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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7. 묵상글 ( 사순 제3주간 목요일. - 불편부당과 부화뇌동.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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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7. 사순 제3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불편부당과 부화뇌동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불편부당(不偏不黨)과 부화뇌동(附和雷同).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불편부당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공동체가 깨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부화뇌동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도 공동체를 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불편부당하지 않으면 공동체가 깨지는 것을 보겠습니다.
불편부당이란 어느 편에서 서지 않고 어느 당파에 속하지 않는 거지요.
그런데 한 공동체에서 누가 한편에 서고
누가 다른 편에 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불 보듯 뻔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주도적으로 그리고 나 중심으로
편 가르기와 줄 세우기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편으로 만드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특히 유력한 사람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은 비단 다른 편과 내 편을 가르고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진리의 편에 서고 주님 편에 서야 할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내 편 네 편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하느님 편만 있어야 하는데
내 편에 서게 함으로 그를 하느님 편에 서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부화뇌동하지 말아야 함을 보겠습니다.
남을 내 편으로 만들지 않을 뿐 아니라
나도 어느 편에 서지 않는 것을 말함입니다.
부화뇌동이 주도적으로 편 가르기와 줄 세우기를 하는 것보다는
덜 악한 것처럼 보이지만 공동체를 깨는 것이기에 못지않게 악하고,
무엇보다도 줏대를 잃고 악한 일에 꼭두각시가 되는 것이기에 딱한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뇌동(雷同)이 의미하는 바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뇌동이란 천둥소리가 나면 사람들이 놀라 같이 움직이는 형용이고,
그래서 뇌동하지 말라고도 하지요.
이는 예기(禮記)에 聽必恭 毋勦說 毋雷同. 곧 남의 말을 공손히 듣되,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무조건 따라 하지 말라고 한 말과 맥을 같이하지요
그런가 하면 군자의 태도와 관련하여 논어에는 이런 말도 나옵니다.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 곧 남과 화합을 하나 꼭 같지는 않다는.
그러니까 진리에 어긋나는 말을 누가 하면
화이부동하고 부화뇌동하지 않아야 군자라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군자를 넘어 성인 곧 진리 편에 서고 하느님 편에 설 사람들입니다.
확실하게 주님 편에 서야 하지 어정쩡하게 있다가 부화뇌동하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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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7.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상을 해 보십시오. 아인슈타인이 지금 이 자리에 강의하러 온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과연 그 강의를 듣겠습니까? 또 이 강의를 듣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올까요? 지금이야 워낙 유명한 분이라서 많은 사람이 강의를 듣기 위해 올 것이라고 예상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이 살아 있을 때는 교수로서 그렇게 인기가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고, 그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너무 아는 것이 없어서 아인슈타인의 강의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물리학계의 주목받는 샛별이었지만, 수강 신청자는 겨우 세 명이었고 다음 학기에는 신청자가 아예 없어서 그 강좌가 폐지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을 통해 프린스턴 대학 총장은 아인슈타인의 교수 기량이 부족하다면서 정교수 직위를 주지 않으려고도 했습니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더 잘 가르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즉, 자기 역량을 드러내는 분야가 있는 법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실력 없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인슈타인처럼 실력은 뛰어나지만, 단지 가르치는 것만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판단은 늘 이런 식입니다. 하나의 모습으로 전체를 평가하는, 그래서 더 중요하고 큰 것을 보지 못합니다. 하느님 일 역시도 전체를 보지 못하기에 잘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 시대에 바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마귀가 나가고 이제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문제는 군중 중의 몇 사람이 이상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이 말을 듣고서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런 표징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으로 알겠다는 것이지요. 사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은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도 하느님의 커다란 표징입니다. 당시에 벙어리 마귀는 하느님만이 쫓아낼 수 있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못 하게 하는 벙어리 마귀이기에 하느님만이 쫓아내서 당신 말씀을 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편을 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마귀가 마귀를 쫓아내는 어리석은 행동들을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단순한 진리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에 관한 부정적인 마음 때문입니다. 이제 주님의 편에 서야 합니다. 주님의 반대편에 서서 반대하고 흩어 버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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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일상이 바뀌어야 미래의 내가 바뀐다(김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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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7.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의 완고한 마음에 경종을 울립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목을 뻣뻣이 세우고 고약하게 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전해주며,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신적 권능에, 오히려 적대하며 악담을 퍼붓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전해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두 개의 중심이 되는 동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 말을 들어라” 라고 할 때 “들어라”라는 동사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을 온전히 걸어라” 라고 할 때 “걸어라” 라는 동사입니다. 이 두 동사의 표본, 곧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걷는 것의 표본은 오늘 <화답송>에 나오는 “양 떼”입니다. 곧 양은 목자의 말을 알아듣고 그의 말을 따라 걷는 이의 표상입니다.
