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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목요일 맑음
오늘은 금화로부터 지금까지 들은 말 가운데 제일 서운한 말을 듣긴 해도 나는 아무것도 못하면서 너무 많은 일을 씩혀서
그런 말을 들어도 된다고 생각 하여다.
그레도 나는 이달에는 더욱더 좋은 일 기쁘고 경사 슬어운 일이 많아 지이다.
부처님이시여 이렇게 기도 하여다.
87년10월2일 금요일 맑음
나도 사과 따는데 갔다.
금화가 어제 경향신문 7면에 현대판 효녀심청이라고 대자로 사진과 함께 적절한 표현으로 기사 난 것을 읽어보았다.
나는 종일 사과 꼭지를 접었다.
오후에 싣고 간후 과원에서 5시경부터 걸어서 올 수밖에...
리어까 사과 실어서 탈 데가 없어 중환내 집까지 와서는 앉아서 올라왔다.
금화는 빨래를 하고 나는 소죽 부엌에 불을 넣고 오늘은 하루가 기쁘게 지나갔다.
10월3일 토요일 맑음 개천절
별로 하는 일없이 기도하며 하루가 흘렀다.
10월 4일 일요일 맑음
부친께서 깨를 골안밭에 것 털어 오셨다.
한말가량 될까 너무 적게 나왔다. 금화는 장에 가서 여러 가지 사왔다.
나는 집안 청소하고 깨를 흔들고 문 바르는 것을 돕고 소물 솥에 불을 넣고 저녁 먹고 기도 하고 티브이보다 잤다.
87년10월 5일 월요일 맑음
대구 종제 오탁이 한태 법구경과 유마경책을 사오라고 전화를 하고 안동 수야네 엄마 숙모한태 금화 선보로 가는데 숙모 함께 가달라 부탁을 했다.
오전에는 과원에 약을 치로 가고 나는 집안 청소했다. 일찍 다치고 왔다.
금화가 신문에 난 것을 보고 전국에 총각들이 장가들고 싶다는 사람들 편지가 하루 12통이나 왔다. 신나고 기쁜 일이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착한 동생이 그동안의 수고와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신문날 일이였다.
그동안 애쓴 보람이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더더욱 보람 있는 감격적인 일이 생겨지게 하소서.
관세음 위신력을 보여 주심이라 생각하였다.
전화가 여기저기에서 왔다.
정산에서 경향신문 보급 하시는 어른께서 지국에서 20여부를 보내 주기로 했다며 미담 소개 부탁하면 도와준다고 하셨다.
서울 정철영 부회장하고 안동 지회장님께 쓴 편지를 오늘 두통 부쳤다.
87년10월6일 화요일 맑음
오전 부군수님께서 위문품을 전달 하로 오셨다.
오후 벼를 묶었다. 오전 부친께서 이발하로 가셨다.
금화와 있다니까 조일환 총무계장님이 오셨다. 부군수님께서 금화가 경향신문에 기사 난 것을 보고 군수님께서 갔다 오라고 하셔서 나오셨다며 쌀 60키로 보리쌀 40키로와 전기밥솥 밥통 겸용을 선물로 주고 가시고 오후에는 벼를 묶었다.
제수씨 내일이 추석이라고 장보기 해가지고 와서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고 나는 애들 보고 저녁 먹다니 대구 오건이가 왔다.
옥신이가 금화드라이기도 선물로 사오고 양말도 사오고 아부지 담배도 3갑 사왔다.
기특하고 대견스럽다. 모두들 추석이라고 찾아왔다. 새벽 한시가 넘어서 잤다.
87년10월 7일 수요일 맑음 추석날이다
아침부터 성묘 다니느라고 바쁘다.
차례음식을 장만하여 모두 담아서 산소로 가고 나는 진영 앞에서 축원하고 기도를 하였다.
오후 사촌들이 왔다. 대구 큰 사촌 가고 저녁 때는 큰 아버지 종숙 큰 백모 저근백모 앞집 할배 상철부 오국 엄마 숙모도 왔다.
오탁 종제와 종수씨도 함께 왔다.
인사도 받았다. 형수씨도 오셨다. 놀다 가시고 금화 결혼문제 이야기도 하고 기분좋은 흐뭇한 하루 였다.
87년10월 8일 목요일 맑음
오늘 금화 선보로 갔다.
안동 숙모와 제수씨 금화 셋이 나갔다.
신랑 쪽에는 모친 숙모 형수 누나가 나오시고 시숙될 분도 나오시고 시누이 아가씨 두명 비공식으로 나온 것 갓더라며 숨어서 올케 될 금화를 살피더라 한다.
오후 제수씨 먼저 왔다.
