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문 밖. 옛절집의 주초와 장대석
비신과 이수가 멸실된 비좌. 복련이 곱고 안상에는 귀꽃이 소담스럽다.
경내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53계단을 지나야하며 그 정점에 천왕문이 자리했다. 천왕문까지 53계단. 화엄경 입법계품의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찾아가는 수행과정을 표현한 듯 하다.
우리나라 사찰에서 가장 일반적인 배치의 사천왕이 모셔져 있다. 동방 지국천. 남방 증장천. 원래 사천왕의 뒤에는 1904년 3월에 화남 재기 스님이 증명이 되고 금상 유성 스님이 화주가 되어 조성한 사천왕 탱화가 봉안되어 있었는데, 모두 4점이지만 3점이 남아 보관상 별도로 봉안되고 있다. 사천왕탱화가 조성되던 무렵에는 이 전각을 천왕전이라 하여 한층 격을 높여 불렀었다고 한다.
서방 광목천. 북방 다문천. 사천왕상은 1870년 설두대사가 불갑사를 중창하면서 전북 무장의 연기사로부터 목선 4척을 동원하여 옮겨온 것인데, 여기에 하나의 재미있는 설화가 전한다. 어느 날 설두대사의 꿈속에 사천왕이 비를 맞은 모습으로 나타나 지붕을 씌어주면 불법승을 잘 보호하겠다고 하자 스님이 그대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에 실제로 여러 번의 화재 위험을 무사히 넘겼다고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만세루. 평지 가람 전형의 루대이다. 누하가 낮아 누하진입은 어렵고 우회하여 대웅전 중정으로 들어가야한다. 덤벙주초에 누하주를 놓고 위에 귀틀을 짜서 상층 마루바닥을 형성하였다. 근자에 복원한 것 같다. 대웅전 영역은 口자형으로 만세루 일광당 명부전 백운정이 자리잡고 있다. 대웅전 뒷쪽은 향로전 팔상전 칠성각을 배치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겹처마 팔작집으로 보물 제830호로 지정되었다. 안에는 고주를 사용하여 후불벽을 조성하고 불단과 닫집을 상하로 배치하였다. 불단 위에는 목조대좌를 놓고 삼계불(보물 제1377호)이 봉안되어 있다.일반적인 불상 배치와 약간 다르게 불갑사 대웅전 건물은 서향한 반면 삼계불은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괘불지주. 괘불지주에는 강희 49년(1710년)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불갑사에는 1710년경에 조성된 큰 괘불이 있었으나, 용천사에 가져가서 사용하던 중에 한국동란시에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괘불지주 역시 다른 사찰과 달리 석주가 방향을 틀고 서 있다. 괘불탱을 튼튼하게 고정하려던 의도이었는지, 다른 곳에서 옮겨 오면서 실수하여 세웠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대웅전 용마루의 조형물은 보탑(寶塔)으로 칭해진다. 집 모양의 가형토기와 사람얼굴을 닮은 독특한 모습이다. 자료에 의하면 사리함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사리는 도난당하고 사리탑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현재의 조형물은 새롭게 조성하였다고 한다. 불상 좌향과 더불어 남방불교의 특징이라고 하지만 나의 지식 범위 밖의 영역이다.
금산사 대장전에 설치된 조형물의 설명을 보자."『금산사 사적기』에 따르면, 원래 대장전은 진표율사가 미륵전을 짓고, 이를 장엄하는 정중목탑(庭中木塔)으로서 팔각원당형으로 조성했던 건물이라고 한다. 당시의 양식은 탑과 같은 산개형의 층옥으로서 맨 꼭대기 옥개에는 솥뚜껑 모양의 철개를 덮고, 다시 그 위에 불꽃 모양의 석조 보주를 올렸다."
밀양 표충사 대광전 보탑의 상징성을 노스님에게 여쭈었더니 " 그 거 피뢰침이야.피뢰침!!!" 이라고 말씀하셔서 한바탕 웃었던 기억도 있다. 안동 봉정사 대웅전 용마루의 청기와는 " 앨자베스 영국여왕의 수기가 적힌 기와를 올렸다고" 자랑스럽게 설명하는 해설사에게 열 받았던 지난날도 있었다. 요즈음 도심사찰에서 화려하게 보탑을 설치하는 것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불사를 위한 불사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어칸문 솟을꽃창살의 연꽃과 국화. 협칸은 좌우 대칭이다. 불상 조성 방향으로 보면 신도들의 출입문이 될 것 같은데. 실제로 그렇게 이용되는지 모르겠다.
