다.”
이렇게 들불야학은 강학들의 자력갱생 원칙에 입각한 철저한 준비, 광천동 천주교회의 세심한 배려, 지역주민들의 성원에 힘입어 그 역사적인 첫발을 내딛게 된다.
박기순은 당시 광천공단 내의 한남스티로플에 근무하고 있던 윤상원을 1978년 10월 들불야학에 몸담게 만든다. 윤상원의 가세로 야학은 더욱더 탄력을 받게된다. 이후 전남대의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광천공단 노동자들의 근로조건과 의식실태 조사를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들불야학 강학들과 학생들의 도움을 받게 되고, 광천공단 실태조사팀의 일원으로 참여한 박관현도 이를 계기로 들불야학과 인연을 맺게된다.
들불야학의 순조로운 출발 뒤에는 시련도 있었다. 그것은 야학 설립에 견인차 역할을 했던 1기 강학 박기순의 과로에 의한 연탄가스 중독으로 인한 죽음이었다.
박기순 강학의 죽음과 야학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김영철, 최기혁, 전복길 강학의 군입대로 어수선한 분위기에서도 1979년 1월 강학들은 2기 학생들을 받을 준비작업으로 야학교재 편집, 문집 발간, 교구 제작, 일일 다방과 후원금 등으로 2기 학생들이 사용할 학당을 시민아파트에 전세 내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였다.
2. 시련기
시련기는 제2기 입학식이 있었던 1979년 1월 23일부터 1979년 10․26이 발생하기 전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는 유신 말기의 강압적 통치에 의한 국민감시 체제가 절정에 이른 때로 원만한 야학활동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제2기 들불야학 입학식은 천주교회 교리실 강당을 빌려 쓸 만큼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신입생 40여명, 학부모, 강학 15명, 광천시민아파트 주민 등 150여 명이 참석했다.9) 제2기가 순조롭게 출발한 이후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들불야학 강학들은 각 대학 내의 합법적인 등록 동아리들을 결성10)하여 노동자, 농민들이 사회변혁운동의 주체임을 자각하고 보다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대중들의 의식화․조직화에 전념하게 된다.
유신정권의 철권통치가 강화되는 가운데 학교당국과 정보기관에서 요주의 동아리에 가입한 학생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학원사찰이 시작되고, 들불야학의 강학들도 예외 없이 사찰대상에 포함되었다. 강학들에 대한 탄압 유형은 부모님들을 동원한 회유, 담당형사와 지도교수들에 의한 야학 탈퇴 종용 등 다양한 방법이 사용되었다.11) 들불야학에 대한 사찰과 감시는 야학 현장에까지 확대되자 학생들은 불안감에 휩싸이고 일부 강학들은 이탈하였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제2기 입학 당시 40명 정도이던 학생들은 7~8명으로 줄어들었고, 강학들의 수업 불참이 확대되는 등 야학 자체의 운영이 사실상 어렵게 되었다. 강학들은 이런 야학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학생들과는 야유회12)를 마련하기도 하고 학교측에는 강경한 메시지를 전달13)하는 등 야학 운영의 정상화에 노력을 기울인다.
강학들은 당국의 의도가 야학을 폐쇄하기로 결정했다고 보고 학당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게 된다.14) 먼저, 합법적인 등록 동아리의 진입, 둘째로 계속적인 압력이 가중될 때는 사회문제로 대처하고, 셋째로 장기적인 측면에서 자체수업과 특별강학의 수업참여 문제 등에 대해서도 논의하였다.
들불야학은 야학을 탄압하는 외부세력과 일부 청소년들과의 갈등, 재정 문제15) 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야학활동은 계속되었다. 비록 제2기 모집 학생들이 1기와 3기에 분산 배치되는 우여곡절의 과정을 거치지만 새롭게 강학16)들을 편성하고 1979년 8월에는 제3기 신입생을 모집하여 입학식을 거행하여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였다.
3. 발전기
발전기는 1979년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부터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시기이다. 1979년 10월 26일은 유신정권이 종말을 고하는 날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시해 사건을 계기로 그 동안 억압되어 왔던 전국민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드높아 간다. 들불야학도 이러한 분위기에 활기를 되찾게 되었으며, 공안당국의 야학에 대한 감시는 소홀해졌다. 10․26이라는 권력 공백기를 경과하면서 새롭게 야학의 외연을 확대하고 동시에 안정적 성장의 토대를 구축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그 결과 야학의 안정적인 재생산구조의 정착과 전개되는 정세에 대응하여 노동야학 본연의 임무를 다하기 위한 논의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는 1980년 2월 1기 학생들과 강학들의 졸업, 3기의 2학기 진입, 4기의 새로운 입학 등을 계기로 본격화된다. 1기 졸업학생은 11명에 지나지 않았고 1기 졸업강학도 4명에 불과했지만, 이들의 진로 모색은 향후 들불야학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시금석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논의의 결과물은 이 시기의 '강학 긴급임시회의'에 들불야학이 갖는 성격과 역할이 잘 드러나 있다. 먼저, 들불야학의 성격을 노동야학으로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야학의 역할은 첫째, 야학활동을 통해 단련된 지식인의 학생운동에의 재진입, 둘째, 청년학생들과 근로대중과의 연대, 셋째, 근로대중의 의식화․조직화 등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17)
이런 논의 결과를 토대로 졸업강학들은 1980년 봄의 열린 공간에서 학생운동에 재투신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이는 연구학회 조직과 총학생회의 부활로 나타났다. 단적인 예로 신영일, 임낙평 강학의 학생운동에의 투신과 박관현 강학의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당선 등은 전남대 학생운동의 양적․질적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된다.18)
야학 졸업생들은 고양된 노동의식을 바탕으로 현장에서 노동문제에 적극적인 대응을 하게된다. 강학들과 졸업야학생들은 졸업 이후에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이후 노동운동이 척박한 광주지역에 노동운동 조직의 근간이 될 수 있는 동량을 양성하기 위한 학습조직을 구성한다. 이 모임은 윤상원 강학이 담당하였으며 주로 민중과 조직, 경제사, 노동의 역사, 세계노동운동사 등을 학습 공부하였다.
이후 들불야학은 이전의 시련기를 극복하고 안정적인 발전을 지속하게 된다. 이 시기 발전의 동인은 야학의 재생산 구조가 정착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학과 학생 수급구조의 원활한 정착, 강학들의 적극적인 수업 참여와 학생들의 향학 열기 등이 복합적인 상승 작용을 가져와 안정적인 야학 운영이 가능하게 되었다.
