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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베어드(William Martyne Baird)와 한국선교
박용규(총신대학교 신대원 교수)
한국교회사 전 역사에서 윌리엄 베어드만큼 한국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도 드물다. 1891년 3월 25일 입국해서 1931년 11월 29일 평양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40년간 그는 한국선교를 위해 자신의 온 생명을 불태웠다. 부산과 대구 평양 선교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1897년에 숭실학교를 세워 수많은 인재를 키우며 한국의 기독교 교육을 선도했고, 1920년대부터는 성서공회 성서출판위원으로 성서번역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복음전도, 학교교육, 성경번역과 문서선교는 그가 일생동안 흔들리지 않고 일관되게 실천해온 세 가지 사역이었다. 언더우드와 마포삼열이 그랬던 것처럼 베어드는 한국교회를 대변하는 복음전도, 기독교 교육, 문서선교와 성경번역 세 가지 측면 모두에서 한국선교의 개척자였고, 실제로 놀라운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여러모로 한국선교를 위해 어느 누구보다도 준비된 선교사였다. 아들 리차드가 아버지 베어드 박사야 말로 “방법과 재정이 계획되지 않고는 어떠한 일도 시작하지 않았던” “신중하고 보수적인 기질,” “조용하고 내향적이고 규칙적인 사람”이라고 평한 것은 정확한 진단이었다. 학적으로도 그만한 자격을 갖춘 인물도 드물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엘린우드가 예찬한대로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한국 선교 개척 4년 만에 엘린우드가 베어드를 마펫, 언더우드와 나란히 비견할 만큼 한국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도 베어드의 생애와 사역은 이 두 사람에 비해 한국교회사 속에서 제대로 평가를 받아오지 못한 면이 있었다.
베어드의 한국선교 사역은 그의 전 사역기간의 성격을 고려할 때 크게 세 기간으로 대별할 수 있다. 첫 번째 기간은 1891년 내한 한 후부터 숭실학당을 설립하던 1897년까지이고, 두 번째 기간은 숭실학당을 설립하던 1897년부터 1916년 숭실학교 교장직을 사임할 때까지이며, 세 번째 기간은 1916년부터 193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이다. 물론 획일화시킬 수 없지9만 그의 생애와 사역을 고려할 때 그의 전 사역이 위 세 기간으로 뚜렷이 구분된다.
첫 번째 기간 동안 베어드는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부산에서 선교사업을 개척하면서 전도여행을 통해 남해안, 경상도 등지에 복음을 확장했고, 예수교학당 및 곤당골 사립학교 교사 겸직하며 부산과 대구 선교를 개척했다. 두 번째 기간에는 평북지방 선교를 시작으로 평양선교부로 이전하여 1897년에 숭실학당 전신 사랑방학교를 개설하였고 1901년에 학교명을 숭실학당으로 개명하였으며, 1906년부터는 장감이 협력하는 숭실대학으로 발전시키며 숭실을 한국교회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중심 기관으로 발전시켰다. 세 번째 기간에는 주일학교 공과교재 번역 및 편집 발간을 비롯한 문서선교와 기독교서회 편찬위원, 성서공회 성서출판위원으로 성서번역에 큰 기여를 하였다. 본고는 이 점을 고려하면서 베어드가 한국선교에 미친 영향을 역사적으로 조명하려고 한다.
I. 베어드의 성장배경과 선교사로의 입국
윌리엄 베어드는 1862년 6월 16일 미국 인디애나주 클락 카운디(Clark County) 찰스턴에서 출생했다. 1885년 하노버 대학을 졸업하고, 곧 바로 맥코믹신학교에 진학 3년 후인 1888년 이 학교를 졸업했다. 그해 5월 뉴 알바니 노회(the New Albany Presbytery)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1889년에 칸사스 시에서 복음전도 사역을 하였고 1890년에는 콜로라도 델 노르트(Del Norte)에 있는 델 노르트 대학 학장이 되었다. 장로교 선교본부로부터 한국선교사로 임명받은 후 델 노르트 대학 학장직을 사임하고 1890년 12월 18일 한국을 향해 배에 올랐다. 그는 한국으로 출발하기 바로 직전 1890년 12월 18일 앤 베어드와 결혼하였다.
베어드의 선교사 지망은 당시 맥코믹신학교 분위기 속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학교 안에 어느 때보다도 선교의 붐이 강하게 일고 있었다. 맥코믹신학교는 신학적으로는 구학파의 영향이 강하면서도 부흥운동에 대해 상당히 열려 있는데다 무디 부흥운동과 그의 학생자원운동의 영향이 강하게 일었던 곳이다.
