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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리더십을 연제하며........
참된 지도자가 그리운 순간이다.
아마 우리 역사상 최고의 지도자는 단연코 이순신(1545~1598)일 것이다.
1598년 음력 11월 19일 겨울 바닷바람 속에서 전사했다.
마침 12월 17일이 기일이다.
공(公)의 영전에 삼가 머리를 조아리는 바이다.
그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해(1592년) 정월 초부터 순국 이틀 전까지 거의 7년 동안 일기를 썼다.
일기에는 원래 ‘임진일기’ ‘병신일기’ 등 연도별로 그 해의 갑자명이 붙어 있었다.
그러다가 1795년 정조의 명(命)으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가 간행될 때,
일기 전체를 ‘난중일기(亂中日記)’라고 명명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난중일기’는 언뜻 보아 무미건조하다.
날씨만 달랑 적은 날도 있고,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가 전부인 날도 있다.
워낙 핵심적인 사안만 적다 보니 날짜별로 분량이 그리 길지도 않다.
또한 그의 글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간결하다.
단 몇 장만 넘겨 보아도 그가 얼마나 정갈하게 정돈된 사고의 소유자인지 알 수 있다.
이순신은 흔히 성웅(聖雄)이라고 불린다.
이로 인해 ‘수루(戍樓)에 홀로 앉아’ 자나 깨나 나라만 걱정한 초인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는 비범한 능력을 발휘했다. 무엇보다 공적(公的) 의식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발포(鉢浦·오늘날 고흥) 수군 책임자 시절, 전라좌수사가 거문고를 만들겠다며
관아 마당의 오동나무를 베어오라고 명했다. 그
러나 그는 그것이 나라의 물건임을 들어, 직속상관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자나 깨나 나라만
걱정한 초인 같은 이순신,
실제로 비범한 능력을 발휘
모든 해전에서 단 한 번도
패한적 없는 건
전쟁사에 유례가없는 일
당시 군인들에게 활은 기본 병기였다.
그는 자신이 장군이라 하여 결코 활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전라우수사와 함께 활을 쏜 날, ‘그가 아주 형편없으니 우스운 일’이라고 걱정했다.
그는 주변사람들을 애틋하게 대했지만, 직무를 태만한 관리들을
단호하게 처벌하고 악질적 범죄에는 극형도 불사했다.
그는 자신이 솔선수범하며 항상 엄정한 군기를 강조했다.
그가 탁월한 전략가라는 점은 굳이 언급하기조차 민망하다.
그는 지리와 기후를 토대로 그때그때 적합한 전략을 세웠다.
일정한 전과를 올리면 무리한 추격을 자제하는 등 전장(戰場)을 냉정하게 관리했다.
전투 후에는 반드시 안전한 정박지를 골라 휴식했다.
그는 수십 차례 크고 작은 해전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전쟁사에 유례가 없는 일이다.
또한 그는 우리 역사상 보기 드물게 정보에 민감한 장수였다.
척후선과 척후병을 적극적으로 운영했다.
현지 사람들의 말이나 왜군에 잡혔다가 도망온 사람들의 말을 경청했고,
투항해 온 왜인들도 적절히 활용했다.
군중(軍中)에서 잔치를 벌일 때도 먼저 주위의 척후태세부터 점검했다.
하지만 확실치 않은 정보나 잘못된 정보는 세심하게 분별했다.
정유재란 때 조정은 일본 첩자의 거짓정보에 속아 이순신에게 출동 명령을 내렸다.
부산 쪽으로 가서 도해(渡海) 중인 적장을 공격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정보를 신뢰하지 않아 출동하지 않았다.
이것이 나중에 한양으로 끌려가 투옥되고 죽을 위기에 처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때론 왕명(王命)도 거부할 만큼 소신과 강단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포용적 리더십은 깊이 내면화된 인간적 품격에서 우러나왔다.
그것은 요란하지 않고 은근했다.
그는 수시로 사람들을 불러 밥도 먹고 술도 마셨다.
집무실을 개방하여 다양한 의견을 청취했다.
처사가 공정하여 어디를 가나 장병들과 백성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함거(檻車)에 실려 한양으로 끌려갈 때, 수많은 백성들이 몰려나와 울부짖었다.
이처럼 그는 ‘성웅’이라는 칭호에 걸맞은 비범함을 가졌다.
그러나 동시에 보통 사람의 정서와 한계를 지닌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기도 했다.
자주 병치레를 했고, 늘 가족 걱정에 애를 태웠다.
주변 사람들의 일에도 세심한 애정을 보였다.
또한 거의 강박증 수준으로 정적(政敵)을 공격했다.
백의종군 시 어느 지방관의 홀대를 못내 서운해 하기도 했다.
그의 몸은 수시로 아프고 불편했다.
가끔 땀을 흘려 옷과 이부자리를 흠뻑 적셨다.
코피를 한 되 이상 흘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을 응대하며 술을 마셔야 했다.
또한 1592년 당포해전에서 ‘왼편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등으로 뚫고 나갔다’.
이 총상이 곪아터져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다.
이래저래 그는 무쇠같은 강건함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또한 그는 여느 필부(匹夫)와 마찬가지로 늘 가족을 걱정했다.
