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물결플러스라는 출판사에서 논란이 되는 하나의 신학적 주제를 놓고 벌이는 논쟁을 ‘스펙트럼’ 이라는 제목의 시리즈로 펴내고 있습니다. 역사적 예수와 칭의, 아담의 역사성에 이어 네 번째로 펴낸 <창조 기사 논쟁>을 읽었습니다.
서문에 실린 한 문장이 참으로 옳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서는 영감되었으므로 무오성을 확신하지만, 각자의 성서 해석은 영감되지 않았으므로 오류가 없을 수 없음을 인정한다.”
창세기의 창조 기사인 1장(1:1~2:4전)과 2장(4후~25)의 해석을 둘러싸고 구약성서 학자 다섯 분이 논쟁을 펼칩니다.
성서와 과학의 관계를 갈등/독립/대화/통합 모델로 설명합니다. 성서 말씀에 따른다고 하는 이른바 '젊은 지구 창조론'을 놓고, 과학 쪽에서 갈등 모델은 성서는 그르고 과학이 옳다는 것이고, 성서 쪽에서 갈등 모델은 과학은 그르고 성서가 옳다는 것이지요. 나머지 세 모델은 성서와 과학은 별개의 영역이라는 입장인데, 이는 다시 별개이므로 상관하지 않는다는 독립 모델, 별개지만 대화한다는 대화 모델, 별개지만 통합을 꾀한다는 통합 모델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인간을 구성하는 성분 중 물이 70퍼센트를 차지한다고 하여 사람을 가리켜 “물” 이라고 말하지는 않듯 모든 게 과학으로 환원될 수는 없고, 그 역도 마찬가지로 서로 독립적이라고 봅니다. 무신론자들은 진화론을 들어 “그러므로 신이 창조한 게 아니라 우연히 생긴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진화론 자체와는 관계가 전혀 없는 진화론에 대한 해석, 세계관(진화주의)의 영역이라고 봅니다. “무신론자들이 과학을 활용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듯, 유신론자들이 과학을 활용해 신이 존재한다는 걸 입증할 수는 없다”는 말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 책은 과학은 그르고 성서가 옳다며 문자적 해석을 주장하는 한 분과 성서와 과학은 별개의 영역이라는 입장을 취하는 네 분들의 논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네 분들의 결-상호텍스트성과 배경, 문맥에 따른 해석-유비, 창세기 1-2장이 주는 교훈(혹은 교훈이 아닌 것), 고대 우주론을 반영하는 창세기 1장-은 조금씩 다릅니다.
이 책은 세미나 내용을 옮긴 것으로 청중이 다 알고 있다는 걸 전제로 기본 개념에 대한 설명 없이 다섯 분이 논쟁을 합니다.
역사비평학을 수용하지 않는 분들은 창세기를 모세가 쓴 경전(모세 5경 : 창세기~신명기)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시고 역사비평학을 수용하는 분들은 모세가 쓴 경전이 아니라고 생각하십니다.
이들은 모세는 주전 1,500년대에 살던 사람인데, 5경에 쓰인 히브리 말/문자는 주전 1,000년 이후에나 생겼다는 점을 그 근거로 내세웁니다. 주전 1,500년대에 살던 모세가 어떻게 주전 1,000년 이후에나 생긴 히브리 말/문자로 성서를 쓸 수 있다는 얘기냐고 반박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창세기 12~50장(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 이야기)은 연대기적으로 일어난 일에 대한 서술(History)이지만 1~11장(천지창조, 인간의 타락, 가인과 아벨, 노아와 홍수, 노아의 축복과 저주, 바벨 성)은 신앙고백적인 해석사(Geschichte)/신학적 역사라고 보아 원역사라고 부릅니다.