4. 항쟁참여기
항쟁 참여기는 1980년 5월 18일부터 신군부에 의해 항쟁이 진압된 1980년 5월 27일까지의 시기이다. 1980년 5월 신군부의 정권찬탈 음모에 의한 5․17 비상계엄 선포로 시작된 민주주의의 압살 과정에서 발발한 광주민중항쟁 기간에 들불야학은 절정기에 이른 활약상을 보여 주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야학이 설립된 이후 시련기와 성장발전기를 경과하면서 축적된 들불야학의 역량이 응축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광주민중항쟁 기간 동안 들불야학은 항쟁지도부에의 참여, 지하유인물과 투사회보 작성, 적극적인 시위 가담 등의 활동에 참여하였다. 야학은 사실상 1980년 5월 17일 수업을 끝으로 5월 18일부터 일주일간 휴교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들불야학 관련자의 광주민중항쟁 참여는 윤상원을 중심으로 한 졸업강학과 현임강학, 특별강학, 학생들의 자발적이면서도 조직적인 참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광주민중항쟁 기간 중의 강학들과 야학생들의 시위 참여 및 투사회보 제작에 관련된 사항은 본 논문의 ‘들불야학과 광주민중항쟁’에서 자세히 언급한다.19)
5. 해체기
해체기는 광주민중항쟁이 진압된 이후 1980년 6월부터 1981년 7월 4기 졸업식을 끝으로 들불야학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까지이다. 항쟁 이후 적극적인 항쟁참여와 투사회보 제작에 참여했던 강학들과 학생들이 죽거나 구금되거나 지명수배되었다.20) 그 때문에 광주민중항쟁이 끝난 후 야학은 이전처럼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광주민중항쟁 이후 약 2개월 동안 강학들과 학생들은 방황과 갈등, 번뇌의 시간을 지내야 했다. 수업 재개에 대한 열망은 들불야학 보존의 당위성과 살아남은 자들이 해야 할 당연한 일로 인식되어 1980년 7월 18일 항쟁 이후 처음으로 수업이 재개되지만 간헐적인 게릴라식 수업일 뿐이었다. 이들은 광천동 제방과 학생들의 자취방, 산수동 독서실, 백천탕(계림동) 등을 전전하며 학생들과 대화 형식 수업과 신문 중심의 산발적인 수업을 계속해 가지만 이마저도 보안문제로 불가능하게 된다.
강학들과 학생들의 들불야학 재건에 대한 열망은 새로운 학당의 마련으로 나타났다. 중흥동 천주교회에 새 학당을 마련하여 3기 졸업식을 1981년 1월에 거행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야학을 지키기 위한 노력들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결국 들불야학은 1981년 7월 4기 졸업식을 끝으로 강학들에 대한 공안당국의 수배, 재정문제, 학당문제 등으로 인하여 사실상의 폐교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들불야학이 해체된 이후 1981년 후반기에 들불야학 4기 강학이었던 최종희, 이종영의 주도하에 전남대생을 중심으로 한 무등야학이 당시 광천동에 있었던 무등교회(교원공제회관 옆)에서 문을 열었다. 또 들불야학 4기 강학이었던 박현주의 주도 하에 조선대생을 중심으로 한 샛별야학이 농성동 성당에서 문을 열었다.
그러나 이들 야학들은 일부 신도들의 반발과 신도협의회의 강력한 저지로 장소를 옮기는 불운을 겪기도 하였으나, 두 야학은 공안당국의 강학들에 대한 연행과 강제징집 등 군부 권위주의체제의 철저한 감시와 가혹한 탄압으로 1년을 넘기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된다. 이후 야학운동은 Y야학, 무등배움터, 한얼야학 등이 설립되기도 하였으나 노동야학 형태로는 운영되지 못하고 ‘생활야학’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Ⅳ. 들불야학과 민주민족운동
1. 들불야학과 학생운동
들불야학은 준비 단계에서부터 발전․전개과정 그리고 야학 해체 과정에 이르기까지 당시 광주권의 진보적인 학생운동 그룹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특히 평소부터 민중현장에 대한 투철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박기순은 들불야학의 태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 지역 출신 학생운동가인 김영철, 전복길, 최기혁 등과의 만남을 통해 노동야학운동이야말로 광주 전남 학생운동의 당면한 과제라고 결론을 내렸다. 당시 박기순은 전남대 6․29 교육지표 시위사건으로 강제휴학을 당하자 곧바로 자신의 신념에 따라 광천공단에 위장취업을 결행했던 이 지역의 핵심 학생운동가였다.
들불야학과 이 지역 진보적인 학생운동 그룹과의 긴밀한 관계는 야학 강학들의 출신 동아리가 대부분 전남대학의 독서잔디․탈춤반․연극반․기독학생회․아카데미흥사단과 조선대학교의 한얼․민속극연구회 등 주로 사회과학 서클과 민중문화를 연구․실천하는 동아리였다는 점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이에 들불야학은 대기강학을 모집하는 데 있어서도 당연히 '사회과학의 기본적인 관점이 서있는 자'와 '야학 설립 취지에 동조하고 이를 실천할 자세를 갖춘 자'를 최우선시하였다.21)
야학을 운영하는 과정에서도 들불야학 강학들은 강학회의를 통해 자주 '학당의 존재와 방향' 문제를 심도있게 논의했다. 그들은 지식인과 민중의 만남을 통하여 현대 산업사회의 비인간화 현상을 극복하고, 민중이 역사의 진정한 주체가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는 한편, 학생운동의 돌파구와 사회운동의 역할을 해결한다는 측면에서 노동야학의 존재 의의를 인정했다.22)
한편, 들불야학의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노동자들은 야학현장에서 함께 모여 상호간의 모순을 자각하게 되고 이들은 다시 학교와 노동현장으로 되돌아가 자신들의 새로운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들불야학은 광주지역 학생운동의 질적인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1기 강학 신영일은 야학생활을 시작한지 몇 달이 지난 후 “그들(야학 학생들) 생활의 생생한 체험 속에서 나는 응어리진 슬픔과 부대끼면서 (그 동안) 우리들이 꼭 부여잡고 아까와 했던 모든 것들을 버려야 했다. 허영과 위선에 가득 찬 환상의 껍데기들을!”이라고 자탄하면서 지식인으로서의 '허영'과 '위선'을 처절하게 반성하고 있다. 이처럼 일정기간 야학경험을 하게 된 들불야학 강학들은 대부분 야학 학생들로부터 “무엇보다도 생생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그들과 공부하면서 진정한 우리와 진정한 우리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에 감사한다.“는 깨우침을 갖게 된다.23)
이러한 현장경험을 살려 들불야학을 졸업한 대부분의 강학들은 학내로 되돌아가 학생운동의 중심역할을 담당했다. 예를 들어 1기 강학 신영일은 학내의 각종 학회 활동을 주도하며 학생운동과 노동현장운동과의 연계성을 강조했고, 당국의 심한 탄압으로 부득이 야학을 그만둔 2기 강학 전용호는 1979년 11월 30일, 김정희와 함께 전남대에서 시위를 주도했다. 그들의 시위 준비를 위해 들불의 윤상원이 선언문을 직접 작성하고 박용준이 들불야학의 등사기로 광천동에서 밤새워 등사를 했다. 또한 ‘민주학원의 새벽기관차’를 자처하고 1980년 5월 당시 탁월한 대중연설과 민주화에 대한 신념으로 전남대 학생들은 물론 광주시민들을 크게 감동시켰던 전남대 박관현 총학생회장도 바로 들불 출신이었다. 이런 점에서 광주지역 학생운동의 돌파구로 출발했던 들불야학은 이 지역 학생운동의 발전된 하나의 전형이자 새로운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2. 들불야학과 노동운동
들불야학은 광주지역 학생운동의 중심세력과 당시 광주․전남 최대의 공단지역인 광천동 공단의 노동자들로 구성된 노동야학이다. 들불야학이 바로 노동야학이고 민중교육운동을 지향했다는 점에서 들불야학과 노동운동과의 관계를 잘 알 수 있다.
광주지역에 있어서 '들불'이라는 노동야학의 등장은 당시 노동운동의 경험과 역량이 매우 미미했던 광주․전남지역의 현실을 감안할 때 그 의미는 매우 큰 것이었다. 당시 현장운동의 중요성을 느끼고 노동야학 설립에 적극적이었던 박기순은 자신의 적극적인 권유로 들불야학에 참여하게 된 윤상원과 더불어 광주․전남지역 최초의 위장취업자라 할 수 있다. 이들은 1978년 10월경에 각각 광천공단 내에 위치한 '동신강건사'와 '한남플라스틱'에 위장취업하여 이 지역 노동운동의 기틀을 세우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특히 박기순은 당시 노동운동에 열성적이던 정향자(현 노동상담연구소장)와 각별한 교분을 맺으면서 학생출신 노동자와 현장노동자와의 연대성을 주장했다.
