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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다 혹은 다르다
모든 인간은 같다. 누구나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러나 같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유교적 전통에 따르면 인간의 성(性; 본성)에 내재된 천명(天命) 혹은 리(理)는 동일하다. 천명이란 우주 삼라만상의 기본 원리, 질서로서 이것이 온전한 형태로 인간에게도 당연히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비록 둔하고, 총명하고, 밝고 어두운 기(氣;기질)에 따라 발현의 정도와 수준에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리의 내용, 본질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으므로,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은 수양의 결과에 따라 같은 높이, 같은 위치에 도달 – 말하자면 세상의 이치에 통달한 상태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시각에 의하더라도 모든 인간은 이미 아담과 이브라는 한 조상의 자녀이므로 인간인 이상 천성에 있어 서로 다를 이유가 없다. 인종, 성별, 신분의 차이는 신 앞에서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똑같이 귀하다. 그러나 명제로서는 모든 인간이 동등하다고 전제한다 하더라도, 모든 인간이 실질적으로 동등하다고 인정되는 데는 역사적으로 각고의 노력이 필요했으며, 여전히 그 여정이 끝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모든 인간은 법적으로 평등하다는 관념, 즉, 헌법 제11조가 요약하고 있는 바와 같이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는 구절만 해도, 거기에 들어있는 이상이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완전하게 구현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근본에 있어 같다는 생각이야말로 인본주의, 즉 휴머니즘의 출발점이다. 진정한 인류애는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다는 믿음을 바탕으로만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등질성은 모든 인간이 본질 및 속성에 있어 같고, 동일한 내역의 이성 및 감성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모두는 동등하고 평등한 인간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 또한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한 동등하고 평등하게 취급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그것을 넘어서서 모든 면에서 같고 모든 면에서 똑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환언하면 모든 인간은 같다고 할 때의 같음은 명제적이고 공식적인 등질성을 지칭하는 것이고, 내용적이고 실질적인 동질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동질적이기 보다는 이질적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을 어떠한 경우와 상황에서도 똑같이 다루고 처우한다면 이보다 더한 억압과 강제, 질곡은 없을 것이다. 인간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성격도 욕구도 성향도 다르고, 그걸 이룰 수 있는 능력과 의지도 다르다. 인간조건의 대등과 인격체로서의 대등은 구분되어야 한다. 인격체로서의 인간에게 평등의 강요는 오히려 불평등의 강요로 귀결될 수 있다. 그러므로 각 인간이 같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이 도리어 같음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이라고 보여진다.
결국 인간은 동일하지 않다. 우선 인간은 각자 다르다는 말이고, 인간적 가치도 상이하다는 말이다. 쌀 한 톨로 만족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황금 1톤도 부족한 자도 있다. 욕구가 다르고, 만족의 정도가 다르다. 뚜르게네프는 인간을 돈키호테형과 햄릿형으로 나눈 바 있고, 소설가 이병주는 톨스토이형과 도스토예프스키형, 니체가 아폴로형과 디오니소스형으로 구분하였지만, 외향적, 내향적, 또는 직관형, 사고형 등으로 사람의 유형을 변별해내더라도 그것은 인간의 성격에 관한 구별일 뿐 인간의 가치에 대한 것은 아니다. 철학은 인간의 류개념(類槪念)에 치중해왔지만, 문학은 각자의 인간을 소우주로 보고 그 내면세계에 천착해왔다. 철학이 인간의 공통성과 동일성을 전제로 의식의 본질과 속성, 기능과 작용에 대한 내적 반성 - 한마디로 류개념으로서의 인간이 무엇을 알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해 탐구해 왔다면, 문학은 인간의 차이와 구별을 전제로, 바꾸어 말하면 개체개념으로서의 인간이 무엇을 알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해 주목해왔다. 작가들에게 인간은 각자 나름대로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가지고 행위하며 외부와 접촉하고 교류한다. 철학은 인간이 이성적임을 전제로 진리나 선을 추구하는 존재로 간주해왔지만, 궁극적으로 세상에 악과 신산, 고통, 불행, 아픔, 괴로움, 고독이 횡행하는 원인에 대해서는 만족스런 설명을 하지 못했다. 철학이 인간의 동일성에서 출발하였다면 문학은 인간의 상이성에서 시작한다. 세상의 악과 인간의 불행은 바로 상이한 인간성 간의 균열과 갈등에서 비롯된다고 본 것이다. 문학이 주목하는 것은 개성이다. 문학은 개별의 인간을 주시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통찰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한다. 결국 문학은 철학과는 다른 측면에서 인간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것이고, 그 단초는 개성이다. 류개념으로 사고되는 인간은 동질적이지만 개성을 통하여 보는 인간은 이질적이다. 인간이해에 있어 동질성에 주목한 철학과 이질성에 관심이 있는 문학이라도 여정의 끝에서 보면, 결국은 같은 지점에 다다를 것이긴 하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문학과 철학이 각자의 성과를 같은 방식, 같은 언어로 표현해 내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들은 인간의 가치, 가치 있는 인간을 어떻게 상정하고 부각하여 우리 앞에 제시하고 있을까.
