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는 오후 5시 출발하여 서울 북쪽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춘천으로 향했다
춘천 103보란다 103보 눈이 많이 왔다
1982년 겨울... 엄청난 눈이 103보에 내렸다
번지없이 의지없이 팔려간 곳 103보
눈이 동구란 신병들 호기심과 불안감에 상대방만을 바라보고
기간병의 기침소리만으로도 오금이 절리는 시절
우린 저 눈을 치워야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닭고기 메뉴 식판을 저 눈으로 닦는데 힘들었던 기억..
수많은 신병들이 이렇게 스쳐갔었구나
징그렇게 이 노래가 연병장을 깔아내리던 그 시절...

3일을 자고 50트럭에 사려간 곳은 선착장
어딘지 왜가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전 짐짝에 불과했다 그 당시엔...
앞에는 소양강과 배가 대기하고 있었다
쭈그리고 쭈그리고 앞으로 밀착!
조그만 배 안에 몇명이 탄지도 모르게 배를
산을 깍아내린 황량한 소양강가를 솥살같이 달린다
4시간 달렸을까? 인제군 12사단 후송차량이 대기중이다
거기서 12사단 보충대로 갔다
아! 내일은 또 어디로 팔려갈 것인가?
보충대를 거칠때마다 동기들과 헤어진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 간 나
2살이하 동생들이지만 그들과 막말했다
그러나 그게 좋았다
당장 이 공포를 의지할 곳은 그들 뿐이다
12사단 보중대엔 논산 내 동기는 이제 나를 포함 3명이다
모두들 흩어졌다 내리는 저 눈처럼
다들 잘 있는지
부산출신 김종화 광주출신 김주영 그리고 나

어버지
지금 아버지는 나 없이 어떻게 가계를 운영하실까?
어머닌 건강하실까?
동생들은.....
친구들은....
논산 동기들도 잘 있는지

주여 제가 왜 여기 있나이까?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도 없이 팔려온 이곳 인제군
늙으신 아버지. 노가다하시는 아버지
평생을 아프신 어머니... 어린 동생들
그들을 어찌하고 주여 나를 이곳에 버리셨나이까?
눈이 눈이 나린다
이유도 목적도 없이 소복소복 쌓인다 내 가슴에
1982년 12월 25일
저녁을 먹고 집합명령이다
50트럭에 실려 간곳은 12사단 교회
그레 하늘엔 축복 땅에 평화
크리스마스였다
이곳도 사람이 사는 곳인가
크리스마스 빵도 먹어보고

이제 동기와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부산 김종화 이진구 연세대 출신인데
헤어져 아쉽고, 광주 김주영 이진구 너무나 좋은 친구
그들은 51연대로 가고 난 37연대로 갔다
인제가면 언제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
인제군 서화면 천도리

저 소양강을 건너온지 일주일만에 천도리에 왔다
전라도 광주놈이 서화면 천도리를 어디 듣기나 했으랴만
여기 귀신이 되어 몸성히 제대하는 것이 효도라 생각하니
애착이 갔다
흙을 혀로 핦고 싶을 정도로....
누가 날 알아주는 이 없고 인정해주는 이 없다
스스로 개척하고 스스로 지키고
그래서
그래서
무사히 집으로 가야한다
이제 나 혼자다
이것이 대학중에 고시를 합격하지 못한 죄값이다
이 산중 한 가운데서 모든 것을 당당히 맞서야 한다
몸성하게

경찰을 항하여 길거리에서 혼자 맞서는
저 사람처럼 그래야 한다
나도 생각하면 고교때 박정희와
그런 적이 있지 얺은가 말이다

서화면 천도리 연대보충대에서 곧바로 예하부대로 갔다
전방으로 더 들어가는 모양이다
아래 사진 우측이 실제로 내가 근무했던 부대사진이다
30년이 지난 지금 자갈 길이 포장된 것 외는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정면으로 보이는 산이 이른바 상황발생시 거점진지다
우린 비상시에 저 곳을 점령하여 목진지를 구축하고
적(?)을 기다리는 것이 우리 부대의 처음이자 마지막 임무다
훼바가 난 무언지 모른다
하여튼 우리부대는 훼바부대였다
여기서 난 둥지를 틀고, 국방부시계가 돌아가기만 바랬다

