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54
10월25일[연중 제29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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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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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Q5aYymnnzeM
[한국외방선교회 김지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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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식재료를 손질하면서 그 행위 자체를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알콩달콩 재미있고 기쁘게 살아가고 계시는 한 수도회 세미나 동반을 해드리고 있습니다. 또래 형제들, 저와 동종업계에 종사하시는 신부님 수사님들도 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저만 쌩고생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이 공동체 형제들 고생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피정객들을 위한 시설 관리며 주방이며, 빨래 청소며 다들 손수 하시는 분위기였습니다. 누군가 나와 비슷한 삶을 기쁘게 살아내고 있다는 그 자체로 제게는 너무나 큰 위로요 힘이었습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안에서는 ‘일상의 영성’이란 표현을 자주 씁니다. 때로 지루해 보이고 때로 무의미해 보이는 우리들의 반복되는 일상사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굳게 믿는 영성입니다.
매일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루를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는 영성입니다. 매일 우리와 만나는 이웃들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이는 영성입니다.
매일 되풀이 되는 소소한 일상사에도 분명히 큰 가치와 의미가 있음을 믿으며 성실히 반복해나가는 영성입니다. 이러한 일상의 영성에 대한 충실한 실천은 오시는 주님을 잘 맞이하기 위한 가장 좋은 준비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요즘 계속되는 복음 주제가 깨어있음이요, 철저한 준비입니다.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장 39~40절)
일상의 영성을 잘 실천하기로 유명한 17세기 맨발의 가르멜회 수도자가 있었는데 수도원 주방장이었던 부활의 라우렌시오 수사님입니다.
참으로 겸손했던 그는 아주 기쁜 얼굴로 동료 수도자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식재료를 손질하면서 그 행위 자체를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수프를 저으면서 동료 수도자들의 성화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행하는 하찮아 보이는 행위들을 하느님을 위한 일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성당에서 열심히 기도할 때도 하느님을 만났지만, 동료들의 낡은 구두를 수선할 때도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라우렌시오 수사님께서 남기신 명언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반드시 큰 일만 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프라이팬으로 작은 계란 하나를 요리하더라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뒤집습니다.”
이러한 라우렌시오 수사님이었기에 사람들은 그분을 만나면 마치도 주님을 만난듯 한 느낌이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가 주방에서 접시를 닦을 때의 모습은 마치 경건한 사제가 거룩한 성찬례를 집전하는 듯했습니다. 그는 거룩한 사제도 아니었고 명설교자도 아니었지만 자질구레한 일상사를 통해 주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돈 보스코 성인께서 강조하셨던 일상의 영성, 사실 특별한 것이 아니더군요. 우리가 쉽게 넘겨버리고 마는 일상의 소소한 작은 것들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영성입니다.
작은 의무들에 중요성을 두고 충실히 이행하는 영성입니다. 매일 아침이면 내 책상 앞에 놓이는 매일의 업무들, 귀찮은 일상적 소임들을 기쁜 마음으로 행하는 영성입니다.
영성 생활 안에서도 ‘특별한 그 무엇’을 추구하지 않고 매일 되풀이되는 미사나 아침 저녁 기도에 구원의 보편적 진리가 담겨있음을 기억하고 ‘할 때 잘하는 영성’입니다.
우리가 매일 보내고 있는 ‘일상’은 황금보다 더 가치 있는 축복의 순간들이며, 찬란한 기적들이 수시로 반복되는 금쪽같은 시간으로 여기는 것이 일상의 영성의 골자입니다.
일상의 영성을 산다는 것은 매일 아침 복음적인 삶, 균형 잡힌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일입니다. 일상의 영성을 산다는 것은 그때그때 상황에 충실하다는 것, 매 순간 해야 할 바를 충실히 잘 해낸다는 것, 모든 것을 미리미리 잘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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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YtK2OpX59u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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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몇 명의 영혼을 구할 능력이 있다고 믿는가?>
샤를로트 퍼킨스 길먼의 『누런벽지』 (The Yellow Wallpaper)는 19세기 후반의 여성들이 겪는 정신적 및 사회적 억압에 관한 내용의 자전적 소설입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주인공은 의사인 남편 존, 그리고 그들의 아기가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 대형 저택을 임대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서술자는 최근에 아기를 출산한 후 임신성 우울증 또는 신경 쇠약과 같은 조건으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존은 아내를 일시적인 신경성 장애로 진단합니다. 그는 그녀에게 휴식을 취하고, 글쓰기나 그림 그리기와 같은 활동을 피하도록 권장합니다.
