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으아리
양문규
타박타박 천태산을 내려오다 큰소리를 만났어요
그 소리는 스스로 꽃이라 말하지 않았지만
으아리, 어떤 말보다 단아한 죽비
내가 세상에 첫 발 내딛었을 때
당신을 보지 않았어도
열엿새 달빛만큼 동그랗던 관음(觀音)
천 년 은행나무 그늘 아래에서 들었지요
거북바위와 고라니와 산방과 배나무집을 두고 떠나는 발소리
첩첩 가시가 빽빽이 박혀있지만
저녁노을 안고 더 붉은 아침 해 걸려있듯이
뽀얀 입술 속에 제 집이 들어있어요
설령 흔적 없이 사라진 무늬라 해도
그 뿌리는 나무그늘보다 한참 더 깊은 걸요
삐끗해 어긋난 발목 주무르며 땅 끝을 향해
으아리, 거기 그렁저렁 내가 살아요
꽃보다 하얀 당신의 마음
―『불교문예』(2016, 여름호)
탱자나무 여자
양문규
오래된 과수원을 지나다 온몸에 가시 두른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가시나무새보다 작은 깃털을 매달고 있었다 가시 끝에는 하얀 눈물 빛이 선명하였다 칼바람에 깃든 뼈마디 마디가 아픈 여자
사람들이 여자를 꺼려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가시나무새는 단 한 번의 사랑을 위하여 심장을 가시에게 내어주고 죽어간다지 늙어가면서도 여자는 지상의 방 한 칸 붉게 물들이지 못한 채 가시철망보다 날카로운 입술 앙다물고 울타리 너머 손톱을 세우고 있었다
여자는 한때 과수원 꽃길을 따라 온종일 푸른 벌판을 바람처럼 떠돌았으리라
너무 많은 날을 과수나무 울타리로 살았다 멀고 먼 길을 돌아 울타리가 되면서부터 여자는 달빛 가시가 되었다 어느 새 나도 탱탱, 가시가 되어 늙어가고 있었다 울타리가 제 운명이라는 걸 너무도 오랫동안 감추고 있었다
가시 울타리 너머 나를 겨누다 이루지 못한 사랑, 다시 불러본다
노루귀
한겨울 내내 봄을 듣고 싶었다
오랫동안 귀 기울였던 전화벨이
산수유 꽃 바퀴를 굴리며
산방에 쪼르릉 달려오자
청보라 꽃들이 긴 꽃대를 따라 하늘로
귀를 내고 있다
이윽고 내 몸속에도 소리가 찾아왔다
―『작가와사회』(2016, 여름호)
길
양문규
불러본다
벼꽃 바람에 살랑대며 메뚜기 살찌우는 논두렁길
콩꽃 비린 살 냄새 풍기면서 콩새에게 양식 내어주는 밭두렁길
참개구리 뒤를 따라 배암이 스스륵 스쳐가는 둑길
철 따라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눈이 오는 길
날이 밝으면 새가 울고 벌 나비가 너나없이 화류(花柳) 이루는 길
하루살이 떼 구름처럼 날아다니는 길
아침부터 멍멍이와 동네 꼬마들이 어우러져 똥을 싸고 오줌 내갈기는 고샅길
엄니와 고모 몸빼 치마 걸쳐 입고 소쿠리 그득 나물 캐는 비탈밭길
아버지와 삼촌 지겟작대기 장단에 쾌지나칭칭 힘을 얹어 오르는 나뭇길
쇠똥구리 한가로이 쇠똥 속에서 빵을 굽는 들길
꾀꼬리 긴 울음으로 사랑을 애원하며 펄펄 나는 숲길
멧돼지 한밤중에도 두 눈을 딱 감고도 식탁 가득 채우는 산길
할아버지 막걸리 한잔 걸치고 망태 어깨에 맨 채 어정어정 걸어가는 꼬부랑길
할머니 큰아버지 내외 들밥 지어내기 위해 오르내리는 텃밭 뒤안길
아들 딸내미 꽃바구니 옆에 끼고 날다람쥐 따라 꿈을 따는 언덕 너머 꽃길
대답하지 않는다
소똥
소똥은 어디로 굴러갔나
아주 오래전 내가 나락꽃이 활짝 핀 날망집 다랑이 논 지나갈 때
송아지가 딸린 어미 소가 음매 하며 질펀한 한 무더기 똥을 퍼질러 놓고 있었다
소똥 속에는 할배의 짠 눈물보다 나락꽃이 향기롭게 폴폴 배어있었다
얼마 전 내가 천 년 은행나무 옆 배나무집 비탈밭 지나갈 때
절간 진돗개 한 마리 컹컹 짖으며 마른 생똥을 싸질러 놓고 있었다
개동 속에는 개밥그릇보다 못한 잿밥내만 솔솔 풍기고 있었다
천태산에는 소똥이 없다
―『계간문예』(2016, 여름호)
* 양문규
충북 영동 출생. 1989년 『한국문학』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벙어리 연가』, 『영국사에는 범종이 없다』, 『집으로 가는 길』, 『식량주의자』. 산문집 『너무도 큰 당신』, 『꽃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론집 『풍요로운 언어의 내력』. 논저 『백석 시의 창작방법 연구』 등. 현 계간 『시에』, 반년간지 『시에티카』 발행인. 천태산 은행나무를사랑하는사람들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