윤상원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연계시키는 노학연대의 역할이 들불야학 출신들에게 부과된 과제라고 역설했다. 그는 야학 학생들에게 노동법과 세계노동운동사 등을 강의하면서 앞으로 들불야학과 들불동우회(들불야학 제1기 졸업강학과 졸업학생들의 모임), 들불 출신이 중심이 된 전남대 노동문제연구소와 현장 소그룹 등이 이 지역 노동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24) 또한 윤상원은 1978년 12월말부터 이듬해 2월말에 걸쳐 진행된 광주공단 노동자 실태조사에도 깊이 관여했다. 이 노동자 실태조사의 추진 배경은 첫째 6․29사건 이후 황량해진 이 지역 학생운동의 활성화를 위해서였고, 둘째는 광천공단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객관적으로 자료화시키는 작업이 바로 이 지역 노동운동을 성숙시키는 지름길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이 실태조사에 들불야학에서는 신영일이 적극 참여했고, 윤상원은 물심 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이 실태조사에 동참했던 박관현과 박용안이 이들과 인연이 되어 이듬해에 들불야학 강학이 된 것도 특기할만한 일이다.25) 1980년 4월, 윤상원은 광주 전남지역을 대표해 전국민주노동자연맹 중앙위원에 피선되어 전국적인 연계 속에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을 준비하던 중 5월항쟁을 맞이하게 된다.
노학연대를 강조한 들불야학의 의도는 학당의 존재와 방향에 대해 일찍이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중간세대'라고 정의한 데서 잘 드러난다.26) 또한 들불야학은 인간화 해방을 위해서도 노력했는데, 이를 구체적으로 들불야학 체육대회 선수선언문중에서 “우리는 들불야학인으로서 인간의 속박과 굴레로부터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정의를 위해서 노력을 다할 것을 선서한다.”27)라고 말했다. 훗날 야학교육과정을 통해 들불야학의 이러한 설립취지를 깨달은 어떤 학생은 “들불은 지식인과 인간적인 만남이다. (나는) 배움의 욕망을 간직한 채 들불에 들어왔다.……하지만 지금은 배움의 욕망보다 배움의 필요성을 알았다.……관념적인 지식보다 인간적인 지식을 배우고 싶다”고 말하면서 야학교육을 통해 달라진 자신의 세계관을 피력하기도 했다.28)
다음으로 들불야학은 노동야학이었기 때문에 그 교육목표도 자연히 민중교육운동을 지향했다. 이 점은 “끝까지 민족민중해방, 인간해방의 새날을 위해 싸울 것을” 다짐한 들불 강학들의 선서 내용에서도 잘 드러난다.29) 당시 광주지역 대부분의 검정고시야학들과는 달리 들불야학은 교재 편집에 있어서도 가능한 한 현실생활과 밀접한 내용들을 많이 수록했고 수업시간에도 생생한 현장자료들이 많이 인용되었다. 그 결과 야학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전국 노동현장에서 발생한 사건들이 바로 자신들의 문제라고 깨닫게 된다. 한 야학학생은 수업시간을 회고하는 자리에서 “국어 강학(최영희)이 동일방직 여공의 일기를 읽어 주었습니다. 그때 (그들이) 우리들과 같은 처지라는 것을 느꼈습니다.”라고 그때의 심경을 토로했다.30)
이처럼 노동야학으로서의 들불교육을 통해 야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인간화 문제와 노동문제에 눈을 뜨게 되었고, “저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검정고시를 보기 위해 들어왔지만 인간다운 삶이나 노동문제에도 눈을 떠 앞으로도 계속 이 방향으로 밀고 나가겠습니다”와 같이 새로운 세계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되었다.31)
들불야학 강학들은 올바른 노동야학의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 자체적으로 각종 세미나와 수련회를 통해 한국사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민중사관 정립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이를 산 교육현장에 직접 접목시키기도 했다. 들불야학의 이러한 교육정신은 대기강학을 모집할 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대기강학을 선발하기 전에 먼저 대기강학 대상자의 성실성과 기본자세를 검증한 다음, 노동야학의 강학으로서 마땅히 갖춰야할 덕목으로 지금의 교육현실을 파악하고, 민중과의 만남을 지향하며, 지식인의 이중성을 극복하고, 진정한 인간화 실현을 위해 노력할 것 등을 요구했다.32)
이러한 교육경험과 실천들은 훗날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을 때 바로 들불야학의 강학들과 학생들을 자발적으로 그리고 매우 자연스럽게 한국 현대사의 한 중심에 서도록 했다.
3. 들불야학과 문화운동
사회의 모든 집단들은 일정한 사회문화적 환경 속에서 구성원들 간의 장기적인 상호영향관계를 통해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이루기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들불야학도 예외가 아니다.
먼저 들불야학의 문화는 민중문화라 할 수 있다. 들불야학은 강학과 학생들이 역사의 주체가 되고 민중교육을 통한 피압박자들의 해방을 지향했다. 윤상원의 적극적인 권유로 야학의 문화강의를 담당했던 3기 특별강학 박효선은 야학과 광천지역 민중문화운동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의 지도하에 학생들이 직접 대본을 쓰고 연극에 출연했던 집단 창작극 '우리들을 보라'33)와 '누가 모르는가?'34)는 이 지역 최초의 민중극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광천천주교회 크리스마스 전야제 밤에 공연했던 '우리들을 보라'는 당시 관람했던 천주교 신자와 지역주민들에게 많은 감명을 주고 박수갈채를 받았다. 박효선은 광주지역 민중문화운동을 주도하고 광주항쟁기간 중 끝까지 도청 사수를 주장했던 인물로 그의 탁월한 민중문화운동의 정신과 역량은 들불야학에서의 현장경험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 외에도 들불야학은 학생들과 지역주민들에게 우리의 전통문화를 이해시키기 위해 야학 체육대회나 입학식, 졸업식 등 각종 행사 때마다 전남대 탈춤반 학생들의 탈춤공연으로 뒷풀이를 하는 등 광천지역의 민중문화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다음으로 들불야학의 문화는 빈민사회운동문화라고 할 수 있다. 광천동 공단지역과 인접한 광천천주교회에서 문을 연 들불야학은 약 반년 후 광천동 빈민아파트 지역 내에 또다른 학당을 마련한다. 광천동 빈민아파트지역 주민들과의 잦은 접촉에 따라 강학들과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이 지역의 특수한 문화를 이해하게 되었고, 쌍방간에는 일종의 긴밀한 유대감과 공감대가 형성되어 갔다. 특히 이 과정에서 들불야학 강학들보다 한 걸음 앞서 광천동 시민아파트 부근에 살면서 이 지역을 중심으로 몸소 빈민운동을 실천하고 있던 특별강학 김영철, 박용준과의 역사적인 만남은 들불야학 구성원들에게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김영철은 평소에도 “(아무리) 시일이 오래 걸린다 할지라도,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집단 토의를 통한 교육만이 가장 빠른 진정한 민주화의 지름길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으며 또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가고 있습니다.”35)라고 말할 정도로 민중교육과 민주화에 대한 신념이 확고한 인물이었다.