이들은 저택의 최상층 침실에 머물게 되는데, 이 방에는 누런색의 이상한 벽지가 붙어 있습니다. 서술자는 처음에는 그 벽지를 싫어하지만, 점차 그에게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남편의 권장에 따라 아무 활동도 하지 않게 된 서술자는 점차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집니다. 그녀는 벽지 뒤에 여성이 갇혀 있다고 믿게 되며, 이 여성이 밤마다 벽지를 긁으려고 시도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는 서술자가 점점 더 광기에 빠져들면서, 그녀가 벽지를 완전히 찢어버리고, 그녀 자신이 그 벽지 뒤의 여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이 소설은 여성이 아픈 이유는 남성처럼 공부하고 일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고 여성은 본래 약한 존재라는 선입견에 맞서는 최초의 페미니즘적 소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길먼은 그렇게 벽지에 갇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길먼의 아버지는 독실한 종교인이었지만, 가족을 책임지지 않고 떠나버렸습니다. 그래서 홀어머니와 어려움 속에서 자라야 했습니다. 결혼한 남편도 결국 길먼의 신경 쇠약을 여성이라는 이유로 치부하였습니다.
그녀는 휴양하며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 금기를 깨고 소설을 씁니다. 여성도 무언가 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는 당시 보수적인 미국에 퍼져있던 무거운 분위기와 홀로 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휴양을 마치고 나와 남편과 이혼합니다. 그리고 여성의 인권을 위해 싸우는 길을 선택합니다. 그녀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의 미국 여성주의자, 소설가, 시인, 강사로, 여성의 권리, 사회 개혁, 그리고 여성의 정신 건강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깨는 많은 변화와 발전을 가져온 여인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남들 하는 대로 따라가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더 쉬운 길이기 때문입니다. 나만의 길을 간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산길을 간다고 생각해도 이미 나 있는 길과 내가 헤치고 가는 길은 상당한 어려움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무엇이 더 큰 보람으로 남을까요? 어려운 길로 나아가 길을 낸 사람일 것입니다. 의미 있는 일, 보람 있는 일, 결국 행복한 결과를 주는 일은 반드시 그렇지 않은 일보다 어렵고 힘이 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깨어있음에 당신의 제자들과 일반 신자들의 차이를 말씀하십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더 큰 행복을 위해서는 더 큰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노예 해방을 위해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남부와 전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조금은 편한 수녀의 생활을 접고 더 힘든 길을 택하여 지금 우리가 아는 모습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태석 신부님도 마찬가지고 온 나라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평생 부담감으로 살아온 축구선수 메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예는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많이 맡기신다는 말은 그만큼 인정해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인정받으면 그만큼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내가 누구이냐에 대한 나의 믿음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리 하느님이라 하더라도 그만한 능력과 일, 성과가 나지 않으면 그 믿음은 지속될 수 없습니다. 의사가 되었는데 진료를 하나도 하지 않으면서 의사가 된 기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만한 일을 해야 그만한 보람이 옵니다. 그 보람은 바로 내가 믿는 그 사람이 되었다는 자존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자녀로서의 행복을 얻으려면 그만큼 많이 일해야 합니다. 사람 영혼을 구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영혼을 구하려는 꿈을 꾸고 있나요? ‘나는 가족도 구하지 못하는데 뭔 큰일을 하겠느냐?’라고 생각하나요? 그러면 나 자신을 벽 속에 가두는 것이 됩니다. 누런벽지의 길먼처럼 벽지를 뚫고 갇혀 있는 나를 꺼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내가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다고 믿을 때 나에겐 더 많은 고난의 십자가가 마련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갈 때는 그리스도께서 부활 때 느끼셨던 그 기쁨과 더 가까운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그 행실대로 갚아주십니다. 마더 데레사는 천국의 문 앞에 있던 베드로 사도에게 “나는 이 천국을 가난한 사람들로 가득 채우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차이가 나의 자존감, 곧 행복의 수준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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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순례 두 번째 날에는 ‘정난주(명연) 마리아 묘’와 ‘용수성지’를 순례하였습니다. 