측면의 빗살문과 금강저살문(?). 흔치 않은 배치이다. 건물 좌향으로는 측면이지만 불상으로 보면 어칸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스님들의 출입문이다. 실제로 활용 여부는 확인 못 했다.
내부에서 바라본 측면 창살
외부 창살 모습
우물천장
공포는 외2출목, 내3삼출목으로 짜 올렸다. 어칸 좌우 기둥에는 안초공을 끼웠는데 용 형상을 새긴 부재이다. 외부로는 용두가, 내부로는 용꼬리가 드러나 있다.
학.매화.포도 대웅전 내부에는 포벽과 측벽은 다수의 벽화가 장엄되어 있는데, 그 중 눈길을 끄는 것은 까치 및 학이 그려진 벽화이다. 이 벽화는 현재에는 신중탱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기도 한다.
대웅전을 세울 당시 벽화를 그리던 화가가 누구라도 절대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하였는데 궁금증을 참지 못한 한 사람이 안을 몰래 들여다보자 화사(畵師)는 피를 흘리며 죽었다. 그리고는 그 피가 까치로 변하여 날아갔다고 한다. 대웅전 건축 당시 그 시대에 내로라 하는 조각가가 찾아와 스스로 자원하여 벽화와 단청을 맡겠다고 했다. 그런데 거사가 ‘일을 하는 100일 동안 절대로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부탁하였는데, 99일 째 되는 날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한 공양주가 안을 들여다보자 까치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다 깜짝 놀라며 날아갔다 한다. 그러한 연유로 대웅전 벽에 재미난 까치 그림(睡鵲畵)이 그려져 있다.
보궁형 닫집
남향한 목조삼계불. 아미타.석가.약사여래. 문화재청 자료에는 삼세불로 명기했지만 오류이다. 문화재청 자료를 가져온다. "석가모니불은 주존불로서 삼불 가운데 가장 크고 건장한 신체에 넓은 무릎을 하여 안정되어 보인다. 육계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머리에는 정상계주와 중앙계주를 큼직하게 묘사하였으며 네모꼴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엿보인다. 두 귀는 길어서 어깨까지 늘어졌고, 약간 굵어진 목에는 세 개의 주름인 삼도가 뚜렷하다. 옷은 양어깨를 모두 덮고 있는 형식으로 오른팔을 드러냈으며, 옷주름은 두 다리 위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손 모양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데, 양손 모두 마치 실제 인물의 손처럼 표현하여 사실성이 돋보인다.
약사불과 아미타불 또한 불명확한 육계, 팽창된 얼굴, 분명한 이목구비, 부피감 있고 편안한 자세, 사실적으로 표현된 양 손,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옷주름 등의 세부 표현에서 본존인 석가모니불과 공통적인 특징을 보인다. 다만, 석가모니불에 비하여 크기가 다소 작아지고 양어깨를 모두 덮은 옷에 오른팔을 드러내지 않고 아미타인의 손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불상 안에서 발견된 불상 조성기에 의하여 1635년 무염(無染)스님을 비롯한 승일·도우·성수 등 10인의 화승들에 의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무염비구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초기의 것으로, 전라도·충청도·강원도지역을 거쳐 폭 넓게 활약하던 무염일파의 작품과 경향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기준이 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자료에는 "불전은 대웅전이며 북방불교의 목조불전 건축양식과 남방불교의 불단 배치방식이 혼합되어 나타나는 독특한 구조와 양식을 갖추고 있다"라고 했지만 일천한 지식으로는 이해 불가다. 다만 건물의 좌향과 불상의 좌향. 용마루의 탑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배치는 영주 부석사, 봉화 천성사에도 나타난다. 두 사찰의 경우에는 서방 극락정토에 상주하고 계시는 아미타불이 동쪽을 향하고 있다. 또한 공주 마곡사 대광보전에도 보인다. 부석사처럼 종교적 이유가 아니라, 임진왜란 이후 미처 모든 전각이 복원되지 못 한 상태에서 불보살을 한 전각에 모신 후 예배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전해진다. 남방불교의 특징이라면 해남 미황사. 김해 장유사를 비롯 남방불교 도래설이 전해오는 금당에도 보여야 할텐데.