인간은 추상적 존재로서의 가치를 가짐과 동시에 구체적 존재로서의 가치도 지닌다. 전자가 류(類)로서의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지는 자유, 평등, 인권 등 형식적 가치를 말한다면, 후자는 개체로서의 인간의 품성, 성품의 가치를 지칭한다. 개체적 존재로서의 가치를 표상하는 인격은 성격을 포함하여 그 사람의 정신적, 심리적 전체의 품격, 됨됨이, 가치를 말한다. 철학은 유덕자가 되는 것을 인간의 가치를 표상하는 징표이자, 궁극적인 목표라고 보았다. 하지만 철학이 직설적으로 인격자가 될 것을 가르치는 동안 문학은 위인전이나 영웅전을 통하여 성현의 모습을 우리 앞에 제시하는데 그쳤을 뿐, 구체적인 작품 속에서 이상적 인간상을 제시하는 일은 드물었다. 왜 그랬을까. 먼저 철학이 제시하는 유덕자는 추상적 개념일 뿐 살아있는 실물로서는 우리의 눈앞에 어떻게 나타날 지에 대한 일치된 견해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의 일상에서 먹고, 자고, 배설하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죄 많고 하찮은 인간들과 부딪히고 부대끼며 살면서도, 모두의 인정을 받는 덕 있고 이상적인 인물을 형성화 해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현실에 그런 인물이 있는지 의문이고, 어떤 선지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씀(누가 4.25)처럼, 눈앞에 존재한다 해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인간상에 대한 개념이 제 각각일 수 밖에 없고, 그나마 제시된 인물상도 타인의 동의와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오히려 많다. 체홉이 ‘귀여운 여인’을 통하여 어떠한 상황에서도 대상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잃지 않는 여인을,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리나’에서 ‘레빈’이라는 건실하고 진중하며 듬직하면서도 겸손한 청년을, 니코스 카잔차기스가 ‘희랍인 조르바’에서 놀라운 생명력과 원기왕성, 자연스러움, 건강하면서도 야수적인 영혼을 가진 자유인을, 빅토르 위고가 ‘레 미제라블’에서 죄와 반성, 수난과 희생, 법과 인정(人情) 사이에서 원숙해지고 성자에 가까워진 노인을 그려본 적은 있지만, 그들은 우리 곁의 인물들처럼 그 위대성이 채 깨우쳐지기도 전에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그러므로 작가라고 해서 이상적 인간상에 대한 관심이 적을 리는 없지만, 모든 사람의 공감을 얻을 만한 기억에 남는 전형(典型)으로서의 위대한 인물상이 그려진 적이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최고의 인간상으로 ‘예수를 닮은 인간’을 택하고 그리스도의 자연성과 완결성을 닮은 인물을 묘사할 목적으로 ‘백치’의 므이쉬킨, ‘까라마조프’의 알료샤를 창조한 바 있다. 그러나 그의 의도가 성공했는지의 여부는 여전히 미정의 장으로 남아있다.
인격 – 덕의 가치
천재는 감탄을 자아내지만, 인격은 존중을 불러온다고 한다. 우리가 바란다고 천재가 되는 것이 아니지만, 인격은 모든 사람의 도덕적 수양의 목표다. 천재는 타고나는 것이기에 탄복의 대상이지만, 인격은 부단한 도야와 단련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기에 존경의 대상이 된다. 세상의 모든 철학과 종교의 가르침은 사실상 ‘완성된 인간이 되라’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완성된 인간이란 물론 인격적으로 성숙한 인간 – 한마디로 덕이 있는 인간을 말한다. 어떤 인간이 덕 있는 사람일까. 먼저 덕이란 노력, 수양이나 단련으로 윤리적 이상이나 도덕을 닦고 성취한 결과 애쓰지 않아도 정의(正義)와 진선미(眞善美)를 저절로 행할 수 있게 된 사람, 또는 그 상태를 뜻한다. 따라서 덕 있는 사람의 성정과 행실은 올바르며, 인품은 남의 존경을 받게 마련이다. 덕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반성적 삶의 최고의 결과물이다.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과 비판적 사고, 깨달음을 실천에 옮기는 실행력과 결단력, 그리고 타인과 세상에 대한 관대한 이해와 사랑을 행할 수 있는 태도, 성품, 한마디로 통틀어 ‘완성된 인격’의 총화가 바로 덕이다. 덕은 그렇게 고단한 수고와 극기를 통하여만 습득할 수 있는 가치이기 때문에 존경과 존중의 대상이 되는 것이고, 종교와 철학이 인생의 목표로 삼도록 가르쳐 온 것이다.