신앙 때문에 남편 황사영 알렉산델은 순교하였고, 정난주 마리아는 제주도에 관노로 유배 갔고, 2살 아들은 추자도에서 생이별하였습니다. 정난주 마리아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저의 고향도 생각났습니다. 저는 1963년 4월 15일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 376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제가 그곳에서 태어난 이유는 5대조 할아버지께서 신앙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깊은 산골로 피난 가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는 1991년 8월 23일 사제서품을 받고 제가 태어났던 고향으로 가서 첫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교우촌에서 지내는 많은 분들이 미사에 함께 해 주었고, 저를 축하해 주었습니다. 비록 관노의 신세였지만 정난주 마리아는 신앙 안에서 충실하게 살았고, 고인이 되었을 때도 고인을 존경하던 마을 사람들이 묘소를 잘 돌보았습니다. 지금 고인의 무덤은 많은 신앙인들이 찾는 성지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했던 것처럼 사랑하는 남편의 죽음도, 2살 아들과의 생이별도, 평생의 관노생활도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떼어놓을 수 없었습니다.
용수성지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탔던 배가 상해를 출발해서 제물포로 가려했는데 도중에 태풍을 만나 갖은 고초를 겪은 후에 제주도 용수포구에 도착했던 곳입니다. 김대건 신부님과 선원들은 용수포구에서 미사를 봉헌하였고, 배를 수리한 후에 다시금 출발하여 나바위 성지에 도착하여 무사히 조선에서의 사목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용수성지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기념하는 기념관이 있습니다. 기념관에서는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생애를 볼 수 있고, 제주 교구의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제주 교구에서는 고증을 고쳐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타고 왔던 ‘라파엘 호’를 복원하였습니다. 신부님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라파엘 호에 승선한 사람들이 직접 배를 몰고 제주 앞바다를 나갔는데 평온한 날에도 멀미 때문에 포기하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건장한 사람들이 하루도 못 견디는 배 위에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5개월 넘게 지냈다고 합니다. 순례에 함께한 분들 앞에도 심한 파도처럼 삶이 장애물이 있습니다. 물론 제게도 장애물이 있습니다. 순례자들과 저는 ‘라파엘 호’에 잠시 머물면서 우리가 장애물들을 이겨낼 수 있도록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전구를 청하였습니다.
요즘 우리는 제1독서에서 ‘로마서’를 읽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일관되게 말씀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은 율법과 기득권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며 신앙은 하느님을 믿는 의로움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율법과 기득권은 필요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오늘 나는 나에게 주어진 하루라는 하느님의 선물을 어떻게 보내는지 생각하며, 문득 예전에 어느 식당에서 읽었던 글을 생각합니다. “생각하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힘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읽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지혜의 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사랑 받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신이 부여한 특권입니다. 웃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영혼의 음악이기 때문입니다. 주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이기적 이기엔 우리의 하루가 너무 짧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지상 최대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생각하고, 읽고, 사랑하고, 웃고, 나누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갈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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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2,39-48: 충성스러운 종에 대하여
매 순간을 충실한 삶으로 준비하라는 말씀에 이어 오늘은 더욱 구체적으로 충성스러운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를 들어 항상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충실히 수행하고 준비하는 삶의 자세를 말씀하신다. 베드로는 이 비유가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인지 묻는다. 주님께서는 이 명령이 교사의 역할을 맡아 남보다 영향력 있는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더 새겨들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43-44절) 그들은 동료 종들에게 정해진 양식을 내주라는 명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적절한 때에 각자에게 적절한 영적 양식을 넉넉하게 줄 것이다.
