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의 밤바다
여수항에서 배를 타고 1시간쯤 가면 돌산도가 나온다.
이어 금오산이다.
솔바람 소리에 울창한 낙락장송은 까딱하지 않는데.
파도 소리에 까딱 않던 바위가 흔들거린다. 흔들바위다.
하늘을 가리는 동백 터널을 지나면,
아슬아슬한 절벽에 지은 암자가 나온다.
까치집처럼 앙증맞은 향일암이다.
지현스님
스님 한 분이 순천 송광사에서
여수 향일암으로 승적을 옮겼다.
당시 27세, 법명은 지현(知玄),
속세의 호는 호월(湖月).
스님은 남해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세에 출가하여,
10년을 목표로 전국 사찰을 순회하며 수도하다가,
금오산으로 왔다.
그리고 폐사지로 방치된 향일암에 자리를 잡았다.
스님은 백팔염주에 사바세계(娑婆世界)의 번뇌를 실어,
수도(修道)에 정진하고 있었다.
인물이 좋은 대다가. 낭랑한 목소리에,
스님의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몰랐다.
그러니 여신도들은 미남 스님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한 여인의 등장
향일암에서 1km 떨어진 해변 율촌마을에,
양산을 쓰고 하이힐을 신은 신여성이 양장차림으로 나타났다.
광주에 사는 아가씨(박애희)는 폐결핵으로
학업을 중지하고 요양 차 이모 집에 왔다.
한눈에 보아도 절세미인이었다.
울창한 숲에는 동백, 산죽, 춘란이 지천이고,
바위틈에 도사린 석란의 향기가 십리 안팎을 뒤덮었다.
아름다운 풍광 탓인지,
아가씨의 병은 호전되어, 전과 같이 활기를 찾았다.
하루는 아가씨가 인근에 있는 암자로 산책을 나왔다가,
젊은 스님과 눈이 마주쳤다.
바로 지현스님이다.
청아한 목소리로 염불하는 스님을,
중이 아니라 남성으로 보고 연정을 품었다.
아가씨 마음은 오직 한 곳에 꽂혔다.
스님의 풍란 같은 향기에 취한 것이다.
그래서 아가씨는 2개월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암자를 찾았다.
아가씨의 시선은 날이 갈수록 뜨거워지는데,
스님은 매정하게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이글거리는 가을볕에 가중나무는 단풍이 드는데,
아가씨는 짝사랑에 가슴이 미어졌다.
이번에는 신병이 아닌 상사병으로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그러기를 석 달,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끝내는 농약을 마셨다.
이모는 조카의 애절한 소원을 풀어주기 위해,
단 거름으로 지현스님을 찾아갔다.
스님은 이모의 요청을 들은 둥 만 둥 하고.
해독이 급하니 당장 녹두 국물을 먹이세요!
이모는 매정한 스님을 원망하며.
집에 돌아와 녹두를 갈아 먹였다.
무의촌 갯마을이라 꼼짝없이 죽을 목숨인 조카가,
신통하게도 녹두 국물 한 대접을 마시고 살아났다.
지현스님은 화엄경(華嚴經)을 음송하며 암자 경내를 회람하고 있었다.
이때 뒷산에서 비통한 여인의 통곡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스님은 소리 나는 곳에 가 보니.
흔들바위에서 바다로 투신하려는 그 아가씨였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하는데,
자기로 인해 한을 품고 죽는다고 생각하니
여기서 물러나면 살생을 금하는 불자의 바른 자세가 아니다.
알겠소!
아가씨의 소원이 무엇이든 다 들어 주리다!
제발 바위에서 뛰어 내리지 마시오.
그 말을 듣자마자 아가씨는 혼절하고 말았다.
스님은 아가씨를 안아 암자에 누이자,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꿈에 그리던 스님의 품에 안겼다.
스님은 젊은 여인의 싱싱한 체취에 얼이 빠졌다.
그리고 정열이 용솟음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10년 기약을 마치지 못하고 파계(破戒)하고 말았다.
어언 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한 여인이 대구 팔공산 동화사에서
수도에 정진하던 지현스님을 찾아왔다.
이 아이가 스님의 딸입니다.
스님은 노을 진 하늘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결심한 듯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내 아이입니다.
스님은 가사(袈裟)를 벗어 던지고 딸을 안았다.
1971년 5월, 향일암 중창공사 때,
인연의 끈을 연결해준 것에 보답하고자, 기와불사를 자청했다.
그들은 부산 영도구 봉래동에서,
미곡상을 운영하며 단란하게 살고 있다.
한 여인의 지극한 사랑이 10년 수도를 멈추고,
가정으로 돌아오게 한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흔들바위는, 바람 없이도 잘만 흔들거린다.
옮긴글/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