“1870년, 80년대에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무디와 샌키(Moody-Sankey)의 신앙부흥운동에 깊이 영향을 받고 있었다. 무디(Mwight L. Moody)가 창립하는데 도움을 준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은 대학생들과 신학생들에게 거대한 영향을 주었다. 시카고에 있는 맥코믹 신학교의 급우인 윌 베어드와 샘 모펫도 많은 학생자원집회에 참석하였고, 그들 클래스의 다른 학생들과 함께 바다 건너에까지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한 무한한 헌신을 다짐하였다. 그 한 클래스에서 4명이 한국에 왔고, 다른 사람들은 중국, 인도, 일본으로 갔다. 신학교뿐만 아니라 교회들도 이 운동의 강력한 흐름에 사로 잡혔다. 토페카에서 애덤스 집안은 해외선교 운동 증진의 중심지가 되었던 제일장로교회와 연결되었다. 1년 안에 이 교회에서 9명의 교인이 해외선교사로 나갔다. 이들 중 몇 명은 열정적이나 다소 성급했던 것 같다.”
베어드의 한국선교 행은 이미 한국 선교사로 입국하여 한국선교를 불태우고 있던 신학교 동기 동창 기포드(Daniel Lyman Gifford)와 마펫(Samuel A. Moffett)의 영향도 컸다. 신학교 재학 시절 베어드는 동료 마펫, 기포드와 함께 학생자원운동에 참여하면서 선교열을 불태웠다. 이호우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이들은 “신학교 시절 내내 해외선교를 위한 기도 모임을 정기적으로 가졌다.” 훗날 이들 세 사람은 신학교 같은 급우들로 1888년 신학교를 같이 졸업하고 훗날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한국장로교 형성과 발전을 주도해 왔을 뿐 아니라 맥코믹학파를 형성하여 한국장로교 신학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다. 기포드는 1888년 졸업과 동시에 북장로교선교회 해외선교부로부터 한국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세 명의 급우 가운데 제일 먼저 내한했다. 그 뒤를 이어 마펫이 1889년 4월 한국선교사로 임명받고 그해 11월 한국으로 향했다. 베어드 부부가 고베에서 제물포까지 8일이 소요되는 거리를 작은 기선 오와리 마루(Owari Maru)를 타고 부산에 도착한 것은 1891년 1월 29일이었고, 다시 제물포에 도착한 것은 2월 2일이었다.
베어드의 선교사로의 내한
베어드가 한국에 처음 입국했을 때 남장로교 선교사로 입국한 테이트를 포함한다면 이미 세 명의 동료들이 한국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어 한국이 조금도 낮 설지 않았다. 그가 처음 한국에 도착했을 때 그를 환영하기 위해 북장로교 선교부 소속 9명의 선교사들이 모였을 때 이미 신학교 시절 3년 내내 함께 선교를 꿈꾸던 기포드와 마펫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에는 새로운 선교사를 환영하기 위해 전체 선교부가 모였다. 이때 선교부는 베어드 부부를 포함해서 9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헤론 부인(의사인 남편이 몇 개월 전에 사망하였다), 언더우드 부부, 기포드 부부(Giffords), 도티 양(Miss Doty), 그리고 모펫이었다. 이 작은 그룹으로 기포드, 모펫, 베어드는 맥코믹신학교의 1888학년도 (졸업)동기생들이었다. 이방 땅에서 이 젊은 선교사들은 이방인들 가운데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 내 베어드의 사역은 이미 미국을 출발하기 전부터 확정되어 있었다. “부산 선교부의 개설과 초기 역사”에서 베어드가 언급한 것처럼 엘린우드가 그를 한국에 파송하려고 했던 것은 부산선교부의 개설이었다. 한국에서 가장 전략적으로 중요한 부산지역에 복음을 전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그 일에 베어드는 참으로 적격자였다. 북장로교 선교부는 베어드가 도착하자 연례회의를 열어 베어드의 부산행을 공식적으로 결정했다.
“베어드 부부는 월요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화요일에 선교회는 연례 모임을 시작했는데, 이 모임은 토요일까지 계속되었다. 이 모임에서 베어드 부부는 부산에서 사역을 개척하기로 결정되었다. 이것은 서울을 벗어난 최초의 항구적인 선교 센터였다. 2주 후에 베어드는 새로운 선교부 부지를 구입하기 위해 언더우드와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다.”
본래 부산선교부 개척은 알렌에게 할당된 몫이었다. 알렌이 부산 선교를 개척하면 베어드 부부가 그를 도와 부산선교부를 발전시키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국정부가 와싱톤에 공사관을 개설하면서 공사관 고문과 통역관을 맡아 달라고 제의하자 이 제의를 받아들였고 미국선교부는 알렌에게 2년간 선교사 직 휴직을 결정했던 것이다. 베어드의 한국선교는 쉽지 않은 환경 속에서 추진되었다. 그가 내한하던 1891년부터 1910년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병탄을 당하기까지 한국은 가장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고 있었다. 이 시대 조선의 역사는 한 마디로 비운의 역사였다. 1873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고 한국을 영구적으로 식민지로 만들려는 일제는 1894년 청일전쟁으로 중국의 영향력을 제거하였고, 이듬해 1895년 명성왕후를 살해하고, 그로부터 약 10년 후에는 러일전쟁으로 러시아의 위협을 제거한 후 을사늑약을 체결하였다. 다시 고종의 강제퇴위(1907)와 병탄(1910)이 이어졌다. 이후 1931년 그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한반도를 둘러싼 국내외 상황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바로 이 같은 시기에 베어드가 한국선교를 개척한 것이다.