한편, 그 반대의 표상에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벙어리 마귀”가 있습니다. 벙어리 마귀는 말씀을 듣지 못하게 방해하여, 말하지 못하게 하는 마귀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말씀을 따라 걷지 못하게 하고, 말씀의 실현을 훼방하는 방해꾼입니다. 이 방해꾼은 <제1독서>에서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고집스런 마음, 목을 뻣뻣이 세우는 고약한 마음, 그리고 <화답송>에서의 “무딘 마음”의 표상입니다. 곧 이들은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말, 곧 자신의 생각이라는 우상을 따라 걷는 이들의 표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마귀를 쫒아내심으로써,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곧 말씀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반응은 놀라워하면서도 받아들이기보다, 오히려 예수님께,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루카 11,15)고 악담으로 대적하면서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모순을 반박하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이는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낸 사실이 단지 하나의 기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손가락, 곧 하느님 권능의 임재임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 나라”의 임재를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그 뜻이 이루어지는 하늘나라의 실현을 뜻합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말씀이신 예수님과 더불어 우리 안에서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만약 우리가 아직 “하느님 나라”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 안에 말씀을 듣고도 따라 걷지 못하게 하는 완고한 무딘 마음이 있지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 안에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고집스런 마음, 목을 뻣뻣이 세우는 고약한 마음이 있어 주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말이나 생각을 듣고 따라 걷고 있지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는 자기 자신의 말이 아니라 이미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따라 걸어가는 “양 떼”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화답송>에서 시편작가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는 그분 목장의 백성, 그분 손이 이끄시는 양 떼이로세”(시편 95,7).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주님!
제 안에는 당신 형상의 빈자리가 있습니다.
오로지 임자이신 당신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당신께서 제 안에 계시오니, 당신의 나라를 드러내소서!
제 영혼이 당신의 성전이오니,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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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7. 사순 제3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신앙의 어중간은 없다
‘두개의 깃발’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깃발이고, 하나는 마귀두목 베엘제불의 깃발입니다. 둘 중에 선택하라면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선택하면 부귀영화나 명예, 매혹적이고 달콤한 삶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현실적인 가난, 업신여김과 모욕, 때로는 박해와 순교까지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삶은 매 순간 선택의 삶입니다. 둘 중의 하나입니다. 양다리 걸치기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어중간은 없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면 세상에서 안전한 처세술이 될 수 있지만,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세는 아닙니다.