모두다 좋아하시더라고 하셨다. 금화는 막배로 신랑 될 사람과 오다가 과원에 잇다 부친께서 안골에 가셔는데 만났다고 했다.
저녁에는 온 집안 어른 들이 다모여서 이런 저런 이야기 두 집안 내력 등을 나누고 술을 한잔씩 하시고 가신 후 죽전 숙모와 모두 인사를 나누고 추석 훗날이라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간 후 새벽 4시까지 예기하다 가고 취침을 했다.
이모든 것을 부처님께 감사해야한다.
이제 금화가 시집을 가야한다.
나는 큰마음 먹고 막내를 보내려고 했더니 시 청소년 회장이란 신랑감이 그중에 제일 조건이 우리 와 맞아 떨어 진것 같다.
인연이 아무래도 깊은 모양이다.
얘기 들을 때는 인격 외모 학력 군필해는 줄 알았는데, 본인이 직접 와서 얘기하는 것을 들은즉 중졸이고 군은 방위제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것이 걸였으나 군은 필하고 고졸은 대는 줄 알았더니 아니라고 했다.
김선평 시조로부터 30세손이라고 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 6대조로부터 물려받은 집이라고 했으며 직장은 자리만 좋으면 들어간다고 했다.
성격은 좀 있는 사람 같은데 나중에 어떨까? 다른 점은 모두 다 좋다고 생각 된다.
부처님께 모두 위임하고 대는 대로 해나가리라 관세음보살
87년10월 9일 금요일 맑음
아침에 일어나니 안개는 자욱한데 매부될 사람 김진홍군이 자고 일어나서 세수하고 잘 잤는가 하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인사했다. 아침을 먹고 정산까지 금화 배웅을 했다.
부친은 땅콩을 묶어서 나르고 오후 제수씨와 금화는 사과 따로 갔다 와쓰며 이런 저런 얘기하고 있다니까 진홍군이 저희 부모님과 의논 하니까 8월은 너무 바쁘고 9월 달에 약혼식 조로 이렇게 하고 결혼식은 내가 얘기한데로 12월에 가서 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해보자한다며 오빠와 가족 의논해 보시라는 전화가 왔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부처님이 도우시고 가피력 내리소서.
87년10월10일 토요일 맑음
오전 벼를 실어 모두었다. 오후 사과를 따다.
오전 백부 부친 숙부 상명아빠 전밭골 우리 벼를 실어 모두고 나는 집에서 땅콩 좀 따다니 금화 새참 갖다 주고 왔다.
집배원이 왔다. 민주정의당 명예총재 전두환 대통령각하님께서 교지문 서신과 신문을 보고 전국 총각들과 국방부내 정보본부에 근무하는 족친아저씨께서 선물 선전용 일기 공책 한권과 편지를 보내 오셨다.
그것을 읽느라고 점심밥도 할줄 모르고 편지 보고 있는데 벌써 일하신 어른들께서 점심 잡수로 오셔다.
큰 아버지 상명 아빠가 읽어보았다.
저녁에 해숙이 6촌 남실이 태희 끝남이 등 영학 아제 재종 오창이 모두 놀러 와서 읽어보았다.
효선이 새벽효자 쓰는데 나쁜지 좋은지 풀어봐 달라했다. 또 학이아제 아들 오인이 이름도 나쁜지 좋은지 봐달라고 했다.
그러나 자세히는 볼 수 업쓰나 대강 풀어보니 보통 이름은 다 데니까 그냥 두는 것이 좋다 고 해주었다.
둘다 그냥 두기로 하고 조금 있다 재종은 간 후 학이 아제와 이런저런 얘기하고 놀다가 새벽 한시가 넘어서 간 후 취침했다.
오늘도 기쁜 날이였다.
영월 안혜자 영양사 한태서 답장도 왔다. 요즘 같으면 세상 살아있다는 보람도 느낀다.
87년10월 11일 일요일 맑음
오전 벼 타작을 하였다.
나도 사과 따는데 가서 꼭지를 접었다. 오늘은 시목으네 모자와 동생 웅이 나 금화 이렇게 사과를 따고 넣고 작업 하였다.
가줄로 오지 않았다.
부친 백부 숙부 상명 아빠 경운기로 타작을 하였다. 저녁 늦은 시간에 실어왔다.
올해는 큰집과 타작을 하여 매우 쉬웠다. 저녁을 먹고 나서 안동아제 한태 전화가 왔다.
부사를 20상자 이상 따달라고 했다. 상자당 만원씩하고 따주기로 했다.
저녁 먹고 티브이 보고 있다. 피곤하여 일찍 잤다.
오늘 외사촌 병철 이가 왔다.
동네 청년들과 함께 노는 것을 보고 먼저 잤다.
87년10월12일월요일 맑음
부친과 소달구지 타고 먼저 들로 갔다.