피붙이와 종을 수시로 고향에 보내 홀어머니의 안부를 알아보았다.
사정이 허락되면 자기가 직접 달려갔다.
‘하루 내내 노를 바삐 저어’ 병환 중인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밤새 위로하며 기쁘게 해드렸다’.
어떤 때는 ‘적을 토벌하는 일이 급해서 오래 머물지 못했다’.
언젠가 아내의 병세가 위증하다는 전갈을 받자
‘아들 셋과 딸 하나는 어찌 살아갈꼬?’라고 탄식했다.
가족에 대한 애절함은 셋째 아들 면(葂)의 전사 소식을 접하며 절정에 달했다.
약관 20세의 청년이 고향에 침입한 왜군과 분연히 맞서다 전사한 것이다.
그는 ‘너를 따라가고 싶지만 남아 있는 식구들을 생각해 참을 뿐’이라고 오열했다.
그는 처음에는 원균(元均)과 합동작전을 벌여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시기심, 술주정, 여색(女色) 등 원균의 탈선을 목격하며 차츰 사이가 벌어졌다.
그는 곳곳에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원균에게 원색적 비난을 퍼부었다.
원균은 조정의 당파 분쟁을 이용해 수시로 그를 흔들었다.
아마 그는 이런 부당한 현실에 대해 울분을 토한 듯하다.
그를 전라좌수사로 추천한 것이 바로 유성룡이다.
감옥에서 풀려난 다음날, 그는 ‘어두울 무렵 성 안으로 들어가
정승과 이야기하다가 닭이 울어서야 헤어져 나왔다’.
그에게 적대적인 조정에서 유성룡은 거의 유일한 지지자였다.
이순신이 차가운 겨울바다에서 전사한 바로 그날,
얄궂게도 유성룡은 조정에서 쫓겨났다.
그는 낙향하여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이순신은 결코 타고난 성웅이 아니다.
과거(科擧)도 서른둘에 합격했다.
그는 평범한 인간이 부단한 단련과 절제를 통해 비범함에 이른 인물이다.
그만큼 그의 인간적 공감의 폭이 넓고 깊다.
그는 가족 걱정으로 애를 태우는가 하면, 나라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렇다고 사(私)로 말미암아 공(公)을 그르친 적은 결코 없다.
이처럼 소탈하면서도 균형 잡힌 품성이 바로 그의 강인한 정신력의 바탕이 된 것이다.
하지만 왕조시대에 국왕과 불화를 겪으며 전쟁을 치르기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랴.
‘난중일기’는 거친 세파(世波)를 막아내기 위해 그가 밤마다 홀로 쌓아올린 방파제이다.
붓을 붙들고 마음을 다잡으려고 애쓰는 공(公)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가슴이 먹먹하다.
[이순신 리더십] [1]
출세 늦은 초라한 武將? 선조가 알아본 救國의 재목
2017년 대선을 통해 등장할 새 리더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무엇인가.
정유재란이 나던 1597년 13척 배로 명량해전 승리를 이끈 이순신 장군은
420년이 지난 지금도 불멸의 존재감을 지니고 역사의 하늘에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순신의 시대에나 오늘날의 우리 시대에나 늘 절박하게 사회 구성원들을 다그치는 물음이 있다.
'참된 지도자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
그것이 사회의 발전과 건강함을 견인하는 기본조건이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리더십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통해서 그 문제를 명쾌하게 추적해보기로 한다.
현재 국민 대부분이 알고 있는 '이순신이 전라좌수사가 되기 이전 모습'은 매우 초라하다.
류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 있는 이순신에 대한 서술이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순신은 이 밖에도 여러 숨은 공이 많았다. 하지만 조정에서 아무도 그를 추천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과거에 급제한 지 10여 년이 되어 겨우 정읍 현감이 되어 있었다.
이즈음 왜인의 교만스러운 태도는 날로 극성스러워만 갔다.
임금은 비변사에 명하여 제각기 장수 될 만한 인재를 천거하라 하였다.
이때 내가 순신을 천거해서 비로소 수사(水使)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본 사람들은 순신이 갑자기 승진한 것을 의심하는 이도 혹 있었다.'
류성룡은 선조 시대에 영의정으로서 임진왜란 극복에 전력으로 헌신했다.
징비록 또한 워낙 유명한 책이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이가 위의 글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심지어 이순신 연구자 중에는 이 기록을 고증 없이 맹목적으로 믿고 악의적 해석까지 첨가해서
"이순신은 권력을 지닌 문신인 류성룡에게 아부하고 빌붙어서 출세한 무장"이라고 기술한 이까지 있다.
실제는 과연 어떠한가?
엄정하게 고증해 보면 놀랍게도 류성룡의 주장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첫째, 류성룡이 기술한 것처럼 이순신은 '과거에 급제한 지 10여 년이 되어
겨우 정읍 현감이 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이순신은 선조 9년(1576)에 과거 급제하고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종9품)으로 임명돼 벼슬길에 들어선 이래 승진과 좌천을 거듭했다.
과거 급제 4년 만인 선조 13년에 발포 만호(종4품)로 뛰어올랐다가 2년 뒤 좌천됐다.
이어 선조 19년에 조산보 만호(종4품)로 승진 임명돼 2년간 재임한 뒤 다시 좌천됐다.