유덕자에 관한 강박을 부추기는데 있어 군자라는 말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것이다. 서양철학은 인식론을 중요시하여 상대적으로 도덕철학에 대한 논의가 적었던 반면, 동양철학은 어떻게 정의하더라도 그 내용의 대부분이 도덕철학 - 군자(君子)가 되기 위한 수신학(修身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동양철학에 있어, 학문의 목적 자체가 군자가 되는 것이었으며, 국가를 다스리기에 앞서 먼저 마음을 갈고 닦으면 저절로 나라는 잘 통치될 수 있다고 보았다(修己治人). 백 마디의 말과 행동도 먼저 몸과 마음을 가다듬은 다음의 일이었다. 군자의 인품과 행동은 백성들을 교화시키고 대동사회 - 유토피아를 가져올 것이었다. 이상사회를 가져올 키맨으로서의 군자에 대하여, 논어에는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논어 이인). 군자는 화합하나 뇌동하지는 않고 소인은 뇌동하나 화합하지 않는다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논어 자로). 군자는 자신의 무능을 괴롭게 여기고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을 괴롭게 여기지 않는다(君子病無能焉 不病人之不己知也 논어 위령공) 등등 부지기수의 언급이 있고, 중용 14장은 군자의 행동가짐 전반에 대해, 주역 혁괘 상6은 군자의 변혁은 표범처럼 선명하고 소인은 변혁의 결과를 받아들여 얼굴만 고쳐 이에 따른다(君子豹變 小人革面)라고 하며, 심지어 장자(莊子)에도 군자의 교제는 맑은 물과 같이 담담하고 소인의 교제는 단 술과 같이 달콤하다(君子之交淡若水 小人之交甘如醴; 산수山水 6장)라는 귀절이 나오고 있다. 맹자, 순자, 한비자 등을 더 볼 것도 없이 중국고전철학은 군자가 화두였으며, 군자야 말로 완성된 인격의 상징이자, 이상으로 기려졌고, 이후의 철학 – 주자학, 양명학은 이에 대한 우주론적 철학적 기초를 부여하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격자가 많으면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는 가정에는 잘못이 없어 보인다(군자가 가져온 사회의 실제 모습은 별론으로 한다). 서양에서도 일찍이 플라톤은 ‘국가’에서 철인왕(哲人王)이 통치하는 국가가 최선의 국가라고 주장하면서, 선의 이데아를 내재화한 철학자들이 왕이 되지 않는 한 이 세상에서 불행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한 바 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동양과 달리 유덕자 – 혹은 철인왕에 대한 논의가 덜 집요했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라는 절대적인 중단사유가 발생하였기 때문이었다. 동양의 군자는 인격자인 동시에 정치를 담당하여 현실세계를 이상사회로 만들 의무가 있는 정치가였지만, 기독교도에 있어서 현세의 왕은 사후의 왕 – 신(神) - 만큼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생의 목표가 현세가 아닌 천국과 영생에 있고, 이생이 전부가 아니라 내생이 궁극의 종착점이라면, 아무래도 강조점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칼뱅의 예정설에 의하면,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의 행위나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이 창세 전에 이미 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신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인격이나 생전의 선행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비록 부의 축적과 직업적 성공은 신의 간택받았다는 징표이고, 그런 사람은 선정받은 자답게 정직하고 이타적으로 살아야 할 것이지만, 어쨌거나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해서 꼭 군자와 같이 이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어야 하는 사회적 정치적 의무를 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젠틀맨이라는 개념도 재산이 있고, 지성과 교양이 풍부하며, 예절을 갖춘 신사를 말하긴 하지만, 이 또한 군자와 같은 책무를 지닌 계층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서양에서 ‘덕 있는 자’는 도덕철학의 목표이긴 했으되, 동양의 군자와 같이 지상에서 이상향을 구현해 내야만 한다는 강박성향을 가진 개념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도 덕과 관용, 자비와 근면, 이타적 태도를 높게 평가하긴 했다. 그러나 그런 자질만이 지상에 평화를 가져올 유일한 요소라고 믿지는 않았다. 기술적으로 말해 부덕한 자도 정치를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키아벨리는 정치가는 필요할 때는 주저 없이 사악해질 것, 배신할 것, 잔인해질 것을 주문하기도 했었다. 어차피 어떤 인간도 피조물인 한 창조주인 신의 완전함을 따를 수는 없었다. 제 아무리 유덕자라 해도 신의 형상의 일부만을 가지는 데 불과할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인격자는 신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람들은 유덕자를 따르는 대신 신을 그리워하고 신을 닮고자 하였다. 신의 전능, 신의 자비, 신의 사랑, 신의 모든 것을 우러르며 숭배하였다. 그러나 신을 원하면 원할수록 신은 멀리 있었다. 신은 바로 내 곁에서 내 기도를 듣고 응답하는 것 같아도, 언제나 나의 외부에 있었다. 높은 곳에서 나를 굽어보고 관찰하며, 나중에 용서해주기는 하지만, 나의 죄상을 일일이 목도하고 나중에 심판하기 위해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 인간은 신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하찮은 존재이며, 신의 도움이나 용인이 없는 한 자기 힘으로는 지푸라기 하나 들 수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 이러한 상태에서 서양의 유덕자가 동양의 군자와 같이 인간세계를 완전히 개조할 수 있다는 믿음은 생겨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스도 – 현실의 인간
기독교의 본질은 그리스도 - 예수라는 인물에 구현되어 있다. 예수가 없으면 기독교도 없고, 예수가 없으면 기독교는 다른 종교 – 특히 유대교와 같이 신에 복종하고, 신의 지배를 받을 뿐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 소외된 종교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라는 신인(神人)은 인간으로 살았고, 인간으로 죽었으며, 고통과 원망, 화해와 용서, 열정과 사랑을 실천하였다. 생전의 고난은 제쳐놓더라도, 최후에는 제자에게 배신당하고, 지상의 죄인으로 재판받았으며, 로마병사에게 조롱을 당하였고, 가시면류관에 십자가를 메고 언덕을 오르는 수난을 당하였으며, 십자가에 달려서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망에 차서 외쳤다. 그리스도는 신이면서도 우리 곁의 어느 인간보다도 나을 것이 없는 신산과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 불사성을 가진 다른 신들은 인간 이전에도 있었고 인간 이후에도 그대로 있을 것이다. 영생불멸의 그들에게 하루살이 같이 스러져가는 인간들의 일은 관심이 없을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오직 인간을 위해 이 세상에 왔고 오직 인간을 위해 죽어갔다. 그리스도는 객관적인 신성과 주관적인 인성의 결합을 통해 완전한 인간적 관점, 나의 외부에 있는 신이 아니라, 나와 같은 인간, 나아가 나 자신인 인간, 결국 나의 내부에 있는 인간의 시선을 대변하고 있다. 이것이 신인인 그리스도가 전적으로 신(神)이기만 한 다른 신들과 다른 점이다.