금화는 외사촌 보내고 점심을 싸가지고 뒤우로 왔다.
웅동생은 제수씨 친정가고 없어서 오지 못했다.
부친과 금화 나 셋이서 점심을 먹었다.
참 맛이 좋았다. 이제 이렇게 일하는 것도 올해로 마지막이 될 것 같다.
함께 점심을 들에서 먹어보는 것도 마지막이 될 것 같다.
모두가 추억에 그림자가 데어 세월은 자꾸만 쉬지 않고 흘러가고 있다.
모두 실어주고 돈 4십만원 받아서 부친 드리고 금화 먼저 왔다.
꼴 베어서 낙과 싣고 타고 왔다.
올해는 들 구경도 여러 번 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나 이대로 만족을 느끼면서 행복하게 살면서 미래에 무엇이 될까?
변함없이 불도를 닦아 모든 사람 위해 기도하면서 열심히 살아야 겠다.
오늘도 피곤하여 티브이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87년10월 13일 화요일
제수씨는 친정에 갔다.
땅콩을 따다 외숙어른이 오셨다.
오늘은 금화와 나는 땅콩을 따다. 부친은 저다 나르고 오후 외숙어른 오시고 안동형수도 왔다. 땅콩을 따다가 나는 방에 들오고 외숙 어른과 동리 돌아가는 얘기도 하고 가신다 하는 것을 저녁이라도 잡수시고 가시라하니까 계시다가 잡수시고 남문섭 아제 댁으로 올라가시고 티브이 보다 법구경을 읽다가 기도 좀 하다가 잠이 들어지만 오늘 내가 했는 말이 무심결에 했지만 너무 거칠고 잘못 한 것 같아서 후회스럽다.
금화가 땅콩 따로 빨리 나와서 따라는 말인데 말 표현이 너무 사나워서 내가 한 말이라도 진담 아니지만 이런 말을 한 것은 많이 잘못된 언행이였다. 생각하며 참회 하였다.
또 한 가지는 해숙이 사과를 두개 먹고 두개 가지고 간다하여 사과를 먹어 쓰면 땅콩이라도 좀 따주고 가야지 그냥 가면 데냐고 했다. 안동형수가 있어는데 형수가 어떻게 들었을까? 그까지 사과하나 먹었다고 일해주고 가라하니 너무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이런 저런 말들이 혹 남에 기분은 상하게 하지 않았을까? 불도를 닦는 마음은 언제나 이런 말 이런 행동이 모두 자신에 마음에서 용납 대지 않으니 참으로 진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만 가지 행동이 어렵고 조심이 된다.
부처님이시여 계정혜 삼학도를 잘 닦아서 불도를 성취하여 가엾은 중생들을 이익대게 하며 자리이타 행을 할 수 있도록 부처님이 가피력을 새롭게 성취하고 얻을 수 있게 하여 주소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10월 14일 수요일
나는 땅콩을 따다. 부친과 금화는 고추를 따다.
나는 종일 땅콩을 따고 금화와 부친은 고추를 따서 영봉으네 벌크에 갓다 넣기로 하여 그 집에 가다 주었다.
10월 15일목요일 흐림
편지를 답장을 여주 김성환 선생님께 쓰고 족친어른 인천 회장님께도 써다.
87년10월16일 금요일
이종 준연에게도 잔디회 봉사자 최경현 양께도 녹음 태프와 금화 기사 난 것을 함께 동봉했다.
경주서 제수씨께서 전화가 왔다.
사형일로 치안 본부장 서울 진고종숙 어른께 얘기하여 보라고 했다.
무조건 편지하시라고 하셨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고 내가 알아 볼태니 기다리라고 했다.
저녁 강승창 고종숙 어른께 전화로 문의 드렸더니 대강 가르쳐 주셔쓰나 전후사연을 잘 모르무로 경주 사돈어른 직접 찾아 보시도록 하겠다니까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래서 경주 전화 드려더니 성우 사형이 받았다.
그래서 사장 어른 봐꿨다. 대강 얘기 드려더니 감사하다면서 찾아 뵙겠다고 하셨다.
10월 17일 토요일
오늘도 사과 따 모았다.
부친께서 15일부터 금화와 하루 따고 그 외 혼자서 남은 사과 모두 18일까지 다 따 모두셔다.
어제 금화 약혼 한복 정산 배호진댁에 부탁 전화해 놓았다.
87년10월18일 일요일 맑음
금화 17일 막차로 안동가서 법회보고 약혼 선물도 서로 봐 두기로 하고 어제 나갔다.
법회 참석 못 했다고 했다.
허혼 서간 강월스님께서 써놓은 것을 찾아오고 오늘 식전 백부 안동 가신다고 하셔서 술값 만원 드리고 경주 전화하니 사돈댁 받았다.
