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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무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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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경주는 17만호가 넘는 인구가 살았던 거대한 도시였다. 도로는 바둑판 모양으로 질서정연하게 계획되었고 거리에는 기와집이 연이어 있고 숯으로 밥을 해 먹을 정도로 생활은 호화로웠다고 전한다. 육로와 해상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동서양의 문물들이 한데 어우러져 첨단과 유행이 넘치던 국제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던 곳, 서역인들은 신라를 황금의 나라로 부르며 선망의 대상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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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화려했던 신라의 역사를 말해주는 것이 바로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는 왕릉이다. 신라의 왕릉은 초기에는 대부분 도읍지 한 복판에 만들어 졌다. 후기로 갈수록 풍수지리설에 따른 명당을 잡기 위해 외곽의 산기슭에 자리 잡으면서 곳곳에 흩어지게 되었고 그 숫자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천년의 역사동안 모두 56명의 왕이 나라를 다스렸으니 그 무덤의 숫자가 많을 수밖에..... 그런데 이 무덤들은 정확히 어느 왕의 무덤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오랜 세월 끊이지 않았던 전란의 피해를 입어 기록들이 유실되고 빗돌들 도한 남아 있는 것이 없어 대부분이 구전된 자료들뿐 모든 것이 수수께끼처럼 헝클어져 있다. <삼국사기>에 파편처럼 전해지는 기록과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근거해 비정된 것이니 이설이 분분하기도 하다. 그래서 신라 왕릉은 더 비밀스럽고 신비스런 느낌을 간직하고 있지도 모른다. |
그중에서도 거대한 동산을 연상케 하는 대능원은 신라 무덤의 위용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곳이다. 경주시내 한 복판에 자리 잡고 있어 어디서든 한눈에 들어오는 모습인데 무려 23기가 옹기종기 무리를 지어 있다. 이곳에 무덤의 내부를 들어가 볼 수 있는 천마총과 대릉이라 불리었던 미추왕릉 또 경주에서 가장 큰 무덤인 황남대총이 자리 잡고 있다.
신라의 무덤들은 모두가 지하궁전처럼 화려하다. 도굴에 눈이 멀었던 일제 때부터 파헤쳐지기 시작하며 수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대부분 황금으로 된 것들이었다. 순금으로 만든 고깔모자에 화려한 새 날개가 장식된 금관, 치렁치렁 금붙이가 매달린 허리띠에서 신발, 팔지 목걸이, 귀걸이에 이르기까지 신라의 왕족들은 온몸을 황금으로 장식한 지배자였다. 또 로마에서 온 유리그릇이 출토되어 신라문화의 국제성을 유감없이 보여주기도 했다.
이들 무덤을 보면 경주가 비록 초라해진 옛 고도의 모습에 불과할지라도 한시대의 영광이 얼마나 위대했는지 알 수 있다. 빛나는 황금문화를 가졌던 천년의 왕국은 사라졌지만 거대한 무덤들이 남아서 이 땅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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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경주 IC로 진입하여 먼저 시내 중심가 자리 잡고 있는 대릉원 지역을 찾아간다. 첨성대에서 계림, 반원성, 안압지로 이어지는 산책 코스를 따라 답사할 수 있다.
<맛있는 집> 천마총 입구 주차장에서 담장을 끼고 50미터 쯤 들어가는 한적한 민가에 위치한 도솔 마을 (054-748-9232)은 잘 알려 지지 않은 맛집이다. 번화한 관광지의 삭당이 아니라 고풍스러운 한옥에서 깔끔한 손맛을 느끼게 하는 한식을 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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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도성이었던 반월성터에서 첨성대 쪽으로 내려가는 곳에 계림이 위치해 있다. 이곳은 신라가 건국되었던 아득한 시간부터 변하지 않는 하나의 몸짓으로 서 있는 서라벌의 성역이다. 수령을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연륜을 간직하였지만 계림의 숲은 아직도 여름날처럼 싱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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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 의하면 이 숲속에서 경주 김씨의 시조가 탄생하였다고 한다. 서기 65년(탈해왕 9년) 8월 4일 탈해왕은 새벽녘 시림(始林) 숲에서 들려오는 신비로운 닭울음소리를 들었다. 이 숲에서 닭이 우는 것은 처음이어서 날이 밝자 신하를 시켜 숲으로 가 보게 하니 금색 찬란한 궤짝 하나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왕이 궤짝을 가져다 열어보게 하니 놀랍게도 그 속에는 아이 하나가 있었는데 용모가 준수하고 범상치 않았다. 왕은 기꺼이 그 아이를 거두어 길렀고 이름을 ‘알지’라고 했으며 금궤에서 태어났다고 성을 ‘김(金)’이라 했다. 알지는 당시 말로 ‘아기’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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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해왕은 김알지를 태자로 삼았으나 그가 왕위를 사양하여 김알지의 6대손에 와서야 김씨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13대 미추왕이다. 이 후로 이 숲의 이름을 닭이 울었다 하여 ‘계림’이라 했으며 김씨가 왕이 되어 나라가 번영할 때는 나라 이름을 아예 계림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러므로 계림에서의 김알지의 탄생은 당시 신라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으며 동시에 성스러운 일이었다. 계림은 곧 성스러운 숲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그 후로 나라에서 관리를 두어 보호하였다 하여 호림(護林)이라고도 불렀다.