사람들은 신을 기리고 우러를 수는 있었지만, 신을 닮을 수는 없었다. 막상 신의 속성을 생각하면 막연하고 추상적일 뿐 어떤 면이 우리가 따르고 본받아야 할 점인지 알 수 없었다. 신은 가까이 있는 것 같지만 실은 멀고도 먼 곳에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다르다. 직접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왔으므로, 보고 만지고 배우고 따라 할 수 있었다. 그의 말씀을 학습하고, 그의 행동을 모방하며, 그의 사랑을 실천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는 신이므로 단순한 유덕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인물상인지에 관해 의견불일치를 걱정할 필요도 없다. 단지 그가 행위한 대로 하기만 한다면, 저절로 신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이다. 신에 다가갈수록 덕은 자동적으로 높아질 것이다. 결국 덕이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내재화했다는 말이 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이상적인 인물상을 구현해 내리라는 목표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닮은 인물을 창조하려 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선택이라 하겠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조카딸 S.A.이바노바에게 보낸 편지에서 ‘소설의 주된 관념은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인간을 묘사하는 것이란다. 세상에서, 특히 우리 시대에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을 거야. 러시아작가들뿐 아니라 유럽작가들까지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인간을 묘사하려고 했지만 언제나 포기해야 했지. 끝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지. 아름다움은 이상이지, 하지만 우리의 이상이건 유럽 문명국들의 이상이건 한번도 완성된 적이 없어. 지상에서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유일한 인간은 바로 그리스도란다. 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무한한 아름다움을 지닌 인간은 물론 그 자체로 무한한 기적이라 할 수 있지.-하략’라고 썼다(‘Dostoevsky’ Konstantin Mochulsky 345쪽: Princeton university press). 그러나 ‘기적과도 같이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인간’을 묘사하는 일은 따지고 보면 사실상 불가능한 작업이자, 애당초부터 절대적으로 성공이 보장되어 있지 않은 무모한 시도라 할 수 있겠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런 기획을 한 것 자체가 그와 같은 필력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실로 대담한 도전이라 하겠다.
아름다운 인간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백치’의 주인공 므이쉬낀 공작은 순진무구한 인물이다. 공작은 정신장애와 간질병 때문에 스위스의 병원에서 오랫동안 치료를 받다가, 무일푼 신세로 뻬쩨르부르그로 돌아온다. 그가 그곳에서 만나는 인물들은 그의 천진함에 당황하여 그를 백치라고 부른다. 백치 앞에 두 여인이 나타난다. 절세미녀인 나스따샤 필리포브나는 불행한 여인이다. 박복한 그녀는 이미 소녀시절에 토츠키라는 지주에게 동정을 능욕당한 후 그의 첩으로서 어둡고 그늘진 삶을 산다. 그녀는 토츠키가 자신을 남에게 돈 받고 팔려는 사건의 내막을 알게 된 것을 계기로 비열한 사내에게 몸을 더럽히고 말았다는 자각과 죄의식 때문에 세상의 위선과 폭압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급격한 성격변화를 겪게 되고 걷잡을 수 없이 광포한 모습을 띠게 된다. 그러나 므이쉬킨 만은 그녀의 고결한 본성을 감지하고 자포자기적인 행실이 본심이 아니라 정신적 타격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청혼하지만, 역시 므이쉬킨의 인간적 가치를 알아본 그녀는 오히려 그의 행복을 위해 예판친 장군의 딸 아글라야에게 가도록 종용한다. 몽상적인 개성과 높은 긍지를 지닌 아글라야는 귀족출신이면서도 귀족사회에 비판적일 만큼 진취적인 면모도 지니고 있지만, 자만심 때문에 경쟁자인 나스땨샤의 비극성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그녀의 불행에 연민이나 동정을 가질 여유도 없다. 이런 오만 때문에 오히려 그녀는 뒷날 사기꾼에게 속아서 불행하게 끝나게 된다. 모든 것을 소용돌이로 몰아가는 태풍의 눈과도 같은 나스따샤를 중심으로 므이쉬킨과 로고진이 연결된다. 로고진은 돈밖에 모르는 상인의 집에서 태어난 그는 어쩌면 자기 부친처럼 누렇게 빛이 바랜 수전노로 일생을 마쳤을지도 모르나, 나스따샤를 만나면서 내면에 숨겨져 있던 난폭하고 걷잡을 수 없는 야수적인 열정이 깨어나게 된다. 그는 돈과 힘과 억지와 폭력을 모두 동원하여 그녀를 차지하려고 애를 쓰지만, 그녀의 마음은 므이쉬킨에게 가 있다는 것을 알고, 결국 아글라야에게 므이쉬킨을 양보하고 정신이 아닌 몸만 돌아온 그녀를 무참하게 살해하고, 살인현장을 목격한 므이쉬킨은 그 충격으로 다시 정신적 백치상태로 돌아가고 만다.