들불강학들은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 내 학당주변과 아파트 주변환경에 대해 조기청소를 실시했고, 아파트지역 비행(非行)청소년들에 대한 훈육교육운동도 함께 진행했다. 야학은 이들 비행청소년들을 위해 학당에서 따로 인성교육을 실시하기도 하고, 강학들과 야학학생들이 혼성된 친선 축구시합과 야구시합 그리고 야유회 등을 통해 이들과의 인간적인 유대감을 키워갔다.
이처럼 야학을 지역주민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들불야학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야학이 중심이 되어 노래, 연극, 체육대회 및 조기축구 등을 통해 강학과 야학 학생들이 지역주민의 문화권으로 융화되기 위해 스스로 노력했고,36) 야학이 주최한 체육대회도 '지역주민들과의 관계를 융화시키는' 목적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37)
이처럼 들불야학이 학교당국과 정보기관의 조직적인 탄압으로 야학 운영이 사실상 불가능했을 때 천주교 교회측과 지역주민들과 줄곧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들불야학이 벌인 지역사회주민운동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Ⅴ. 들불야학과 광주민중항쟁
1. 10‧26공간에 대한 들불야학의 기본입장
1970년대 중반 이후 사회운동이 노동계급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면서 우리사회의 모순해소를 위해서는 지식인들이 노동현장에 투신하여 노동대중을 의식화‧조직화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요구와 흐름 하에서 학생운동은 역사의 주체인 노동계급과의 만남을 중요시하는 '현장론'을 강조하였고, 이에 대한 실천방안으로서 노동야학이 등장하게 된다.38) 왜냐하면 노동야학은 노동자를 비롯한 기층민중들과 만남의 매개물이었기 때문이다.
광주‧전남에서의 '현장론'은 1978년 7월 들불야학이 설립되면서 구체화되었다. 들불야학은 성격상 노동야학으로서, 그 출발에 있어서 서울지역의 '현장론'과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39) 장소 또한 광천공단 가까이에 잡았다.
이런 방향 설정 하에서 들불야학 강학들은 거의 모두가 10‧26쿠데타 이후 민주화 공간에서 학생운동에도 일정정도 참여하고 있었지만 당시 강학들은 야학활동에 비중을 두거나 전념하기로 다짐하면서 자기 거취를 정리한다.40) 왜냐하면 이런 정리는 들불야학의 노동야학적 성격과 방향을 고수하려 했기 때문이며, 또한 야학이 학생문제, 재정문제, 장소문제 등 여러 가지 해결해야 할 운영상의 현안문제, 그리고 운영체제 개선, 교재개발, 졸업한 강학과 학생들의 진로 등41) 여러 문제와 과제들을 안고 있어 학내운동과 야학운동을 병행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야학의 현실과 결의에도 불구하고 당시 야학의 책임자인 행정강학을 맡고 있었던 박관현이 야학을 떠나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서 전남대 민주화운동을 이끌게 된다.42) 이는 박관현의 의사라기보다는 전남대 운동권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박관현의 학생운동에의 참여에도 불구하고 당시 들불야학의 기본입장은 민주화운동 상황에 대해 직접 참여하는 것을 자제하고 오직 야학과 관련지어서 상황을 판단하면서 야학운동에 전념하는 것이었다.
2. 들불야학과 광주민중항쟁
강학들은 1980년 5월 17일 5‧17군사쿠데타의 가능성이 흘러나오는 시점에서 만약을 대비해 집에 귀가하지 않고 안전한 곳에서 정국정세와 야학운영에 대한 대책 마련을 위한 시간을 가졌다. 들불야학은 10‧26 이후 야학운동 중심으로 자신을 꾸준히 정리하였다. 그 결과 ‘예비검속’을 비켜갈 수 있었으며 들불야학으로 하여금 민주화운동 지도자가 부재한 광주민중항쟁의 공간에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게 하는 조건으로 작용하였다.43)
5월 18일 광주민중항쟁 첫 날에 들불야학은 어떤 모습을 하였는가. 그날 강학들은 아침 일찍 야학당에 모두 모여 청소를 하고 학생가정방문44)을 하였으며, 그 후 시위에 동참한다. 그들 중 일부가 아침청소 후 전남대 정문으로 가서 군인들의 캠퍼스 장악과 함께 학생들 수명이 교문 앞에 모여 있는 상황을 확인하고 가정방문 일정 때문에 야학당으로 돌아오게 된다. 가정방문을 마친 오후 강학들은 쿠데타군의 학살만행 소식을 전해듣고 시내로 나가 시위대열에 참가하였다. 광천동 들불야학 공동방으로 돌아온 이후 강학들은 자기 집에 귀가하지 않고 함께 모여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도 같이 생활을 하였으며, 시위 참가, 정세토론, 그리고 비상계엄과 광주민중항쟁의 조건에서 야학운영 등에 대하여 골몰하였다.45)
들불야학은 어떻게 하여 투사회보를 제작하게 되었는가? 광주민중항쟁 발발 후 단순하게 참여하는 시위보다는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무엇인가 적절한 대응으로서 역할을 찾던 중 5월 19일 윤상원이 나타나 그 동안 쿠데타군에 의한 피해와 시민들의 투쟁상황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하였다. 당시 그는 도청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녹두서점에 근무하면서 자신이 시위군중들의 전면에 나섰거나, 뛰어다녔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시내 상황을 비롯한 여러 소식들을 비교적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설명을 들은 강학들은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총을 들고 싸우자”, “미국인들을 인질로 잡자”, “싸움을 조직화하자”, “실상을 알리는 유인물 작업을 하자” 등등의 여러 이야기가 나왔다. 결국 토론 끝에 선전홍보작업을 하기로 결정되었다. 이런 결정이 나오게 된 것은 지금의 상황에서 야학을 지키면서 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일, 즉 당시 상황에서 학살과 저항의 실상을 알리고 시민들의 힘을 하나로 모아 싸움을 효과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선전홍보활동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제호와 문안 내용 등에 대한 구체적 토론과 함께, 담을 내용46)을 작성하였고 인쇄된 후에는 2인 1조 형태로 시내 각 지역에 배포되었다.47)
들불야학의 선전홍보 활동은 어떠하였는가? 우선 들불야학은 지금까지 ‘투사회보’ 제작팀으로만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과 차이가 있다. ‘투사회보’란 제하로 유인물이 제작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 5월 21일인데, 선전작업은 이미 5월 19일부터 시작된다.48) ‘투사회보’가 나오기 전에도 여러 인쇄물이 뿌려졌다. 살포된 인쇄물 중에 ‘선언문’, ‘민주수호 전남도민 총궐기문’ 등은 문헌상 확인되고 있으나49) 당시 참여자의 증언에 의하면 그 외에도 몇 가지를 더 제작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50)
그리고 선전홍보작업이 5월 21일 이후 ‘투사회보’란 제목으로 고정되어 나온 것은 당시 전개되고 있는 상황들에 대한 소식을 전하는 데 있어서 지속적, 일정한 틀을 갖춤으로써 시민들에게 신뢰감을 주고 투쟁 의지를 북돋우면서 조직화하기 위함이었다. 곧, ‘투사회보‘의 출현은 단순한 선전홍보 활동의 차원을 넘어선 광주민중항쟁을 조직화하고 대중적 지도력을 확보하기 위한 ’지하신문‘으로서 역할과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5월 21일까지는 쿠데타군이 광주시내에 진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살포에 신경을 많이 썼으나 시민들의 반응은 매우 좋았다.51) 그리고 물자를 확보하는 데 있어서도 시민들의 전폭적인 협조와 성원이 있었다.52) 시민들의 이런 반응은 투사회보 제작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작업에 대한 확신과 책임감을 주었던 것 같다.53) 투사회보 작업은 24일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24일을 마지막으로 투사회보 작업을 끝내기로 결의하고 해산하였다.54) 이런 결정은 상황 변화에 따른 것이었다. 즉, 이제 항쟁이 최후의 상황에 임박하였다는 판단 하에서 들불야학을 보존하기 위해 해산하기로 정리한 것이다.55)
지금까지와는 성격이 다른 도청지도부가 구성됨으로써 투사회보 작업은 도청지도부의 직접 지도하에 작업 장소를 YWCA로 옮겨 계속 발행되었다. 투사회보 8호는 YWCA에서 발행되었으며, 투사회보 9호는 이름만 ‘투사회보’에서 ‘민주시민회보’로 바뀌고 순번 9호는 그대로 붙였다.