II. 베어드의 한국 선교 사역, 그 역사적 개관
1. 초기 부산, 대구선교의 개척(1891-1897)
한국선교사에서 그가 남긴 가장 큰 공헌 가운데 하나는 부산과 대구 선교의 개척이다. 1891년 2월 2일 서울에 도착한 베어드 부부는 25일 언더우드와 한국인 교사와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다. 부산 선교는 북장로교 선교회로서는 일종의 개척이나 다름없었다. 베어드는 곧 바로 부산 선교를 착수하지 않고 여름을 지난 후 부산 선교를 본격적으로 착수하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다. 1891년 9월 베어드는 미국 영사 허드(A. Heard)의 도움으로 부산에 선교부로 사용할 장소를 구입하는 데 성공했다. 9월 24일 선교 거주지 건립을 시작했고, 그 해 11월 부산으로 내려가 그곳에 정착했다. 봄 원산부흥운동의 주역으로 널리 알려진 하디(R. A. Hardie)가 개항장 의사로 부산에 내려갔고, 그해 12월 휴 브라운 부부가 부산에 도착해 부산선교를 착수했다. 그해 10월 호주장로회 선교부 소속 일단의 선교사들이 부산에 도착해 훗날 부산선교 사역을 두고 북장로교 선교회와 호주장로회선교회가 갈등을 빚게 되었다.
부산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리차드 베어드가 지적한 것처럼 “항구로서의 전략적인 위치로 인해 부산은 이미 국제적으로 중요한 요지였다. 미국과 일본에서 북경으로 가는, 그리고 상해에서 서울이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승객들과 수하물들은 모두 부산을 통과하였다. 심지어 서울에서 원산으로 가는 국내 여행도 내륙의 형편없이 나쁜 길과 여인숙을 이용하는 것보다 제물포에서 부산 혹은 원산으로 가는 증기선을 이용하는 것이 더 편리했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었으며 따라서 중국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특히 부산지역은 그 영향이 더욱 심했다. 게다가 일본의 영향마저 대단해 베어드 입국당시 부산은 “한국인의 마을이라기보다는 일본인들의 마을이었다.” 부산에 대한 인상을 베어드는 이렇게 집약했다. “전설 줄이 마을과 일본을 연결하였고 전보가 서울과 연결되었다. 일본우표를 파는 일본 우체국이 있었고 일본 돈으로 영업하는 일본 은행지국이 있었다.”
9월 베어드가 부산에 내려왔을 때 하디 가족은 자신들의 임시 거주지를 베어드 부부를 위해 개방하였다. 미국 공사의 비서로 있던 알렌의 도움으로 베어드는 일본인 마을 밖 가까운 거리에 있는 항구를 마주보는 절벽에 땅을 확보할 수 있었다. 1892년 11월 하디 부부가 원산으로 거점을 옮기고, 호주 선교사들이 초량과 부산진에 있는 내륙에 자리를 잡으면서 베어드 부부는 항구지역에 남아 있는 유일한 선교사가 되었다.
주거 환경은 참으로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1892년 2월 5일 베어드의 일기에 의하면 10피트도 안 되는 작은 방 4개에 하디 부부, 베어드 부부, 맥케이, 3명의 처녀 선교사들, 한국어 선생, 일본인 하녀가 거주했다.
부산 선교는 매일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참으로 고된 삶이었다. 낭만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베어드는 자신의 일기에서 지적한 것처럼 당시 부산, 경남 지역에는 진성 콜레라가 창궐하여 “거의 매일 이 무서운 전염병으로 죽어 가는 사람을 화장하는 연기가 이곳저곳에서 하늘로 치솟았다.” 이 어려운 시기 베어드를 곁에서 도운 사람은 서상륜, 서경조, 고윤하씨였다. 베어드는 1892년 5월 18일 서상륜과 함께 부산과 남해안 지역을 순회하면서 전도를 했으나 뚜렷한 결실이 없었다. 1892년 보고서에 기록한 것처럼 베어드는 “한인사회에 우리가 천주교와 다른 새 종교를 전하러 왔다는 사실을 알리는 일밖에 더 하지 못했다.” 서상륜이 1개월 만에 건강상의 이유로 돌아간 후 마포삼열 선교사의 권유로 1893년 4월 그의 동생 서경조가 2개 월 가량 베어드 선교사를 도왔다. 서경조는 훗날 이렇게 회고 한다:
당시 전도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서경조의 표현을 직접 빌린다면 “전도는 잘 수 업고 구경군의 욕셜과 관인들의 놀님가음만” 되었다. 서경조는 남아 달라는 베어드의 간청과 부산에 내려온 마포삼열의 간청도 뿌리치고 인천을 거쳐 소래로 돌아왔다. 복음의 불모지에서 인간적 한계를 절감한 그가 할 수 없이 선택한 길이었다. 서경조가 떠난 후 1893년 12월부터 황해도 해주 출신 고윤하가 베어드를 도와 복음을 전했다. 1892년 영선현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해 오늘날 초량교회의 전신 영선현교회를 설립하고, 호주 선교회는 범일동 좌천동을 무대로 복음을 전해 부산진교회를 설립했다.