제수씨 봐꿔는데 사돈어른 오신다고 해서 그럼 알겠다하고 금화는 사돈어른 제수씨 백부 만나서 점심 잡수시고 고종숙 어른 만나 뵙고 금화 제수씨 먼저 들왔다.
금화 옷 맞춰 놓고 왔다. 오늘 볼일은 모두 잘 봐 놓고 왔다.
그런데 어재밤 진홍이와 함께 있다가 신장 결석증이 발생 금화 놀래다.
성소병원 까지 새벽에 갔다며 걱정 했다. 나는 진홍이 전화를 받았다.
그런대 그런 소릴 하여 그래도 약혼하고 결혼하여 평생 함께 하게냐고 마음을 알아보려는 말을 했더니 더욱 놀래 딴다.
제발 아무일 없이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고 이제 별탈 업는 약혼식을 하기로 작정 했다.
10월 19일 월요일 맑음
오늘은 집안 청소해 놓고 기도하고 오후 제수씨 애들 하고 넘어 오셔다.
상의도 없이 혼자 약혼복 맞춰 다고 섭섭다 했다.
큰아버지 18일날 나가셔다 오시지 안아서 온 사방에 전화를 했다.
저녁 먹고 티브이보다 기도하고 잤다.
87년10월 20일 화요일 흐리고 쌀쌀했다.
제수씨 첫차로 넘어가시는데 편지 부치라고 보냈다.
16일까지 써둔 것을 오늘 등기로 경현양께 그외 3통은 보통으로 내일은 금화 약혼식을 하로 간다.
농협에 예금 해둔 것 60만원 찾아오라고 웅이한태 시켰다.
부친은 사과 따로 가시고 안 계셔서 돈 같다주고 한복 아직 덜 대서 오지 않았다고 했다.
살 것 대강 얘기해주고 너무 여러분 가면 욕한다고 하여 큰아버지 아버지 제수씨 큰집 형님 안동 큰 숙모 여섯 분이 갈 예정 오태 기준도 갔다고 했다.
동생은 너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안가도 되고 너 요랑 대로 하라고 했더니 섭섭했던 모양이다.
정산 가서 동생한태 제수씨 얘기하니까. 나한테 안 간다고 했다며 제수씨도 첫차로 안 간다고 했다.
안가면 금화혼자 먼저 가지 머요 했더니 끊어졌다.
금화 준비 시켜주고 안동 숙모 한태 국제식당 12시에 만나기로 했다고 가르쳐 드리고 이제 내일 약혼식 하로 가니 편히 쉬고 일찍 자라고 했다.
티브이 보고 기도를 했다. 아무탈 없이 순조롭게 내일 약혼식을 잘 치루도록 부처님이 도우소서. 이제 얼마 안있어 행복한 인생 새 출발을 시작 하게 될테니 조심조심 하라고 당부하고 모두 부처님께 감사기도 하며 오늘이 지나갔다.
87년10월 21일 수요일 맑음 음력 8월 29일 금화 약혼식 한날
아침 일찍 밥을 해먹고 먼저 돈을 가지고 첫차로 넘어갔다.
저근 오빠 가자니까 10시 반차로 나온다고 했다. 나는 집에서 배호진씨 차를 불러서 아버지와 큰아버지 형님을 정산까지 9시반경 가시도록 하고 호진씨 부인도 함께 왔다.
모두 가시는거 보고 들와서 집안 청소하고 서울 기석이 서류 띠 보내라는 전화 받아 적어놓고 안동 태훈모 종수씨 전화를 받았다.
종수씨세요 기사 금화 오빠입니다. 하니까 아주벗님이세요 안녕하셔서요? 하여 다름이 아니고 숙모님 나가셔는지요? 하니 네 조금 전에 나가셔다고 했다.
밝은 음성을 들으니 기분이 좋았다. 기열네 엄마 형수씨가 오셔서 점심을 차려 주셨다.
큰집 형수 도장 파가지고 신원증명 띠고 안동 기준이 서류 띠고 해서 서울 올라가도록 했다.
오후 4시쯤 대서 부친께서 술 두병 소주 한되 청주 한되하고 소고기 닷근 정도 명태 특 한떼 이렇게 가지고 강선 편지함께 가지고 오셨다.
조금 있다니 큰아버지 나오시는 것 모르고 누구로 해떠니 나다 왜 하시는 소리 큰아버지 셨다. 벌써 다녀오셨습니까?
저녁에 종숙 재종형님 오시라하여 한잔 대접 하려고 제수씨 동생 넘어오라고 했더니 저녁 먹고 있다니까 왔다.
