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아옴을 전제로 하는 떠남은 안정된 설렘이라고나 할까요?
그래도 이 봄에 혼자 훌쩍 떠나고 싶었습니다.
같이 길을 떠날 친구를 물색해 보았지만 시간적으로 잘 맞지도 않고 이미 다녀온 치구도 많아서 이것저것 재보다가는 결국 떠나지 못할 것 같아서 혼자 이리저리 다녀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정말 꼭 필요한 것만 챙겨서 작은 가방 하나 만들어 유럽 몇 곳을 발길 닿는대로 가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가족들은 혼자서 가도 괜찮냐고 몇 번이나 물었지만 정말 겁나지 않았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냥 돌아오지 뭐하는 심정이었으니까요. 열한 시간쯤 날아서 발 닿은 곳은 파리였습니다.
파리의 상징물인 개선문이나 에펠탑 그리고 세느강변을 돌아다니며 마침내 작품속의 인물들을 만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레마르크의 개선문에서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도 없고 만사가 미리 생각하고 짜놓은 것이고 미리 씹혀서 미리 느껴진 통조림'같다고 해서 '통조림 시대'라고 통렬히 비판한 의사 라비크의 외침을 되새기기도 했고, 사랑에 대한 집착과 광기를 보여준 퐁네프다리를 걸으면서 '퐁네프의 연인'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여행은 풍광이나 색다른 문화를 접촉하게 해주는 기회가 되는 것은 물론 제게는 작품속의 인물들과 만나게 해주는 시간이기에 잠시 작품속으로 들어가 바로 여기에서 만났고 저기에서 헤어졌고 하면서 마치 그들 곁에서 잠시 머무르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상상은 자기 나름대로의 장면을 떠올리게도 해주지만 현장을 만나면 그 주인공들의 심리와 행동이 더욱 잘 이해되는 느낌을 갖게 된다고나 할까요?
흔히들 루브르박물관이나 베르사이유궁전을 점찍고 입을 벌리며 돌아오는데 반해 저는 한 시간을 기다려 들어간 베르사이유 궁전의 아름다움보다 길거리에서 마주친 파리잔느의 멋과 향기에 취해서 프랑스문학 작품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조금 더 이해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비록 길거리에는 개똥이 널려있었지만 자유를 원해 목숨까지 바쳐 쟁취했던 그들의 일상이 공기속에 가득차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쩌다가 이곳까지 날아와 잠시나마 그 맛과 멋을 느낄 수 있음이 봄날의 꿈처럼 여겨졌으니까요.
밀라노의 두오모성당 앞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냉정과 열정 사이'에 나오는 준세이와 아오이를 생각하면서 젊은날의 상처와 회한을 떠올렸습니다. 젊음은 상실과 상처를 필수로 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치유되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때 누구나 '쥰세이'이고 '아오이'임을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화려하고도 이상하게 쓸쓸한 느낌이 드는 것은 내 눈으로 보는 성당이 아니라 작품속의 성당을 되살리기에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 느낌과 맞게 하늘은 낮게 드리워져 있었고 뾰족탑은 구름에 걸려 있어서 꼭대기 위에 있다는 황금성모상은 아득해 보였습니다.
이런 가라앉음을 깨워줄 곳은 로마였습니다. '로마의 휴일'의 오드리헵번이 그레고리 펙을 만나 아이스크림을 먹던 계단이나 트레비분수에서는 슬며서 입가에 웃음이 나왔으니까요. 전설처럼 예쁘고 귀엽던 오드리헵번이 재잘거리며 마치 그곳에 잠시나마 앉아있을 것 같은 생각에 , 잘 생긴 그레고리펙이 큰 키에 양복을 입고 그윽한 눈매를 가지고 지켜보고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주위를 두리번거리기까지 해보았습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넘쳐나는 각국의 관광객들과 바가지 상술, 그리고 염려되는 소매치기 때문에 잠시라도 경계를 멈출 수 없기 했지만 빛나는 햇빛과 작품속의 발랄하고 상큼한 기운이 제게는 느껴졌습니다. 옆에서 일본인 관광객에게 일본가이드가 말하더군요. 어쨌든 그레고리펙은 공주를 데리고 도망쳐버려야 했다고요... 서툰 일어 실력에도 그 말만은 들려오더군요. 그의 말대로 그 두 사람이 함께 도망쳤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솔직히 말해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일상은 우리들의 것이지 작품속의 인물들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폴리를 찾아 가면서 통영의 바다가 훨씬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사람이 카톡의 프로필에 나폴리섬의 정상에서 찍은 사진을 올려놓았던 것을 떠올리면서 공간은 지명으로 내게 남는 것이 아니라 추억의 부표로 남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금 생각했습니다. 시공간의 교직 속에서 내가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고 함께 누릴 수 있는 기쁨, 슬픔, 아픔도 순간일 수밖에 없다고 깨닫습니다. 지나고나서 아련함과 그리움이 동반하면 추억이고 감정이 떠올림 없이 그냥 떠오르면 기억이라지요. 추억 한 조각 정도 남아 있으면 그나마 행복한 삶이라고 자부하면서 섬을 내려왔습니다. 주변의 분주함과 소란스러움이 현실로 돌아오게 하는데 오히려 도움이 되어주었습니다. 다행스럽다고나 할까요?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이 탐욕스럽고 고집스럽게 친구의 살점을 요구했던 베니스에서는 곤돌라를 타고 돌면서 혼자 이리저리 떠도는 여행길에서 처음으로 탐욕스러운 친구라도 곁에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모든 교통수단은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시간과 돈이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이지요. 아주 현실적인 이유에서라도 누구라도 곁에 있는 사람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다는 지극히 상식적이고도 이기적인 생각에 잠시 빠졌지요. 그리고 작품속에서 캐릭터를 극대화시켜서 그렇지 누구의 마음속에라도 자리잡고 있는 이기심의 본모습을 보았다든 것이 더정확한 것 같네요.