5월 25일 이후 들불 관련자들의 광주민중항쟁에의 참여는 조직적 결정에 따라 현임 강학들은 야학 보존을 위해 제외되었고, 나머지는 자신의 자유의사에 맡기기로 하였다. 그에 따라 윤상원, 김영철, 박용준, 박효선과 동근식, 그리고 학생들 일부(윤순호, 나명관, 김성섭)가 투사회보 제작에 참여하였으며 그 외 학생들이 다른 내용으로 참여하였다. 그 중에서 당시 3기 강학 동근식이 현임 강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참여한 것은 필경을 위해서였다.
광주민중항쟁이 끝나자 선전홍보 활동에 참여했던 모든 강학과 학생들은 그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사망‧체포 혹은 지명수배자가 되었고, 이 때문에 광주민중항쟁이 끝난 후 야학은 이전처럼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군부독재에 맞서 피의 역사를 쓴 동지들과 학생들을 생각할 때, 비록 이곳 저곳을 떠돌지라도 아무런 정리나 마무리 없이 멈출 수는 없었다. 광주민중항쟁 이후 수업이 재개된 것은 광주민중항쟁 발발 이후 만 2개월 만인 1980년 7월 18일 광천동 하천 제방에서였다.
들불야학의 광주항쟁에의 참여 및 활약을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들불야학의 광주민중항쟁에의 참여는 철저히 조직적 결정을 통하여 이뤄졌다는 점이다. 첫 날은 조직적 판단과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역할을 찾지 못하고 단순히 시위에 참가하였을 뿐이었으나, 항쟁 둘째 날부터는 선전작업을 계기로 조직적인 모습과 역할을 수행해 냈고, 뿐만 아니라 마무리 역시 조직적으로 이뤄졌다.
둘째, 들불야학 관련자들의 광주민중항쟁 참여는 두 가지 양상, 즉 선전홍보활동(여러 선전물과 지하신문 투사회보)과 도청지도부 참여와 활동56)을 보인다. 당시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투쟁 전망이 비관적인 정세 하에서 사회인사들의 참여는 기대하기 힘든 상황57)이었기 때문에 광주민중항쟁의 투쟁지도력 형성은 대단히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처럼 항쟁을 이끌만한 지도력이 부재한 현실에서 대중적 지도력 형성 및 조직화를 위한 선전선동작업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도청지도부가 단순 투항 및 수습차원에서 벗어나 항쟁의 정당성 확보 및 민주화투쟁 차원으로 발전과 함께, 윤상원의 지도력 형성 및 강화에 중요한 기반으로 작용하게 된다. 전체적으로 들불야학 관련자들의 활동은 광주민중항쟁에서 들불의 지도력과 조직력, 투쟁력을 보여 주었다.
셋째, 들불야학 강학들은 적어도 1980년 정치공간에서 보여준 학생운동가들의 한계적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1980년의 정치공간에서 학생운동 지도자들은 결정적 국면에서 무력하였다.58) 뿐만 아니라 5‧17쿠데타 이후에 그들은 예비검속을 당하였거나 항쟁의 무대에 서지 못하였다. 이로 인하여 광주항쟁의 시작은 기존 지도자의 부재 속에서 시작되었으며, 전국적 대응 역시 부재하였다. 하지만 들불야학 강학들은 광주민중항쟁을 맞이하여 조직적인 참여와 대응을 해냄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분명히 드러낸다. 우선 강학은 학생운동 출신으로서 학내 동아리 등에서 추천된 활동가이며 야학의 소정 과정을 통해 확정되었다. 그리고 야학활동을 통해 노동계급성을 강화하고 이를 통하여 노동운동 등 민중운동을 지향하는 노동야학 운동가들이다. 때문에 강학들이 비록 학생운동가 출신이지만 노동운동으로의 전이적(轉移的) 매개물로서 노동야학운동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학생운동의 한계는 일정하게 극복된 자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3. 역사적 경험과 교훈
광주민중항쟁은 1980년 민주공간을 마감하는 ‘민주 대 반민주’ 대결의 최후, 최고의 집중적 체험이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민주화운동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의 민중적 정치투쟁으로써 1980년 이후 우리 현대사의 규정자요, 실체적 시대정신이었다.59)
한편 들불야학은 당시 운동여건 하에서 운동방식과 조직적․이념적으로 선진적 운동가 집단이었다. 그 당시 학생운동의 발전 과제가 노동운동과의 만남이라고 보았을 때, 들불야학은 가장 선진적 운동 양식이었으며, 강학들은 투철한 민중지향적 학생운동가들이었다.60)
광주민중항쟁에서 들불야학 관련자들의 활동이 보여준 역사적 경험은 몇 가지 교훈을 제공하였다. 첫째, 광주민중항쟁은 운동가와 노동계급이 결합하여 조직적 투쟁을 전개한 역사적 경험이다. 사실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제기된 산업민주화 과정에서 운동가와 노동계급의 조직적 결합 문제는 우리나라의 민족민주운동의 과제였다. 당시 ‘현장론’, ‘노동야학운동론’은 그런 역사적 요구의 표현이라고 할 것이다. 1980년의 공간에서 이런 요구의 절실함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사북노동자항쟁이다.61) 광주민중항쟁은 ‘현장론’, ‘노동야학운동론’등의 역사적 요구의 반영태인 들불야학과 직접적으로 결합되어 전개됨으로써 향후 노동계급으로 하여금 우리나라 사회운동에서 투쟁의 최전선을 담당할 새로운 역량으로 서게 하는 큰 역사를 창조하였던 것이다.
둘째, 들불야학은 광주민중항쟁의 공간에서 지하신문을 통해서, 그리고 항쟁지도부를 통해서 사회변혁의 역사적 가능태로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들불야학은 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당시 사회운동의 한계 극복에 대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들불야학은 광주민중항쟁을 통하여 1980년 민주주의 공간의 체험이 남긴 내적 추동력으로서, 시대적 과제 극복의 역사적 매개물로서, 한국사회의 운동적 과제를 포섭하고 있는 선진적 운동 양식임을 증거하였다.
Ⅵ. 들불야학의 민족민주운동사적 의의
존재의 문제는 사유와 물운동의 통일이다. 따라서 특정존재에 대한 구명은 존재자에 대한 차이와 관계에 대한 인식이며, 나아가 물의 운동형식에 대한 포착이다.62) 들불야학은 특정시기의 모순 해소를 위한 지식인의 노동계급에 대한 접근 시도요, 운동적 대응물이었다. 이런 모색 노력은 구체적으로 광주민중항쟁을 거치면서 그 역사적 가능성이 검증되고, 그 존재적 의의가 드러나게 된다.