선조 22년 전라도 조방장(직속 상관의 품계에 따라 정3품 또는 종3품에 임명됨)으로 승진해 재임하다가
그해 12월에 정읍 현감(종6품)으로 좌천됐다.
둘째, '조정에서 아무도 그를 추천해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서술도 전혀 사실이 아니다.
임진왜란 발발 3년 전인 선조 22년 1월, 일본의 강력한 침략 조짐에
막중한 위기의식을 느낀 선조가 신하들에게 "무장을 추천하라"고 명하자,
당시 조정의 최고 실세였던 병조판서 정언신과 우의정 이산해가 이순신을 추천했다(선조실록, 선조 22년 1월 21일).
그뿐만 아니다.
같은 해 선조 자신도 이순신을 추천했다.
그는 비변사(국방과 군사 업무를 전담했던 최고 권력기관)에 "이경록 이순신 등도 채용하려 하니,
아울러 참작해서 의논하여 아뢰라"고 명했다(선조실록, 선조 22년 7월 28일).
셋째, '이때 내가 순신을 천거해서 비로소 수사가 되었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
이순신이 정읍 현감으로 있던 선조 24년 2월 12일에,
선조는 비변사에 "이천, 이억기, 양응지, 이순신을 남쪽 요해지에 정송(定送)하여 공을 세우게 하라"고 명했다(선조실록, 선조 24년 2월 12일).
네 사람이 남쪽 바다를 지키는 수사가 되도록 각자 부임할 임지를 정해주라는 명령이었다.
그에 따라 당시 우의정 겸 이조판서로서 비변사 당상관이던 류성룡은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배정했을 뿐이다.
그런데 류성룡은 징비록에 왜 사실이 아닌 글을 썼을까?
임진왜란이 종식된 뒤인 선조 31년, 류성룡은 권력투쟁에서 패해 영의정에서 면직되고 삭탈관작까지 당했다.
뛰어났던 그의 업적에도 원통하고 악랄한 폄훼가 대대적으로 가해졌다.
"나라를 망친 소인"이라는 말도 안 되는 비난까지 받았다.
권력을 잃은 그는 낙향했고, 고향에 간 지 5년쯤 되었을 때 징비록을 썼다.
아마도 회고록을 쓰는 과정에서 새삼 일어난 세태에 대한 분노와 반감 때문에,
그는 자신의 과거 업적을 다소 과도하게 부풀리고 싶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징비록의 사실과 다른 기술 때문에
후세에 이순신에 대한 평가가 일정 부분 왜곡된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이순신 리더십] [2]
위험 무릅쓰고 '감옥의 역적'을 찾아 문안하다
"권력은 끊임없이 의심한다"
- 태종의 덫에 걸린 이숙번
임금 양위 시기 질문에 소신 밝혔다가 유배돼
권력속성 눈뜬 하륜은 절대不可 답해 화 모면
- 密·簡·敬 3가지 거울
군주를 모시는 사람은 주도면밀한 태도로
조급함·덜렁댐 없이 한계 지키는 모습 필수
조선 초 이숙번(1373~1440)은 하륜과 함께
이방원을 왕위에 올린 1등 공신 중의 공신이다.
그런데 하륜은 모든 권세를 누린 반면 이숙번은 끝내 정승에 오르지 못했다.
게다가 말년은 유배 생활로 보내야 했다. 그것은 사소한 말실수로 자초한 것이다.
태종 9년(1409년) 8월 마흔세 살의 태종은 2차 선위(禪位) 파동을 벌인다.
선위 파동은 임금 자리를 세자에게 물려주겠다고 운을 띄운 다음
세자에게 줄을 대려는 세력을 제거하려는 군왕들의 고전적 술책이다.
그보다 3년 전 1차 선위 파동으로 국왕의 처남들이
추풍낙엽처럼 지는 것을 봤던 신하들이기 때문에
2차 때는 별다른 희생자는 생겨나지 않았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희생자가 있었으니 바로 이숙번이다.
8월 13일 태종은 측근 중 측근인 이숙번을 불러
선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이숙번은 당연히 "계속 정사에 힘쓰셔야 한다"고 답했다.
그런데 주도면밀(周到綿密)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태종이 덫을 놓았다.
"그러면 언제쯤이나 이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겠는가?"
평소 덜렁덜렁하고[簡] 직선적인 성품인 이숙번이 무심결에 답했다.
"사람 나이 쉰이 되어야 혈기가 비로소 쇠하니
나이 쉰이 되기를 기다려도 늦지 않습니다."
결국 이숙번은 태종이 정확히 쉰이 된 태종 17년 초
'세자에게 아부했다'는 모호한 죄로 의금부에 갇혔다가
유배를 떠나 결국 유배지에서 쓸쓸하게 삶을 마쳤다.
간(簡)은 간혹 대범하다는 뜻에서 좋은 뜻으로 쓰이지만,
대부분은 거칠고 덜렁덜렁한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게다가 이숙번이 주군으로 모신 태종은 주도면밀, 치밀, 정밀 등
밀(密) 하나에 집중했던 인물이다.
태종 16년에 태종은 옛사람 말이라며 이런 구절을 인용한다.