묵시록을 보면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묵시3,15-16).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결단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마귀를 선택해야 하는가? 아니면 주님을 선택해야 하는가? 너무도 당연한 답이지만 삶의 모습은 여전히 이해타산에 휘둘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 편에 서는, 그리고 모아들이는 노력을 하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루카11,17). 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가정도, 공동체도 어떤 모임도 한마음 한뜻이 될 수 있도록 정성을 모아야 합니다. 나쁜 습관이 있다면 고쳐야 하고 내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는 열린 마음의 눈을 떠야 하고, 시기와 질투의 마음이 있다면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의 넉넉함과 포용할 수 있는 큰 품을 키워야 합니다. 말 한마디라도 위로가 되고 기쁨과 희망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실천이 없다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함으로써 열매를 맺고 주님의 편이 되시길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고집 때문에 사실을 바꾸고, 때로는 거짓된 소문을 퍼뜨리고, 진실에 눈을 감아버립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을 마귀의 패거리로 몰아붙이던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목이 뻣뻣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완고함이 쌓이면 마음속에 생명력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거짓 속에 묻힌 마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가끔 세상의 정치적 이야기를 꺼내면 사람들이 말합니다. “신부님께서는 여당이십니까? 야당이십니까?” 그러면 말합니다. 저는 ‘천주당’입니다. 하느님 앞에 서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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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7.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어르신들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람이 들어오는 자리는 표가 나지 않지만, 사람이 나간 자리는 표가 나기 마련이다.” 3명이 여행을 하다가 1명이 본당 미사 때문에 먼저 돌아갔습니다. 3명이 함께 했을 때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1명이 없으니 그 빈자리가 허전했습니다. 저는 운전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1명이 없으니, 운전도 해야 했습니다. 아침이면 가방도 챙겨야 했습니다. 신부님은 1인 3역을 했습니다. 모든 일정을 계획하였고, 숙소를 예약했습니다. 물이며, 먹을 간식을 챙겼습니다. 신부님은 떠나면서 목요일에 다시 오겠다고 했습니다. 본당 주일 미사를 마치고 비행기를 타고 온다고 했습니다. 저를 댈러스에 내려주고 혼자 뉴욕으로 가야 하는 동창 신부님을 위해서 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둘이 함께 다시 뉴욕으로 간다고 합니다. 동창을 위해서 기꺼이 다시 내려온다는 신부님의 진한 우정이 고마웠습니다. 저를 데려다주고 혼자서 뉴욕으로 가야 했던 신부님이 안쓰러웠는데, 친한 동창과 함께 돌아가게 되어서 마음이 놓였습니다. 이렇게 10일간의 여행은 마무리되었고, 저는 댈러스에서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좋은 뜻으로 떠난 여행이 뜻하지 않은 갈등과 다툼으로 엉망이 되는 때도 있습니다. 심할 때는 같이 떠났지만, 따로 돌아오는 일도 있습니다. 상대에 대한 배려와 헤아림이 없이 자신의 주장만을 이기적으로 내세울 때 그렇습니다. 자신의 큰 허물은 보지 못하고 상대방의 작은 허물을 들추어낼 때 그렇습니다. 지나친 음주로 몸과 마음을 주체하지 못할 때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며, 신앙을 키우기 위해서 가는 성지순례에서도 간혹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예전에 성지순례를 갔을 때입니다. 복도를 지나는데 누군가를 험담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모임 시간에 늦게 나온다거나, 침묵해야 할 장소에서 떠든다거나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사제들끼리 떠나는 순례에서도 간혹 갈등과 마찰이 생기기도 합니다. 순례를 여행처럼 생각할 때가 그렇습니다. 저는 순례를 떠날 때면 늘 들려 드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베들레헴 성당 문 앞에 있는 글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행객으로 이곳에 왔다면 순례자가 되어서 가시길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이 순례자로 이곳에 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가시길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을 왜곡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베엘제불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선동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죽이려고 했습니다. 만일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가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믿고 따랐다면 그들 또한 하느님 나라로 가는 여행에 함께 했을 것입니다. 왜곡과 날조는 하느님한테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왜곡과 날조는 악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교회 역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권력의 편에 서서 진실을 외면하고 왜곡했던 아픈 과거가 있습니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될 것이다.” 사순시기는 거짓과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시간입니다. 사순시기는 왜곡과 날조를 밝혀내고 진실과 자유를 회복하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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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7. 사순 제3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마지막 문장이 제 가슴에 한동안 남아 있었습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왜 이 말이 가슴에 오래 남았을까 잠시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이런 생각이 스쳤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그러니 내게는 잘못이 없어.’
언제 이런 생각을 했을까요? 언제 이런 모습에 물들어 있었을까요?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이 스쳤을까요?
오늘 복음은 제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적극적으로 주님께 다가가고 그분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면, 소극적인 자세요. 어떤 선택도 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 주님과 멀어지는 것이다.’