운이 좋았을까?
내무반 생황도 만족은 아닐지라도 좋았다
당시 나보다 1개월 고참 김태동(충청도) 일병이 좋았고
박종세 대대장이 너무나 날 편히 대해주었다
이 분은 육사출신인데 불란서 대사 무관출신으로 안다
나 제대무렵 육군본부에서 가셨는데 근무중 일개 졸개 병인 나에게
안부를 무를 정도로 나를 아끼신 분이셨다
이런 큰 배려에도 난 30년 지난 지금도 그분을 모른체하니
내가 지금 그 죄를 또 받는가 보다
지금은 미안해서도 그 분을 뵙지 못하겠다
부디 건강하시고 애들과 함께 행복하시길...

봄이되자 우린 전방으로 부대교체되어 들어갔다
4월로 기억되는데... 눈이 내려 무릎까지 빠졌다
그 먼길을 도보로 기어갔는데
아직 졸병이라서 어떻게 행군했는지 기억이 안난다
터지고 까지고 찢어지고 갔다는 것 외엔....
그러나 가야한다
반드시 가야한다
고향의 부모님을 뵐려면 가야한다
남들보다 먼저 가야한다

향로봉,사천리 1031고지 통문 수색 매복 GP GOP
뭐 이런 것 수십번 들은 단어다
중국 민항기... 아옹산사태 다 내 근무때 발생했다
얼마나 전방이 난리법석이었는지 모른다
화장실에서 일보다가 생긴 일 2가지
10월인가? 노천화장실에서 바라보는 북녘의 산하는 너무나 평화로웠다
협곡건너 북한의모습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계곡 거너 북측경사면에 단풍이 얼마나 빨겠는지
빨간물이 뚝 뚝 떨어지고 있었다
파란 하늘, 검정 계곡 거기에 빨간 단풍
내가 언제 이 모습을 다시 볼까하면서 일을 다보고
신문지 찍어 마무리 하는 순간
난 어디서 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25회 사시 합격자 발표가 있었고 거기에 당시 나와 같이 공부했던
사람들이 대거 합격한 것이다
난 너무나 돌아갈 수 없는 먼 곳에서 이들 명단을 보았다
가을산이 너무 아름다웠다고 기억된다
나머지 하나도 노천화장실에서 일어난 일이다
일보는데 어디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최정방에서 이런 소리는 당장 사격이다
그러난 난 총이없다
잠시 내무반에서 일보러 나온 중에 알수없는 생명체와 만난것이다
소리는 계속적으로 가까이 오면서 들렸다
모든 생리현상이 중단되고 모든 에너지와 신경을 그 소리에 집중되었다
난 회후에 조치할 자세로 준비하였는데
나에게 오는 것은 고슴도치였다
화장실 옆 쓰레기통에 짠밥을 먹으려고 온 고슴도치
당시 우리초소 인근에 고슴도치가 많았디

수색과 매복
내 근무중에 탈영병이 북측으로 갔다
당장 퇴주로를 차단하고 작전을 하였는데
연대 정보장교(소령)님과 1대대 수명이 지뢰를 밟아 전사한 일이 벌어졌다
화랑연병장에 우린 그들을 보냈다
더우기 장교의 몸으로 솔선수범하신 연대장교님 생전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우러 전사자중에 이병들이 많아서 괴로웠다
그들 부모님들은 오열하셨다
지금같아선 무슨일도 일어날 지경이지만
당시엔 상상도 못할 일이다
탈북한 자의 육성이 작전 14일 만에 북측 확성기에서 흘러나왔다
김** , 홍**,곽** 잘 있느냐 난 김일성 수령님이 주신 이밥과 소고기국 먹고
지금 북에서 잘 지내고 있다
미치고 환장할 소리를 들으며 작전을 마쳤다
다시금 전사한 분들에게 머리숙여 조의를 보낸다