'임금이 치밀하지 못하면 신하를 잃고, 신하가 치밀하지 못하면 몸을 잃는다.'
이 말은 곧 태종 자신의 사람 보는[知人] 원칙이기도 했다.
진덕수는 '대학연의(大學衍義)'에서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무엇보다 간극이나 틈[隙]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걸 수없이 강조한다.
"임금과 신하의 즐거움을 나누려면 실오라기만 한 틈도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물론 윗사람도 그래야 하고 아랫사람도 그래야 한다.
이 점은 예나 지금이나 조직 사회에서는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윗사람은 그 속성상 아랫사람들을 끊임없이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의 충성도나 능력 둘 중 하나를 의심한다.
또 그래야 한다.
다만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서는 안 된다.
적어도 겉으로는 강명(剛明)한 모습을 유지해야 한다.
마음이 굳세고[剛] 사리에 밝아야[明] 하는 것이다.
태종이 이숙번을 향해 던진 추가 질문은
실은 윗사람이 먼저 의심하는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거친 성품의 이숙번은 그것을 덥석 집어삼켰다.
이는 같은 1등 공신이면서도 노회했던 하륜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살펴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하륜은 이렇게 답했다.
"주상의 춘추가 60, 70이고 세자 나이가 30, 40이어도 불가할 텐데,
하물며 지금 주상의 춘추가 한창때이고 세자가 아직 어리니 절대 불가합니다."
참고로 당시 세자는 16세였으니 7년 후면 얼마든지 국정을 맡을 수 있는 나이였다.
하륜의 이 대답을 그저 천박한 아부 정도로 치부하는 것이 우리 학계의 평가다.
그만큼 학계는 현실 속의 사람 관계를 모른다는 말이 될 수도 있겠다.
하륜은 자신으로서는 넘볼 수 없는 권력 앞에서
스스로 한계를 지키고 조심하며 경계한 것이다[敬].
이처럼 태종과 하륜 그리고 이숙번의 관계는
각각 밀(密), 간(簡), 경(敬)이라는
사람 보는 핵심 개념을 통해 풀어낼 수 있다.
진덕수가 사람 보는 법[觀人之法]의 교과서로 평가한
'논어'의 옹야 편 첫 장은 이 점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공자가 제자 중궁(仲弓)은 임금도 될 만하다고 하자
중궁이 그러면 자상백자는 어떠냐고 물었다.
이에 공자는 그도 임금이 될 만하다고 답했다.
왜냐하면 두 사람 다 선이 굵었기[簡] 때문이다.
그러나 중궁이 다시 물었다.
"(저처럼) 속으로는 삼가면서[居敬] 행동은 털털하다면[行簡]
임금 자리도 맡을 수 있겠지만,
속으로도 대충대충 하면서[居簡] 행동도 털털하게 한다면
지나치게 소탈한 것[大簡]이 아니겠습니까?"
공자는 즉각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중궁의 말이 옳다고 했다.
이숙번도 분명 '논어' 계씨 편에 나오는
이 대목을 읽었을 텐데 깊이 새기지는 못했던 것 같다.
"군주를 모시는 데 세 가지 허물이 있을 수 있다.
위의 말씀이 아직 미치지 않았는데 먼저 말하는 것을 조급함[躁]이라 하고,
위의 말씀이 미쳤는데도 말하지 않는 것을 숨김[隱]이라 하고,
위의 안색을 살피지도 않고 말하는 것을 눈뜬장님[�]이라 한다."
누가 봐도 이숙번은 이 순간 눈뜬장님이었다.
조(躁), 은(隱), 고(�)도 사람 보는 핵심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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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알리는 세 가지 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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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새 아이디어 꺾는 경영진
③다양한 스타트업 탄생
전통의 완구 회사 레고(LEGO)는 1990년대 들어 점차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어린이 고객들은 레고보다 비디오게임기에 더 몰두하는 것처럼 보였다.
레고는 '아이들은 이제 전원만 켜면 바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장난감을 더 좋아한다'고 분석하고, 비디오게임 시장에 뛰어들었다.
또 조립하지 않고도 바로 가지고 놀 수 있는 쉬운 장난감을 많이 만들었다.
그런데 결과는 참담했다.
2004년 레고는 사상 최대 규모 적자를 냈다.
무너져가던 레고의 구세주는 덴마크의 한 컨설팅 회사였다.
레고가 원래 붙잡고 있던 질문은 '아이들은 어떤 장난감을 좋아할까?'였다.
그런데 그 컨설팅 회사 조언을 받아들여 이 질문을
'아이들에게 놀이의 역할은 무엇인가?'로 바꿔 봤다.
그리고 이를 알아보기 위해 컨설팅 회사와 공동으로
LA, 뉴욕, 시카고, 뮌헨, 함부르크에 사는 가정에 조사팀을 파견했다.
이들은 몇 달에 걸쳐 아이들을 따라다니면서 노는 모습을 촬영하고, 심층 인터뷰를 했다.
조사팀이 발견한 건 예상과 달랐다.
아이들은 즉각적인 쾌락도 좋아하지만, 오랜 시간을 투자해
어려운 기술을 익히고 이를 자랑하는 것에도 큰 즐거움을 느꼈다.