런던의 비슷한 집들이 줄을 서있는 길거리를 걸어서 도착한 버킹검 궁전 앞에서 노여왕과 연인을 둔 찰즈왕세자 곁에서 사랑에 굶주렸던 다이애나 왕비를 떠올렸습니다. 그녀가 연인과 차를 타고 지나다가 교통사고를 낸 다리를 지나면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그녀의 운명에 그래도 한 표를 던졌습니다. 그녀의 아들인 월리암 왕자와 헤리 왕자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최소한 그녀는 가장 행복하게 마감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사고가 다행이라는 뜻이 아니라 사랑없는 자리에서 버티는 것보다 자기 삶에 적극적으로 나서려고 했다는 점에서 점수를 주고 싶다는 뜻입니다. 인생에 정답도 없고 공식도 없지만 열심히 살아보려고 했던 그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왕은 지금 궁에 없는지 영국국기가 바람에 잔잔하게 펄럭이고 있네요. 영국 역사를 간직한 여왕은 지금 어디에서 머무르고 있는 것일까요? 내가 이렇게 먼 길을 와서 그 궁을 바라보고 있는데 말이지요.....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결국 하나의 점이 되기 위해 떠난 여행이었지만 다시 점들이 모여 선을 이루는 세상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고 기실은 그럴 수 있음이 다행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여행길의 작품속에서 빠져나와 현실속에서 가족을 만나면서 잠시 꾸던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이곳은 서울의 변방 북한산 자락 아래입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나는 내 작품속의 주인공입니다. 자 이제 또 나는 내 역할에 충실하렵니다......
첫댓글 정말부럽네요 그젊은과 용기가
저도여행무척즐기지만 룸메이트없인절대불가능으로생각하는데^^
유럽을일목요연하게내추억속책갈피에잘끼워둘께요
건강하시고또더발전하세
어쩜 이렇게 매끄럽게 글이 써지는지?
참, 재주도 놀랍습니다.
패키지가 아니고 혼자서 감행한 먼 나라 여행기가
내게는 부러운 선물로 다가오네요.
우리가 생판 잘 알지 못하는 곳을 다녀와서 이렇게 여행기를 올리면 거긴가 하고 읽어 내려 갔을텐데
솔 솔 명주실처럼 풀리는 글 속에 우리 마음을 설레게하는 내용들이 있어 끝까지 따라 읽었어요.
둘이 가는 여행이 딱 좋지만 자주 떠나는 여행은 혼자서도 많은 시간을 독점 할 수 있어 좋은듯
하구요 길을 가다 보면 길 동무도 생기고 독립심이 발동하여 똑똑 해 지는듯 하지요. 불버요...
멋진 친구 부럽다. 용기가 대단해요. 작품 속 주인공에 매료된 인옥에게 나는 잠시 너에게 매료되어
한 작품을 읽은 것 같구나.매끄러운 글솜씨에 트푸한 차림에 마음끗 누리는 너의 자유스런 여행 모습 그리며
잘 읽고 감탄한다,자세히 다시 보니 43회 권인옥 아우네요. 28회 인옥 친구인줄 알고 뎃글 썼는데
43회라니 다시 한번 놀랍니다.첵임이 다 완수된 엄마
대단한 용기가 부럽습니다.
일목요연하게 서술한 여행기가 맛깔스럽고 정갈한 음식처럼 기분좋게 읽힙니다.
多讀이 마음의 양식이된 아우님의 여유가 느껴집니다.
여행기가 어쩜 이렇게 매끄럽고 깔끔한지요 글솜씨가 대단합니다 그러고 진정한 여행은 용기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멋쟁이!!!
여정을 함께 하는듯한 느낌이네요...작가이신거 맞죠!
그동안 숱하게 본 유럽 사진과 상상의 이미지와 만나 더 아름답게 느껴 지네요
후배님 용기가 부럽습니다...우리도 해 보고 싶어지네요...흐흐
선배님들. 고맙습니다. 발길 닿은대로 간 여행에 높은 점수를 주셔서. 하지만 많이 헤메고 힘들었던 점은 말하지 않아서 그렇지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고생이 고생으로 여겨지지 않고 또다른 맛으로 여겨지는 것을 보면 생물학적 나이와 다르게 아직은 젊은가 봅니다. 다른 사람은 인정하지 않을지 모르지만요....
모두들 건강하시고 떠날 수 있으실 때 떠나세요, 같이든 따로든 말이지요.
떠남은 함께함을 소중하게 여기게 만드는 덕목이 있거든요.
그것만 해도 얻음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부럽습니다..혼자서 여행을..너무 잘 봤습니다.저도 6월말 남편이랑 프랑스 이태리 갈려고 하는데, 선배님 처럼 잘 할수 있을런지요? 너무 좋았어요. 카페에 자주 들러서 좋은글 많이 많이 올려주세요. 선배님! 카페에서 자주 뵙고 싶습니다.♥♥♥
남편분이랑 가시면 걱정하실 것 없으시겠네요. 즐거운 여행 잘 다녀오세요 . 많은 것 보려고 하시기보다 발길닿는 곳을 여유있게 즐기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