동료 종들에게 때맞추어 양식을 주는 일은 교회 지도자들의 몫이다. 자신의 몫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으로 남용을 하게 되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할 것이다.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며 자기의 소임에 충실한 자들은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43절)이라고 칭찬을 듣고 많은 일을 맡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근면하고 성실해야 할 자신의 본분을 잊어버리고, 깨어 지키는 일을 쓸모없는 일로 가벼이 여기며, 옳지 못한 길에 들어서서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괴롭히는 자, 만일 그가 그들에게 돌아갈 몫을 지급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처단당하여 많은 매를 맞을 것이다. 주님의 영광을 가리거나 자기에게 맡겨진 양 떼를 소홀히 다루는 자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과 똑같이 대접받을 것이다.
지도자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양들이 잘못되는 것이 대부분 자신의 탓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 경우에는 그들이 주님의 길을 지키지 않고, 구원을 위해 주어진 거룩한 명령을 어겼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이익만 탐내고, 교만으로 믿음을 소홀히 하고, 말로는 세속을 버린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움켜잡고, 자기 욕심만 차리느라 하느님의 뜻을 행하지 않았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47절) 하셨다. 주인의 뜻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매 맞을 짓을 했고 매를 맞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들에게 선한 덕행의 모범이 되어야 할 증거자들인 우리가 어떤 매를 맞더라고 억울할 수 없다. 알고도 주님의 뜻을 거스른 자는 많이 맞을 것이고 모르고 잘못한 사람은 적게 맞는다고 하셨다. 그래서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4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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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심판>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39-40)
39절의 도둑과 집주인에 관한 표현은 뭔가 좀 이상하고, 40절의 내용과도 맞지 않는 표현입니다.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그 시간에만 잘 지키면 됩니다. 몇 시에 올지 모르면? 24시간 계속 지켜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도둑이 온다는 것은 확실한데, 몇 시에 올지 모르기 때문에 한시도 방심하지 못하고 24시간 계속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40절의 내용을 기준으로 39절의 뜻을 생각하면, "도둑이 몇 시에 오든지 간에 온다는 것을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가 예수님의 본래 의도일 것입니다.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라는 말씀이 강조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1) 사람의 아들은 틀림없이 온다.
2) 그 시기는 사람이 예상할 수 없다.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이 언제 이루어지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심판 받을 준비를 항상 하고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도둑'과 '집주인'이라는 말 자체에는 특별한 뜻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갑자기 오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일 뿐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하고 묻는데(루카 12,41), 예수님의 답변을 보면 일차적으로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인데, 지도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은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심판'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42절에서 말하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일차적으로는 교회 지도자들을 가리키지만, 넓은 뜻으로는 '모든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각 개인에게 각자의 인생을 맡기셨고, 탈렌트를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인생을 관리하는 집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제대로 인생을 살았다면 심판 때에 행복하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불행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심판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하느님을 몰랐던 사람들과 종교와 신앙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그리스도교 신앙인이라면 신앙인으로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신앙인이 아니라면 아닌 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자기 탓이 아닌 이유로 하느님을 안 믿었다면 그것을 크게 탓하지는 않으시겠지만,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선(善)과 사랑은 종교와 신앙을 초월한 보편적인 가치라는 점입니다. 종교와 신앙이 다르더라도 선은 선이고, 악은 악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을 몰라서 못 믿었더라도 사랑은 사랑입니다.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에 대해서 '그는 안 맞을 것이다.'라고 하지 않고 '적게 맞을 것이다.' 라고 표현한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 말은 '적게' 맞는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 아니라, 그런 사람에게는 따로 다른 기준이 적용된다는 뜻입니다.
마태오복음에 있는 '최후의 심판'의 내용을 보면, 심판의 대상은 '모든 민족들'이고(마태 25,32), 심판의 기준은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과 '해 주지 않은 것'입니다.(마태 25,40.45) '믿음'이 아니라 '사랑'이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사랑 실천을 하지 않아도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사랑 실천만 잘하면 믿음이 없어도 되는가?'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사랑 없는 믿음'보다 '믿음 없는 사랑'이 좀 더 낫긴 하지만, 목적지 없이 달리기만 잘한다고 해서 잘 달린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은 목적지이고, '사랑'은 목적지까지 가는 방법입니다.
