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 상공의
태극 깃발
- 강 문 석 -
봄은 미적거리면서 한없이 더딘 걸음으로 오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론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녹두알만큼이나 작은 꽃망울을 잔뜩 매단 벚나무 가지 끝에서도 어느새 봄기운이 감지되고 있다. 3월의 첫 주말에 찾았던 해운대 백사장. 탐방객들 중엔 아직도 겨우내 걸쳤던 두터운 외투차림도 보이긴 했다. 그러나 이젠 해풍마저도 살랑살랑 가볍게 뺨을 스치니 봄은 이미 우리 곁에 찾아온 게 틀림이 없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연전에 만났던 그 노인이 오늘도 백사장에 나와 태극기를 하늘 높이 띄워 올리고 있었다. 태극기로 만든 가오리연은 솔밭 상공을 치솟아 까마득한 초고층 마천루를 향하고 있었다.
누가 옆에서 지나가는 말로 ‘저 양반, 보기보다 실제 나이는 그리 안 많데이!’ 라며 제법 아는 체를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리퍼트 대사에게 테러를 가한 그 작자보다 분명 몇 년은 앞서 태어났을 것 같다. 그에게 직접 물었다. ‘아직도 반여동에 살고 있느냐’고 했더니 '연산9동으로 옮겼다'며 자기를 알아봐준다 싶었던지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그의 태극기 사랑은 유별난 데가 있다. 그땐 모자에서부터 신발에까지 크고 작은 태극기가 50여개나 붙어 있었다. 그랬던 것이 이젠 디자인이 세련되게 바뀌면서 개수도 많이 줄어들었다. 양쪽 볼에다 그린 앙증맞은 태극기가 그를 더 젊게 보이도록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저출산과 고령화로 나라의 동력이 떨어진 현실을 걱정했던지 모자와 가슴팍에다가 '어린이는 나라의 보배'라는 표어까지 붙였다. 태극기를 거부하는 종북 세력들이 나라를 거꾸러뜨리기 위해 기승을 부리더니 드디어 사고를 쳤다. 종북은 이제 5천백만 인구 중에 금배지를 단 인간들까지 포함하여 수만 명이나 된다. 더 불어나기 전에 이들을 송두리째 잡아다가 그들이 그토록 추앙하는 김정은 밑으로 보내야만 발 뻗고 잘 수가 있을 것 같다. 리퍼트 대사의 미국은 우리와 그냥 맺어진 우방이 아니다. 전쟁에서 피를 나눈 혈맹이다. 일곱 살에 동란을 맞았던 나는 실로 통탄할 만한 억울한 폭격을 당해 아버지를 잃었다.
'피란민 중에 빨갱이가 섞였다'며 낙동강 백사장에서 도강을 기다리던 피란민들에게 아군 전투기들은 떼 지어 몰려와 소나기폭격을 퍼부었다. 같은 도시에서 이웃으로 살다가 함께 떠난 시민들은 순식간에 맞닥뜨린 아비규환 속에서 백사장을 붉게 물들여야 했다. 차라리 바로 숨을 거둔 사람들의 고통이 덜했을 것 같았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팔다리가 잘린 채 살려달라던 단말마는 생지옥 그 자체였고 누구도 구조할 환경이 되지 않아 그들은 그대로 몸에 피가 빠져나가면서 서서히 스러져 가야만 했다. 사변 통에도 누군가가 블랙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이승만 대통령의 포격명령으로 그런 참극이 벌어졌다고 선동했다.
그래서 성장기 내내 이승만을 향해서 나는 적개심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육이오사변 60돌을 맞은 2010년에 전쟁의 숨은 비화와 전화 속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증언을 담은 책자가 쏟아져 나왔다. 그 중엔 당시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의 생생한 기록도 있었다. 소련제 탱크에 끝없이 밀리는 전란 중에도 그녀는 빼먹지 않고 타자기로 매일매일 일기를 썼다. 남편 이승만이 유학시절 미국에서 맺은 인맥을 최대한 활용하여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는 대목에선 소름이 돋았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인천상륙작전을 진두지휘했던 맥아더는 이승만을 아버지처럼 받들었다. 북진통일을 외치던 이승만의 뜻을 맥아더가 맹목적으로 따랐던 것이 아니었다.
남편인 이승만이 구술하면 프란체스카가 타이프라이터로 작성한 구원요청서는 트루먼 대통령을 비롯한 국방장관 등 미국의 요로에 보내졌고 오케이 답이 나올 때까지 몇 차례나 보내고 또 보냈다. 육이오사변에서 나라를 구한 건국대통령 이승만을 온전히 알고 화해하는 데는 60년이란 세월이 걸린 셈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부끄러움을 떨치기가 어렵다. 미래의 희망인 이십대의 절반 이상이 육이오가 언제 일어났는지 모른다고 한다. 심지어 초등생의 삼분의 일은 육이오를 북침으로 알고 있다는 충격적인 보고도 있다. 이러한 현실이 지속된다면 우리가 후손에게 나라를 제대로 물려줄 수 있을까 걱정된다.
새봄을 맞이하는 드넓은 바다는 아득하게 수평선으로 이어지고 태극기 전령사의 머리꼭대기 위에선 작은 태극기가 오늘따라 태평양을 향해 더욱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부디 하느님이 보우하사 대한민국이 오늘의 난국을 잘 헤쳐 나갈 수 있길 빌어본다.
첫댓글 가족들이 예쁘시네요.
선생님께 아이들은 인사드릴 기회가 없어서 잘 모르실 것입니다. 남매 중에 위의 아이 경림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