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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제19태왕(391-412) 고국양왕의 태자, 본명은 고담덕인데 중국측 기록에는 안(아틸라)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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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은 남정 북벌하여 한국 민족사에 있어 한 시대를 구획하는 '광개토경' 위업을 이룩하였다. 서쪽에 위치한 선비족 후연과는 처음에 우호관계에 있다가 후연왕 모용성이 중국의 중원으로 진출하기 전에 후방을 칠 것을 우려하여 고구려정벌에 나서게 되는데 고구려의 남소성과 신성을 침공해오자 이에 대한 보복을 감행하여 요동성과 요하지역을 차지하게 되고 다시 후연왕 모용희가 침공해오자 요하 이동지역에서의 세력권을 확고히 하게 된다.
북으로는 거란을 정벌하여 조공관계를 맺는다. 백제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관계가 깨진 백제가 왜를 앞세워 고구려와 우호관계에 있는 신라를 침공하자 5만 병력을 보내어 가야지역까지 추격하여 일대를 장악하고 6성을 장악하는 등 세력을 행사하고 신라에 대해서는 위기에 처한 신라를 구함으로써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신라우월사관인 신라사관론자들 광개토태왕을 추켜 세우는 이유라 할 것이다.
한국 사학계는 인정조차하지 않는 상황이지만, 광개토태왕비문과 [위사]에도 명백히 기록되어 있지만, 흥기하는 북위를 제압하기 위하여 서쪽으로는 정예 기마군으로 중앙아 감숙성 지역의 토욕을 정벌하고, 북위수도(업)에 고구려인 54만을 이주시켜 북위가 남쪽으로 수도를 천도하게함으로써 초원길과 초원무역을 장악하였다.
광개토태왕은 거란이나 후연, 비려, 왜에 대해서는 토멸의 대상이었으며 신라나 백제, 가라제국은 정복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로 보아 이들 신라나 백제, 가야는 동일집단으로 보고 통일의 위업을 이루려는 의지를 보였던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강제적 통합보다는 국권과 자치권을 보장해 주면서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게 함으로써 단군한국의 홍익인간이념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4~5세기의 동아시아는 격동과 활력의 시대였으며 삼국의 정립이 국제적 교섭을 배경으로 본격화되는 시기였다. 이러한 동아시아의 정세속에서 위대한 정복군주가 탄생하였으니 바로 고구려 제19대 임금인 광개토태왕이었다. 광개토태왕은 역사상에서 두 번 태어나셨다고 할 수 있다.
즉, 자연인으로서의 출생과 대왕의 훈적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능비가 19세기 말 재발견 됨으로써 태왕의 훈적이 보다 뚜렷한 실체로서 우리에게 다가온 사실이 바로 그 것이다. 태왕은 소수림왕 4년 (374년) 왕제 고국양왕의 아드님으로 태어나셨으니, 바로 백제의 정복군주인 근초고왕의 몰년에 해당된다. 이는 당시 동아시아의 축을 이루었던 고구려와 백제의 대립에 있어 명암이 엇갈리는 숙명적 사건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태왕의 인간적인 면모를 담은 기록은 희소하지만 체구가 장대하였다는 부여인이였기에 대체로 태어나실 때부터 체격이 웅위하고 기상이 늠름하였으며 성인의 풍모를 지녔다고 한다. 이는 물론 고대의 영웅사관에 기인하는 기술이라 할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태왕의 성품을 반영한 표현이라 할 것이다.