독일에 사는 11세 소년이 가장 아끼는 물건이라면서 보여준 낡아 빠진 신발이 그 증거 중 하나였다.
신발 옆구리와 바닥에 가득한 상처는 소년이 스케이트보드 기술을 완전히 습득했다는 걸 의미했다.
레고는 오히려 더 어려운 제품을 만들기로 했다.
조립하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더 근사한 모양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레고 블록 개수가 1000개가 넘는 제품을 더 많이 개발했다.
위기의 레고를 구했던 컨설팅 회사는 '레드 어소시에이츠(Red Associates).'
공동 창립자 미켈 라스무센(Rasmussen)씨를 덴마크 본사에서 만났다.
"레고가 보이지 않던 문제의 원인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회사의 핵심 질문을
'어떤 장난감을 좋아하는가'에서 '아이들은 왜 노는가'로 바꿔 규정한 덕분입니다.
이 질문은 전통적인 비즈니스 질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문학, 그중에도 현상학적인 질문입니다.
현상학의 거장인 하이데거는 '사람들을 이해하길 바란다면, 그 사람들의 눈이 돼서
그들이 사는 세계를 경험하며 그들의 시각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즉, 직접 고객의 삶에 파고들어서 생활 방식을 파악하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가 보이고, 해결책도 찾을 수 있습니다."
레드 어소시에이츠는 컨설팅 회사로는 독특하게도
인문학적 접근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회사다.
온갖 수치를 분석하거나, 포커스 그룹 인터뷰를 하는 대신,
소비자의 집이나 직장에 직접 찾아가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달 동안 삶을 관찰한다.
아침 출근길부터 따라다니고, 같이 점심을 먹고, 직장 동료를 인터뷰하는 식이다.
"정말 인간이 숫자와 데이터로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숫자로 나타난 정보는 사람의 부분일 뿐,
아무리 이를 조합한다고 해도 완벽한 한 사람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회사는 커지면 커질수록 고객을 이해한다면서 각종 숫자와 데이터에 몰두하게 됩니다.
정작 고객은 만나지 않으면서 숫자와 데이터에 의지해 고객을 추측하려고 합니다.
경영자는 고객 대신 다른 경영자들을 만납니다.
그들만의 리그가 생기죠.
이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잘 들어보세요.
놀랍게도, 어떤 시점부터는 더 이상 사람들이 하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전문용어로만 대화한다는 의미).
이건 무언가가 잘못돼가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그는 고객의 삶에 파고든 다른 사례로 삼성전자를 꼽았다.
"2000년대 중반 삼성전자의 TV 부문 임원들은 완전히 헤매고 있었습니다.
온갖 최신 기술을 반영한 TV를 만들었는데, 잘 안 팔렸거든요.
당시 삼성 TV의 외관은 소니를 비롯한 타사 제품들과 흡사했습니다.
온갖 기술력을 자랑하는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고,
다른 제품과 비슷한 영상을 틀었죠.
그런데 바로 이게 문제였습니다.
소비자들은 끝도 없는 공학 발전의 퍼레이드에 싫증을 느끼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저희는 접근 방식을 달리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TV를 많이 팔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가정에서 TV라는 현상은 무엇을 의미할까?'로 바꿨습니다.
그리고 고객들이 TV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관찰했습니다.
사람들은 TV를 거실에 둡니다.
TV를 살 때는 항상 여성들의 의견이 반영됐고,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TV 디자인이 예쁘지 않다는 불만도 있었습니다.
소비자들은 몇 년 지나도 괜찮은 디자인의 물건을 집에 두고 싶어 합니다.
여기에는 TV도 당연히 포함됩니다.
연구팀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TV도 가구의 일종'이라는 겁니다.
삼성전자는 TV 디자인 자체를 바꿨습니다.
딱딱한 상자 디자인을 버리고, 유선형 디자인을 채택했습니다.
스크린은 평평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나온 제품이 바로 '보르도 TV'입니다."
이 같은 '하이데거식' 경영이 등장한 배경에 대해
김경준 딜로이트컨설팅 코리아 대표는 "지금이 '변곡점'이기 때문"이라면서
"기존 트렌드가 계속 이어질 때는 방향이 보이니까 변화의 움직임이 없지만,
트렌드가 종횡무진하는 시기에는 솔루션이 빅데이터로 갔다가
인문학으로 빠지는 등 다각화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레드 어소시에이츠 본사는 코펜하겐 도심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5층짜리 허름한 목조건물이었는데, 엘리베이터가 없어
사무실이 있는 4층까지 나무 계단을 올라야 했다.
묵직한 현관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가니
나무로 된 마룻바닥에 카펫이 깔려 있었고,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다.
첨단 설비가 늘어선 일반적인 컨설팅 회사 사무실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미팅룸에는 큼지막한 석조 테이블 1개와 의자 몇 개, 화이트보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건물이 아주 오래돼 보입니다.
“지은 지 100년이 넘었을 겁니다.
창문 밖 저쪽 건물이 보이세요?
저게 덴마크 왕궁입니다.
국왕 마르그레테 2세가 살고 있죠.(덴마크는 입헌군주제 국가다.)”
―왜 이렇게 불편한 곳에서 일하시나요?