하느님만 사랑하고 이웃은 사랑하지 않은 사람과 이웃만 사랑하고 하느님은 사랑하지 않은 사람 가운데 누가 구원을 받게 될까? 우리는 그런 문제로 논쟁을 할 여유가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고, 하나로 실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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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서 ‘준비’와 ‘깨어 있음’이라는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주제를 이어 가려고 마태오 복음서 저자는 ‘도둑’의 비유와 함께 ‘집사’의 비유를 소개합니다.
어제 복음에서 오실 분은 주인이었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그 대상이 바뀝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상하지 못한 때 도둑이 들어오듯이, 사람의 아들도 이처럼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진술에서 미래의 사건을 예상하지 못하는 인간의 무능력함이 강조됩니다. 이는 제자들이 깨어 준비하면서 사람의 아들의 오심을 기다려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질문에 응답하시는 방식으로 가르침을 이어 가십니다. 어제 복음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종이 예시되었다면, 오늘 복음에서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가 비유적으로 제시됩니다. 주인이 집사에게 맡긴 임무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주인의 가정을 돌보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주인은 집사에게 자신이 올 때를 기다리면서 맡겨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리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만일 집사가, 주인이 늦게 온다는 사실을 알고 방만한 생활을 한다면, 그는 주인에게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두 번째 비유, 곧 집사의 비유에서 집사의 불충실한 모습이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집사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십니다. 제자들을 향한 경고는 자칫 나태하고 방만한 생활에 빠져 있을 수 있는 우리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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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누구의 종인지 물으십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루카 복음 12장 42절)
집사는 압니다. 주인이 왜 자기를 다른 종들에게 봉사하는 자리로 불렀는지,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이미 주인의 말과 행동을 통해 배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충실하고 슬기롭게 제 역할을 수행하면서 맡겨진 종들에게도 유익을 주겠지만, 거기에 더해 차츰 주인을 닮아갈 겁니다. 그것이 그에게 허락된 가장 큰 선물일 것이지요.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분명히 합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 죄에서 해방되어 의로움의 종이 되었습니다."(로마서 6장 17절-18절)
복음에서 보듯, 집사는 주인의 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인의 뜻을 토대로 자기가 무얼 해야 하는지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죄의 종이었을 때는 재물과 육의 질서에 묶여 살아갔고, 율법의 문자에 매달려 사고하고 행동했습니다. 단죄와 심판이 앞섰고 쾌락과 욕정에 타인을 희생시키며 자신을 드높였지요.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습니다."(로마서 6장 14절) 반면 은총 아래 있는 의로움의 종은 다릅니다. 복음 속 주인의 바람처럼 그는 맡겨 주신 다른 종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며 충실하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합니다. 그 일이 바로 주인의 일이기 때문이고, 주인이 그걸 바라시니 순종할 따름입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복음 12장 48절)
율법과 전통의 그늘 아래서 태어나 숨 쉬고 교육받으며 살아온 구약의 백성 중에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을 믿고 그분의 제자가 된 이들은 말하자면 더 많이 받고 더 많이 맡기신 사람들입니다. 문자를 넘어서 의미로, 형식을 넘어서 정신으로 모험을 시작한 이들이지요.
그들은 새로운 생명의 주인이 하셨듯 단죄가 아닌 포용으로, 심판이 아닌 용서로 맡겨진 이들에게 헌신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겁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먹이고 키우고 돌보는 주인의 자비와 사랑을 따라하다가 닮아가고 닮아가다가 끝내 하나 되는 사람입니다. 오늘도 의로우신 주인 마음에 순종하여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으로 살아가시길 기원합니다.
주인께서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느닷없이 오시더라도 사랑의 상태에 머물러 사랑을 살고 있다면 그 해후의 순간이 얼마나 행복할는지요! 은총 아래서 의로움의 종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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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신다.”(루카복음 12장 48절)
오늘날 사라져가는 것 가운데 하나가 장인(匠人) 정신입니다. 장인 정신이란 무엇인가에 변함없이 헌신하고 혼신의 힘을 다하며 충실히 몰두하는 정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는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한 충실성과 헌신의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편의주의와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로 빨리 변하는 현상 때문인지 신앙생활마저도 ‘대충주의’에 젖어가는 듯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루카 복음사가는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루카복음 12장 42절-46절)를 교회 지도자들에게 적용시켜 전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주님의 뜻을 잘 알아 합당한 준비를 하고 하느님 백성을 잘 돌봐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의 책임은 일시적으로 흉내만 내는 형식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은 늦어질 수도 있지만, ‘생각지도 않은 때’(루카복음 12장 40절),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루카복음 12장 46절)에 오실 수도 있기에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책임을 맡은 이들에게 이르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충실하고 슬기롭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루카복음 12장 42절-44절)
늘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하느님 백성을 충실히 돌보는 교회 지도자들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게 되고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게 됩니다.