사실 저를 포함에서 이런 소극적인 신앙의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 말씀에 들려오는 어떤 것도 행하지 않고 그저 피해자인 양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모습들 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복음을 따라 사는 것은 실천하는 것입니다. 주님 편에 서는 것이고, 함께 모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그것은 주님 반대편에 서는 것입니다. 설령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사순을 지내며 움직여 볼까요? 주님 편에 서서 모아들여 볼까요? 따뜻함에 서서, 사랑을 모아들이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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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꿍
신학생 시절
그 작은 신학교 공간에서도
인생의 희로애락이 펼쳐집니다.
그래서 가끔 모든 불을 끄고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였습니다.
(이런 이야기 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허락되지 않은 은밀한 시간이었습니다. 숨소리를 죽여가며 서로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꽃피웠습니다.
술잔은 금세 마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마다 친구들은 나지막이 말했습니다. ‘까꿍’
술잔이 비었다는 뜻입니다.
이내 ‘까꿍’은 오늘 밤의 은밀한 시간을 알리는 암호가 됐습니다.
지금은 ‘까꿍’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까꿍’이라는 말을 들으면
신학교 시절, 그때가 생각납니다.
바글바글, 아웅다웅, 티격태격, 옹기종기 지냈던
그 추억들이 생각납니다.
오늘은 ‘까꿍’ 한번 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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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7.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신 예수님
“늘 예수님편에 서자”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마라.”(시편95,7ㄹ과 8ㄴ)
바로 오늘 화답송 후렴이자 사순시기 내내 계속되는 새벽 성무일도시 초대송 후렴입니다. 사순시기 낮기도 독서시 계응송 역시 늘 동일합니다.
“주여, 내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내 안에 굳센 정신을 주소서.”(시편51,12)
제가 좋아하는 말마디중 ‘배우다’, ‘섬기다’에 이어 ‘어질다’입니다. 공자의 인(仁)이 바로 어질 인(仁)자입니다. 마음이 어질다는 마음이 “좋다, 착하다, 순하다, 슬기롭다, 너그럽다, 관대하다, 유연하다, 현명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모든 좋은 덕목을 다 담고 있는 “어질다”라는 우리 말이 참 좋습니다. 오늘의 다산 어록도, 논어에 나오는 말씀도 어진 사람에 대한 언급같습니다.
“타인의 결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감수성이라고 한다. 감수성은 지식이 아니기에 남에게 귀 기울이는 태도로 나타난다.”-다산
새삼 남에게 귀 기울이는 경청의 자세가 얼마나 본질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들음의 수용적 사람들이 어진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어질지 못하다면 예를 지켜서 무슨 소용인가? 사람이 어질지 못하다면 음악을 한들 무슨 소용인가?”-논어
공자가 강조한 것 역시 호학(好學)과 더불어 인(仁)입니다. 결국 공부의 목적도 어진 사람이 되는데 있음을 봅니다.
얼마전 주고 받은 결코 잊지 못할 고마운 마음 가득 들었던 어느 분과의 아름다운 대화 내용과 제 자작시를 소개합니다. 지금 남도(南道) 섬진강 부근에는 매화꽃이 한창이랍니다.
-“섬진강 매화마을입니다.”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이 생각납니다. 봄철이 유난히 아름다운 섬진강의 그 자체가 시이지요!”
사실 금수강산(錦繡江山)이라 말도 있듯이 봄철의 한반도는 어디나 아름다운 시적(詩的) 풍경입니다.
“내년 봄에는 신부님 모시고 매화 가득한 아름다운 섬진강에 봄여행하고 싶습니다. 봄의 섬진강은 항상 평화롭고 아름답습니다.”-
주고받은 대화에 즉시 떠오른 “산(山)과 강(江)”이라는 자작시에 만족했고 위로 받았습니다. 이 또한 어진 마음의 표현이겠고 참으로 정주 영성의 절정이 아니겠나하는 자긍심(自矜心)도 들었습니다.
“아니
산이 산에 갈 수가 있나?
강이 강에 갈 수가 있나?
나 머물 때는 산(山)이요 움직일 때는 강(江)인데
나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한결같이 임기다리는 산인데
나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끊임없이 흐르는 강인데
산이 산에 강이 강에 갈 수가 있나?”
베네딕도 16세 전임 교황님이 자주 사용했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부러워했던 말마디 “Enough!(충분하다!)”를 저 또한 좋아합니다. 매사 지족(知足)의 삶을 사는 넉넉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Enough(이너프)의 사람들’을 감히 누가 유혹할 수 있을런지요!