“저희는 업계 특성상 날마다 새로 등장하는 기술과 제품을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오래된 건물에서 지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모든 게 새로운 건 아니다’라는 진리를 매번 되새겨 주거든요.
물론 불편한 점도 있지만, 일하는 데 전혀 지장 없어요.”
인간은 합리적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는 회사인가?(The moment of clarity)’라는 책을 내셨죠.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정답은 인문학에 있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신발 이론’이라는 게 있습니다.
사람들이 신발을 어떻게 사느냐에 관한 연구입니다.
3가지 가설이 있습니다.
1번 가설은 ‘나는 내가 사고 싶은 신발이 뭔지 알고 있고,
정확한 사이즈와 원하는 색도 알고 있으며,
어디서 가장 저렴하게 살 수 있는지 알고 있다.
그래서 목표한 상점에서 의도했던 가격대에 맞춰 원했던 신발을 산다’입니다.
2번 가설은 ‘나는 신발을 사고 싶지만 어떤 모양, 어떤 브랜드의 신발을 사야 할지는 모르겠다.
어디서 사야 할지도 잘 모른다.
그러나 가게를 돌아다니다가 제법 괜찮은 신발을 발견하고
매장에 들어가서 그것을 산다’입니다.
3번 가설은 ‘나는 신발이 필요한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산다’입니다.
어떤 가설이 가장 현실에 가까운 신발 구매 모델일 것 같습니까?”
―글쎄요. 2번 아닐까요?
“아니요. 3번입니다.
전체 신발의 80%가 3번 가설에 따라 팔립니다(웃음).
본능적인 충동 때문에 신발을 산다는 겁니다.
기업들은 ‘고객은 합리적인 인간이며, 특정 브랜드, 특정 가격대,
특정 디자인의 제품을 원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조사해보면 고객은 자신이 어떤 물건을 원하는지 아닌지도 모르고 쇼핑을 하며,
회사가 달아둔 제품 정보는 신경도 안 씁니다.
회사는 숫자와 데이터로 고객을 분석하려고 하지만, 고객은 그럴 수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그런데도 기업들은 끝없이 분석하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게 편하기 때문입니다.
데이터를 수량화하면, 제법 믿음직스러워 ‘보이는’ 정보가 나옵니다.
편하게 일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어요. 이게 문제입니다.”
인간의 존재 의미는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에 달렸다
―그런데 왜 하필 하이데거인가요?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먼저 대답한 사람은 데카르트였습니다.
그가 내린 결론은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입니다.
그 관점에 따르면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며, 따라서 합리적입니다.
무언가 관찰할 때는 객관적으로 살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비교가 가능하도록 모든 것을 수치화해야 합니다.
관찰자와 피관찰자가 직접적으로 얽혀 있어서도 안 됩니다.
객관성을 해칠 수 있으니까요. 데카르트의 철학은 과학, 교육, 경영에 도입됐습니다.
이를 반박한 것이 바로 하이데거입니다.
그는 삶의 대부분을 한 가지 질문에 답하는 데 몰두했습니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What does it mean to be a human being?)’라는 질문입니다.
그의 책 ‘존재와 시간’에 따르면, 인간이 인간으로서 의미를 가질 때는
세계 안에 존재하면서 그 세계와 하나가 될 때입니다.
예컨대 위대한 기타리스트는 기타에 가장 깊이 몰두해 있을 때
인간으로서 의미를 가진다는 겁니다.
인간은 세계와 분리돼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세계 안에서 깊이 몰두하며 경험하는 존재라는 겁니다.
기타리스트는 기타를 자신 또는 세계와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경영에 대입하면, 기업이 고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객이 존재하는 세계 전체를 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한 가족을 이해하려면 단지 어머니 한 명만 인터뷰해서는 답을 알아낼 수 없어요.
아버지, 아들, 딸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관계도 유심히 살펴봐야 합니다.
빅데이터를 분석하든, 포커스 그룹을 관찰하든
인간의 한 단면만 보고 추출한 데이터는 ‘피상적인 데이터(thin data)’입니다.
반면,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계 전부를 연구해 만든 데이터는
‘깊고 두툼한 데이터(thick data)’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저희가 찾는 데이터가 바로 이겁니다.
회사가 피상적 데이터에 몰두하면 고객들로부터 멀어지고,
결국 아무도 원치 않는 제품을 만들게 됩니다.
노키아, 코닥이 그렇게 망했습니다.”
고객의 세계에 직접 뛰어들어라
―그렇다면 그 깊고 두툼한 데이터를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고객이 살고 있는 세계에 뛰어들고, 몰입해야 합니다.
만일 당신이 독일 축구 문화를 알고자 한다면, 독일로 가서
축구 경기가 있는 날 경기장에 찾아가고, 펍(pub)에서 뒤풀이를 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축구 잡지를 읽고, TV 중계를 보고, 인터넷 자료를 찾는다고 해도 이에 미치지 못합니다.
다윈이 어떻게 진화론을 찾아냈는지 아세요?
그는 빅데이터를 이용하거나 포커스 그룹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사례에 대해 열린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연구를 시작할 때 일체의 가설이나 편견도 없었습니다.
그는 단지 많은 사례를 관찰하고, 데이터를 축적했으며,
그 연관성을 찾는 데 몰두했습니다.