아래서 진지까지 갈려면 운해 2곳정도는 거쳐할 곳도 있었다
전방은 조용하지 않았다
밤새도록 쌍방간에 심리전을 계속되었다
전단지와 확성기소리..
그 속에 1983년은 지나가고 있었다
방미 올가을엔... 혜은이 독백 아측에서는 유독 이 노래를 지겹도록 초소에 깔려주었다
'감겨진 두눈엔 눈물만 흘려 내리네...아아"
밤중엔 듣는 이 곡은 계곡 사이 사이 퍼지기 전에
근무자 가슴속에 누구나 파고 들었을 것이다

사진이 낭만스럽다
사진 너머 저쪽은 동해안이다
아마도 내가 근무한 곳이 휴전선으로 치자면 최북단일 것이다

다 아시겠지만 크레모아가 설치된 철조망..
우린 이철조망 전진작업도 했었다
남과북이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전진배치하니
쌍방간에 수백미터되는 GP도 있단다
이곳에서는 돈 쓸 일이 없다
PX가 없기 때문이다 가끔 이동용 PX가 있긴하나
당시에도 전방부대 1종배급은 넉넉하였다
라면 건빵은 물론이고 후방에서 위문편지나
위로품은 상당히 많은 걸로 기억된다
나 이곳에서 봉급을 저축하여 8만원정도 모았다
당시 병들 급여가 얼마인지 모른다
재대하면서 집에 9만원을 드렸으니
아마도 급여가 몇천원 아닐련지

첫 유가를 나왔다
동료에게 양보를 하다보니 17개월만에 첫 휴가
고지에서 연대본부까지 혼자 걸어서 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먼거리를 날아서 왔다
원래 전방에서 단독행동은 철저히 금지되었다
그러나 모범적인 행동을 해서인지
연대 인사장교는 차량지원이 안되니 혼자 오란다
1,000되는 고지를 단숨에 달려서 연대본부로 왔다
세상의 한과 슬픔과 비운을 지고
송정리 역을 출발한지 17개월
내가 뛰니 노루도 뛰었다
주변의 수풀들은 조용하게 우로봐를 하였다
나의 첫휴가를 축하라도 하듯이
중간 중간 계곳이 물이 넘쳐 어려워도 단숨에 5M 계곡을 뛰어버렸다
잘못되면 휴가는 상상도 못할 일
그래도 고향에 간다는 일념으로 뛰어내란 그 시절
고향에 와서 부모님께 큰 절 올리니 첫날부터
당장 부대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왜 일까?
복무중 3번의 휴가를 받았는데 내 감정이 같았다
천신만고 끝에 집에 휴가를 나왔는데
다음날부터 어서 귀대하고 싶었다
이유는 하나
어서 가야만이 제대하기 때문이다
여기가 마지막 종착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대라도 더 맞아야만 재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갔다
마땅히 친구들도 없어서 그렇겠지만
미지근한 휴가는 싫었다
어머님은 떡과 김치를 동료를 위해서 주시곤 했다
당시 사제김치는 최고 인기였다
1년 반인가 근무하고 우린 다시 훼바로 나왔다
원래 1년인데 왜 그랬는지 모른다
해가 바뀌고 계절이 바꿔 온 훼바는 그대로였다
부대 내무반도 그대로....
마을도 그대로,,
바뀐 것은 다방 아가씨였으리라
난 병이여서 다방한 번 못가보았는데, 하사관 이상은
부대앞 다방을 많이 간 걸로 안다

부대 뒷쪽의 민가다
우리 부대는 이 민가까지 아침에 구보하도 했다
사실 우리부대 보다 훨씬 더 전방에 펀치볼이라는 마을이 있어
주민들은 이곳까지 경작한 걸로 안다
난 펀지볼을 가본 적은 없다
다만 멀리서 보았을 뿐.