들불야학의 역사적 의의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학생운동과 노동계급과의 만남에 대한 역사적 검증이다. 우리나라에서 학생운동이 역사적으로 나름의 사회운동적 위상과 역할을 갖고 있으나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동력은 기본계급에서 나온다고 하겠다. 기본계급의 동력 위에서 추동되는 사회운동만이 온전히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우리의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학생운동의 개입의 폭이 클수록 변혁의 폭과 정도는 미약할 수밖에 없었고 정치적 변혁이라는 것도 정권교체에 불과하였다.63) 이와 같이 학생운동의 한계는 4‧19혁명공간에서 뿐만 아니라 1980년 정치공간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이런 자기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가 ‘현장론’이라 하겠다. 들불야학은 광주․전남지역 최초의 노동야학으로서 학생운동이 노동계급과의 만남을 통해서 노동자를 의식화하고 이를 통하여 노동계급이 사회변동의 주체로서 자리하고자 하였다. 결국 서울․경기지역을 비롯한 전국적으로 노동자와 학생운동과의 만남 형태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들불야학의 의의를 논하는 것은 들불야학의 노동야학으로서 격변기의 역사공간에 참여와 역할 때문이다.
둘째, 들불야학운동은 학생운동을 고양시켰다. 10‧26공간에서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학생운동이 5‧17쿠데타 공간에서 보인 무력함은 학생운동의 한계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함께 노동계급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낳았다. 특히 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나타난 학생운동의 자기 성찰과 인식은 투쟁과 조직에서 전위성, 민중운동에 대한 중요성으로 나타난다.64) 이런 모색은 광주민중항쟁과 들불야학의 역사적 경험과 교훈에 바탕하고 있다.
셋째, 들불야학운동은 광주민중항쟁의 역사를 통하여 민중이 역사의 전면으로 다가가는 매개로서 민중부문의 활성화와 정치적 진출 등 사회민주화와 역사발전의 가능성에 대한 전망대였다. 사북노동자항쟁에서의 지도자의 부재, 10‧26공간에서 노동계급과 학생운동과의 상호연대 부재라는 한계를 보였으나 광주민중항쟁에서는 들불야학 강학이며 민중운동가인 윤상원, 김영철을 고리로 한 지도부와 일선투쟁조직에서 민중의 조직력과 지도력, 투쟁력을 보여 주었다.
넷째, 들불야학운동은 광주‧전남 민족민중운동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먼저, 광주민중항쟁 이후 광주‧전남지역에서의 노동야학운동을 살펴보면, 광주민중항쟁 패배 후 들불야학은 자신들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재생산의 위기에 빠지게 되고, 결국 1981년 7월 4기 졸업을 끝으로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들불야학운동의 역사적 경험과 교훈은 노동야학운동에 대한 관심 고조로 나타나 광주지역에서는 전남대와 조선대 학생운동가들에 의해 ‘무등야학’과 ‘샛별야학’이 설립되어 노동야학운동을 이었다.
다음으로 광주민중항쟁 이후 학생운동은 광주‧전남지역에서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군사정권의 폭력적 탄압 속에 반성과 패배주의적 침묵이 흐른다. 광주‧전남에서는 들불야학의 졸업강학인 신영일, 임낙평 등은 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기존과는 다른 학생운동론이 필요하다고 보고, 새로운 학생운동론을 담은 ‘반제반파쇼투쟁선언서’를 발표하는 이른바 전남대 81년 9월 시위사건을 주도한다. 이 사건은 5‧18민중항쟁 이후의 학생운동을 지배하고 있던 폭력에 대한 공포와 패배 분위기 청산과 새로운 운동을 전개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를 만든다.65)
한편 광주민중항쟁의 패배의 충격과 군사정권의 폭압 속에 이렇다할 움직임을 보이지 못하고 있던 광주지역의 사회운동은 1984년 11월 도청지도부(정상용, 김종배)와 들불야학(신영일, 정재호), 그리고 전남대(정용화, 송재형)와 조선대(양희승, 장갑수) 출신, 기타(김창중, 이춘희 등)의 청년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청년운동과 지역운동을 결합한 새로운 운동을 모색하는 ‘전남민주청년운동협의회’가 만들어졌다. 이로써 광주민중항쟁 이후 침체되었던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광주‧전남지역에서의 문화운동은 광주민중항쟁에 참여한 「광대」의 대중선전선동활동이 광주민중항쟁 이후 문예운동의 방향과 내용을 규정짓는 중요한 경험이 된다. 이는 민중문화운동론으로 나타나고, 이의 구체적 형태가 소집단운동 및 소극장운동이라고 하겠다. 광주에서는 1983년 소극장․문화기획의 「일과 놀이」가 만들어지고, 1984년 2월에는 극단 「토박이」가 창립된다. 한편 들불야학 문화담당 특별강학이었고 도청항쟁 지도부의 홍보부장이었던 박효선은 광주민중항쟁의 경험과 교훈을 바탕으로 소극장운동과 민중문화운동 발전에 공헌을 하고, 생을 다할 때까지 광주민중항쟁과 들불야학 등의 주제로 광주‧전남지역의 문예운동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광주민중항쟁과 들불야학운동을 교훈 삼아 학생운동권에서는 노동운동 및 ‘현장론’이 강조되어 많은 전남대․조선대 학생들이 위장취업자로 노동현장에 투신함으로써 노동운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처럼 들불야학의 노동야학운동은 강학들의 직‧간접적 관련 속에서 광주전남지역의 민족민주운동 발전의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Ⅶ. 결론
존재와 역사가 우연의 산물이 아니듯 들불야학 역시 우연한 돌출의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가난한 자,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만남을 통해 시대적 모순을 해소하고자 하는 신념과 죽음을 담보한 실천가들의 성과물이었다. 또한 들불야학은 광주‧전남지역 최초의 노동야학으로서 당시 노동계급에 대한 의식화 요구 속에서 탄생한 학생운동의 가장 선진적인 운동태였다. 설립이래 유신체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고 3년여 기간 동안 들불의 노동야학운동은 참여자들의 헌신과 죽음의 투쟁을 토대로 재생산되었고, 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노동야학운동, 노동운동, 그리고 학생운동, 문화운동 등 민족민중운동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였다. 그런 역사적 경험과 교훈은 광주를 비롯한 전국에서 야학운동을 촉발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민중운동선상에서 계승‧발전되어 나타났다.66)
오늘날 우리가 계승해야 할 들불야학의 현재적 정신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본적으로 가난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접근이며, 나아가 그들을 해방시키는 역사를 열기 위한 고민과 실천일 것이다. 고용불안과 실업, 빈부차와 빈곤을 구조화시켜 ‘20:80 사회’로 재편67)해 가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시대에서 들불 정신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들불 열사를 향해 불러대는 산 자들의 초혼가(招魂歌)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회상(回想)인가, 증언인가, 아니면 “역사의 하늘에 희미하게나마 자신의 흔적을 남기며 떨어지는 별”68)들의 이야기인가.
역사란 자연적 흐름이 아닌 오직 주체들의 인위적 포섭 속에서 기억되고 계승될 뿐이다. 들불의 역사 역시 예외일 수 없다. 때문에 산 자의 몫은 엄연하며, 산 자의 삶 또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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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연구는 공동논의 과정을 거쳐 Ⅰ⋅Ⅱ장은 배충진(동아인재대학 사회복지과 겸임교수), Ⅲ장은 이강복(조선대학교 경제무역학부 강사), Ⅳ장은 김경국(여수대학교 중국학과 교수), Ⅴ․Ⅵ․Ⅶ장은 정재호(조선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강사)가 각각 집필하였다. 참고로 필자들 중 배충진, 김경국, 정재호는 당시 들불야학의 강학으로 활동했다.