저희는 이런 과정을 ‘센스 메이킹(sense making)’이라고 부릅니다.”
문제도 답도 모를 때는 인문학으로 풀어라
―기업이 문제를 해결할 때 디폴트 사고(기존의 경영학적 접근)와
센스 메이킹(하이데거식 접근)을 동시에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문제를 전자로, 어떤 문제를 후자로 해결해야 합니까?
“센스 메이킹이 필요한 문제는 조금 특별한 문제입니다.
저희는 기업들이 겪는 문제를 얼마나 불확실하느냐에 따라 세 종류로 나눠봤습니다.
첫째는 ‘선형 문제(linear problem)’입니다.
경영진이 여러 차례 경험을 통해 문제가 뭔지도 알고,
어떻게 하면 가장 빨리 원하는 목표 지점에 도달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때는 기존 방법대로 정보를 수량화하고 전략을 세우는 것이 최적의 방법입니다.
둘째는 ‘가설 문제(hypothetical problem)’입니다.
문제가 뭔지는 알고 있지만, 정답은 잘 모릅니다.
불확실성이 조금 늘어났군요.
예컨대 당신이 앱 개발자라면 앱을 개발할 때 구글 안드로이드 기반으로 할지,
애플 iOS 기반으로 할지 고민이 될 겁니다.
이때도 기존 경영학적인 접근 방식이 최고입니다.
‘고객은 안드로이드를 더 좋아한다’와 같은 가설을 세우고,
소비자 일부를 대상으로 실험해 보면 됩니다.
가장 효율적이고, 가장 확실한 답이 나옵니다.
문제는 셋째입니다.
저희는 이것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big unknown)’라고 부릅니다.
말 그대로 문제도 모르고, 답도 모릅니다.
아디다스의 예를 들어보죠.
이 회사는 2003년 봄, 중장기 전략회의를 열었습니다.
매출은 증가하고 있었고, 딱히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경영진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미 그전부터 사람들이 스포츠를 경험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헬스장에서 근육을 만들고, 더 많은 사람이 시가지를 조깅하기 시작했습니다.
요가나 필라테스에 대한 수요도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아디다스는 설립 이후 줄곧 스포츠를 ‘경쟁, 도전, 즐거움’이라고 정의했는데, 세상이 달라진 겁니다.
사람들이 운동하는 동기는 더 이상 경쟁이 아니라 건강과 외모 관리였습니다.
이를 깨달은 아디다스는 적극적으로 생활 스포츠용품을 확대했습니다.
이후 워킹, 조깅, 헬스용 운동화 시장은 매년 두 자릿수 증가세를 보였지만,
농구, 테니스, 야구 운동화 시장은 눈에 띄게 축소됐습니다.
만약 아디다스가 당시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웃음)”
―그러나 매출이 줄어들거나 성장세가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문제를 알아차릴 수 있나요?
“세 가지 신호가 있어요.
먼저, 회사의 비용 구조를 볼 때 광고비가 연구개발(R&D)비보다 많다면
이는 사람들을 억지로 설득하고 있다는 뜻이며, 무언가 위기가 닥쳐올 것이라는 징조입니다.
둘째, 전략 미팅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왔는데,
경영진 중 누군가가 ‘그건 아니다. 우리 회사 방식과는 맞지 않는다’고 한다면,
회사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태어날 수 없다는 것을 뜻하며 반드시 문제가 발생합니다.
마지막으로 업계 관련 분야에서 다양한 스타트업이 탄생하고, R&D가 활성화되고,
새로운 특허가 나온다면 이는 업계가 혁신적으로 뒤바뀔 우려가 있다는 걸 뜻합니다.
이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면 회사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 하이데거인가?
하이데거는 20세기 독일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현상학의 거장이다.
그의 관점에 따르면, 인간은 합리적인 개인이 아니며, 속해 있는 세계와 분리해서 볼 수 없다.
레드 어소시에이츠는 이를 경영에 대입, 데이터 분석이나 포커스 그룹 조사 대신
직접 고객의 삶에 파고들어 그가 속한 세계 전부를 관찰하는 접근법을 적용한다.
"인간은 어디까지 어리석고 잔인해지는 걸까"
빈 군사박물관… 1차 세계대전 촉발한 암살사건 車 전시된 곳
변화에 무지했던 황제… 충실하고 근면했지만 민족주의 분쟁 못보고 위신 지키려 선전포고
빈 군사박물관은 도심에서 남쪽으로 한참 벗어나 있다.
클림트의 '키스'를 전시하는 곳으로 유명한
오이겐 공작의 여름궁전에서부터는 걸어가야 한다.
걷기에는 좀 먼 거리다. 관광객들에게 외면당하는 이유다.
그렇지만 불편함을 감내할 가치가 있는 곳이다.
한때 유럽을 지배했던 위대한 제국의 투쟁사(鬪爭史)가 장엄하게 펼쳐져 있다.
여기엔 1차 세계대전의 직접적 원인이 된 유물이 전시돼 있다.
고전적 디자인의 자동차 한 대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인 페르디난트 대공이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의 총에 맞아 숨질 때 바로 이 차를 타고 있었다.