후벽 백의 관음
불단 기둥의 서수. 무슨 동물일까? 부안 내소사에는 숭어를 물고 있는 용이 보이고, 구례 천은사 기둥에는 수달이 양기둥에 오르내리고 있다. 자료에는 쥐라고 설명하였다. 두 마리 쥐는 밤낮을 상징하여 세월이 덧없이 빠르고 무상하니 끊임없이 정진하라는 암시라고 한다.
아마 『빈두설경賓頭設經』에 나오는<안수전등> 이라는 비유담의 쥐를 말하는 것 같다. 창원 성주사에 벽화로 그려진 것을 본 기억이 있다.
안수정등(岸樹井藤)
건장한 사나이가 한없이 넓은 언덕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평화로운 듯하면서도 묘한 분위기가 풍기는 언덕이었습니다.쉬엄쉬엄 꽃도 구경하고 벌레들도 쫓고 언덕의풍경도 감상하며 거닐고 있는데, 멀리 사방팔방으로부터 사나운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서서히 좁혀들어오는 불길을 보면서 어떻게 벗어날까를 심각하게 고심하고 있는데, 불현듯 미친 코끼리 한 마리가 나타나 사납게 덤벼드는 것이었습니다.먼 곳의 불길보다는 미친 코끼리를 피하기에 급급했던 사나이는 황급히 도망을 쳤고, 눈앞에 큰 나무가 나타나자 죽을힘을 다해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코끼리는 다른 곳으로 떠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고, 계속 나무 밑을 맴돌며 그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무에 의지하여 한숨을 돌리기는 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배가 고프고 갈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탈출할 길을 찾았고, 마침 나무에 얽혀 있는 칡덩굴이 아래쪽의 크고 깊은 우물로 드리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사나이는 위험을 무릅쓰고 칡덩굴에 매달렸고, 차츰 아래로 내려가 우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우물 속이라 하여 평화롭지는 않았습니다. 우물 밑바닥에는 용이 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이무기 세 마리가 떨어지면 잡아먹겠다며 큰 입을 벌리고 있었고, 우물가에는 독사 네 마리가 혀를 날름거리며 잔뜩 노려보고 있었습니다.사나이는 식은 땀을 흘리며 목숨 줄인 칡덩굴에 꽉 매달려 버텼지만, 차츰 힘은 빠지고 손은 저려 왔습니다.
그나마 빨리 떨어지라고 우물 위쪽에서는 흰 쥐와 검은 쥐가 교대로 칡덩굴을 조금씩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으니..." 죽었구나! " 생각하며 칡덩굴만 잡고 있는데, 갑자기 안으로 액체 한 방울이 들어왔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나무 구멍에 지어 놓은 벌집으로부터 꿀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달디 단 그 꿀은 모든 것을 잊게 했습니다. 달콤한 한두 방울의 꿀을 받아먹는 재미에 사나이는 더 이상 탈출할 생각을 하지 않고, 인생의 괴로움과 죽음의 두려움을 모두 잊은 채 칡덩굴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위험을 만난 사람은 인생, 넓은 언덕은 무명장야無明長夜, 미친 코끼리는 우리의 업연처(業緣處) 또는 무상, 등나무 줄기는 생명줄, 우물은 생사, 세마리 이무기는 삼독(탐,진,치) 네마리 독사는 사대(지,수,화,풍), 흰 쥐와 검은 쥐는 낮과 밤, 벌은 헛된 생각, 꿀은 오욕(식욕,수면욕,성욕,재물욕,명예욕), 불은 늙고 병들어 죽음을 각각 비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 상징성을 배제하고 단지 바라보는 재미도 있다. 용과 쥐가 숨바꼭질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은 없는가? 장엄하고 엄숙한 금당을 조성하던 도편수는 은근히 멋을 부려 분위기 반전을 시도했을 것이다. 그러한 발상에서 나오는 해학적인 시각이 우리선조들의 안목이다. 참!!! 내소사 대웅전의 조형물은 인간의 번뇌와 탐진치를 멸하라는 상징이며, 천은사 수달은 화기에 약한 천은사를 비보하기 위한 비보책이다.