부산에서 첫 번째 세례가 거행된 것은 1893년 여름 베어드의 사랑채에서였다. 한국인들과 선교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마펫이 낸시 로즈에게 세례를 주었고 베어드가 더글라스 에비슨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로부터 약 1년 후인 1894년 5월 13일 베어드는 사랑하는 딸 낸시 로즈를 잃었다. 사랑하는 딸이 사선을 넘고 있을 때 베어드는 어빈 박사와 함께 선교여행을 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딸의 죽음 앞에 슬픔이 복받치는 슬픔을 억제하기 힘들었던 베어드는 장례를 치른 후 그의 부친에게 인간적 약점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제 안의 본성은 매우 강한 반면, 은혜는 매우 약하다.” 그로부터 5개월 후 태어난 아들 존 애덤스는 큰 위로가 되었다.
첫 신자 멘지(B. Menzies)의 어학 선생 심상현(沈相炫), 이 도념(李道恬), 귀주(貴珠, 성 미상) 등 3명이 1894년 4월 22일 베어드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 1891년 부산선교를 시작한 그가 1894년에 가서야 첫 성인 세례를 베풀었다. 베어드가 이렇게 신중하게 세례를 베푼 것은 지원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진정한 동기를 가지고 있는지, 삶의 변화를 통해 진실된 신앙을 보여주고 있는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겠다는 결심이 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4월 16일 일기에서 베어드는 두 세 사람이 주님께서 자신의 죄를 사해주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믿음을 진심으로 고백하였음을 기술하고 있다. 이들은 조상 숭배를 포기하겠다는 의사까지 밝혔다. 첫 세례와 관련하여 1894년 5월 3일 자 베어드의 일지는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지난주일(4월 22일) 우리는 처음으로 세 명의 한국인에게 세례를 주는 기쁨을 가졌다. 그들은 부산에서 처음으로 세례 받는 사람들이다. 예배는 훌륭했고 이전에 드렸던 어떤 예배보다도 더욱 훌륭한 예비인 것 같았다. 그들은 심상형, 그리고 두 명의 노인들, 호주 숙녀들과 관계있는 이도념과 기주였다. 예배는 부산에 있는 그들의 집에서 거행되었다. 찬송, 기도, 성경을 읽고 우리에게 그와 같은 날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심씨가 처음으로 세례를 받고 그 다음에 두 여인이 세례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용기를 얻었다.”
1894년 7월 16일 서초시, 유모 곽수은이 세례를 받았다. 베어드는 단순히 복음만 전하지 않았다. 부산에 도착한 베어드 부부가 제일 먼저 한 사역은 부산 지역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학교를 시작했다. 1895년 1월에는 “한문학교”(Chinese School)가 문을 열었다. 학생들은 모두 한국인들이었지만 중국 고전 작품을 가르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학생들이 계속 불어나 1896년에 남학교 재학생이 100명이 되었고, 1897년 어빈(Bertha K. Irvin) 여사의 보고에 의하면 여자들을 대상으로 야간에 실시한 여학교에도 16명이 재학하고 있었다.그 해 4월에 부산에서 첫 기독교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여학교에 재학하는 나이 많은 여학생이 기독교 상인과 결혼한 것이다. 결혼식은 “한국의 관습과 미국의 관습이 혼합된 일종의 낯선 방식이었지만 그러나 예식의 방법은 분명히 기독교식이었다.” 세브란스(L. H. Severance), 갬블(D. B. Gamble), 호서방이라는 한 한국인의 기부금으로 1908년에 여학교 건물이 세워졌고, 1909년 가을에는 여자 중학교가 시작되었다. 1909년에 20개 초등학교에 138명의 남학생과 142명의 여학생이 재학하고 있었다.
부산은 여러 가지 점에서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확인한 곳이었다. 선교사역이 쉽지 않았으나 베어드는 자신의 가정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냄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일(the witness of the Christian home)을 통해, 사랑방전도를 통해, 문서 선교를 통해, 그리고 답사 전도 여행을 통해, 그리고 의료 사업과 교육사업을 통해 부산선교를 개척해 나갔다. 초기 사랑방은 복음전도에서 매우 중요한 수단이었다. 거의 매일 손님들이 사랑방에 찾아와 답사 여행을 하지 않을 때는 사랑방이 베어드의 모든 활동의 중심이었다. 일종의 복음의 접촉점이었다. 베어드의 일지에는 1893년 9월 11일 사랑방을 방문한 부산에서 50마일 떨어진 김해에서 온 배씨 노인, 남쪽으로 100마일 떨어진 제주도에서 온 장님, 10마일 떨어진 동래에서 온 박씨 그리고 북쪽으로 400마일 떨어진 만주 국경에 있는 함경도에서 온 사람을 만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마펫이 사용했던 방식이고 한국에 파송된 거의 모든 개척선교사들이 사용했던 방식이었다.