한편, 주님이 늦게 오시는구나 하며 하느님 백성을 잘 돌보지 않는 불충한 지도자는 ‘절단을 내버리는’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루카복음 12장 46절 참조).
나아가 교회 지도자들이 하느님의 뜻을 알면서도 준비를 하지 않거나 주인 뜻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몰라서 행하지 못한 평신도들보다 더한 책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루카복음 12장 46절-47절 참조)
예수님께서는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복음 12장 48절) 하고 말씀하시며 지도자들의 책임을 강조하십니다.
하느님 백성의 영혼을 돌볼 책무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요 그분의 사랑으로 모든 이들을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일 수 없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의 이 책무는 본질적이고 일차적인 책무로서 그 어떤 핑계나 다른 일 때문에 미루어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시는 주님을 맞을 합당한 준비입니다. 그런데 이런 책무가 교회지도자들만의 몫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 축성과 사제 축성, 수도 축성 등을 통하여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기로 약속하였습니다. 따라서 언제 어디서든 주님의 뜻대로 행동하고, 모든 것을 내 것으로 삼지 않고 주님께 되돌리며, 오직 하느님의 일에만 마음을 쓰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우리의 자발적인 봉헌과 하느님의 축성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기 시작되고 행복의 길이 열립니다.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려면 변덕을 부리지 않는 항구함과 깨어있음, 충실성, 책임을 지는 태도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오감(五感)을 자극하는 온갖 현상들에 휘둘리지 말고 변함없이 주님을 의식하고, 깨어 주님의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항구함이 없다면 우리는 주님의 매를 맞을 것입니다.
또한 충실함은 주님의 일에만 몰두하는 것입니다. 세상일도 집중하고 몰입하지 않으면 성취할 수 없는데 하물며 영혼 구원이야 얼마나한 충실함이 필요하겠습니까.
충실함은 멈추지 않고 꾸준히 해나가는 인내를 필요로 합니다. 사랑이 깃든 인내야말로 충실함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대충주의와 편의주의, 그리고 변덕과 현상적인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는 충실한 종으로서 사랑의 책임을 다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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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승훈 루카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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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지금 매를 맞는 것이 낫다>
어린시절 기억입니다. 시골에는 ‘아이스께끼’ 장사가 있었습니다. 일주에 한두 번 고물 자전거를 타고 와서는 동네 어귀 느티나무 아래 자리를 잡고 비료 포대, 고무 신발, 구리철사 등 그야말로 돈 되는 고물은 무엇이든 받아 챙기고 어름을 채운 나무통 안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내어 주었습니다.
비료 포대 하나도 귀했으니,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온 동네 아이들이 모였지만 먹지 못한 채 구경만 할 때가 많았습니다.
저도 너무 먹고 싶었는데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참고 있다가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습니다.
1원짜리 동전 하나였습니다. 1원이면 아이스크림 두 개입니다. 신이 나서 느티나무 아래로 달려갔습니다.
그러고는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었습니다. 옆에 아이들이 부러운 듯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뒤쫓아 오신 어머니의 얼굴을 마주하며 놀랬습니다.
그 뒤는 상상에 맡깁니다. 저는 그날 아이스크림을 먹지 말아야 했습니다. 돈이 없었으니까요. 지금서 얘기하지만, 전에는 작은집 사립문 울타리를 엮어놓은 구리철사를 풀어다가 엿을 사 먹은 일도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하신다”(히브12,6).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유익하도록 훈육하시어 우리가 당신의 거룩함에 동참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히브 12,10)
우리의 부모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꾸짖음을 달게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루카12,47-48) 따라서 지금 매를 맞는 것이 다행입니다. 마지막 날 주님 앞에서 매를 맞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일꾼은 관리인입니다. 그리고 관리인은 주인이 바라는 대로 해야 합니다.