대웅전 중앙불단 뒤쪽 왼편에 봉안되어 있다. ‘사자산 봉림사(獅子山 鳳林寺) 대종’ 명문이 있는 1702년(숙종 28)에 조성된 범종이다. 범종은 비교적 작은 규모로 상대와 하대 장식이 없이 단순한 형태를 보인다. 위로부터 용뉴의 용은 가늘게 발을 세워 음통과 종을 지지하고 있으며, 그 아래로는 상대(띠장식)없이 2줄의 양각선을 두르고 원좌에 범자문 8개를 돌렸다. 그 아래 종신에는 당좌(撞座) 대신 불패를 장식하여 “성상삼전수만세(聖上三殿壽萬歲)”라 쓰고, 그 좌우로 합장하는 보살상을, 그 아래로 화기를 새겼다
각진국사 비. 각진국사(覺眞國師)는 고려 공민왕대에 불갑사를 중창한 인물로, 시호는 각진 탑호를 자운이다. 각진국사비 자운탑은 고려후기 1355년 제작된 것으로 귀부와 비신은 있지만 옥개석이 없는 상태로 비신위에 2개의 원형석이 나란히 올려져 있다. 탑신에는 횡서로 ‘각진국사’라 쓰여 있고 다른 내용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며, 수리한 흔적이 보인다. 귀부는 형식회된 모습으로 정방형에 가깝게 조각되었다. 대웅전 남측면 언덕에 봉안되어 있다. 본래 위치가 아닐 것이다.
향로전. 거북이 장식물. 출입문이 아니다. 답사객들에게는 익숙한 모습 아닌가? 그렇다 충주 미륵사지서 새끼를 등에 업은 거북을 보았을 것이다. 의미에는 관심이 없다. 거북이 엉금엄금 기어갈 듯하여 한참이나 머물면서 시간 가는 줄을 몰랐었다.
일광당. 당초에는 선당(禪堂) 용도의 건물이었으나 지금은 승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익공과 민도리를 섞어 쓴 맞배집이다. 주간에는 방형 화반을 1구씩 설이하였다. 구조는 5량가를 결구하였다. 울퉁불퉁 휜 부재를 곧게 다듬지 않고 사용한 미감이 돋보인다. 내부는 방과 부엌, 툇마루로 나뉘어 있는데 좌측 2칸은 부엌이며 우측 3칸은 방을 들이고 배면쪽에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처마는 서까래와 부연을 쓴 겹처마이며 한식기와를 올려 맞배지붕을 만들고 좌우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불갑사 대법고는 1741년에 만들어진 것으로서 길이 240㎝, 울림판 직경 200㎝, 높이 220㎝의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큰북이다. 이것은 오래된 법고 가운데에서는 가장 크다고 한다.
백운당은 종무소로 사용하는 건물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이며 민도리 맞배집으로 구조는 간단히 5량가로 짰다. 무각선원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익공계 팔작집이다. 염화실은 정면 4칸, 측면 2칸에 1칸× 1칸을 덧붙인 평면으로 익공과 민도리를 섞어 짠 맞배집이다. 구조는 5량가를 짰다.
세심정
칠성각.팔상전
대웅전 우측에 자리하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맞배집이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구조는 간결한 5량가를 결구하였다. 본래 대웅전 뒤편의 왼쪽에 있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인데, 각진 국사가 중창하였던 고려시대에는 이 자리에 승당으로 쓰이던 적묵당이 있었다. 명부전 내부은 뒷벽에 붙여서 ㄷ자형 불단을 두고 존상을 안치하였다. 중앙 불단에는 지장삼존상을 봉안하였고, 그 좌우에는 명부세계에서 지장보살을 도와 사자를 심판한다는 시왕상 10위와 판관, 녹사, 사자, 인왕 등을 각각 2위씩 모셨다.
시왕상은 1654년(효종 5)에 조성된 작품으로서 조선후기 목조조각의 양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례이다. 그리고 1654년에 조성된 지장탱, 조선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업경대, 목조 동자상 등이 내부를 가득 메우고 있었으나 보관의 어려움 때문에 지금은 별도로 관리하고 있다.