계림은 숲 가운데로 개울이 흐르고 개울 주위에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자랑하고 있다. 이곳은 신성시되어 함부로 나무를 벨 수 없었기 때문에 자연사(自然死)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옛 모습 그대로 천 년의 세월을 간직하고 있다.
1980년대에 와서 계림의 외곽 주위를 발굴 조사했는데 그 결과 큰 건물터들이 발견되었다. 이는 왕국에 부속된 관청 건물로 추정되는데 이로 하여 신라 왕궁 내부에 속하는 신성한 숲이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왕궁의 서북쪽에서 겨울의 북서풍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조성되었을 이 숲속에 깃들인 신라 천 년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석양빛이 감도는 계림은 더욱 신비로운 이야기를 전해 줄 것만 같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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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경주 IC로 진입하여 먼저 시내 중심가 자리 잡고 있는 대릉원 지역을 찾아간다. 첨성대에서 계림, 반원성, 안압지로 이어지는 산책 코스를 따라 답사할 수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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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은 옛 신라의 도읍이었던 서라벌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산이다. 멀리서 보면 거북이 등처럼 두루뭉실하게 솟아 있지만 오르다 보면 뜻밖에 기골이 센 산세에 놀라게 된다. 채 5백 미터가 넘지 않는 높이지만 크고 작은 봉우리가 어울려 독립된 산세를 형성하였으며 우람하고 기괴한 암봉들이 노출되어 전형적인 바위산의 기상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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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옛 왕도 경주 분지의 풍경은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나지막한 산줄기들이 천연의 성벽처럼 겹겹이 둘러싸고 있으며 형산강은 햇빛에 은빛 물살을 반짝이며 평화롭게 굽이치고 있다. 그리고 남산은 이 경주 분지 깊숙이 들어 와 젖을 물리고 있는 어머니처럼 다정한 모습이다.
신라 역사는 남산에서 시작되어 남산에서 막을 내렸다고 할 수 있다. 건국설화에 나오는 박혁거세가 태어났던 곳도 남산이고 신라 천년의 영화가 이슬처럼 사라지던 포석정의 비애도 이곳 남산에서 이루어졌으니 남산은 신라의 흥망성쇠를 함께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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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신라 사람들에게 남산은 부처님이 사는 도솔천의 세계였으며 몸이 다한 뒤 넋이라도 이곳에 머물기를 소원하던 그리움의 땅이었다. 그 성스러운 옛 시절의 이야기가 지금도 골짜기마다 가득한 탑과 돌부처의 미소로 살아 있다. “절들은 하늘의 별처럼 가득하고 탑들은 날아가는 기러기 떼처럼 솟아 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처럼 남산은 지상에 부처님의 세계를 구현하려 했던 신라인들의 종교적 염원이 담긴 땅이었다.
남산은 7세기 중엽 삼국 통일에 따른 국토 확장의 기운을 타고 전국 각처의 명산마다 사찰들이 세워지기 시작할 때 부처님이 머무는 정토의 땅으로 성역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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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탁 트인 전망, 사시사철 청류가 쏟아져 내리는 계곡, 울창한 소나무 숲과 어울린 양질의 화강암, 한나절이면 족히 다녀올 수 있는 위치……. 남산은 불국토를 염원하던 신라 사람들에게 더없이 좋은 천혜의 땅이었다. 확인되는 절터만 해도 1백여 군데, 석탑이 60여 개, 불상이 80여 기나 발견되었으며 국립 경주박물관 뜰 앞에 즐비한 불두와 목 잘린 불상들도 대부분 남산에서 실려 간 유물들이다. 남산의 불교 유적들은 7세기에서 10세기에 이르는 각 시대의 조각 양식이 총망라된 야외 박물관과 같다. 이들 불상의 표정에는 비바람 속에서도 천년의 세월 동안 변치 않는 신라인의 미소가 간직 되어 있어 언제 찾아 가도 신비롭고 새로운 감동을 안겨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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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길> 남산의 유적은 워낙 넓은 지역에 분포해 안내자나 상세한 유적지도가 필요하다. 종주코스는 서남산 삼릉계에서 시작하여 냉골을 거슬러 올라 상선암을 거쳐 용장상 터를 거쳐 신선암 마애불과 칠불사를 거쳐 남산리 쪽으로 하산 하면 좋다.