따라서 충성스러움이 요구됩니다. 만약 일꾼이 주인 것을 내 것 인양 남용하여 멋대로 쓴다면 주인은 더 이상 그에게 관리를 맡길 수가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용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며 그것을 관리하도록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간과 능력, 재물 등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써야 합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8)고 하셨으니 누군가 나에게 요구한다면 많이 받은 줄로 생각하고 또 주님께서 많이 맡겨주셨다는 것을 생각하며 감사하길 바랍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나도 하느님 은총의 덕으로 오늘을 삽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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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막스 플랑크 생물학적 인공 두뇌학 연구소의 과학자들은 실험 참가자들을 울창한 숲으로 데리고 가서 ‘직선으로 걸어가라’라는 간단한 지시를 했습니다. 이 숲속에는 실험 참가자들을 안내하는 어떤 표지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방향 감각과 똑바로 걸을 수 있는 능력에만 의존해야 했습니다.
실험이 끝난 후 몇몇 참가자들은 자신이 직선 경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GPS 분석을 관찰하니, 그들은 지름 20미터 이내에서 원을 그리며 걸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실험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자신의 걷는 방향에 대한 믿을만한 단서가 없으면, 실제로 원을 그리며 걷는다.’
걷는 것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삶도 이런 모습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즉, 삶 안에서 명확한 이정표가 앞에 없으면, 인간은 말 그대로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원을 그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 이정표가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큰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이십니다. 하지만 많은 이가 주님을 바라보기보다는 지금의 상황에만 계속 매여있을 뿐입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있지 않으니 주님 뜻을 제대로 따를 수가 없습니다. 세상 삶 안에서 계속 무엇인가를 하고 있지만 원을 그리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40)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준비는 사람의 아들을 맞이할 준비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제 오실지 모를 주님이시기에 지금 당장 잘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하시지요. 그러나 우리는 늘 뒤로 미루고 있습니다. 주님을 보려고 하지 않고 그래서 주님의 뜻도 따르지 않으면서, 아직도 많은 시간이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지금 나 좋을 대로 살다가 주님만 맞이하면 되지 않겠냐는 생각입니다. 결과만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좋은 결과는 좋은 과정을 거쳐야 나올 수 있습니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좋은 결과가 나올 리가 없습니다. 문제는 주님께서 결과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과정 역시 모두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로 가장 빨리 직선으로 가는 방법이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또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하느님 나라는 내게 가장 먼 나라가 될 뿐입니다. 지금 자리에서 맴도는 삶이 아닌, 하느님 나라를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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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주님의 사람이니>
루카 12,39-48 (깨어 있어라,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베드로가,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나 주님의 사람이니>
나
주님의 사람이니
나의 사람은
주님께서 맡기신 사람
주님
그 사람
믿고 바라고 사랑하시듯
늘 그렇게
나
그 사람
믿고 바라고 사랑하려네
나
주님의 사람이니
나의 일은
주님께서 맡기신 일
주님
그 일
품고 돌보고 이루시듯
늘 그렇게
나
그 일
품고 돌보고 이루려네
나
주님의 사람이니
주님
나에게서
당신을 보시도록
늘 그렇게
나
주님의
몸과 마음이 되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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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정체성에 대하여>
요즘 Identity란 말을 많이 씁니다. 정체성 또는 신원이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자기 정체를 잘 알아야 하고 자기 정체성이 뚜렷하고 확고해야 한다고도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귀도 주교 앞에서 상속권을 아버지에게 돌려주며 이제부터 육신의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겠다고 선언한 다음 집을 떠나 어디론가 가고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강도가 나타나 누구냐고 물었고 이에 망설임 없이 자기는 위대한 왕의 사신이라고 답합니다.
20대 젊은 나이에 프란치스코는 이미 주님과의 관계에서 이렇게 뚜렷한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저는 같은 나이에 신학교에 들어가서도 확고한 정체성을 가지지 못했었지요.