엿을 싸가지고 집집이 돌리라하고 고기도 조금씩 썰어서 한잔 먹게 하라하고 예물 그쪽에서 오는 대로 하겠다 의논도 하지 않고 옷을 맞췄다고 야단이며 동생 약혼 하는데 돈을 조서 갔다 오라고 하지 않았 따고 섭섭하다며 또 무엇 무엇 사는지 하는지도 모르게 의논 좀 해가지고 하면 얼마나 좋으나고 했다.
제수씨 비위에 아니 맞았다고 내가 그걸 어찌 아노 그렇게 나오면 나는 점점 마음에 문이 닫아저요 숙모가 저의들 목은 다 나누어 주어는데 저는 더 이상 일 업다고 하는 소리도 기분이 나쁘다고 했다.
마음에 있는 소리 나한테 직접 얘기하는 것은 좋다. 내가 아무리 잘 해봐도 잘 한점 없을 것시요 나는 나름대로 내 방식대로 살아서 내 마음이 용납 대지 않으면 내 마음 안에 파고 들 수가 업다.
내가 왜 이렇게 못난 인간인지 나도 몰라 아무리 잘해주려고 해도 내 마음에는 들지 않아 고민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모두 부드럽게 따뜻하게 대하면서 왜 제수씨한테 이렇게 해서는 안대는 줄 알면서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금화는 시집에 함께 갔다. 웃지 말고 조심하고 실수 없이 내일 보자하고 끊었다.
87년10월 22일 목요일 맑음
MBC 안동 문화방송국에서 전화가 왔다.
오늘 아침 일찍 안동 강정 아제한테서 사과 넣으라고 전화가 왔다.
70여 상자 담아서 모두 싣도록 끌어내려면 사람을 해야 한다. 큰집형수 재종형수 두 분을 하였다.
어제 동생 약혼 축하음악 한곡을 부탁하려고 전화 했더니 프로야구 중계방송 때문에 오늘은 못하고 금요일 오후 3시10분부터 방송하는 프로에서 지난 일이지만 축하곡을 보내준다고 했다.
오늘 아침 8시20분부터 진행자께서 푸른신호등 방송시간에 어제 동생 금화양이 약혼식을 했다는데 먼저 축하들입니다.
하여 감사합니다. 전화 받으신 분은 누구십니까 하여 큰오빠 권오윤입니다.
동생 약혼소감을 말씀하세요. 그동안 아버지와 큰오빠 시중들며 가정을 돌보느라 고생 했는데 정말 기뻐요.
어떻게 살 계획 입니까? 옛말에 하늘이 무너저도 솟아날 길이 잇다 했으니 어떻게 살아 갈 길이 있으리라 믿어요.
전화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기성이가 녹음하는데 만저버려서 망쳐버렸다. 헷갈려서 말도 잘 못 했다.
먼저 사과 너으로 간 뒤 기성이랑 나도 리어까 타고 같다.
마지막 계산을 해야 하기 때문에 웅 동생이 오지 않는다 하여 날씨도 따뜻하여 좋다.
나는 기성이 하고 잘 놀았다 상자 숫자도 예산데로 나왔다.
모두실어 보내고 뒤처리 다하고 형수 제수씨 먼저 다 가고 나중에 리어까 타고 집에 오니까 매부와 동생이 와 있었다.
매부 왔는가하고 소죽 끓였다.
저녁 엿을 이웃에 돌리고 종방이 모여 술과 고기를 나누어 먹었다.
이렇게 내 동생이 신방을 차려서 우리 집에서는 처음으로 대조사님 진영 앞에서 하룻밤을 보내려고 자리를 폈다.
온 집안이 사람 좋타고 칭찬하시면서 축하했다.
나에 하나 뿐인 막내 여동생이 시집을 간다니 꿈같다.
좋은 가문에 출가하여 부유한 집에 우애와 사랑이 철철 넘치는 집에 보낼 수 있게 되어 그 무어라 말할 수 없이 기쁘고 흐뭇합니다. 저가 원하던 데로 소원 성취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영원히 행복이 충만하며 총애와 우애을 빌면서 기도하고 자정이 데어서 잠자리에 들었다.
10월 23일 금요일 맑음
휠췌 때문에 안동에 갔다 왔다.
오늘 첫 얼음이 얼어다. 아침을 먹고 큰어머니 큰집 형수가 나와다.
조금 있다니까 오득 형님이 왔다. 사과나무 묘목 신청을 받으로 다니신다고 했다.
배5주 사과5주 신청하고 매부와 인사하고 술 한 잔 한 후 씻으로 나가고 4종형님 신랑감은 잘 구했다 한다.
금화 주민등록 하로 함께 넘어가는데 제수씨도 함께 넘어갔다.
나는 집 청소 해놓고 씻은 후 옷을 갈아입고 점심 먹은 후 돈70만원 예금 할 것 가지고 나갔다.
