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들의 새해맞이
취떡·과줄 먹으며 밤새 연 만들어 새해 첫날 설빔 입고 어른께 세배궁궐엔 왕과 신하 모여
신년 인사 신하·백성에게 축하그림 선물도 “셋, 둘, 하나!” 제야의 종소리가 울리는
텔레비전 앞으로 오랜만에 가족들이 둘러앉았습니다.
지나간 한해를 함께 돌아보고, 새해의 소망을 빌며 덕담을 주고받는 것은 익숙한 연말연초의 풍경이지요.
그렇다면 텔레비전도, 그 흔한 전기도 없었던 조선시대에 우리 선조들은 어떻게 새해를 맞이했을까요?
지금처럼 해가 바뀌길 기다리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을까요?
시곗바늘을 잠깐 조선시대로 돌려보겠습니다.
● ‘환세’와 ‘과세’ 하던 날
“아우님, 환세 잘 하시게.”
“아이고, 형님도 환세 편히 하십시오.”
섣달그믐, 지금으로 치면 음력설을 하루 앞둔 날.
강원 강릉시 성산면 위촌리에서는 조선시대에나 지금이나 이런 대화가 오가곤 한답니다.
‘환세(換歲)’라는 말을 풀이하면 ‘해를 바꾸다’라는 뜻.
저녁상을 물린 다음 친지들이 맞절을 하며 한해를 잘 마무리하기를 기원하는 겁니다.
물론 절을 하며 세뱃돈도 주고받습니다.
새해 아침부터 돈이 나가는 것보다는 저녁에 주고받으며 복을 비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뜻이라고 합니다.
위촌리는 430년째 마을 자치조직인 대동계를 이어오고 있을 정도로 옛 전통을 중시하는 마을입니다.
당연히 ‘섣달그믐날에 잠을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는 말도 철석같이 믿었지요.
환세가 끝나고 나면 집안 구석구석에 불을 밝혀 재미난 놀이를 이어갔습니다.
안방의 윷놀이를 시작으로 아이들은 그림자놀이·왕놀이를 하고, 새해에 띄울 연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놀이의 흥을 돋우는 데 주전부리가 빠질 수 없겠지요.
진득진득 달콤한 엿과 과줄, 쌀을 직접 찧어 만든 하얀 절편과 봄에 따다 말려놓은 취나물로 만든 취떡까지.
이날만큼은 모든 것이 넉넉히 허락됐습니다. 이 마을 출신인 소설가 이순원씨는
“엿을 하나씩 입에 물고 형제들끼리 머리를 맞대 연을 만들다 보면 어느새 새벽이 오곤 했다”고 회상합니다.
그렇게 아침이 밝으면 ‘과세(過歲)’의 시간입니다.
두루마기와 도포, 갓과 유건을 갖추고 어른께 또 한번 세배를 드리는 것이지요.
그리고 초이튿날, 이 마을에서는 특이하게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합동세배를 올렸는데,
이 풍습은 ‘도배(都拜)’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가장 나이 많은 어르신인 ‘촌장어른’께 인사를 올리고 서로의 안부를 묻습니다.
이순원씨는 “한데 어우러져 절을 올리다 보면 각자가 서 있는 자리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삶의 뜻깊은 시간이 된다”고
그 의미를 전합니다.
● 궁궐의 새해맞이
궁궐에서도 새해 첫날은 그 어느 때보다 북적였습니다.
정월 초하루는 한해의 운세를 가늠하고 국가의 새로운 통치이념을 널리 알리는 날.
왕과 왕세자·문무백관들이 모두 모여 연회를 열고 장수·복·재물 등을 소망했던 것입니다.
왕들은 화려한 면복(면류관과 곤룡포)차림을 한 채 궁궐을 돌아다니며 절을 받았는데,
이는 정조(正朝)의식 또는 정조하례로 불렸습니다.
1400년대에 쓰인 조선 <세종실록> 에는 정조하례의 풍경이 자세히 묘사돼 있습니다.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을 중심으로 관리들이 줄지어 왕에게 절을 올리는 배례(拜禮)로 연회가 시작됩니다.
이어 신하들이 밥과 반찬을 함께 올리는 진찬안(進饌案), 꽃을 바치는 진화(進花),
술을 따르는 진제1작(進第一爵)과 진제2작(進第二爵)이 뒤따랐습니다.
연회를 마치는 뜻으로 마시는 술인 파연작(罷宴爵), 다시 한번 왕에게 절을 올리는 배례 등 절차는 엄격했습니다.
새해 첫날은 지방에서 올린 특산물이 궁궐에 가득했다고 합니다.
왕들은 70세가 넘은 관리들에게 쌀과 생선 등을 하사하고,
90세가 넘은 백성들을 불러 신분을 한등급 올려주는 등 넉넉한 나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 연하장의 시초, 세화(歲畵)
왕이 신하와 백성들에게 내린 물건 중에 유독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새해를 축하하는 뜻을 담아 그린 그림인 ‘세화(歲畵)’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예부터 문(門)을 통해 복과 재앙이 드나든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대문이나 기둥에 그림을 붙여 집을 보호하고, 동시에 행복과 장수를 빌기도 했습니다.
이 그림들을 통칭해 ‘세화’라고 부릅니다.
<조선왕조실록> 과 조선시대 행정법전인 <육전조례> 등을 보면 매년 12월20일 무렵,
왕실에 소속된 화가 20여명이 600여장에 이르는 세화를 그렸다고 합니다.
“설날 도화서에서 세화의 표본을 그려 전시하면 시골 환쟁이들이 운집해 본떠 갔다.”
조선시대의 풍속을 기록한 책 <동국세시기> 는 조선 중기 무렵부터 일반 백성들도 세화를 주고받았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세화의 소재는 다양했습니다.
맹수의 왕인 호랑이, 어둠을 걷어내고 새벽을 알리는 동물인 닭, 신비의 영물 용과 소나무·신선·태양 등이 두루 쓰였죠.
마치 봉황처럼 외발로 고고하게 서 있는 닭을 그린 ‘금계도’, 익살스러운 표정을 한 호랑이를 담은 ‘호작도’ 등은
당장이라도 집안의 액운을 물리쳐줄 것만 같습니다.
꽃을 들고 사슴을 타고 있는 신선의 모습을 묘사한 ‘신선도’, 소나무와 붉은 영지가 우거진 계곡에 흰 사슴이
뛰노는 풍경을 그린 ‘십장생도’는 그림 전체에 영롱한 기운이 감돕니다.
그림 하나하나에는 재치와 해학이 넘칩니다.
세화를 주고받던 풍속은 1900년대 초반 들어 자취를 감춥니다.
다만, 그것이 현대의 ‘연하장’을 쓰는 문화로 이어졌다는 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연하장을 쓰는 문화마저 가벼운 문자메시지로 대체되고 있지요.
2017년에는 조상들의 풍습을 되새기며 손으로 꾹꾹 눌러 쓴 연하장 또는 편지 한통을 띄우면 어떨까요.
그 사람과의 추억과 모든 일이 잘 풀리길 소망하는 마음을 담아서 말입니다.
◇ 참고자료= <조선평전> (신병주 지음, 글항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