이들처럼 창조 기사를 원역사로 보고 읽지 않고 연대기적 서술로 읽는다 하더라도 1장(1:1~2:4전)과 2장(4후~25)을 보면 이상한 느낌을 받게 마련입니다. 1장에서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지 엿새째 되던 날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고 했는데, 2장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느님이 사람을 창조하시는 얘기가 또 나오기 때문입니다. 1장에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고 했는데 2장에서는 남자를 창조하셨다, 나중에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역사비평학을 수용하지 않는 분들은 1장에서 끝난 얘기가 2장에서 새로 시작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장은 1장에서 끝난 얘기를 다시 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하는 것이라는 점을 나타내기 위해 2장 동사의 원어의 시제가 과거인 걸 과거완료로 바꿔가면서까지 번역했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2장 19절은 본래 ‘주 하나님이 들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를 흙으로 빚어서 만드시고’인데 영어 성서 중 보수적인 번역으로 유명한 새국제역(NIV : New International Version)은 1장에서 이미 창조하신 것을 2장에서 또 창조하셨다고 하면 말이 되지 않으므로 ‘만드시고’를 ‘만드셨고’로 바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과거로 돼 있는 시제를 과거완료 시제로 옮김으로써 이 문제를 벗어나려 했지만 역사비평학을 수용하는 분들은 이렇게 옮긴다고 해서 이 문제를 가릴 수는 없다고 봅니다. 우리말 번역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히브리 말로는 창세기 1장과 2장의 하느님 호칭이 다르다고 합니다. 1장에서는 보통명사인 하느님(엘로힘)으로 부르지만, 2장에서는 고유명사인 야훼(YHWH)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호칭의 차이가 아니라 편집자가 각각 다른 시대에 살던 저자(들)이 지은 두 가지 자료를 하나로 합친 증거라고 구약성서 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이를 문서 가설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이른바 ‘모세 5경’은 바벨론 포로기(주전 587-538년)에 이스라엘에서 바벨론으로 끌려간 제사장(그룹)이 400년 넘게 전해져오던 문서들을 편집해 하나의 5경으로 만든 것으로 봅니다. 주전 960년 다윗-솔로몬 왕 시대에 남쪽 유다에서 편집된 J문서, 통일 이스라엘이 분열된 주전 920년 북쪽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1세 때 편집된 E문서, 사마리아 멸망 후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이 남쪽 유다로 피난하면서 히스기야 왕 시대(주전 721-694년)에 통합된 JE문서, 요시야 왕 시대(주전 639-609년)에 편집된 D문서에다 그(들)의 P문서를 결합해 최종 완성한 게 5경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신명기만 별도이고 창세기부터 민수기까지 4경에는 창세기 1장과 2장처럼 서로 다른 문서를 골고루 편집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이므로 내용으로는 1장이 2장에 앞서지만 저작 연대로 보면 하느님을 야훼로 부르는 2장(J문서)이 하느님을 그저 하느님(엘로힘)으로 부르는 1장(E문서)보다 40년, 편집된 P문서를 기준으로 하면 400년 앞선다고 봅니다.
‘노아와 홍수’와 관련해 방주가 아무리 크다 한들 방주 하나에 지구상의 모든 생물을 과연 다 담을 수 있었겠느냐는 의문도 제기하지만, 그것은 그만두고라도 6장 19절에 따르면 “암수 한 쌍씩” 이끌어 들였다고 하고 7장 2절에 따르면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짐승은 암수 둘씩” 이끌어 들였다고 하여 서로 다르게 기술돼 있습니다. 이는 5경의 편집자인 제사장(그룹)이 그(들)의 P문서와 J문서 두 자료들 가운데 하나로 통일하지 않고 그대로 옮긴 것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수많은 구절들의 하나입니다. 구약성서 학자들은 “암수 한 쌍씩”은 P문서에 따른 것이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짐승은 암수 둘씩” 은 J문서에 따른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거칠게 말하면 마태/마가/누가/요한(공동체)이 각각 전한 복음서가 있는 것처럼 5경 또한 신명기를 제외하고 J가 전한 4경, E가 전한 4경, JE가 전한 4경으로 여러 가지 4경이 나올 뻔 했는데, 이처럼 제사장(그룹)이 세 문서에다 그(들)의 P문서와 신명기를 편집하여 하나(의 5경으)로 완성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정확한 저작 연대와 주체(저자)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제사장(그룹)이 여러 문서를 편집한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이러한 역사비평학적 해석은 성서의 권위를 떨어뜨리지 않습니다.