* 본 연구는 공동논의 과정을 거쳐 Ⅰ⋅Ⅱ장은 배충진(동아인재대학 사회복지과 겸임교수), Ⅲ장은 이강복(조선대학교 경제무역학부 강사), Ⅳ장은 김경국(여수대학교 중국학과 교수), Ⅴ․Ⅵ․Ⅶ장은 정재호(조선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강사)가 각각 집필하였다. 참고로 필자들 중 배충진, 김경국, 정재호는 당시 들불야학의 강학으로 활동했다.1) “들불”이라는 명칭은 야학설립 준비과정에서 동학혁명을 주제로 한 유현종의 소설 “들불”과 미국의 노동운동 비사에 나오는 “들불”이라는 명칭에서 착안하였다.
2)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야학활동안내서」, 1981, pp.4~6.
3) 특별강학 고 김영철의 실태조사에 의하면 ① 노후된 주거시설 ② 아파트 관리부재 ③ 환경오염 공동변소의 악취와 쓰레기 ④ 주민들의 무질서 싸움과 추태 ⑤ 인근 소비업소의 부당한 폭리 ⑥ 헐값인 아파트 권리 임대금 등이 주민들의 주요한 불만요인으로 나타나고 있다. 김영철, “광천시민아파트개발계획”, 1977. 참조.
4) 1980년 1월 5일, “강학회의록” 참조.
5) 들불야학, “광천들불야학”, 1979.7.
6) P. Freire는 기존교육이 교사와 학생 관계를 지배문화의 소산인 “길들임”의 과정으로 보고 일정한 교실에서 일정한 관계를 갖고 지정된 교사가 있어 주입식으로 가르치는 것을 비판하였다. P. Freire. Pedagogy of the Oppressed, Herder & Herder N.Y., 1972.
7) 신영일을 생각하는 모임, ꡔ신영일을 배우자ꡕ, 도서출판 산하기획, 1998, p.117.
8) 신영일, “학당의 내적․외적 현황과 연혁소개”, 「들불문집」 창간호, 들불야학, 1978.
9) 전남사회문제연구소 편, ꡔ들불의 초상ꡕ, 풀빛, 1991, p.122.
10) 박관현, 박용안은 사회조사연구반, 배충진, 고희숙은 성경과 찬송, 김연중 전용호는 가면극연구회를 결성하게 된다.
11) 1979년 4월 14일 강학회의 참조.
12) 1979년 5월 6일 강학회의에서 춘계야유회의 의의를 “학생과 강학들에게 쌓여있는 스트레스를 해소시키고 현재 학당의 침체된 분위기를 살리고 불건전한 관념을 올바르게 인식시키며 우리들만의 갖는 새로운 형태의 야유회를 창조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13) 1979년 5월 23일 강학회의에서는 학교당국에 시한부결정안을 요구하는데 그 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3) 1979년 5월 23일 강학회의에서는 학교당국에 시한부결정안을 요구하는데 그 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1. 4월 이후, 강학들에 대한 야학 탈퇴 압력 및 강학 상호간, 강학과 부모간, 강학과 교수간의 불신과 이간을 조장해온 학교당국의 비교육적 처사에 대해 해명해 달라. 2. 문제집단, 불온써클, 외부의 조종을 받는 조직 등 들불야학에 쏟아진 터무니없는 비난을 중지하도록 요구하며 그에 대해 해명해달라. 3. 학생활동에 대해 학교당국은 학생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들불야학에 대한 관계당국의 사찰이 중지되도록 우리를 대변해 달라. 4. 4월 이후 강학들은 고통과 번민 속에서 학과공부마저 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 문제학생이라는 오명을 벗어버리고 열심히 학문탐구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달라. 마지막으로 우리는 계속해서 야학 강학으로서의 임무를 다할 것이다. 총장직권 휴학결정을 취소해 달라.“ 전남사회문제연구소 편, ꡔ들불의 초상ꡕ, 풀빛, 1991, pp.140~141.
14) 1979년 5월23일 강학회의록 중에서 재정리.
15) 학당의 재정은 대부분 강학회비, 카드판매, 문집판매, 기타(일일다방, 졸업강학 기금)등으로 충당되었다.
16) 이때 새롭게 편성된 강학은 그 동안 대기강학이었던 박효선, 서대석, 정재호, 김경옥, 동근식, 김경국, 오흥상, 이영주, 이성애 등이 강학으로 승진되었다. 그리고 기존 강학에는 윤상원, 박관현, 임낙평, 박용안과 특별강학인 김영철, 박용준이 있었다.
17) 1980년 4월 21일 “강학회의록”에서 발췌 정리.
18) 이에 대한 내용은 신영일을 생각하는 모임 펴냄, 앞의책(1998), pp.134~136을 참고하기 바람.
19) 또 본 논문 외에 들불야학이 광주민중항쟁 과정에서 “투사회보”를 작성하게 되는 경위와 과정은 전남사회문제연구소 편, ꡔ들불의 초상ꡕ, 풀빛, 1991, pp.256~278을 참조하기 바란다.
20) 당시 사망한 사람은 2기 강학 고 윤상원, 특별강학 고 박용준이었고, 구금당한 사람은 특별강학 고 김영철, 1기 학생 나명관, 3기 학생 윤순호, 3기 학생 김성섭 등이었다. 그리고 지명수배된 사람들은 3기 강학 고 박관현, 특별강학 고 박효선, 3기 강학 정재호, 2기 강학 전용호, 3기 강학 김경국, 3기 강학 서대석, 3기 강학 이영주, 3기 강학 동근식, 1기 학생 신병관, 3기 학생 오경민 등이었다.
21) 1979년도 8월 22일자 “강학회의록” 참조.
22) 1979년도 4월 21일자 “강학회의록” 참조.
23) 신영일 강학의 “학당의 내적․외적 현황과 연혁소개” 참조, 들불문집 창간호
24) 전남사회문제연구소 편, 앞의책(1991), pp.92~193.
25) 전남사회문제연구소 편, 앞의 책(1991), p.114.
26) 1979년도 4월 21일자“강학회의록” 참조.
27) 1979년 10월 21일 광주효광여중에서 실시된 ‘제2회 들불야학 체육대회’ 선수선언문 제3조 내용.
28) 들불문집 제3호, 1기생 조순임의 ‘들불과 나의 만남’중에서.
29) 1979년 7월 3일자 “강학회의록”에 있는 들불인의 선서내용: 1. 우리는 우리들에게 부여된 역사적 소명을 저버릴 수 없다. 2. 우리는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우리에게 주어진 질곡의 역사를 꿰뚫고 나갈 것을 다짐한다. 3. 우리는 들불인으로서 끝까지 민족민중해방, 인간해방의 새날을 위해 싸울 것을 선서한다.
30) 들불문집 제3호, “좌담회”중 2기생 최광남의 말.
31) 들불문집 제3호, “좌담회”중 1기생 신일섭의 말.
32) 1979년 1월 16일 강학회의록 참조.
33) 1978년 12월 24일 저녁 공연.
34) 1979년 8월 18일, 제1기 진입식 및 3기 입학식 기념 집체극.
35) 들불문집 창간호 “격려사”중에서.
36) 1979년 7월 3일자 강학회의 참조.
37) 들불문집 제3호, ‘들불체육대회 행사보고’내용중에서.
38) 편집부, “10‧26이후 정세대응을 둘러싼 논쟁,“ ꡔ학생운동논쟁사ꡕ, 일송정, 1988, pp.11~13.
39) 전남사회문제연구소 편, 앞의 책(1991), pp.105~106.