차 주변으로는 당시 상황을 말해 주는 사진들이 걸려 있다.
그 뒤로는 1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비극을 주제로 한
전시가 연도별로 방대하게 진열돼 있다.
전시실을 둘러보면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인간은 어디까지 어리석고 잔인해질 수 있는 걸까?
빈은 클림트, 프로이트, 말러, 왈츠로 유명한 음악과 예술의 도시이다.
그런데 빈은 어떻게 1차 세계대전이라는 미증유의 악역(惡役)을 맡게 됐을까?
그 원인을 찾기 위해서는 빈 중심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호프부르크(Hofburg)로 가야 한다.
이곳은 1278년부터 1918년까지 합스부르크 왕조의 궁전이었다.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움직인 심장답게 압도적 중압감을 내뿜는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들은 커져 가는 왕조 크기에 비례해 궁전을 계속 키웠다.
그 결과 별관 18개와 궁정 정원 19개, 방 2600개로 이뤄진 오늘날의 호프부르크가 완성됐다.
도시 속 도시다.
이 거대한 공간의 마지막 주인은 프란츠 요제프(Joseph) 황제였다.
사라예보에서 총에 맞은 페르디난트 황태자의 큰아버지다.
1차 세계대전의 선전포고를 명령한 사람이기도 하다.
1830년 쇤브룬 궁전에서 태어난 그는 1848년 큰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큰아버지는 거세지는 혁명 운동을 막기 위해 스스로 황제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젊고 빛나는 조카 프란츠 요제프가 군주정에 대한
신민들의 애정을 다시 불러일으킬 것으로 내다봤다.
예상은 옳았다.
젊은 황제는 신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개혁에 대한 황제의 약속도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를 부풀렸다.
소요는 가라앉고 왕조는 힘과 권위를 되찾았다.
황제는 본분에 충실했다.
부지런하고 근면하게 제국을 다스리는 데 열중했다.
일관성과 의무의 화신이었던 황제는 매일 똑같은 생활방식을 유지했다.
새벽 4~5시에 일어나 찬물로 목욕한 뒤
수수한 제국군 중위의 제복을 입고 서재로 들어갔다.
밤사이에 올라온 서류들을 읽는 도중에 간단한 아침을 먹었다.
7시 반부터는 각료들과 군 장성들을 만나 국사를 논했고,
일주일에 두 번은 오전 10시부터 점심시간 사이에
일반 백성을 만나 그들의 고충을 들었다.
점심 역시 서재에서 간단하게 때웠고, 바로 업무를 재개해
오후 5~6시에 모든 일을 끝내고 서재를 떠났다.
저녁은 대개 황실 가족과 했는데, 역시 소식(小食)이었기 때문에 빨리 끝났다.
가끔 식후에 오페라나 연극을 관람했지만,
대부분 다음 날의 공무를 위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황제에게는 치명적 결점이 있었다.
변화에 무지했고, 변화를 싫어했다.
그는 화려했던 과거와 오랜 전통에만 집착했다.
'사도의 법통을 이어받은 존엄한 분이시며
우리의 더없이 자비로운 황제이신 프란츠 요제프 1세 폐하'라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길고 엄숙하고 시대착오적인 호칭으로
본인을 부르도록 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기술의 진보도 싫어해 전화, 기차, 자동차, 전깃불을 멀리했다.
정체된 시대였다면 프란츠 요제프는 훌륭한 황제로 남았을 것이다.
그의 불행은 자신이 살아간 19세기가, 변화가 해일처럼 밀려와
기존 전통과 삶을 송두리째 쓸어가 버린 대변혁 시대였다는 데 있었다.
프란츠 요제프에게는 그런 변화에 대응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시대는 눈부시게 진보하는데 황제는 구중궁궐 안에서 과거에만 머물렀다.
아버지와 달리 자유주의자였던 황태자 루돌프는
조국이 갈수록 억압적 반동 국가가 되는 데 반발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국사에서 배제하고 백안시했다.
절망 속에서 황태자 루돌프는 권총 자살했다.
하지만, 더 큰 비극은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민족주의 바람이 더욱 거세게 불었다.
다민족 국가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는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였고, 대책이 필요했다.
황제는 무시했다.
특히 발칸 반도에서 강대국 간 긴장이 고조되고,
피지배 민족들의 불만과 분쟁이 극에 달했지만, 황제는 신경 쓰지 않았다.
결국 세르비아에서 후계자였던 조카가 총에 맞아 죽는 비극이 발생했다.
제국의 위신만을 생각했던 황제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했다.
1차 세계대전의 시작이다.
전쟁이 한창이던 1916년 노(老)황제는 '68년간의 통치'란 대기록을 세우고 죽었다.
행복한 죽음이었다.
2년 후 그의 제국이 멸망하는 것을 보지 않아도 됐으니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멸망은 프란츠 요제프 황제를 비롯해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예상치 못했던 사건이었겠지만,
긴 역사로 보면 흔히 있는 일이었다.
오늘날도 100년 전 빈과 마찬가지로 격변의 시대다.
변화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시대 흐름이 됐다.
그렇다면 현재 대한민국은 변화하고 있는가?
우리의 리더십은 변화를 통해 우리 사회를 지켜낼 만큼 깨어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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