순회전도, 의료사역, 그리고 사경회
베어드는 부산을 거점으로 순회선교를 통해 그 주변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순회전도를 실시해 광범위하게 복음을 전했다. 답사여행을 위해 그는 1년 중 7개월을 집을 떠나 있어야 했다. 그의 일지에 담긴 그의 순회 여행의 기록은 너무도 대단했다. 매일 매일 초강행군이었다. 1893년 4월 17일부터 5월 20일까지 무려 한 달이 넘는 순회전도 여행 동안 그는 광범한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4월 17일 월요일에 동래, 4월 19일 수요일에 가지원, 20일 목요일에 밀양, 21일에 삼구리(청도), 그리고 22일 토요일에 대구에 도착하여 혼신을 다해 복음을 전했다.
“우리는 책에 대한 요청이 있기 전에는 거의 멈추지 않았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이 일은 계속되었다.”
그가 순회 선교한 지역은 광범위했다. 1896년 보고에 의하면 그 한 해 동안 여덟 번의 순회선교를 실시했는데, 이는 279일을 요하는 것으로 1,000마일이 넘는 긴 전도여행이었다. 그는 마산포, 진주, 김해, 동래, 상주, 안동, 경주, 울산, 밀양, 대구, 전주, 목포, 그리고 공주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방문했다. 이와 같은 순회전도 결과 부산 지역의 개척자 베어드는 김해, 동래, 울산, 밀양, 진주, 대구, 상주, 안동, 경주 등 경상도 지방과 전주, 목포 등 전라도 지역과 충청도 공주 지역에까지 순회전도를 실시해 이들 지역에 선교부가 설치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베어드는 노상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항구의 선원들에게도 기회가 닿는 대로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이기풍 선교사가 제주도에 파송되기 전 부산항과 제주도간의 연락을 통해 “이런 방식으로 복음은 제주도에까지 전달되었다.”
사랑방, 문서선교, 순회전도외에도 베어드는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부산에서 꼭필요한 사역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베어드는 1892년 1월 연례모임을 위해 기록한 첫 선교보고서에서 부산에 의료선교사를 임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 브라운 의사 부부가 미국으로 돌아가고 어빈 의사 부부가 1893년 부산에 도착했다. 어빈(Charles H. Irvin, 1862-1933)이 도착한 후 그가 추진한 의료 사역은 부산 지역에 너무 적절한 선교사역이었고, 또한 성공적이었다. 1901년 부산 선교부의 보고서에 의하면 지난 8년 동안 6만 명의 환자가 치료를 받았으며, 그 중 9천 명이 어린아이들이었으며, 이외에도 5,400번이나 환자들의 집을 직접 찾아가 방진을 했다. 어빙은 고명호를 조수로 훈련시키고 세브란스 의전에 진학시켜 훗날 유명한 외과의사로 만들었다.
선교 초기 전국 어디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 부산에서도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중요한 선교 정책으로 실시되었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일환이었던 사경회는 처음부터 부산에서 중요한 선교 정책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네비우스 방법의 일환으로 시행된 사경회가 부산 지역에서의 처음으로 개설된 것은 1893년이었다. 그해 12월 베어드는 그 힘든 상황에서도 최초의 훈련반을 부산에서 개최하였다. 그러나 어느 만족할만한 사경회는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896년 7월에 가서야 열렸다. 베어드 박사는 그 해 보고서에서 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7월에 애덤스와 나는 동래에 있는 그의 집에서 열흘 동안 여름성경학교를 열었다. 모두 11명이 참석했는데, 기독교인들과 이전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이 합해서 평균 6~7명이다. 매일의 강행군 속에서 우리는 마가복음을 거의 다 다루었다. 우리는 성경에서 총론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주요한 교리들 몇 가지와 기독교인의 주된 의무에 대한 몇 가지를 공부했다. 늦은 오후와 저녁에는 거리에 나가 전도했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종교적 주제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아주 유익한 공부시간으로 여겨졌다. 나중에 어떤 사람은 이때부터 공개적인 고백을 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대구선교 개척
베어드는 부산에 거점을 두면서 대구 선교부를 개척하기 위해 1895년 대구로 올라갔다. 마침 대구에 선교 거점으로 활용할 수 있는 좋은 주택이 매물로 나와 1896년 1월 그 집을 구입할 수 있었다. 1896년 베어드의 보고에 의하면 그는 1895년 북장로교 연례회가 끝난 후 다시 대구와 진주를 방문했을 때 장차 선교부를 개설할 것을 염두에 두었다가 울산이 아닌 대구에 217달러를 주고 집 한 채를 구입했던 것이다. 베어드는 대구에서 다른 집들도 구매해 줄 것을 제의받았다. 베어드가 볼 때 이것은 장차 이 지역에서는 선교에 대한 반대가 없을 것을 예견해 주는 것이었다.