사람들은 므이쉬킨을 우습게 보면서도 이 소박하고 순수한 인물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모자란 것 같지만 현명한 그는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활력이 결여된 대신 그들이 갖지 못한 신비로운 정신적 힘을 소유하고 있다. 그의 백치와 같은 선량함은 주위로부터 멸시받고, 조롱되며, 이용되지만, 그 과정에서 오히려 그들은 그의 소박함에 대비되는 자신들의 자만과 탐욕과 허영의 적나라한 실상을 목도하게 된다. 작가가 백치에서 말하고자 하는 인간적 아름다움은 잘 생긴 용모나 육체적인 균형이 아닌 도덕적 선을 말하고, 악은 선과 비교되면서 권력과 돈만을 추구하는 추악한 인간군들의 더럽고 흉악한 모습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비루하지만 그의 내부에 감추어진 힘은 점차로 빛을 발휘하여 밝디 밝은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주위의 모든 인물들은 자신들도 몰랐던 자기의 치부를 알게 되어 한편으론 그를 미워하면서도 다른 편으로는 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까라마조프 형제들의 알료샤는 아직 어리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 미숙한 청소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구들중 유일하게 온전하고 충일한 인격을 가졌다. 아버지 표도르와 큰형 드미뜨리가 한 여인(그루센카)을 두고 벌리는 이전투구에나, 드미뜨리와 작은 형 이반, 그리고 다른 여인(카쩨리나)간의 감춰진 애증관계에 있어, 그들 모두의 메신저로서 그들을 연결해주는가 하면, 속마음을 믿고 털어놓을 수 있는 단 한 사람으로서 그들의 계획과 독백과 탄식을 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까라마조프라는 이름은 인간의 욕망, 그중에서도 육욕을 상징한다. 탐욕, 폭식, 허영심, 분노, 질투, 정욕, 나태 등 인간이 맞서 싸워야 하는 일곱가지 죄악 중 어느 것도 가벼운 것은 없지만, 육욕은 무엇보다도 본인의 정신을 타락시키며, 상대를 황폐하게 만든다. 므이쉬킨이 돈과 권력의 노예가 된 자들과 대결을 했다면, 알료샤는 육욕의 포로가 된 자들에 둘러 쌓여있다. 물론 알료샤 자신도 까라마조프 일족으로서 육체적 욕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에겐 더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오로지 육신의 목소리만을 쫓는 아버지와 형제들과는 달리 자비나 연민, 사랑과 같이 지상과 천상을 연결하는 가치들에 관해 설교하는 조시마 장로가 있다. 그러나 조시마 장로는 사실 말씀으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가르치는 스승이다. 그는 타고난 성자도 아니고, 준비된 교사도 아니다. 그의 동작은 굼뜨고 그의 언어는 어눌하지만 그에게는 진실의 힘이 있다. 그는 방탕과 악행의 밑바닥까지 떨어졌다가 돌아온 탕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한마디 한 동작은 직접경험과 고통스러운 반성에서 나온 것으로 천금보다 더 무겁다. 알료샤는 노쇠한 장로의 죽음에 맞이하여, 그가 기적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그의 시신에서는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썩는 냄새가 났을 뿐이다. 알료샤는 한순간 믿음을 잃을 뻔 하였으나, 그리스도의 뜻은 인간을 성자로 만드는 기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누구보다도 강인한 전사로 거듭나게 된다.
아버지와 아들들은 반목하고, 형제들은 서로 싸우며, 모두는 각자의 갈등을 겪고 있지만, 알료샤는 가장 조화로운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이다. 아버지는 인생 자체를 부정하고, 이반은 신을 부정하며, 드미뜨리는 인간의 운명을 대변한다. 드미뜨리는 ‘신과 악마가 싸우고 있으며, 그 전쟁터는 인간의 마음이다’라는 사실을 알지만, 어느 쪽도 선택할 만한 힘이 없으며, 자신의 무력감만을 확인할 뿐이다. 그는 선량한 본성을 가졌지만, 제어할 수 없는 욕망과 약한 의지 때문에 인생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그러나 냉소적인 이반은 스스로의 이성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정신이상이 되지만, 드미뜨리는 질풍노도와 같은 고난을 거친 뒤에 그러한 신산을 이겨낸 인간들이 그러하듯 오히려 평안을 얻게 된다. 알료샤는 등장인물 모두에게 일정 정도 의지가 되고 위로를 준다. 아버지는 드미뜨리와 이반을 혐오하고 무서워하지만, 막내에게만은 그답지 않은 순수한 애정을 느끼고, 이반이 그의 유명한 반역과 대심문관의 사상을 이야기하는 상대도 알료샤이며, 드미뜨리는 그의 걷잡을 수 없는 격정과 인간적 과오, 사람들의 오해와 착각 때문에 부친살해범이라는 누명을 쓰지만 자신의 무죄를 믿어주는 알료샤의 굳건한 믿음에 무한한 위안을 받는다. 조시마 장로는 알료샤의 인간적 가치를 알아보고, 그로 하여금 수도원에 머물지 말고, 세상에 나가 세파를 겪으라고 충고한다. 모든 귀중한 것들은 단련돼야 하기 때문이다. 조시마를 맹목적으로 따르던 알료샤는 착하기만 한 순둥이에 지나지 않았으나, 격랑을 통과한 그는 진정한 빛과 소금으로 거듭날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소설 속의 알료샤는 그 특질을 아직 충분히 표출되지 못하였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소설 후반부에서 그가 일류쉬까의 장례식을 계기로 니꼴라이등 소년들과 주도적인 관계를 맺기는 하지만, 여전히 사건이 발생하고, 수렴되는 중심인물의 위치에 이르지는 못하였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하지만 소설 속의 모든 인물들이 때때로 라도 그에게 와서 위로를 받고, 그에게 마음의 짐을 털어놓아 가볍게 하지 않고는 사건들이 진행이 안된다는 점에서는 틀림없이 핵심마디라 할 수 있고, 소설의 통일성과 정합성을 확보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중심고리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연스러움과 아름다움