명부전 내부 중앙불단에는 지장삼존상을 봉안하였고, 명부세계에서 지장보살을 도와 사자(死者)를 심판한다는 시왕상(十王像) 10位와 판관, 녹사, 사자, 인왕 등을 각각 2位씩 모셨다. 그 중 시왕상은 1654년(효종 5)에 조성된 작품으로서 조선후기 목조조각의 양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례이다. 중앙 지장보살은 양감 넘치는 얼굴에 승문형 민머리를 하고 있으며, 눈은 가늘고 길게 아래쪽을 내려보고 있으며 살짝 웃는 인상을 풍긴다.
이마에는 백호가 목에는 삼도가 있으며, 법의는 두어깨를 모두 덮는 통견식으로 걸치고, 내의는 가슴부분에서 띠로 돌려 고정하였는데 띠 위부분의 내의가 꽃잎모양으로 주름져 있다. 옷주름은 어깨를 타고 배 부분까지 자연스럽게 흘러 두 무릎 사이에서 부채꼴로 퍼지게 묘사하였고, 수인은 아미타구품인을 결하고 있다. 지장보살의 좌우에는 협시인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시립하고 있다.
명부전 벽화. 칠여래불
명부전 벽화. 지옥도
참식나무...문화재청
천연기념물 112호 불갑사 참식나무 자생북한지 (靈光 佛甲寺 참식나무 自生北限地). 참식나무는 녹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일본, 대만, 중국 등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울릉도와 남쪽의 따뜻한 지역에서 자라고 있다. 영광 불갑면의 참식나무 자생 북한지대는 불갑사 절 뒤편 산 중턱쯤에 있다. 나무들의 높이는 대략 6m 내외이며 군데군데 모여서 자란다. 주변에는 동백나무, 서어나무, 느티나무 등이 자란다.
전설에 의하면, 삼국시대에 이 절에 있던 정운이라는 스님이 인도로 유학을 떠나 공부하던 중 인도의 공주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된 인도의 국왕은 정운 스님을 인도에서 떠나게 했다. 정운 스님과의 이별을 슬퍼한 공주는 두 사람이 만나던 곳의 나무 열매를 따서 주었고, 스님이 그 열매를 가져와 심었는데 그것이 자라서 참식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이 자생지의 나무들은 그 나무의 씨앗들이 퍼져 자란 것이라고 전해진다.
영광 불갑면의 참식나무 자생 북한지대는 참식나무가 자랄 수 있는 가장 북쪽 지역으로 식물분포학적 연구가치가 높고, 인도와 우리나라의 교류관계를 알려주는 문화적 가치도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꽃과 잎이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꽃 상사화 군락, 정운스님과 인도 공주의 슬픈 전설을 간직한 참식나무 군락, 나에게 봄날의 불갑사는그렇게 다가왔다. 애별리고愛別離苦 라고 했지만 회자정리會者定離요 거자필반去者必返이라 하지 않았던가.
상사화 - 이해인
아직 한번도 당신을 직접 뵙진 못했군요
기다림이 얼마나 가슴 아픈일인가를 기다려 보지 못한 이들은 잘 모릅니다.
좋아하면서도 만나지 못하고 서로 어긋나는 안타까움을 어긋나보지 않은 이들은 잘 모릅니다 .
날마다 그리움으로 길어진 꽃술 내 분홍빛 애틋한 사랑은 언제까지 홀로여야 할까요?
침묵속에서 나는 당신께 말하는 법을 배웠고 어둠 속에서 위로 없이도 신뢰하는 법을 익혀왔습니다 .
죽어서라도 당신을 만나야지요 사랑은 죽음보다 강함을 오늘은 어제보다 더욱 믿으니까요 .
2012.03.13
***한국전통사찰관광정보.문화재청.불갑사홈페이지 자료를 참조 및 발췌하였습니다*** |
첫댓글 선과님,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
이번달 순례지를 올려주셨네요. 포인트 잘 기억해 뒀다가 고루 잘 보고 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불갑사 관전에 요긴한 자료입니다.
고맙습니다 선과님^^().
선과님 반갑습니다.
사찰순례 갈 생각에 벌써 가슴이 설렙니다.
불갑사 구석구석 재미있게 올려 주셔서 즐거운 여행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