진주와 상주 그리고 대구를 방문하고 장차 선교부 개척으로서 세 곳의 강점과 단점을 면밀히 살핀 베어드는 대구에 선교부를 개척하는 것이 좋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해외선교부에 알렸다. 베어드가 대구를 선교부 적격지로 선택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1896년 윌리엄 베어드는 선교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대구를 선택한 이유 여섯 가지를 들었다. 첫째, 대구는 지리적으로 경상도의 거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둘째, 경상도에서 가장 큰 도시로 인구가 많은 촌락으로 둘러 싸여 있으며, 약 7만 5천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셋째, 대구는 서울과 부산 사이의 주도로에 위치하고 있어 교통이 편리했다. 대구에서 낙동강이 10마일 가량 떨어져 있어 선편으로 부산과 대구를 오갈 수 있다. 넷째, 대구는 경상도의 도청 소재지로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있다. 다섯째, “령”이라 불리는 대규모 시장이 매년 봄과 가을에 서 상업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여섯째, 이미 거주할 집을 구입했고, 그 집을 수리하고 고치도록 허락할 정도로 특별한 반대가 없는 곳이었다.
본국 북장로교 해외 선교부도 내륙에 선교부를 개설하려는 베어드의 계획에 동정적이었다. 선교부 개설을 1년 후로 늦출 필요가 없었다. 대구에 선교부를 개설하려는 계획은 해외 선교부가 베어드의 대구 이주를 허락함으로써 구체화되었다. 베어드는 부산에 북장로교 선교부를 개설한 데 이어 대구 지역 복음화를 착수함으로써 개척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베어드는 대구와 부산을 오가며 대구선교부 개척을 추진했다. 동학혁명, 청일전쟁, 명성황후 시해라는 불안한 시대적 상황 가운데서 베어드가 대구선교부를 개척한 것이다. 베어드는 1896년 한 해를 대구 선교부 개척에 쏟았다. 서울과 개항장 밖에서 외국인들이 거주하는 것을 국법으로 금하는 상황에서 대구에 거처를 마련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였다. 게다가 1891년 한 프랑스 사제가 공격을 받고 턱수염이 뽑히는 일이 발생한 상황에서 가족들을 데리고 대구로 이주한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베어드가 왜 그토록 애착을 기울여온 부산을 떠나려고 했는지는 불확실하다. 아마도 호주빅토리아 선교회가 부산을 거점으로 활발하게 선교하고 있는 상황에서 선교지 영역을 둘러싸고 호주선교회와 마찰을 피하면서 장차 부산과 서울 사이 내륙에 새로운 선교부를 개척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1896년 지방 관리의 공식적인 허락 속에 대구에 거주하며 선교 거점을 확보한 베어드는 광범위하게 순회전도하며 대구 지역에 복음을 전했다. 그러다 베어드는 1896년 북장로교의 교육사업에 대한 책임을 맡으면서 서울로 옮겼고 1897년 부산에서 사역하던 처남 아담스(James Edward Adams)가 대구 선교부로 와서 베어드의 사역을 계승했다.
2. 새로운 사명: 평양으로의 부름과 숭실학당의 설립(1897-1916)
베어드의 대구 선교부는 예상외로 순조로웠지만 이즈음 그의 주된 관심사는 장차 이 땅에 기독교 지도자들을 육성하려는 기독교 학교였다. 1897년 그의 보고서에는 대구 선교에 대한 보고는 찾을 수 없었다. 그는 한국에 부임한 아덤스에게 부산과 대구 사역을 인계하고 새로운 비전을 설계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기독교 학교였다. 기독교 학교를 전담할 선교사가 북장로교 선교회에서는 한 명도 없었다. 이미 대학 학장을 경험하고 다년간 학교교육 경험을 축척한 베어드는 기독교학교의 필요성을 더욱 더 절감하기 시작했다. 동료 선교사 밀러(F. S. Miller)는 1896년 11월 11일 선교부에 베어드가 그 일을 맡을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우리는 학교 사역에 경험 많은 영적인 사람을 오랫동안 찾아왔고 기도해 왔습니다. 그동안 주님께서는 내내 우리들의 현장에 한 사람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베어드 씨는 미국에서 학교 사역에 경험을 가지고 있고, 그것에 대해 통찰력도 뛰어 납니다. 또한 그는 우리가 바라는, 학교를 영적인 중심지로 만드는 일에도 매우 적합하고, 복음사역에 대해 경험이 있기 때문에 복음전도자로 부름 받은 사람들을 충분히 훈련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선교 본부가 예기치 않은 베어드 씨의 사역의 변화에-우리들까지도-현명한 태도를 보여주기를 기대합니다.”
대구에서 올라온 베어드는 1897년 3월부터 5월까지 북부지역을 여행했다. 이것은 답사성격의 순회전도여행이 아니라 “평양 교회의 세례지원자들을 문답하는 것을 돕는 일”이었다.