37연대 1대대 근무자중에서도 이곳이 어딘지 모른 사람이 많은 것이다
죄측이 항상 작전하면 기어 올라가던 거점진다로 가는 길이다
당시엔 37R 1BN 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는 아마 영어 약자인 모양이다
이 사진은 안 올려다가 마지막으로 올린다
소양강 상류, 소양강 원류다
37연대 병사들은 12사단 보충대에서 연대로 처음으로 올때나
휴가 받아 고향 갈때나
제대하고 집에 갈때나 반드시 이 광경을 볼것이다
희망과 기대 포기와 한숨이 교차하는 이곳
구불구불 급경사도로... 자욱한 하얀먼지
몇몇의 주민과 말없는 푸른 제복의 군상들...
그 버스 안에서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어서 어서 개구리복을 입기를 학수고대하면서 지나쳤을 이 길이
지금은 너무나 그립다

전역이다
이 노래를 들은지 꼬박 2년만에 전역이다
난 교련혜택을 입어 6개월 면제를 받았다
동료전우들에게 지금도 너무 미안하다
하지만 병장 달자마자 고참행세도 못하고 나올려니 억울도 하다
그러나 앞에는 고향의 부모님과 동생들이 있지 않은가?
미안한 것은 그 무렵 부대 유격훈련이 있엇는데 전역시기와 같아서
열외한 것이다.
나와같이 단국대 졸업생 김기태도 같이 전역했다
그도 6개월 수혜자인데 4년 후 (1988년) 신림동 고시촌에서 만났다
반갑기 보다는 쑥스러웠다
그는 아직 공부중이었고 나는 모 공사에 취직을 하였지만
그를 본 내 마음은 편치않았다. 아마 모처에서 판사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향토사단 신고식에 1982.9.27 군번들 상당수가 눈에 띄었다
간단한 전역식을 끝내고 부대앞 다방에서 차한잔 마시고 헤어졌다
그리고 지금껏 만나지 못했다
왜였을까?
내가 문제가 많은 놈이다
마지막으로 12사단가를 올려보고 싶다
나의 눈물과 한과 슬픔의 12사단가
그러나 이젠 자랑스럽게 부르고 싶다
듣고싶으신 분이 있다면 현재곡을 정지시키고
아래 곡만 들으세요
(현제는 2곡이 동시에 흐르고 있습니다)
이용 서울
12사단가
12사단가.mp3
난 전역 후 바로 한국토지공사(지금은 주택공사와 합병 LH공사)에 입사했다
첫 직장에서 많은 혜택과 대우를 받았지만 고시를 재도전하기 위하여~~~ 그렇지만 실패...
법원 일반직에 1년근무하다가 당시 유행이던 KTA(지금은 KT "한국통신")에 4급으로 입사
전남본부에서 10년 근무후 징계당하고 퇴직했다
진실을 알고 진실을 아는 것이 파면사유였고, 이것이 내 운명으로 받아들여지는 순간이다
모든 것이 허위요 날조임에도 우리나라 정치계 법조계 언론계는 돈과 성 앞에서는 진실이 허위로
허위가 진실로 둔갑하는 것이었다...
오늘 나의 군생활을 되세김하면서 전역신고 직후 내 일기장에 적힌 나의 신조를 50이 넘어 읊조려 본다
'실수는 두번 다시 하지 않는다"
김한수, 이병열,김기태 이완체,백두현,김강한,윤창균... 한현우,이강연,백창학 30년이 되어도 줄줄 그들이 이름이
기억나는 것은 분명 내 기억력이 좋아서만은 아닐 것이다
모두에게 건강과 평화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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