므이쉬킨과 알료샤는 어떤 점에서 아름다울까. 눈앞에 현실로 보여진 인간은 모자란 듯하거나(므이쉬킨), 아직 어릴 뿐(알료샤)이다. 사람들은 그들을 무시한다. 자신이 그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보면 이들 아름다운 인간은 사람들의 자신감을 북돋아주고 온전하게 만들어준다. 사람들은 그들 앞에서 주눅이 들거나 움츠릴 필요가 없다. 그들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여,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띠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겸손과는 다르다. 겸손이 드러내지 않는 발톱, 억제된 우월감이라면, 아름다운 인간에게는 숨겨진 가시나 맛깔스럽게 위장한 독이 없다. 말 그대로의 진정한 휴식과 평안, 위로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사람들은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대교약졸(大巧若拙)의 경지와도 같이 그들의 겉모습은 평범해 보여도, 그들의 내면을 알아갈수록 채워지고 충만해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를 죽여 타인을 살리는 것과도 다르다. 그들은 타인들로 하여금 교감하고, 소통하며, 상처를 치유하고, 열등감을 만회하며, 교만과 나태의 독소를 제거하는 등 부족한 부분을 채우도록 하기 때문에 그들의 존재는 타인들에게 필수적이다. 누군가 그들의 존재가 절대로 필요함을 안다는 것은 그 들을 아끼고 귀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경멸과 업신여김 까지는 아니더라도 미미하게 시작된 관계가 안도와 사랑이라는 창대한 결론을 맺게 되는 비밀은 물론 아름다운 사람의 내부에 있다. 타인들은 그들과 접촉하며 그들이 전혀 자기들에게 해가 되지 않고 위협요소가 전혀 없다는 점을 감지하고 마음이 놓이고 경계심이 풀리게 된다. 그러나 그것으론 부족하다. 타인들은 상처를 치유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상처를 치유하는 힘은 상대방을 깊이 이해하고 위하는 데서 나온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면을 꿰뚫는 직관과 조건 없는 애정이 있어야 한다. 편견을 가진 자는 온전한 시선으로 남을 응시할 수 없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편견에서 해방된 것은 욕심이 없기 때문이고, 욕심이 없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욕심은 욕망과 다르다. 욕망은 삶의 추동력이요, 엔진이지만, 욕심은 그것이 지나친 것을 말한다. 욕심은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자신은 물론 주위의 모든 것을 위험에 몰아넣는다. 욕심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는 법이다(야고보서 1:15). 본래 욕심은 자연스러움의 경계 밖에 있어야 하지만, 오히려 자연스러움을 몰아내고 주인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동서양 모든 성인들의 노력은 쫓겨나고 소외된 자연스러움을 되찾으려는 노력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모든 아름다운 사람은 자연스럽고, 자연스러운 사람은 아름답다. 노자가 ‘낳되 소유하지 않고 기르되 의지하지 않으며 이끌되 지배하지 않는다. 이것이 덕이다’(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라고 하여, 무위자연의 정수를 설파한 이래, 불교에서는 득도와 해탈을 목표로, 유학에서는 활연관통(豁然貫通)을 최종단계로 삼아 수양을 해왔다. 각기 목적지에 도달하는 수단과 방법에 관하여는 이설(異說)이 있지만, 오랜 시간의 격물궁리를 거친 후에 마침내 도가 통하는 순간이 되면, 내가 곧 우주(宇宙)요, 우주가 곧 나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개체로서의 나는 우주라는 본체(本體)의 특정한 현현태(顯現態)에 불과하지만, 일순간 우주와 내 마음을 관통하고 있는 이치가 한가지임을 깨달아 내 안에서 본체를 체득하게 되는 것이다. 시각은 조금 다르지만, 기독교에서도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영접하는 순간, 즉 내가 그리스도요, 그리스도가 나인 사실을 인지하여 신과 일체가 된 사람은 자연스럽게 율법과 선행을 행하게 되는 경지에 이른다고 한다. 인간으로 다녀간 신이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신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자각은 최소한 인간적인 이기심과 욕심을 억제하는 효력이 있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어쨌거나 사람이 득도하거나 신의 내재를 경험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우선 도통한 후에도 인간으로 남아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인간인 이상 먹고 자고 배설해야 한다. 그리고 여전히 죄 많고 찌질한 인간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점도 여일하다. 그렇다고 그들 이마에 광채나는 낙인이 찍히거나 후광이 신체를 감싸는 것도 아니다. 외견상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사람이 득도하였는지 신을 영접하였는지를 알아볼 외적 표지는 전혀 없다는 말이다. 어쩌면 그는 전보다도 더 후줄근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마치 므이쉬낀이나 알료샤 처럼 바보스러울 정도로 솔직하거나 어리고 유약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외관과 행동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의 배경, 외양을 구성해내는 내면의 바탕이 핵심이다. 그것이 바로 자연스러움이다. 흔히 무애(无涯) 천의무봉을 얘기하나 그것은 자연스러움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인간으로서 자연스럽다는 것은 욕심이 없다는 것이요, 욕심이 없다는 것은 지나침이 없다는 것이다. 죽림칠현처럼 술에 취해 벌거벗고 춤을 추는 것은 지나친 것이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지나치지 않은 자연스러움이란 욕심부리지 않는 소박한 생활태도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득도라 함은 노자의 말 그대로 낳되 소유하지 않고 기르되 의지하지 않으며 이끌되 지배하지 않는 경지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성인 – 영원한 꿈