다섯 가지 주장 가운데 넷째 장인 ‘창세기 1-2장이 주는 교훈(혹은 교훈이 아닌 것)’이 가장 와 닿습니다.
창세기의 저자(들)은 애시당초 창조의 순서나 연대를 알려주려는 의도가 없었고, 창조주인 하느님과 인간, 창조주와 피조 세계 사이의 올바른 관계에 관한 신학적 가르침을 담으려 했으므로 교훈이 아닌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주시는 교훈이 뭔지를 살펴야 한다고합니다.
해와 달을 신으로 섬기던 시대에‘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라는 말을 굳이 씀으로써 해와 달은 피조물에 불과하고 온누리의 창조자는 하느님뿐이심을 선포했고, 고대 근동에서 왕에게만 부여하던 ‘하느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을 하느님이 사람에게 부여하셨다고 한 것은 하느님이 사람을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평등하게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대신해 피조 세계를 다스리는 동역자로 삼아 주셨음을 고백한 것으로 이는 모두 당시로서는 놀라운 선언이었다는점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로교인의 질문과 답변>이란 책의 한 대목이 이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 옮깁니다.
아담과 하와를 문자대로 믿나요?
어떤 이들은 믿고, 어떤 이들은 믿지 않는다. 수 세기 동안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창세기의 앞부분에 이야기된 아담과 하와를 실제 역사적 인물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성서학자들이 18세기 이후부터 성서 내 글들의 성격을 좀 더 분명히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사태가 바뀌었다. (중략) 성경의 모든 문서들이 다 역사적으로 또는 문자 그대로 해석될 것을 의도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비유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진리들을 전달하는 데 있어서 그 내용이 역사적, 문자적으로 사실이든 그렇지 않든 별 상관이 없다.
유사하게 성서학자들은 우리가 창세기의 앞부분 장들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널리 순환되던 이야기들로서 세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 그리고 인간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기록된 것임을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 이야기들이 전달하려고 하는 내용의 진리는 신학적 진리이다. 그것이 꼭 역사적 진리이어야만 할 필요는 없다. 이 이야기들의 신학적 목적은 인간이 누구인지, 세계와 만물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 그리고 모든 피조 질서가 창조주와의 관계 속에 위치해 있다는 점 등을 이해하는 한 방식을 제공해 주는 데에 있다. 창세기 앞부분의 사건들이 문자적으로 해석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이 진리들은 타당성을 갖는다.
그렇듯이 어떤 장로교인들은 아담과 하와가 실제의 역사적 인물이었음을 믿을 것이다. 또 어떤 장로교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쪽에 서 있든지 간에 창세기의 이야기들이 전달하려고 하는 진리들은 깨달아서 믿어야만 한다.
구분
시기
신
예
이름
번역
J문서
주전 960년
통일 이스라엘
다윗-솔로몬 왕
YHWH
엘로힘
여호와(개역) 하나님
←YaHoWaiH
창세기 2장
야훼(공동) 하느님
←YaHWeH
주 하나님(새번역)
E문서
주전 920년
분열 후
(북)이스라엘
여로보암 1세
엘로힘
하나님(개역, 새번역)
창세기 1장
요셉 이야기
하느님(공동)
JE문서
주전 721-694년
이스라엘 멸망 후
유다 히스기야 왕
D문서
주전 639-609년
이스라엘 멸망 후
유다 요시야 왕
신명기
여호수아기
사사기
사무엘기
열왕기
P문서
주전 587-538년
바벨론 포로기
제사장 그룹
엘 샷다이
전능하신 하나님
(개역, 새번역)
창세기 1장
출애굽기 25~40장
레위기
민수기
전능하신 하느님
(공동)
아놀드 로드스 지음, 문희석/황성규 옮김 <통독을 위한 성서 해설> 대한기독교서회 1977
김이곤 지음 <신의 약속은 파기될 수 없다-창세기의 현대적 이해> 한국신학연구소 1979
박준서 “포로기의 역사와 제2의 출애굽”, 김찬국 “구약성서의 창조 신앙” 월요신학서당 편 <새롭게 열리는 구약성서의 세계> 한국신학연구소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