<맛있는 집> 남산 삼릉 입구 주차장에서 100미터 정도 전방 길가에 위치한 고향손 칼국수(0561-745-1038)는구수한 맛을 내는 칼국수가 별미다. 우리 밀을 이용해 만드는 손 칼국수이기 때문에 이름 그대로 고향의 맛을 느끼게 한다. | |
경주시내에서 토함산 자락을 넘어가면 망망대해가 펼쳐지는 동해바닷가에 이른다. 요즘 사람들은 이곳 바다를 포구의 이름을 따서 그냥 감포바다라 부르지만 옛사람들은 신라의 왕도인 경주로 들어가는 입구라 하여 동해구(東海口)라 불렀다. 육로보다는 물길을 통해 이동이 빈번했던 고대의 시간 속에서 이곳은 서라벌로 들어가던 교통의 요충지였다. 멀리 아라비아의 상인들까지 이 바닷길을 넘나들었고, 약탈을 일삼던 왜구들도 호시탐탐 노리던 길목이었던 곳, 그러므로 동해구는 어떤 곳보다 신라인들에게는 특별한 장소였고 생명선처럼 지켜야할 최후의 보루였다. 그곳에 바로 신라 정신의 성스러움의 징표가 되는 대왕암과 감은사 터가 자리 잡고 있다.
시퍼런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 한가운데 외로운 바위섬으로 떠 있는 대왕암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바다 속에 자리 잡은 해중릉이라 불린다. 멀리서 보면 평범한 바위섬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한 가운데가 못처럼 패여 있고 사방으로 물길이 나 있으며 거북이 모양의 돌이 안치되어 있어 어떤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이곳에 문무왕의 사리나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는 설도 있고 뼛가루를 뿌린 산골처란 주장도 있지만 어쨌든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대왕님의 거룩한 정신이 간직된 곳임은 분명하다.
대왕암이 위치한 감포바다가 바라보이는 용당산 기슭에 자리한 감은사지는 호국의 용으로 변한 문무왕의 넋이 깃든 절이다. 문무왕이 동해에 출몰하는 왜적을 부처님의 힘을 빌려 물리치기 위해 짓기 시작했으며 완공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시자 그의 아들 신문왕이 완공하고 부왕의 거룩한 정신을 기리고 그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감은사(感恩寺)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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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감은사는 여느 사찰과 달리 돌로 우물마루를 만들어 지하구조를 두고 있는데 이는 용으로 변한 문무왕 넋이 머물게 하기 위해서다. 절 앞에 용담이라는 연못을 만들어 대종천을 통해 동해바다와 연결되도록 했고 그 물길을 따라서 호국의 용이 수시로 드나들 수 있도록 해 놓은 구조물인 것이다.
주춧돌과 기단석 같은 무심한 돌덩이만 흩어져 있는 폐사지이지만 “금당 섬돌 밑에 동쪽으로 구멍이 나 있어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이 구멍을 통해 감은사 금당에 들어와 휴식을 취했다”는 삼국유사의 전설 같은 이야기가 우리 앞에 사실처럼 실체를 보여주고 있다.
절터에는 통일신라시대의 탑으로는 가장 장엄하고 웅장한 두 기의 탑이 서 있다. 대지에 굳건히 발을 붙이고 하늘 높이 솟아오른 이 탑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어떤 세월의 힘으로도, 그 어떤 침략자의 힘으로도 결코 무너뜨릴 수 없는 위엄이 깃들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 탑은 고선사지 탑에서 정형을 갖추기 시작한 신라 탑의 정형이 석가탑으로 완성되어 가는 과도기의 양식의 통일신라 3층 석탑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탑 앞에 서면 누구나 거대한 돌덩이가 말하고 있는 엄숙한 위엄에 압도되기 마련인데 그런 엄숙성과 단호한 기상이 있었기에 작은 나라였던 신라가 결격은 삼국통일 위업을 이룩할 수 있었던 셈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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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길> 감은사지와 대왕암은 경주 시내에서 4번 국도를 이용해 추령터널을 지나면 양북면 어일리 검문소가 나오는데 여기서 929번 지방도로를 따라 6.5 킬로미터쯤 가면 왼편 산기슭에 감은사 터가 있고 그 앞 바다 쪽 봉길리에 대왕암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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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경주여행 잘 해 보십시요 동창 여러분 건강합시다
수학 여행땐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게 보았는데 자세히 보여 주어서 감사 합니다 언제 시간 한번내어 가보야겠어요 '
여행은 *아는것 만큼*보인다한다! 신라 천년의 문화와 정신을 이해하는데,,,,며칠 다녀와서,,,알진 못할티인즉,,,,시간 나는 틈틈이*공부*도해서 올 가을엔 경주 문화유산 답사도가고,,,,감포항에 가서 해산물 먹거리도,,,,해볼 생각,,시간나면*근호*얼굴도 한번보고,,,,,좋은 내용 잘보고 가네! 박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