밖으로는 “정주의 산”처럼, 안으로는 맑게 흐르는 “생명의 강”처럼, 산과 강의 정주영성을 살아가는 참으로 깊고 어진 사람들이 이상적 베네딕도 수도자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서와 루카복음 말씀을 읽으며 묵상하다 보니 떠오른 예화와 시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흡사 무지의 악에, 사탄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실 삶의 중심인, 참으로 어지신 예수님에게서 멀어질 때 누구나의 가능성이 무지의 악마입니다. 베드로의 예에서 보다시피 사탄이, 악마가 따로 있는게 아니라 주님을 떠날 때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이런 이들은 바로 자기를 모르는 무지한 이들입니다. 다음 실감나는 예레미야서의 묘사가 그대로 우리 인간의 부정적 단면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그들은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그들은 나에게 순종하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목을 뻣뻣이 세우고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다...그들의 입술에서 진실이 사라지고 끊겼다.”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깊은 좌절감의 표현입니다. 예나 이제나 우리는 변함없이 후안무치, 적반하장, 내로남불 등 부정적 모습들을 얼마나 많이 목격하는지요. 사람이라하지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도 두려움도 없는 이런 이들이 악마요 사탄입니다. 악에 사로잡힌, 악에 포획된 이들입니다. 바로 이런 이들에 대한 주님의 간절한 회개에의 촉구입니다. 사순시기 우리에게 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될 것이다.”
제1독서 예레미야서의 구제불능의 마음이 딱딱하고 목이 뻣뻣한 무지한 이들은 오늘 복음에서도 계속됩니다. 살아있는 생명의 특징은 따뜻함과 부드러움이요 죽어있는 죽음의 특징은 차거움과 딱딱함입니다. 흙도 마음처럼 살아있는 흙은 따뜻하고 부드럽습니다. 살아있다 하나 죽어있는 차갑고 딱딱하게 굳은 마음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 곡해하는, 또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보여달라’는 이들이 바로 마음이 완고하고 목이 뻣뻣한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영리한 마귀들이 결코 분열되는 일은 없으니 사탄의 힘을 빌려 사탄을 쫓아내는 일은 어불성설임을 천명하시며 당신의 구마행위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능력에 기인함을 밝힙니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어 악마를 포박할 수 있는 가장 힘센자로 당신을 묘사합니다. 이미 이사야 예언서(이사49.24-25)에서 예고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신 주님만이 우리를 사탄의 손아귀에서 구출할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우리 안에 잠재해 있는 어둠의 세력을 축출할 수 있는 분은, 우리의 희망이자 구원자이신 예수님뿐이라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7,24-25)
우리의 희망이자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또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늘 당신 편에 설 것을 간절히 바라십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
과연 우리는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구원 역시 선택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단호히, 결연히 늘 사탄이 아닌 주님을 선택하여, 흩어버리는 분열의 삶이 아닌 모아들이는 일치의 삶을 살 때, 또 온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섬기며 따르는 삶을 살 때, 참으로 온전한 참나의 자유인의 삶일 것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며 바치는 사랑의 고백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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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7.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어느새>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루카 11,23)
당신을
바라보다
어느새
당신과 함께
바라봅니다
당신과 함께
바라보다
어느새
당신이 되어
바라봅니다
당신께
걸어가다
어느새
당신과 함께
걸어갑니다
당신과 함께
걸어가다
어느새
당신이 되어
걸어갑니다
당신을
믿다가
어느새
당신과 함께
믿습니다
당신과 함께
믿다가
어느새
당신이 되어
믿습니다
당신을
바라다가
어느새
당신과 함께
바랍니다
당신과 함께
바라다가
어느새
당신이 되어
바랍니다
당신을
사랑하다
어느새
당신과 함께
사랑합니다
당신과 함께
사랑하다
어느새
당신이 되어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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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7. 사순 제3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루카 11,23)
사탄은 예수님 편이 아니다
그 이유를 그분은 이렇게 밀씀하십니다. ‘그것은 내가 모든 사람을 마귀의 손에서 구해 내고 그에게 속아 넘어간 이들을 그의 거짓에서 건져내러 왔기 때문이다. 나는 갇혀 있는 이들을 풀어 주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을 비추고, 쓰러진 이들을 일으켜 세우고, 다친 영혼들을 고쳐 주고, 사방으로 흩어진 하느님의 자녀들을 한데 모으려고 왔다. 이것이 내가 세상에 온 목적이다. 사탄은 내 편이 아니며 오히려 나를 반대한다. 그자는 내가 구원하고 모은 이들을 감히 흩어 버리려고 한다 내게 대항하고 사악한 뜻으로 내 목적을 훼방하려는 그자가 어떻게 나를 도와 저를 무너뜨리려 하겠느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얼마나 어리석은가?’