북장로교선교회 연례회를 끝낸 베어드는 1897년 10월 2일 가족과 함께 평양으로 임지를 옮겼다. 그가 숭실학당을 설립한 것은 바로 이 때였다. 1896년 북장로교 선교회 교육자문으로 임명받은 베어드는 1897년 교육 프로그램을 완성한 후 그 이듬해부터 1915년까지 개척교육프로그램을 실행에 옮겼다. “이 프로그램에는 숭실학당과 숭실대학 개교가 포함되었다.” 베어드의 생애에서 그의 선교사역이 가장 놀랍게 결실을 맺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때였다.
숭실학당의 설립과 운영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베어드는 1896년 교육자문위원으로 임명되고 1897년 교육정책을 채택하고 그 실행을 평양에 왔지만 순회전도를 계속 감당해야 했다. 전도사역을 계속하면서 교육사업을 추진한다는 것은 힘겨운 일이었다. 베어드의 탁월한 역량은 여기서 발휘되었다. 감사하게도 최초의 일곱 명의 목사 안수자였던 방기창이 베어드의 순회선교사역의 공백을 성실하게 메꾸어 주었고, 당시 평양에 교육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평양은 교육의 도시였고, 교육에 대한 관심이 어느 곳보다 높았다. 특별히 청일전쟁 이후 복음이 놀랍게 확장되면서 1897년부터는 “기존 교회와 새로 설립되는 교회로 몰려드는 남녀 새신자들을 위한 성인교육”이 큰 문제였다. 또한 권서인, 선교사조사들, 전도자들, 학교 교사들과 전도부인들을 위한 교육도 시급한 과제였고, 30여개 이상의 교회 초등학교 졸업생들을 위한 그 이상의 교육이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었다. 하지만 필요를 충족시킬 교육 여건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이 현안에 대한 몇 가지 대안이 즉시 제시되기는 했지만 문제의 본질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계속해서 커져갔다. 선교 본부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추가할 수 있는 선교부의 예산은 없다고 답변해왔다. 확실히 절대적으로 필요한 다양한 교육기관들을 위해 땅을 구입할 돈도 건물을 지을 돈도 학교 교정을 넓힐 돈도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채택은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었다. 이 정책의 일환으로 시작된 교육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기초단계와 일주일 혹은 한 달이나 그 이상 계속되는 고등단계, 그리고 세 번째 단계로 대별되었다. 세 번째 단계는 권서인, 복음전도자, 또는 안수 받을 목회자들을 위한 신학반, 교사를 위한 교사 교육반, 교회 초등학교 졸업생이나 가능성을 충분히 인정받은 소년들을 위한 일반교육 학급이 바로 그것이었다. 평양지역의 네비우스 사경회 반을 책임 맡고 있던 베어드는 장차 대학으로 발전시킬 비전을 갖고 “정규교육과 학원사업에 전적으로 매달렸다.” 그리고 그 많은 난제들을 극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거룩한 사명감이었다. 그것은 1899년 그가 미국으로 안식년을 떠나면서 선교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교육보고서에 그대로 나타난다:
“저는 이 지역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기독교적인 교육 사업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열정도 함께 지니고 왔습니다. 교회들을 돌아보면서 이 신념은 더욱 확고해졌고 여기에 체류하면서 점점 커져갔습니다.”·
장차 학교운영과 철학에 대한 비전도 분명했다. “우리의 선교 학교들은 (1) 기독교적이고 (2) 자국어를 사용해야 하고, 그리고 (3) 철저해야 한다”는 메티어(Dr. Mateer)의 교육이념은 베어드가 볼 때 가장 이상적인 것이다. 다만 여기에 한 가지를 추가한다면 “(4) 그들의 환경에 어울리지 않는 교육은 안된다”는 것이다. 베어드가 볼 때 “종교적이고 영적인 영향력은 미션스쿨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미션스쿨의 주된 목적은 한국 백성들 가운데의 적극적인 기독교 사역을 위해 한국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기독교 정신이 숭실의 가장 중요한 설립 이념 중의 하나인 것은 당연하다.
1899년 3월 베어드는 첫 번째 안식년을 미국에 가졌다. 안식년은 그에게 영적으로 육적으로 재충전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 기간 무엇보다 의미 있었던 일은 1900년 4월 말에 뉴욕에서 열린 세계선교대회(Ecumenical Missionary Conference)에 참석한 일이었다. 이 역사적인 모임에는 그는 에비슨 부부, 밀러, 빈턴 부부, 언더우드와 조우했다. 북장로교선교회의 주요 지도자들이 모두 참석했다. 그는 동료들과의 만남, 세계적인 지도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선교에 대한 비전을 새롭게 다질 수 있었다. 4월 23일 베어드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선교 본부에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우리는 이 회의가 말할 수 없이 좋습니다. 나는 뉴욕에서 여러 곳을 구경할 수 있고, 기독교 사상과 행동에 있어서 세계적인 지도자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기쁩니다. 오늘은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와 로버트 스피어(Robert Speer)의 연설을 들었고, 어제는 존 페이턴(John G. Paton)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의 말은 모두 감격적이었지만, 로버트 스피어의 말보다는 덜했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대단한 허드슨 테일러, 로버트 스피어, 존 패턴의 강의는 베어드의 시각을 완전히 바꾸어 주었다. 선교에 대한 사명과 비전도 새롭게 다질 수 있었다. 실제로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오면서부터 베어드는 한국에서의 제 2의 선교사역을 너무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1900년부터 1916년 숭실학교 교장직을 사임할 때까지 16년간은 베어드의 한국선교 사역의 황금기였다. 그는 이 기간 특별히 평양외국인학교 설립, 숭실학당, 그리고 평양대부흥운동의 발흥과 확산 3가지 면에서 한국선교에 눈부신 업적을 남겼다.