도스토예프스키는 연민, 보편적 용서, 사랑, 겸손, 지혜 이런 것들을 그리스도의 특질로 생각하였으므로, 아름다운 인간을 통하여 모든 것을 용서하는 그리스도적 사랑을 보여주려고 하였었다. 말하자면 그것이 창작의도였다. 그러나 현실로 나타난 인물은 바보이거나 미숙한 청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독자에 따라서는 당해 인물이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왜 이런 괴리가 생겼을까. 그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시각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므이쉬낀이 사랑한 나스따샤는 무시무시한 미모를 가졌지만, 스스로의 힘으로는 조화와 평정에 이를 수 없는 정신세계를 가졌기 때문에 결국 남과 자신의 파멸을 불러오고야 말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적 아름다움이란 미모와는 다른 어떤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스도는 그를 알아본 몇 명 이외의 다른 이들에게는 그저 이단의 사술을 외치는 미치광이이거나 부랑자, 무뢰한, 심지어 죽을 때는 일개 범죄자의 신분이었을 뿐이다. 그의 신성, 그의 아름다움이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었다. 그의 덕, 그의 아름다움은 그가 죽고, 그가 부활하여 다시 신으로 돌아간 뒤에나 느껴졌고 지금 우리에 이르러는 그야말로 신격화되어 포장된 형태로 전해오고 있을 뿐이다. 살아있는 자의 덕, 살아있는 자의 아름다움은 어쩌면 우리에게는 꿈에 지나지 않을 지 모른다. 지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곁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의 딜레마이다. 아름다움과 덕을 갖춘 인물이 될 것을 추구하지만, 정작 아름다움은 오히려 비루함과 누추함으로 보이고, 유덕은 끝내 악덕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아름다움과 덕이 세상을 구원하지 못했다면, 도대체 우리는 무엇에 기대어 살아온 것일까. 이상사회를 만들기 위해, 아니 단지 지금보다 조금이나마 더 나은 삶을 위해, 이 땅에 왔던 모든 선지자들은 네 이웃을 사랑할 것, 자립적이고도 독립적인 사람이 될 것, 주위를 교화시킬 수 있을 만큼 죽도록 수양할 것을 외쳐왔지만, 그들의 가르침은 가르침으로만 남았을 뿐이다. 그것은 변함없이 혼탁한 사바세계가 그 증거이니 달리 증명의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그들의 말씀이 헛되이 끝난 것은 아니다. 세상은 그럭저럭 굴러가고 있지 않은가. 그 말씀이 완전히 잊혀진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아름답고 덕이 있는 인간이 되라는 말은 쓸모가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맥 빠질 지 모르지만 쓸모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이렇게 된 이유는 세상에 아름다움과 덕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알아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느끼고 감지할 수 있는 자에게는 쓸모가 있고, 이기심에 눈이 닫힌 자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런 자들은 우리 곁에 왔던 그리스도조차 알아보지 못하였는데, 소소한 덕 따위를 어떻게 구별해 낼 수 있을 것인가. 삐뚤어진 시어머니의 눈에는 며느리의 덕이 안보이는 법이다. 악독한 계모마저 감동시킨 순(舜)임금 같은 비상한 효심이 아니라고 효심이 없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철인들은 무엇보다 우리에게 도덕적으로 특출날 것을 요구하지만, 보통의 인간에게는 보통의 노력만으로도 족하다. 다만 아예 얼굴을 돌리고 있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일찍이 사람의 욕정에서 나온 마음은 항시 위태롭고, 도를 지키려는 마음은 극히 희미하기만 하니, 정신 차리고 오직 하나로 모아, 가장 중심의 진실을 잡으려 노력하라(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고 했거니와 적어도 내 곁의 아름다움을 추함으로, 덕을 악으로 여기고 판단하는 우를 저지르지 않겠다는 자세만 견지한다면 인간의 기본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체로서의 우리에게는 적어도 최소한의 의무가 있다. 득도 해탈하거나 도덕적 영웅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나의 덕행은 주목하고 평가하면서도 주변 타인의 덕과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외면하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말아야 한다. 내 욕심에 가리면 남의 미덕이 안보이는 법이다. 삭막한 세상이지만 어찌 정 붙일 구석이 없으랴. 남이 손을 내밀 때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다가가야 남도 마음을 여는 것이다. 저마다 받은 은사에 따라, 하느님의 다양한 은총의 훌륭한 관리자로서 서로를 위하여 봉사할 때(베드로 전서 4:7), 비로소 지상의 비밀은 열린다. 아름다움, 그것도 인간의 아름다움을 제시하려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목표가 성공했는지의 여부를 떠나, 그의 꿈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의미하다. 아름다움만이 인생을 구원할 수 있다는 그의 신념이 정당한 것인지의 여부는 별론으로 하고 아름다운 인간이 없는 인생은 너무 삭막하지 않을까. [출처] 목마와 숙녀 (백두대간학교) |작성자 이철승 왕사슴벌레