개인택시 권정홍씨 45분경 오는데 금화가 타고 왔다. 곳 타고 정산 가서 예금하라고 돈 내주고 곳 바로 안동으로 갔다.
성소 병원에 내려다. 재활원 생들이 모여 있어다.
각가지 장애형태 장애자 들이 휠췌를 기다리고 있어지만 개개인 몸에 맞지 않게 제작 되서 국산으로 된 것으로 다음에 찾으로 가기로 했다.
4시 넘어 가던 택시로 들왔다. 2만원 주었다.
금화는 아무것도 안하고 갓다 오도록 잠을 자고 나왔다.
나는 소죽을 끌이고 들와서 저녁을 먹고 피곤하여 곳 바로 잤다.
10월 24일 토요일 맑음
안동 종제 아들 태훈이 첫돌 잔치에 금화 갔다. 오후 늦은 시간에 왔다.
나는 소죽을 끌이고 저녁에 잔디회 환우들과 금화 결혼을 축하하기 위하여 나도 참석해야 한다니 시집 식구들에게 쫒팔려 신경쓰여 못간다.
나는 안갈태니 구경해라 가족모두 남들 같지 않아 망신스럽다고 불평이여다.
나는 그래도 저를 그렇게 생각지 않았더니 하는 말이 고작 그렇게 언제부터 시집 식구에게 못 보일까 염여데서 우리형제 아픔을 그렇게 짖발는지 나이 먹은 처녀 시집갈 날이 며칠 있다고 우리 형제을 원망 하는가?
그래도 지를 위해서 정산 동생도 못가게 하여 약혼식에 참석을 하지 안아다.
남들은 우리들에 마음을 어찌 알 수 있을까? 서로가 이해을 못하면 영원토록 풀리지 않는 마음에 응어리을 어찌할까?
분하고 원통하고 한스럽다.
남에게 무시 경멸 이제는 막내 동생까지 무시 경멸하려 들다니 참으로 괘심하다.
부처님이나 하늘이나 알아주실까? 이렇게 오늘이 지나갔다.
10월25일 일요일 맑음
요즘 나의 심경을 일기장에 써본다.
그 어느 누구도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리라. 병 주고 약주는 행동 모든 것이 가소로울 뿐이다. 내가 언제 누구한테 사람 대접을 받고 살아나 뭐 발부면 발는데로 때리면 맞아주고 하고 싶은대로 하게 내버려두고 살아오지 않아던가 그래도 지금까지 잘 살아온 것만도 부처님께 감사드린다.
나로 하여금 깨닫고 느끼고 배워다니 그도 일리는 있으며 나를 미워하고 욕하라 원망하라 그러나 내가 끼여 들지 않고 내가 업다면 너는 마음도 더욱 괴로워쓸 것시며 너가 원하는 데로 대지 않았을 것시니 내가 밉고 가족이 미워도 너는 우리 동생이 분명하고 우리 아버지 딸이 분명한 이상 덮어가지고 모르게 하려해도 아니 된다는 것을 부처님 뜻을 따라 움직일 뿐이다.
나에게 많은 잘못이 있다는 것을 나도 안다.
따뜻한 사랑으로 감싸주지 못하고 소 부려먹듯이 일만 씩혀쓰니 미안함을 무어라 말 할 수 업지만 내가 어리석고 미련해서 정이란 것을 모르고 나 역시 누구한태도 사랑을 받아 보지 안아서 사랑이 무엇인지 가족에 정이란 걸 모르고 살아 굳은 마음이 언제 풀리나 여자로서 동생이나 제수씨나 마찬가지가 아니 여던가?
나는 마음도 몸도 왜로움에 고독함에 빠진 사람이지만 내색없이 불평이나 불만없이 살려고 그래던 것 뿐인데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장 나약한 것 같으나 가장 큰 힘을 보여줄 수 있는 나에 지혜로 군수님이 오시고 부군수님이 다녀가시고 신문에 실리고 방송에 나고 이것이 누가 알아 해주지 않는 것을 해주도록 노력했다.
그동안 나와 아버지을 위해 애쓰고 수고 해씀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다.
그냥 우리 집을 떠나 시집 보내버리면 너무 아쉬움이 남을 것 같아서 여다.
나와 아버지을 위하여 고생하며 참고 열심히 살아준 것을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이 듣고 보고 느끼고 배우고 깨닫고 하여 서로 도우면서 살기를 바라는 뜻이 여다.
내 동생이 잘해서가 아니고 동생으로 하여금 어려운 가운데서 살고 있는 사람들께 용기와 희망을 주게 하려고 이렇게 되기를 나는 염원 하여다.