-일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4 존재는 거룩하다
나는 나무가 금보다 더 낫다고 말씀드립니다. 이것은 주목할 만한 말입니다. 한낱 돌일지라도 그것이 존재를 가지고 있는 한, 그것은 존재가 없는, 즉 존재가 제거된 하느님과 신성보다 더 고귀합니다. 한낱 돌일지라도 존재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죽은 것들을 살리고, 죽음을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대단히 강력한 형식의 생명입니다.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어느 것도 죽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순교자들을 가리켜 “그들은 죽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영생으로 옮겨졌습니다. 생명이 곧 존재가 되는 그러한 삶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사랑이나 슬픔이 우리를 거스르지 못할 참된 뿌리에 이르기 위하여 죽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제 1원인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제 l원인을 알지 못하고서는 아무것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지식이라도 그것이 제1 원인을 알지 못한다면, 그 지식은 참 지식일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명도 자신의 제 l 원인 - 이 원인 안에서 생명은 곧 존재가 된다 - 에 도달하지 않으면 결코 완성될 수 없습니다. 영혼이 죽어서 자신의 참된 뿌리에 도달할 때, 그 영혼은 존재를 얻습니다. 이 뿌리야말로 우리가 터 잡고 살아가는 곳이며, 생명이 곧 존재가 되는 자리입니다.(132)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4장 오직 고통뿐
과격당원의 폭력사건
세 아이들은 귀부인의 발현 장소에 이렇듯이 수많은 군중이 몰려드는 것을 보고 처음엔 깜짝 놀랐고 다음엔 무척 기뻐했다. 그것은 그들이 교만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교만이라는 불순한 감정과는 아예 동떨어져 있었다. 그들이 기뻐한 것은 하늘에서 찾아와 주신 아름다운 친구에 대한 사랑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 앞에서 발현을 비난하거나 놀리거나 혹은 공경을 거스르는 말 따위가 흘러나오면 아주 마음 아파했다. 고바 다 이리아의 발현이 성직자들이 꾸며 낸 음모라고 하면서 반(反) 발현 대회가 8월 19일 주일에 파티마에서 열린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그들의 슬픔이 어떠하였겠는가. 비밀 결사단이 정부의 지원을 얻어 이 대회를 조직한 것이었다. 그러나 본당 신부의 경계와 신자들의 현명한 처사 덕분으로 적의를 품은 이 시위 운동은 소수의 회원 사이에서 여지없이 결렬되고 말았다. 이날 성모님은 왈린 호스의 발현으로 아이들을 위로하셨다.
그 다음 달 그들을 슬프게 한 또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경건한 마음으로 발현 장소에 문을 세웠다는 것은 이미 말한 대로인데 순례자들은 넘치는 감사에서 이 문앞에 많은 ‘감사의 석판’과 여러 물품을 두었다.
그런데 싼타렘의 불량배들이 그 지방 구장(區長)에게 꾀임을 받았음인지, 성모 마리아께 대한 민중의 신심이 되는 이 표를 뿌리째 뽑아 버리려고 어느 날 밤 자동차로 달려와 문을 부수고 물건을 다 가져 갔으며 더구나 발현의 호랑가시나무를 잘라 가지고 자동차 뒤에 묶어 달아매고 개선가를 올리면서 가버렸다(10월 22일에서 23일에 걸친 밤).(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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