지상의 낙원
종교는 내세를 약속함으로써 존재한다. 피안의 행복이 없는 종교는 단지 기만에 불과할 뿐이다. 노동의 수고로움 없이 진수성찬이 차려지고, 이별의 슬픔 없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영생을 누리며, 물리지도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세상이야말로 죄 많은 중생들의 꿈이다. 인간이 영혼의 불멸을 믿고 싶어 하는 것은 영혼 그 자체에 어떤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다. 육체를 가지고는 영원한 기쁨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육신은 언제나 속박이자 덫이었다. 육신으로 있는 한 어떤 방법으로도 고통과 갈등, 비탄과 아픔에서 벗어날 길은 없었다. 솔로몬의 찬란한 영화로도 입은 은혜가 들꽃 하나만 같지 못하고,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거늘, 어리석은 백성에 이르러서는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을 것인가. 영혼의 불멸은 천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의미를 잃는다. 어디에서 쉴 곳을 찾을 것인가.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자. 영원한 행복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너무나도 땅위의 고통에 익숙해 있어 지옥의 불벼락에 대해서는 생생하게 묘사하였어도 천상의 지복에 대해서는 빛, 흰색, 젖과 꿀 등 막연한 추측 이외에는 제대로 눈앞에 제시한 바 없다. 지옥의 현실감에 비하여 천국은 여전히 비현실적인 몽상일 뿐이다. 파스칼의 내기라는 것이 있다. ‘신이 없다면 내가 죽으면 그냥 끝이다. 그러나 신이 있다면 생전에 신을 부정한 나에게는 벌이 내린다. 그러므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지 못한다 해도 만약에 신이 존재할 경우를 가상해보면 신을 믿는 것이 이득이다’. 천국의 일상과 정경은 너무나 모호해서 상상조차 안되지만 무조건 믿는 게 남는 것이라는 말이다. 위 논리를 반대방향으로 향해 볼 수 있다. 피안의 행복을 위해 차안(此岸)의 불행을 방치하는 것이 이득인지의 여부를 따지는 것이다. 만약 천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거기에 입장하기 위해 현세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만큼 허망한 일은 없다. 그러므로 일단 여기, 이승에서의 기쁨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이득이다. 더욱이 지상에서 정신적 평화를 느낀 바 있는 영혼이라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바는 아니므로 어느 모로 보나 손해 볼 것 없는 장사이다.
요컨대 인간은 지상에서의 낙원을 추구할 의무도 있고, 실익도 있다. 그런 점에서 대동사회를 꿈꾼 군자들의 이상은 완전히 부정될 것은 아니다. 세계의 비참이 곧바로 지옥의 도래(到來)로 보일 만큼 크고 감당할 수 없어 보여도 삶은 이어져 왔다. 알아보지 못하였어도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가 다녀갔으며, 도덕적 탁월함으로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위인들도 즐비하다. 그러나 굳이 뛰어남을 추구할 이유가 있겠는가. 자연스러움은 그런 것이 아니다. 낳되 소유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름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여기에 미묘한 도가 있다. 인위적으로 찾아진 자연은 잘못 이해된 노장이나 불교와 같이 단절과 고립 속의 자유, 이기적인 개인의 삐뚤어진 만족에 불과하고, 이상사회를 위한 헌신과 희생의 강박은 곡해되고 천박해진 유학과 같이 뒤틀린 위군자(僞君子)만을 생산한다. 고매한 인격은 욕심을 버린 곳에서 자란다. 그렇다고 욕심을 버리기 위해, 팔, 다리를 도려내는 치열한 수양을 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그것도 자연스러움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저 우리의 알료샤나 므위쉬낀처럼, 주위의 누구라도 답답한 마음을 하소연하고 싶을 때 찾고 싶은 생각이 드는 사람, 말없이 그렇게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걱정을 덜게 만드는 사람이 된다면, 이미 자연의 경지에 들어선 것이다. 인간의 자연은 인간세계에서 구해지는 것이지, 산속이나 수도원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먹고 자고 배설하며, 찌질한 인간들 사이에서, 욕하고 싸우고 지지고 볶으면서도, 상대방에게 온전한 평온과 정신적 평화를 느끼게 해주는 사람은 이미 그 누구라도 아름다운 인간이다.
첫댓글 이 글을 끝까지 읽으라고 올리신건지 궁금합니다....ㅎ
평등하지만 동일하지 않고, 덕에 대해서 옛소설가들이 등장하면서 예수까지 나오고, 결국 자연스러움은 인간세계에서 찾아보라는 말씀인가요?
가장 비범한 것은 평범에 있다라는 것과 비슷한 건가요 ?....
도스토예프스키 숭배자 대간거사님 글 읽기가 좀 어렵긴합니다.
인내를 가지고 일독한즉,
결국 아름다운 인간(이상적 인간상이랄까)이란
먹고자고 배설하며,찌질이들 사이에서 지지고 볶고 하는 가운데서
상대방에게 정신적 평화와 위안을 주는 가장 자연스러운 인간이라 이해되네요.
성급한 결론이긴 하지만 그런 간단한 말로 요약하자 해도 갖은 난해한 어휘와 이론,
다양한 사례의 바다를 통과하지 않을 수 없더라 이겁니다.
오지멤버들에게 정신적 평화와 위안을 주는 것은 더덕주겠죠?
그 바다를 통과하지 않게 해주신 히든피크님의 깔끔한 요약...감사합니다.
우리 오지팀에서 오지팀을 위해 이에 조금이나 근접한 분을 감히, 버릇 없이 꼽아 본다면... 가이버성님 정도가 아닐런지 굳이 한분 더 말하라 하신다면... 있으시긴한대 요까이만...^^ 남바투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