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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송나라의 상주(湘州) 동순(桐楯)이 감응이 통해 불광(佛光)을 지은 인연
송나라 태시(泰始) 때 동해(東海)의 하경숙(何敬叔)은 젊어서부터 불법을 받들었다. 상주 자사(湘州刺史) 유온감현(劉韞監縣)을 따라갔다가 전단나무를 얻어 그것으로 불상을 만들었다. 그러나 광택이 나지 않아 몹시 애를 썼지만 끝내 되지 않았다. 책상에 기대어 깊이 생각하는데 어렴풋한 꿈길에 어떤 사문이 누더기옷에 석장(錫杖)을 들고 와서 말하였다.
"전단나무는 거칠어서 쓸 수 없는 것이다. 오직 현(縣) 뒤에 있는 하씨(何氏) 집의 동순(桐楯)을 쓰면 될 것이다. 그가 아무리 아끼더라도 정성으로 구한다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꿈을 깨어 좌우에 물었더니 과연 그 말과 같았다. 그래서 곧 그것을 사려고 했다. 하씨는 말하였다.
"그것은 내가 매우 소중히 여기므로 혹 누구에게 빼앗길까 하여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는데, 명부(明府)님은 어떻게 그것을 알고 사시려 하십니까?"
경숙은 사실대로 말했다. 하씨가 존경하고 기뻐하여 그것을 주었으므로 광택을 낼 수가 있었다. 그 뒤에 그는 상부직성(湘府直省)이 되었다. 어느 날 밤 꿈에 그 불상이 말하였다.
"쥐가 내 발을 갉는다."
이튿날 아침에 급히 집에 돌아가 그 불상을 보았더니 과연 그 말과 같았다.
⑧ 제(齊)나라 번우(番禺)의 석상이 불을 만나 가볍게 들린 인연
제(齊)나라 건원(建元) 때이다. 번우(番禺)의 비야리 정사(毘耶離精舍)에 옛날부터 부남국(扶南國)의 석상(石像)이 있는데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른다. 형상은 매우 괴상하고 7·80인이라야 들 수 있었다. 이 절은 띠집인데 어느날 불이 번져 오고 그 띠집은 바람받이에 있었다. 집이 연기에 싸이고 불꽃이 이미 붙어버렸다. 비구니 십여 인은 서로 바라보면서 어찌할 줄 몰랐다. 그 중에서 못내 안타까워하는 서너 명이 시험삼아 석상을 들어 보았더니거뜬히 들리면서 균석(鈞石)의 무게도 없었다. 불상은 옮겨지고 절은 다 타버렸다. 그 상에는 늘 신광(神光)이 있었는데 주부(州部)의 난리 때에는 눈물과 땀이 온몸을 적셨으므로 영남(嶺南)에서는 그것을 상후(常候)로 삼았다. 그 뒤에 광주 자사(廣州刺史) 유준표(劉悛表)가 그것을 수도(首都)에서 내 보냈는데 지금은 아마 옛날의 장주사(蔣州寺)에 있을 것이다.
⑨ 제나라 팽성(彭城)의 금상에 땀이 나서 징조를 나타낸 인연
송나라 서주 자사(徐州刺史) 왕중덕(王仲德)은 팽성(彭城)의 송왕사(宋王寺)에서 1장 8척의 금상을 만들었다. 상호(相好)가 장엄하여 강호(江湖)에서는 제일 묘하였다. 북방 국경에서 도적이 일어나 혹은 스님에게까지 미쳤으므로 그 금상은 곧 땀을 흘렸다. 그 땀방울의 많고 적음은 곧 난리의 크고 작음이었으며 그로써 난리를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 고을 사람들은 그것을 상후(常候)로 삼았다.
제나라 건원(建元) 초년에 그 금상이 또 땀을 흘리더니 그 해 겨울에 위(魏)나라가 회상(淮上)을 침범했다. 그 때 곤주(袞州)의 여러 고을이 남부(南附)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대강 모았으나 매우 많았다. 그들은 사문(沙門)을 구박하여 방어를 도우라고 했다. 위나라 군사는 그 진영을 무찔러 모두 패망하게 되었다. 그들은 위대(魏臺)에 무고하여 승려들이 난리를 도왔다 하였으므로 승려들을 모두 죽이려 했다. 그 때 불상은 크게 땀을 흘려 온 법당이 다 젖었다.
위나라 서주 자사(徐州刺史) 양왕(梁王)은 불법을 정성껏 받들었다. 그는 절에 와서 친히 사람을 시켜 비단 수건으로 불상을 닦았다. 그러나 닦으면 또 흘러 그치지 않았고 수십 인이 번갈아 닦았으나 그래도 그치지 않았다.
양왕은 이에 향을 사르며 예배하고 수건을 잡고는 빌었다.
"이 스님들은 죄가 없습니다. 맹세코 제가 보호할 것이므로 반드시 죄에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이 조그만 정성에 감응이 있으시거든 부디 닦는 대로 곧 그쳐 주십시오."
이렇게 말하고 손수 닦았다. 과연 손으로 닦자마자 눈물은 곧 말랐다. 양왕은 이 사실을 나라에 알리고, 나라에서는 명령을 내려 다 용서를 받았다.