부처님은 내 마음을 알고 계신다. 감사합니다. 부처님이시여 관세음보살
10월 26일 월요일 맑음
편지 3통을 우송 하여다. 경기도 부천에서 재종 오창 친구 아들 작명을 부탁하는 전화를 받아서 이 날개상 자와 먼저선 자로 작명을 해쓰며 경향 신문사 사회부 기자 장화경님께 밀알 들을 펴내는 하영종님께 편지 3통을 써둔 것을 오늘 부쳐다.
그리고 저녁에는 기도하고 일찍 잤다.
87년10월27일 화요일 맑음
국민 투표 헌법 개정 찬반을 묻는 날이다.
부친과 금화 가고 나는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가지 안앗다.
제수씨는 선예 대릴로 경주 친정가시고 금화는 주민등록을 찾아서 투표를 하고 오려고 정산 갔다가 안동 나가서 매부만나 약혼 예물을 모두 찾아왔다.
부친은 오셔서 마구간을 쳐놓고 비닐 거두로 가셨다.
나는 책을 보며 하루가 지나갔다.
요즘은 기도도 별로 못하고 있다. 금화가 오더니 이정숙 보살님을 만났다고 했다.
결혼 하려고 약혼해다는 이야기도 했다 하였다.
그런데 오빠가 아직도 그런 생각 하고 있는지 하여 무슨 생각인데요. 하니까
오빠가 나를 좋아하며 결혼 할 생각을 한다기예 금화는 아니라고 딱 잡아 띠며 그런 생각 안한다고 하니 너는 모른다.
제수씨께 얘기를 듣고 편지내용을 보니 그런 생각이 농후하다고 했다.
아무튼 인연이 있어 그렇게 된 이상 서로가 이해를 해야 한다.
부처님 어서모두 해탈캐 하소서 금화가 찾아온 금반지와 금목걸이가 모두 아름답다.
귀한 보배로구나 나도 난생 처음 금반지를 쪄봐다 매부를 해준 것을 매부가 집에 가서 먼저 나한테 구경 시키고 가지고 오라 했다며 가저와서 보여주었다.
티브이시청하다 기도 좀 하고 잤다.
87년10월 28일 수요일 맑음
오늘은 반가운 소식 편지가 쏟아저 들왔다.
감격에 눈물이 자꾸만 흘러내렸다.
서울 김정원양 정원양 엄마 준영이 봉겸이 편지를 읽는데 그 내용에는 진실이 담겨저서 인지 마음이 감동하여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후에는 막내 동생이 목욕을 시켜주었다.
말일날 내가 대구에 갈 계획이니 오늘 안하면 시간이 없다.
그레서 동생이 물을 데워 목욕 시켜주었다.
내 몸을 항상 목욕시켜 주어는데 이제 곳 결혼하면 누가 나를 이렇게 기분좋게 목욕 시켜줄까? 고맙고 감사한 나에 동생.
이 은혜 언제 다 갚을 수 있을지 인연이 다하여 새로운 인연을 만나 행복을 만끽하며 오손 도손 살길 바라며 너는 원하는 데로 소원 데로 다 이루리라.
내말 거역지 않고 다 들어 주었으니 부처님이 다 도와주시리라 하고 티브이 보다 일기 쓰고 기도하고 잤다.
87년10월29일 목요일 맑음
저근집 유태와 참깨를 팔아드렸다.
식전에 이영호 상인이 와서 저근집에 물건을 팔아주고 꿔준 돈 12만원 받아와서 금화는 군 청소년 경진대회 하로 가고 부친은 걸음 실어내었다.
나는 기사1동 권영창 족숙께 벼집 6마지기 72000원에 산다고 약속 해두고 오후 편지 쓰려하다 졸음이 와서 누었다.
비 오는 소리에 일어나니 마당에 소금을 널어 두었다.
비를 맞아서 거두어 덮어두고 옷을 걷으려니 벌써 젖어버려다.
그냥 두고 누구한테 걷어 달라할까 말까 하다 그냥 두었다. 부친 오셔서 걷었다.
저녁 라면을 삶아 먹고 있다니 길수 어른 모친 놀러 오셨다.
이런 저런 대화 하시다 자정이 데어 가시고 서울 진고종숙 어른께 편지를 썼다.
제수씨 동생 경우사형 사건으로 부탁 편지를 문자로 쓰느라 두 시간이상 걸렸다.
초안을 써놓고 취침했다.
서울 장화경 기자님께 전화했다. 사건 기사 좀 써달라고 하니 대구 기자한태 얘기하여 준다고 하셨다. 감사하다 하고 안동 고종숙 어른께 전화 드려더니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니 좀 기다려 보라고 하시며 대구가서 얘기 한번 더 하겠다고 하셨다.
경주 전화 그렇게 전해드렸다.