고국양왕 3년 13세에 태자로 봉해졌다가 18세의 나이로 즉위하셨으니 바로 신묘년(391년)의 일이었다. 대왕은 이후 22년간 짧은 재위기간 동안이었지만 남정 북벌하여 고구려사에 있어서나 한국민족사에 있어 한 시대를 구획하는 문자 그대로 '광개토경' 위업을 이룩하셨다. 즉, 대왕은 위대한 정복군주로 서쪽으로는 세계 최고의 풍부한 철산지인 요동을 확보하고 이를 기반으로 요하를 넘어 대능하유역으로부터 멀리 흥안령 산록의 시라무렌강 유역을 원정하고, 동쪽으로는 목단강유역으로부터 연해주 일원에까지 영역을 확대하였으며,
북으로는 송화강유역의 북만주일원으로 통치영역을 넓히고 남으로는 곡창지대인 한강유역을 획득하는 한편 멀리 낙동강 유역에까지 정복전쟁을 수행하셨다.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대왕은 백제,북연,동부여,신라,가라제국을 조공국으로 복속시키는 한편 태왕호와 영락 년호를 사용하여 중국과 대등한 동방의 패자이심을 사해에 알리셨으니,
이는 당시의 고구려가 팽창된 국력을 바탕으로 전제왕권을 완성하고 제국질서로 이행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위업을 이룩하신뒤 39세의 아까운 나이로 임자년(412년)에 붕어하셨다. 대왕의 본명은 담덕(중국문헌에는 안이라 하였다.)이나 생전에는 호태왕 또는 영락대왕으로 불리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능비문에 의하면 년호는 영락, 시호는 호우총 : 국강상광개토지평안호태왕, 모두루묘지 : 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으로 대왕의 생전 업적이 잘 나타나 있다. [끝]
[환단고기/고구려국본기]"우리 문명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
# -광개토태왕 기마군 깃발문양
중앙은 서남해 중심의 한반도를 의미하고 중국.인도.중동.유럽.아메리카 등 한국의 문명이 전파된 5대양 6대주를 상징하는 문양으로 고구려의 뿌리의식과 함께 고구려 중심의 세계관을 표현한 문양이다 당시 그 깃발을 나부끼며 말을 달렸던 고구려 기마군의 자부심과 당당함과 위용을 충분히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유럽에 갑자기 출몰한 한(훈)민족은 고구려족이고, 최고 군사전략가였던 아틸라 대왕은 광개토태왕이였다!
참고로 장수왕이 100세에 이르기까지 장수하였는데, 광개토태왕이 39세에 요절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광개토태왕은 당시 어느 나라도 대적하지 못하는 동방 최강 고구려를 실현한 태왕으로 우리 민족사에서 치우천왕에 맞먹는 정복군주로서 당시 서방 최강국가인 로마와 겨루고 싶었는지 모를 일이다.
광개토태왕의 이름이 중국에서는 '안'이라 불렀는데, 이는 '아틸라'를 의미한다. 바로 로마제국을 멸망으로 이끈 한(훈)제국의 위대한 대왕의 이름인 것이다. 아틸라도 매우 군사전략이 뛰어난 리더로 로마인들에게 의해 기록되고 있다.
광개토태왕은 티벳지역에 나라를 세운 모용선비족의 토욕을 381년에 정벌하게 되는데, 그 때 고구려인 45만을 북위 수도로 이주하여 북위가 수도를 천도할 정도였다. 45만이라면 기마군으로 편성할 수 있는 엄청난 인원이다.
광개토태왕은 39세에 아들 장수왕에게 왕위를 양위하고,시신이 없는 가짜 무덤(태왕릉)을 만들고, 300인의 수묘인을 정하여 엄하게 지키라고 명한 후에 초원지역으로 이주시킨 45만 중 지원자만 모아 기마군을 편성한뒤 서방으로 말을 달렸다고 본다. 그래야 갑자기 유럽에 출현하여 로마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은 한(훈)민족의 실체를 알 수 있다. 아틸라가 보여준 군사전략과 성품은 광개토태왕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틸라가 황금의자가 아니라, 돌의자를 사용했다는 점은 고구려의 돌문화(광개토태왕비-돌비)를 반영하고, 아틸라가 죽었을 때 찰갑을 묻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그래서 로마제국의 심장 로마까지 기마군을 이끌고 들어가 살려 달라는 로마교황의 간구를 들어 주었던 아틸라는 광개토태왕이였다고 확신한다. 아틸라가 쓴 투구가 고구려군의 투구모양도 일치하고, 한민족의 세운 헝가리는 '한-고리(고구려)'로 명백히 한민족 고구려가 세운 나라이기 때문이다.(윤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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