평양 외국인학교 설립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평양외국인학교는 베어드의 작품이었다. 일찍 교육에 관심이 있던 베어드는 자녀들이 있는 평양주재 선교사들을 자신의 집에 모아놓고 자녀교육의 필요성을 논하던 중 자녀들을 위한 외국인 학교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모두 공감하였다. 안식년 기간 중 베어드는 칸사스 토페카의 제일장로교회 교인이자 공립학교 선생인 루이스 오길비(Louise Ogilvy)를 만나 한국에서의 외국인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그녀의 동의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베어드 부부가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오길비 양이 동행했다. 자녀들이 있는 스왈른 부부, 리 부부, 웰즈 부부, 베어드 부부, 그리고 노블 선교사 부부와 폴웰 선교사 부부까지 합류하여 평양외국인학교가 출발할 수 있었다. 그 좋은 공립학교 교사직을 포기하고 3년 계약으로 한국에 온 오길비가 한국에 왔다는 사실이 놀랍다.
숭실학당의 확장과 발전
이 기간 베어드가 한국선교에 남긴 가장 큰 공헌은 역시 숭실학교의 확장과 발전이다.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베어드는 “서부지역”(Western Circuit)을 전담하면서 이 지역 순회전도와 학당운영을 동시에 맡아야 했다. 베어드가 안식년을 떠난 동안 스왈른이 학당 감독을 맡았고 학생이 30명으로 증가했다. 1900 9월 25일 30명의 등록생으로 학기를 시작했다. 시기적으로도 교육에 대한 관심이 점증하고 있어 학교는 점점 더 발전했다. 학생이 늘어나면서 공간 부족으로 교사를 선교부 사랑방으로 옮겨야 했다. 숭실학교는 1901년 4월 11일에 독립된 건물을 건축했다. 그 건축은 노련한 건축가 그래함 리가 맡았다. 외관은 한국적인 모양을 지니면서 서양식의 구조를 갖춘 당시 숭실학당 교사는 1901년 한국을 방문한 브라운이 “지금까지 내가 보아 온 뛰어난 선교 건축물 중에서도 최고의 건물”이라고 예찬할 정도로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평양대부흥운동을 거치면서 숭실학당은 그 후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을 육성하는 최고의 고등교육기관으로 성장하였다. 필자가 볼 때 숭실학당은 몇 가지 면에서 한국사회와 민족 그리고 교회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첫째 연합운동이다. 당시 숭실학당은 한국교회 연합운동에 가장 이상적인 모델 가운데 하나였다. 1905년 봄 베어드는 서울에서 열린 감리교선교회 연례회의에 참석해 고등교육 분야에서 장로교와 감리교가 함께 사역할 것을 제안했다. 당시 한국에서 가장 크고 최고의 시설을 갖춘 고등교육 기관이었던 숭실대학을 장로교와 감리교가 공동으로 운영한다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었다. 그해 5명이던 이사를 북감리교 3명 북장로교 3명 합 6명으로 확대하였다. 학교 운영에 참여하면서 물리학과 화학과목을 담당했던 감리교의 베커 목사(A. L. Becker), 역사학과 학과장을 맡았던 빌링스(Bliss Billings) 목사, 그리고 수학과 학과장을 맡았던 칼 러퍼스(Carl W. Rufus) 세 사람의 감리교 선교사가 합류했고 장로교에서는 베어드 부부, 조지 매큔, 엘리 모우리(E. M. Mowry)가 전임 교수로 숭실에서 강의를 담당했다. 숭실학교는 감리교와 장로교가 공동으로 운영한다는 의미에서 영어로는 유니온 칼리지(The Union Christian College)로 불렸다. 비록 감리교가 철수하는 바람에 학교의 공동운영이 오래가지 못했지만 숭실학교는 장감의 연합을 대변하는 가장 좋은 모델이었다.
둘째 한국의 지도자 양성이다. 1900년 30명으로 시작한 숭실학당은 학생이 증가하여 재학생이 1905년에 102명으로 다시 1910년에는 498명으로 증가했다. 신사참배 문제로 숭실학당이 폐교하기 직전에는 520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었다. 다음 명단에서 보듯이 1회부터 4회까지 숭실학당의 졸업생들은 독립운동가, 상업, 목사, 농업에 이르기까지 직업이 다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