사장어른께서 수사를 착수하지 않으니 서울 치안본부장 어른께 직접 도움을 요청해 달라는 부탁 말씀을 하셨다.
사위사형 한태 이런 부탁을 하여 미안하다고 하셨다.
오죽 답답하시면 그렇게 씀니까? 괜찬씀니다. 저가 편지한번 드리도록 하게 씀니다. 하고 전화 끊었다.
어떻게 손을 써야 확실하게 수사를 착수하게 할까? 이것이 문제로다.
87년10월 30일 금요일 비
대구 자원 봉사자 최재근 오상택 함께 왔다.
오늘은 소금을 햇볕에 널어 두었다.
집안을 청소하고 비가 와서 덮어두고 저녁때 금화는 군 경진대회 마치고 오상택 최재근은 나를 대리러 오고 함께 들어왔다.
내가 느낀 이야기와 경험담을 얘기해 왔다.
최재근이는 나에게 글을 써보라고 해쓰며 내가 내일 대구경북 지부 2차 정기총회 참석할 준비를 하고 자정이 되서 잠자리 들었다.
87년10월 31일 토요일 흐림
최재근 오상택 나 셋이서 대구로 출발했다.
택시 불러놓고 있다니까 벌써 왔다고 했다.
재근이 나 업고 헐래 벌덕 기열내 집 앞에 택시 있는데 까지 업고 와서 태우고 정산 경안 이발관까지 와서 이발을 하고 동생이 돈 만원 주는 것을 받아가지고 차시간이 데어 오상택이가 나를 업고 차에 올라갔다.
호숙 어른도 있었고 박위중씨도 박귀숙 씨도 있었다. 인사하니 모른척 했다.
나도 모른척 해 주었다.
호숙 어른도 성묘 가시는 모양인데 나를 어디가 아파서 병원 가는 줄 안다.
안동 가서 버스 타는데까지 재근이 나를 업고 갔다.
옷이 미끄러워 메달여 가는데 혼이 났다.
소변을 보고 곳 차표를 끊어서 무정차를 타고 10시 출발 대구 도착 11시 45분도착 했다.
차가 취소데어 택시를 타고 파동 장애자 복지회관으로 12시20분에 도착하여 총무 광배와 오상원을 만났다.
악수 인사를 하고 들어가니까 신정희가 혼자서 수고하고 있다.
악수인사를 하고 소변을 보고 나오니까 최경희가 와 있다. 악수 인사를 하는데 손이 따뜻했다.
나는 점심을 별도로 식혀주어서 혼자 먼저 먹었다.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조금 있다니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서울 송감사 악수를 청해서 인사를 하고 그리고 노춘강씨 46세 형님께서 미술 학원장 내외분과도 인사를 나누고 진정한 얘기를 나누고 저녁에 만나서 자세한 얘기를 하기로 하고 아는 분들과 차례로 인사를 하고 나서 한사람 두 사람 알게 되었다.
경현이가 찾아 왔다.
아저씨 안녕 하세요? 오냐 경현이냐 잘 있어나 하니 네 하여 수고해라 하고 있다니 저녁 때 경현이 먼저 갈께요. 아저씨. 하며 인사 한다. 오냐 저녁에 숙소로 놀러 와라하고 이따 보고 갈께요 했다.
총회를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다과회를 할 때 이수영 지부장님도 오셨다.
지 감사님이 오셨습니까? 하며 먼저 인사를 하셨다. 네 수고 하십니다. 하고 전제균님도 인사 하고 먼저 가고 뒤우로 가고 나누어 간후 우리는 노춘강 형님 자가용을 타고 숙소로 갔다.
숙소에 가서 모두 한곳에 모여 토론도 하고 차안에서 상원이와 영희씨 이야기를 조금 나누었다.
숙소에 도착하여 총무와 잔디네집 마련 이야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한 푼도 낼 수 없다고 얘기 했다.
나도 입장을 얘기 했다. 금년에 있어던 이야기를 했다.
당분간 명년까지는 예산이 될 수 없다. 2,3.년 후로 보류했다.
이런 저런 대화를 하고 노형께서 떡과일 사온 것을 먹고 이야기 듣고 있다니 최현숙씨도 왔다. 만나 볼 수 있었다.
함께 자고 올 때까지 있었다. 부회장님이 목욕 하로 들어 간 후 휠췌 이야기하고 모두 간후 취침했다.
새벽 3시경 티브이가 나왔다. 눈을 떠보니 비디오였다. 외국인 색스 비디오였다. 남자 2명과 여성 한명이 성교를 하는데 기묘한 연출 이였다. 난생 처음으로 그런걸 봤다. 괴이한 일이였다. 조금 보다 정안식 부회장님 족하가 비디오 끄는 바람에 잠을 잤다.
잠이 깊이 들지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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