신학교 첫 수업에 강의실을 잘 찾지 못해 좀 늦게 들어갔더니 칠판에 ‘나는 누구인가?’라고 쓰여있었고 그래서 옆의 친구에게 물으니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10번에 걸쳐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하느님의 자녀다.’ ‘나는 신학생이다.’ ‘나는 누구의 아들이다.’ 이런 식으로 10번을 써야 하는데, 저는 10번을 다 김찬선이라고만 썼습니다.
그해 십여 명의 동기생들이 이 응답을 잘못하여 입학하자마자 퇴학당했는데 그 이유가 5번 이내에 나는 신학생이라는 답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퇴학당하지 않은 것은 제가 교구 신학생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는데 저는 이때 주님과의 관계에서 정체성은 물론 프란치스칸 정체성도 없었고, 정체성의 혼란이랄까, 아무튼, 정체성이 확립되지 못한 상태로 살았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미성숙이고 어리석음입니까? 그런데 오늘 복음의 주님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명확히 알려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종이고 동시에 주님의 집사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는데 개신교 신자들은 서로를 집사라고 부르지요.
형제라는 호칭도 좋지만 주님과의 관계에서 집사라 부르는 것도 상당히 의미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 서로 그렇게 부르고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습니까?
주님의 종이요 집사라는 것은 어떤 것도 내가 주인이 아니고, 하느님이 그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것이지요.
재물도 나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것이고, 내 아내도 나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것이며, 내 아들도 나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것이고, 내 형제도 나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것이며, 심지어 나 자신도 나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것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니 누구도 그리고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해서는 안 되고, 나 자신도 내 좋을 대로 하려고 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싫어서 저는 30대 중반까지 주님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도 ‘주님’ 하며 기도하지 않고 ‘하느님’ 하며 기도했습니다.
사제요 수도자인 제가 그렇게 주님의 종이 되고 집사가 되기 싫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자였습니까? 저라는 인간이! 그리고 그렇게 30년 더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내 좋을 대로 하고 있으니!
집사 노릇에 충실할 때 행복하다고 오늘 주님은 말씀하시는데 나는 행복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제가 이러면서도 그 행복이 참 행복일까요?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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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신다."(루카12,48)
<내어놓아야 할 사랑!>
오늘 복음(루카12,39-48)은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의 비유'입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12.40)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루카12,42)라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오늘 복음 묵상은 12장 47절에서 48절의 말씀을 묵상한 내용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킁 더 청구하신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교회의 지도자들'과 '하느님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사람들'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그들이 심판 때에 심판자이신 주님으로 더 많은 매를 맞게 될 것이라는 뜨끔한 말씀입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라는 직분'과 '하느님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지식'이 '구원의 보증수표'도 아니고, 오히려 '더 많이 받고, 더 많이 알고 있는 것만큼 더 내어 놓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많이 받지 않았나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그리고 이 사랑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 않나요? 거룩한 미사를 통해서. 그리고 너를 통해서.
어느 누구도 주님의 심판대를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많이 받고도,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와 구원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곳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하지 않은 사람들은 마지막 때에 주님으로부터 더 많은 매를 맞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많이 받은 사람답게 행동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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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0cJfeidK1Q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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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 48)
단풍이
아름답다.
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삶으로 기도한다.
사람의 일은
한 치 앞을
볼 수 없다.
욕심도 교만도
내려놓고
끝내 모두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위에 있다.
내것이
아니다.
잠시 맡기신
하느님의 것이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을
따른다.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삶에서
벗어나 기쁘고
충실하게
하느님을
따르는 것이다.
우리 삶안에
하느님이 계신다.
요구도 청구도
하느님의
영역이며
하느님의 것이다.
우리에게 주신
재능도 하느님의
것이기에 하느님을
향해야한다.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공동체의
열매또한
맺을 수 없다.
그 열매는
그 누구도
소유할 수 없다.
소유가 아닌
봉사의 기쁨이며
나눔의 기쁨이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하느님께서는
잘 가르쳐주신다.
하느님을 위한
아름다운 삶이길
기도한다.
아름다운 삶은
아름다운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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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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