40) 1980년 4월 12일 강학회의에서 논의된 강학의 입장 정리를 살펴보면, 회의에 참석한 박관현은 야학수업을 계속하고싶다는 희망을 피력하였으나 야학과 학교(전남대)를 위해 그만 두는 것이 좋겠다는 결정이 났다. 그리고 1980년 4월 21일 임시긴급회의에서 다뤄진 '강학자세문제'에 대한 내용을 통해서도 잘 나타나 있다. "강학토의일지".
41) 1979년 12월 29일 금요일에 있었던 강학토의 일지를 살펴보면, 이날 토의는 Training형태로 진행되며, 현임강학은 물론 졸업강학까지 참석한 야학 전반에 대한 토의가 있었다. 그리고 중요한 의제가 있을 경우 현임강학은 물론 졸업강학들도 모두 참석한다.
41) 1979년 12월 29일 금요일에 있었던 강학토의 일지를 살펴보면, 이날 토의는 Training형태로 진행되며, 현임강학은 물론 졸업강학까지 참석한 야학 전반에 대한 토의가 있었다. 그리고 중요한 의제가 있을 경우 현임강학은 물론 졸업강학들도 모두 참석한다.Training 계획의 내용을 보면, <의제 : 토의내용> ㉠ 수업 반성-각 담당강학 ㉡ 전체 평가-박관현 ㉢ 야학의 방향-임낙평 <내용> ㉠ 전체평가-1, 3기 수업목적 달성 여부 및 1, 2기 수업 방향 ㉡ 야학의 방향-현 일반적 상황에 비추어 올바른 방향 ㉢ 수업반성. 1979년 12월 29일 “강학토의일지”에서.
42) 박관현이 전남대학생운동권의 학생회장선거 참여요구를 받는 시기에 들불야학의 10‧26정변이후 학생운동에 대한 입장정리는 이미 끝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박관현의 학생운동에의 참여는 개인의 자발적인 참여가 아닌 전남대의 학생운동권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전남사회문제연구소 편, 앞의 책, p.187 ; 임낙평, 『광주의 넋 박관현』, 사계절, 1987, p.84.
43) 전남사회문제연구소 편, 앞의 책(1991), p.212.
44) 1980년 5월 17일(土) 강학회의에서는 다음날 실시할 가정방문에 대한 의제가 잡혀져 있다. 의제: 가정방문, seminar, 장소, 학생, 수업문제. “강학회의록”중에서.
45) 전남사회문제연구소 편, 앞의 책(1991), p.232.
46) 투사회보 참조.
47) 들불 강학과 학생 중에서 투사회보와 관련하여 최초 조사를 받은 당시 3기 강학 김경국의 증언에 따르면, 들불야학과 투사회보 제작 배포 참여자를 보호하기 위한 고육책으로 지하유인물과 투사회보의 작업지시, 문안작성, 작업방식, 참여자 수, 인쇄 매수와 배포 등에 대하여 고의적으로 이미 사망한 자, 체포된 자, 또는 수사기관에 이미 드러난 자에게 책임을 떠넘겼고, 인쇄 매수도 대폭 축소해서 진술했다고 한다. 그 결과, 투사회보 제작과 배포에 참가한 양숙경, 노영란 등이 무사히 수사망을 피할 수 있었다. 사실 여러 가지 지하유인물과 투사회보의 제작 배포는 윤상원을 중심으로 참가자 전원이 공동 논의와 집단작업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지, 당시 급박한 상황과 부족한 인원을 감안할 때 문안작성조, 필경조, 물자보급조, 배포조 등의 역할 분담은 불가능했고, 인쇄량도 투사회보 매회당 최소 1만부에서 1만5천부 정도 되었다. 그러므로 각종 유인물마다 필경자가 최소 2~4명이었고, 필경에는 박용준과 동근식 외에도 이영주와 김경국 강학도 일부 참여한 것으로 드러났다.
48) 1980년 5월 19일 윤상원은 시위투쟁의 조직적 홍보를 위해 오전 중 정재호, 서대석 등 강학과 은밀하게 전단작업을 시작하였다. 전남사회문제연구소 편, 앞의 책(1991), p.332.
49) 전남사회문제연구소 편, 앞의 책(1991), pp.332~333.
50) 당시 선전작업에 직접 참여한 3기강학 김경국의 증언.
51) 당시 3기강학 정재호의 증언
52) 당시 들불 1기학생 나명관의 증언
53) 전남사회문제연구소 편, 앞의 책(1991), p.257.
54) 윤상원, 김영철이 광천동의 작업현장에 나타나 이제 더 이상 광천동 들불야학에서 지하신문을 제작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했다. 왜냐하면 기존과는 성격이 다른 새로운 도청항쟁지도부가 수립되어 모든 선전홍보물을 도맡아 제작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였다. 3기 강학 김경국의 증언.
55) 당시 3기 강학 김경국 증언.
56) 윤상원, 김영철, 박효선의 도청지도부 활동, 광천동과 YWCA에서의 선전홍보활동, 도청 내 기타 업무에의 참여 등.
57) 김세원, ꡔ비트ꡕ 하, 일과 놀이, 1993, pp.314~315.
58) 서울역 회군을 둘러싼 학생운동권내의 논쟁, 광주민중항쟁과 관련한 무림‧학림논쟁. 편집부, 앞의 책(1988), pp.26~34.
59) 정재호, “광주민중항쟁과 21세기 한국민주주의”, 정재호․이강복 외, ꡔ광주민중항쟁과 21세기ꡕ, 이바지, 2000, p.86.
60) 들불야학 강학들의 성향을 잘 보여주는 한 사례를 들어보면, 들불야학출신으로서 1980년 당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은 도피 중 ‘박건욱’이라는 가명으로 서울의 한 요코공장에 취업하여 다른 노동자들과 합숙하면서 노동자생활을 하였다. 박관현의 이런 모습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이는 들불야학운동의 영향이라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도피 중 박관현의 모습은 들불야학운동이 추구하는 야학이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고 박관현의 공장생활과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전남사회문제연구소 편, 앞의 책(1991), pp.126~129.
61) 1980년 4월에 발생한 사북노동자항쟁은 그 역사적 의의에도 불구하고 항쟁을 이끌어 나갈 지도자의 부재가 패배의 중요한 원인이었다. 김장완 외, ꡔ80년대 한국노동운동사ꡕ, 조국, 1989, pp.31~32.
62) 김홍명, ꡔ자본제시대의 사상ꡕ, 창작과비평사, 1993, p.14.
63) 김동춘, ꡔ한국사회과학의 새로운 모색ꡕ, 창작과비평사, 1997, p.126.
64) 학생운동권은 1980년 12월 이후 소위 무림‧학림논쟁이라는 이름으로 논쟁을 전개하여 1984년 이후 소위 깃발-반깃발 논쟁까지 이어진다. 편집부, 앞의 책(1988), p.29.
65) 신영일을 생각하는 모임, 앞의 책(1998), pp.137~144.
66)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분석과 평가를 둘러싼 학생운동의 무림‧학림논쟁
67) 한스 피터 마틴(Hans-Peter Martin), 하랄드 슈만(Harald Schumann), ꡔ세계화의 덫 : Die Globalisierungsfalleꡕ, 영림카디널, 1997, pp.26~27.
68) 멕시코 자빠띠스따(Zapatista) 민족해방군(EZLN) 부사령관 마르코스가 어느 행군도중에 자신을 향해 행한 독백의 일부. 마르코스, ꡔ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 Our word is our weaponꡕ, 해냄, 2002, p.4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